바람을 일으키는 도구부터 근사한 예술작품까지-부채

6월. 날씨가 서서히 더워져 시원한 바람이 그리워지는 때다. 서랍에 넣어둔 부채를 찾게 되는 이 시기를 맞아, 우리 조상들이 부채를 어떻게 애용했으며, 나아가 부채에는 어떠한 민화작품을 그려넣었는지 등을 두루 알아보고자 한다. 조상들의 풍류와 멋을 다시금 느낄 수 있는 기회가 될 것이다. (편집자주)

역사 속의 부채


부채는 순수한 우리말로 ‘손으로 부쳐서 바람을 일으킨다’는 뜻의 ‘부’자와 ‘대나무를 가늘게 쪼갠다’는 ‘채’가 합쳐진 용어다. 우리나라에는 오래전부터 부채를 사용했다는 기록이 남아 있다. 원삼국시대 전기 고분군으로 알려진 경남 창원의 다호리고분군에서는 부채자루가 출토되었고, 4세기경의 유적으로 보이는 고구려 안악 3호분 벽화에는 부채를 들고 있는 귀족의 모습이 그려져 있다. 《삼국사기》의 <견훤전>에는 태조가 즉위하자 견훤이 공작선孔雀扇을 선물했다는 기록이 남아 있다. 부채에 관한 기록은 시문에서도 찾아볼 수 있는데, 고시조에는 다음과 같은 글이 남아 있다.

한겨울 부채 보낸 뜻을 잠깐 생각하니
가슴에 타는 불을 끄라고 보내었나
눈물로도 뭇 끄는 불을
부채인들 어이 하리

이에 화답이라도 하듯, 조선 선조 때 시인 임제는 어린 기생에게 다음과 같은 칠언절구시를 부채에 써서 보냈다고 전해진다.

한겨울에 부채 선물을 이상하게 생각마라
나이 아직 어리니 어찌 능히 알겠냐만
한밤중 생각나 불이 나게 되면
무더운 유월의 염천보다 더 뜨거울 것이다

부채에 얽힌 시는 궁중에서도 자주 지어졌다. 태종이 부채에 대한 시를 읊은 것이 그 예이다.

바람 쐬는 평상에 앉아 밝은 달을 생각하며
달빛 비치는 집에서 시를 읊을 때 맑은 바람을 생각하다
대 깎고 종이 붙여 방구 부채 만든 뒤에는
밝은 달 맑은 바람이 이 손안에 있도다

조선시대 대표적인 성리학자이며 황진이와의 일화로 지금까지 회자되고 있는 화담花潭 서경덕(徐敬德, 1489~1546)의 일화에도 부채에 관한 기록이 나온다. 서경덕은 친구 김안국으로부터 부채를 선물 받고 감사의 마음을 담아 다음과 같은 시문을 지어보냈다.

“묻노니 부채를 휘두르면 바람이 이는데, 바람은 어디로부터 나오는가? 만약 부채에서 나온다면 부채 속에는 언제부터 바람이 있었단 말인가? 만약 부채에서 바람이 나오지 않는다면, 도대체 바람은 어디서 나오는 것일까? 허공은 어떻게 스스로 바람을 일으키는 것일까? (…) 바람이란 기氣다. 기는 언제나 공간에서 분리되지 않는다. 이 부채를 휘둘러 움직임을 주자마자 기가 밀리고 쫓겨 물결치듯 바람이 이는 것이다.”


주기론(主氣論 : 우주 만물의 존재 근원을 기氣로 보는 성리학)의 입장에서 기, 부채, 바람의 관계를 통해 자연현상의 원인을 밝히고 설명하려는 서경덕의 과학적 탐구정신을 엿볼 수 있는 대목이다. 한편, 부채에 대한 기록은 구전 민요에서도 살펴볼 수 있다. 경남 통영지방에는 다음과 같은 민요가 전해진다.

