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화 시원과 긴밀히 연관된 〈단군檀君 그림〉

– 글 김용권(겸재정선미술관 관장)


앞선 글에서 민화의 시원은 우리 민족 고유의 문배 풍습 외에도 삼국시대부터 시작된 〈단군 그림〉,〈처용랑 그림〉, 〈비형랑 그림〉과 부적, 병풍 등과 직접적으로 관계를 맺고 있다고 했다. 이에 대해 더욱 구체적으로 살펴보고자 한다.
먼저 〈단군 그림〉에 대해 살펴보면, 《삼국사기》, 《삼국유사》에는 6세기 신라 24대 진흥왕(540~576) 때의 화가 솔거가 그린 〈단군 그림〉에 관한 기록이 나온다. 이른바 《삼국사기》,《삼국유사》에는 솔거가 꿈에서 본 단군의 얼굴을 천여 장 남짓 그린 뒤 신라 사람들에게 나눠 주어 붙이도록 했다고 적혀 있다.
〈단군 그림〉은 민화의 뿌리와 무관하지 않다고 생각된다. 8세기경 대야발大野勃(생몰년 미상, 발해를 건국한 대조영의 동생)이 쓴 《단기고사檀奇古史》에도 “기원 일천여년 전에 이미 <단군 영정>을 그려 신전에 봉안했다”라고 적혀 있다.
계속해서 시대가 내려온 고려 중엽의 이규보李奎報(1168~1241)가 쓴 《동사유고東事類考》에도 “솔거가 〈단군 그림〉 천 본을 그린 후 그림에 대한 심오한 의미를 터득했다”는 기록과 함께 “가까운 친척들에게 조상으로 모시게 했다”는 기록이 나온다. 또한 이규보가 쓴 《동국이상국집》에는 “무당이 백가自家의 신당神堂 방벽防壁에 단청丹靑으로 그린 신상神像을 가득히 걸어놓고 장구를 치고 가무歌舞를 한다”라고 적혀 있는데, 아마도 신상 중에는 〈단군 그림〉이 함께 걸려 있었을 것으로 충분히 짐작된다.
이후 조선시대에도 〈단군 그림〉에 관한 흔적은 아주 쉽게 찾을 수 있다. 대표적인 예로 조선의 세종 때 평양에 단군사당을 지어 〈단군 그림〉을 국조로 숭배하였다는 기록이 전하고 있다. 또한 조선 초기의 《동국여지승람》에는 팔도 각 읍에 사직당社稷壇, 성황당城隍堂, 려단厲壇 등을 설치했다는 기록이 적혀 있다. 짐작컨대 이와 같은 사직당, 성황당 등에서도 〈단군 그림〉이 의례용으로 사용되었을 것으로 추정한다. 오늘날에도 서울 국사당國師堂을 비롯한 각 지역 무당집에서 〈단군 그림〉이 걸려 있는 것을 심심치 않게 볼 수 있다.
신라 시대 솔거에 의해 표준화된 〈단군 그림〉이 벽사적인 의미를 갖고 대대세세 줄기차게 전승되었으며, 결국 조선 후기에는 민화로 변모되어 일반 여염집에까지 걸리게 된 것이다.

참고문헌


김태곤, 《韓國巫神圖》
박용숙, 《韓國美術의 起源》
이규보, 《동국이상국집東國李相國集》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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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간민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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