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화 시원에 직접적인 영향을 미친 <처용 그림>

– 글 김용권(겸재정선미술관 관장, 문학 박사)


《삼국유사》에는 9세기 신라 헌강왕憲康王(875~886)때에 활동한 처용에 대한 기록이 다음과 같이 적혀 있다.

화를 내지 않고 있으니 역신이 감동하여 금후로는 맹세코 처용의
형용을 그린 것만 보아도 그 문에 들어가지 않겠노라 하였다.
이로부터 사람들은 처용상을 그려 대문에 붙이고 벽사진경辟邪進慶을 꾀했다.

이렇듯 신라 때부터 사람들은 문간에다 처용의 얼굴을 그려 사악한 귀신을 물리치고 경사스러운 복을 맞아들이는 일을 했다. 그러나 아쉽게도 그 당시에 대문에 붙였던 <처용 그림>은 전하지 않고 있다. 하지만 <처용 그림>이 어떤 모습이었는지에 대해서는 다음과 같은 고문헌을 통해 어느 정도는 추적, 확인할 수 있다.
고려 말엽의 문인이었던 이곡李穀(1298~1351)의 시詩 <개운포開雲浦>에는 “희미하나마 신라대의 두 선옹 일찍이 그림 속에서 보았네”라는 처용에 관한 구절이 나온다. 이로써 고려 시대 이곡도 신라시대부터 시작된 <처용 그림>을 보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조선 시대에는 <처용 그림>에 대한 기록이 더욱 많이 등장한다. 《시용향악보時用鄕樂譜》에는 <처용 그림>을 겹대문에 붙여 액막으로 썼다고 기록되어 있다. 또한 성현(1439∼1504)의 《허백당시집》에는 다음과 같은 처용에 관한 기록이 있다.

신라의 지난 일 구름처럼 아득하네.
신물(처용)은 한번 간 후 돌아오질 않네.
신라 때부터 지금에 이르도록 다투어
그 얼굴을 꾸미고 그리네.
요사를 물리치고 병을 미리 막으려고
해마다 설날이면 문 위에 붙인다네.

또한 시대가 한참 내려온 1849년에 홍석모가 쓴 《동국세시기》에도 <처용 그림>을 겹대문에 붙여 액막이로 썼다고 적혀 있다. 이렇듯 신라 때부터 <처용 그림>을 문에 붙이는 행위는 조선전기를 걸쳐 후기, 말기까지 계속 이어져 왔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렇듯 조선 시대의 <처용 그림>은 양쪽 대문에 쌍으로 붙여 문배로 계속 사용되거나 새해 첫날 문門에 붙이는 세화로 보다 널리 사용되었다. 어떻든 삼국 시대 처용은 잡귀의 근접을 막는 기능을 발휘하였으며 조선 시대에도 여전히 잡귀 퇴치라는 본래의 기능을 담고 존속되었다는 것을 새삼 다시 이해하게 된다. 결과적으로 <처용 그림>은 ‘문’에 붙여 축역逐疫(역신이나 나쁜 전염병을 쫓아 버리는 일)하고자 했던 풍습과 관련해 가장 이른 기록을 가진 그림으로, 우리 고유의 구역신區域神이자 문신門神인 동시에 민족적 벽사 풍습과 밀접한 관련을 지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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