부채 부채 포랑 부채 접고 피는 때깔 보소
포랑 부채 고운 도령 접는 부채 나를 주소
부채 부채 포랑 부채 가린 얼굴 눈썹 보소

부채의 다양한 용도

과거 선비들은 여름철 뿐 아니라 한겨울에도 부채를 들고 다니며 찬바람이나 먼지를 막았다. 또한 불편한 상대와 마주치게 되면 슬그머니 얼굴을 가리기도 했으며, 때로는 호신용으로도 쓰였다. 또한 부채는 시조와 창을 할 때도 장단을 맞추는 풍류와 멋의 도구로도 애용됐다. 이처럼 선비들에게 부채는 ‘생활 필수품’이었다. 부채는 사용에도 법도가 있어 접는 부채 중 큰 것은 신분이나 벼슬이 높은 사람만 사용했다. 접는 부채는 작은 것이라도 여자는 사용하지 못하도록 했다.
그러나 기생과 무속인, 종교인에게는 필요에 따라 사용하게 했다.
고려시대 남자들이 애용하던 것은 접부채[摺扇]다. 의관을 갖춘 후 마지막에 부채를 들어야 비로소 외출을 할 수 있었다고 말할만큼 애용했다고 전해진다. 송나라 문신 서긍이 1123년에 개경에 사신으로 와 한 달간 머물면서 그림과 함께 쓴 여행보고서 <선화봉사고려도경宣和奉使高麗圖經>에도 “고려인들은 한겨울에도 부채를 들고 다니는데 접었다 폈다 하는 신기한 것이다”라고 기록하고 있다.
일반 사람들에게 가장 많이 사용된 것은 자루달린 ‘방구부채’다. 방구부채는 모양이 둥글다 하여 원선圓扇으로도 불렸다. 주로 부챗살에 비단이나 종이를 붙여 만든 것으로, 집안에서 남녀가 다 같이 사용했다. 그 중 빛깔이 들어 있는 부채[色扇]는 젊은 부녀자나 아이들이 사용했다. 특히 방구부채에 속하는 ‘팔덕선八德扇’이라는 부채는 부챗살 없이 대나무 껍질이나 볏짚, 부들 등으로 선면을 만들었기 때문에 망가질 염려가 없어 농가 등에서 다양한 용도로 사용되었다. 여기에서 팔덕八德이라 함은 첫째로 시원한 바람을 내고, 둘째로 모기나 파리를 쫓아 주고, 셋째로 곡식이나 음식이 담긴 그릇을 덮는 덮개로 쓰며, 넷째로는 불을 지필 때 바람을 일으켜 불을 붙여주며, 다섯째는 들에서 일할 때 깔고 앉는 깔판으로 쓰고, 여섯째로는 길을 다닐 때 햇빛을 가리고, 일곱째는 비를 막아주며, 여덟째로는 머리에 물건을 일 때 똬리 대용으로 쓸 수 있다는 의미다. 이처럼 팔덕선八德扇은 여덟가지 쓰임새가 있다 하여 팔용선八用扇이라고도 불렸다. ‘차면선遮面扇’이라는 부채는 신랑이 장가가는 날 백마에서 내려 신부 집 대문에 들어설 때 얼굴을 가리는 용도나 신부가 초례청에 나올 때 신부의 얼굴을 가리기 위해 사용됐다. 신랑 신부가 처녀 총각임을 상징하는 의미에서다. 이때 신랑은 파란색의 차면선을 이용했고, 신부는 빨간색을 이용했다.
‘소선素扇’이라는 부채는 그림이나 글씨가 없는 흰 부채로 국상이나 친상을 당한 사람들이 이용했다. 이들은 소선을 2년 동안 항시 지니고 다니며 자신의 얼굴을 가렸다. 군부君父를 잃은 죄인은 얼굴을 들고 다닐 수 없다는 의미에서다.
또한 부채는 결의나 서약을 할 때 마음을 묶는 증거로서 이용되기도 하였다. ‘접선’은 다수의 부챗살이 한데 결속되어 있으므로 일심동체를 다짐할 때 사용되었다. 접선은 부챗살 하나하나에 결의한 사람들 이름을 쓰거나 혹은 맹세의 증표로 싯구를 한 구절씩 썼다 해서 ‘합심선合心扇’ 또는 ‘일심선一心扇’이라고도 했다. ‘무당부채’는 부챗살이 길고 부채의 면이 것으로, 무당들이 굿을 할 때 사용했다. 부채의 중앙에는 얼굴에 비해 신체가 간단히 표현된 장군신이 그려져 있고, 좌우에는 나비와 꽃 등이 그려져있다.

재앙을 내쫓는 신성한 도구

부채의 주된 기능은 무더운 여름날 더위를 몰아내고 시원한 바람을 일으키는 것인데, 바람이라는 것은 먼지를 날려 주위를 깨끗하게 한다. 그래서 옛사람들은 부채를 신성한 도구로 여겼다. 제정일치祭政一致 시대, 부채는 하늘을 날 수 있는 신의 사자인 새의 깃털로 만들었기 때문에 신성한 왕의 상징물로 취급됐다. 부채라는 뜻을 담은 한자 ‘선扇’ 역시 새털을 엮어 만들었다는 의미를 담고 있다. 우리나라에서는 부채를 굿을 할 때의 무구巫具로 사용했다. 부채가 재앙이나 병을 몰고 오는 악귀를 물리친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때문에 단오가 가까워지면 친지와 웃어른께 부채를 선물하는 풍습도 있었다. 《동국이상국집》에는 고려시대부터 단옷날 부채를 나누어주는 문화가 있었다고 기록돼있다.
《조선왕조실록》에도 세종대왕이 공조工曹에 명하여 접선(摺扇, 접고 펴는 부채)과 단선(團扇, 둥글게 만든 부채)을 만들어 중국 사신에게 하사했다는 기록이 나온다. 단옷날 시종제신들에게 부채를 하사하는 풍습도 이 시기부터 정착된 것으로 보인다. 이처럼 부채가 신성한 의미를 담고 있기 때문에, 한때 관가官家는 가뭄이 심하게 들은 때에 부채 사용을 금했다. 한발(旱魃, 심한 가뭄)이 하늘의 노여움에서 비롯되었으므로 모든 백성들이 근신하고 자중해야 한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예술작품으로서의 부채

옛 조상들은 부채를 실용적인 도구로 취급했을 뿐만 아니라, 하나의 예술작품으로도 취급했다. 흰색의 부채에 그림을 그린 것을 화선畫扇이라 하고 글씨를 쓴 것을 서선書扇이라 한다. 부채에 처음으로 그림을 그린 것은 이규보의 시문으로 미루어 보아 대략 13세기경으로 파악된다. 《고려사》 고종 19년(1231) 4월 기록에도 “상장군 조숙창 등을 원나라에 사신으로 보냈을 때 헌물獻物중에 우리의 화입선畵入扇을 보낸 일이 있다” 고 나와있다. 조선시대 부채 그림 중에는 이징(李澄, 1581~?)의 전칭작(傳稱作, 확증은 없으나 해당 작가의 것으로 추정되는 작품)인<선면이금산수도扇面泥金山水圖>가 가장 오래 된 것으로 알려져 있다.
특히 조선후기 민화의 유행은 어김없이 부채의 선면扇面을 화폭으로 삼았다. 조상들은 무궁무진한 민화적 소재로 작고 앙증맞은 부채에서 큰 부채까지 다양한 그림을 그려낸 것이다. 조선후기 세시풍속을 기록한 유득공의 《경도잡지京都雜誌》에 따르면 “단오에 부채를 서울 관원에게 나누어 주는데 부채 면에 새나 짐승의 그림을 그렸다”는 내용이 나온다. 남계우(1811~1888)는 부채에 주로 화조도, 난, 문자도, 매화서옥, 기명절지, 나비, 연꽃 등의 그림을 그렸으며 나비를 사실적으로 많이 그린 것으로 유명하다. 단원 김홍도(1745~1806?)의 풍속도 화첩에 수록된 <노상파안路上破顔>이라는 그림에도 말을 타고 가던 양반이 길에서 우연히 일가족과 마주치는 장면이 등장하는 데, 점잖은 선비는 부채로 얼굴을 가린 채 장옷을 쓴 여인을 곁눈질하고 있다. 동시대의 궁중화원 이었던 운초雲樵 박기준은 부채 그림을 전문적으로 그린 화가로 유명하다. 박기준은 다양한 조형미를 살려 각양각색의 백선(百扇, 장식이나 그림이 없는 흰부채)을 그리고, 백선속에 산수화나 초충도, 화조도, 나비, 태극 등의 문양 등을 그렸다. 덕분에 그의 부채는 마치 실물을 붙여 놓은 듯 매우 사실적으로 보인다. 이런 부채는 민화의 책가도 병풍이나 족자 등에도 그려졌지만, 상당수가 낙관이 없어서 작가를 확인할 수 없다.
한편, 합죽선(合竹扇, 부채살에 종이 등을 붙여 접고 펼 수 있도록 만든 부채)에는 화가의 이름이 남겨진 것들이 많다. 과거에도 선물 받은 부채에 유명 화가의 그림을 그려 받거나 명필가의 글씨를 써 받아 애장하는 풍습이 있었는데, 겸재 정선의 산수도, 단원 김홍도의 신선도, 호생관 최북의 그림이나 완당 김정희의 글씨 등과 같은 거장의 작품이 그려진 부채가 그 시대의 가장 격조 높은 부채였다. 이처럼 유명 화가나 명필가의 그림을 선물 받은 부채에 새기는 풍습은 지금까지도 이어지고 있다. 일부 사람들은 유명 화가나 명필가의 그림과 글씨를 아껴서 부챗살에서 종이만 따로 떼어 내 액자나 족자로 표구하기도 했다. 그러므로 부채 역시 하나의 미술작품이라 해야할 것이다. 실제로 일제강점기 일본에서 발행된 <월간공예>에도 전 주의 합죽선을 “부채로서 최상의 것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며 일본에는 이 같은 물품이 없다. 조선의 공예품 중에서 영원히 갖고 싶은 것 중의 하나다”라며 실용적인 동시에 예술적 가치가 있는 물품으로 높이 평가하고 있다.

부채, 조상의 얼을 되살리다

앞서 살펴본 것처럼 부채의 역사는 상당히 오래됐다. 그러나 현대 사람들은 부채보다 는 선풍기, 에어컨 등의 도구를 사용하는 것이 사실이다. 부채는 단지 바람을 일으키는 도구일 뿐만 아니라 옛사람들의 멋과 풍류 그리고 예술성과 조형적 아름다움을 두루 담고 있는, 실용적인 도구인 동시에 아름다운 예술작품이다. 단오가 다가오는 5월 즈음이면, 부채에 그림을 그리거나, 혹은 부채를 전시하는 행사가 많이 열린다. 오늘날 전국의 각 지자체나 문화센터 등도 단오를 맞이해 부채에 민화를 그리는 체험행사를 많이 개최한다. 유명 관광지에도 부채는 어김없이 우리나라 대표 관광상품으로 자리잡고 있다. 본격적인 더위가 시작되는 단오를 맞이해, 선선함을 전해주는 부채에 새겨진 정겨운 우리 민화를 감상하고, 나아가 부채에 직접 민화를 그리며 우리 선조들의 풍류와 멋을 한껏 느껴보는 것은 어떨까.


글 금광복 (민화작가, (사)한국민화협회 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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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간민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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