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화 속의 사자, 양식의 계보를 쫓다

도 1. 계견사호, 샤를바라 1888년 수집, 프랑스 국립기메동양박물관

▲도 1. 계견사호, 샤를바라 1888년 수집, 프랑스 국립기메동양박물관

구한말 민화시장에서 가장 인기 높은 그림은 생활장식화였다. 특히 생활 속의 공간과 기물을 아름답게 꾸미는 그림들이 잘 팔렸다. 민가民家의 다락이나 벽장문을 장식한 계견사호鷄犬獅虎도 그 중의 하나였다. 길상吉祥의 의미를 지닌 닭·개·사자·호랑이가 한 세트를 이룬 그림이다. 그런데 여기에 등장하는 동물의 모습은 시대에 따라 약간씩 혼동을 주기도 한다. 먼저 눈여겨 볼 대상이 백수의 제왕인 사자다. 민화 속에 등장하는 사자를 양식의 계보라는 맥락에서 살펴본다.

19세기 중엽 우리나라의 세시풍속을 기록한 『동국세시기東國歲時記』에는 정초正初가 되면 민가에서 세화歲畵로 계견사호를 그려서 붙인다고 했다. 그렇게 활용되었던 <계견사호> 한 세트가 파리의 기메동양박물관에 전한다. 1888년 서울의 광통교 인근 시장에서 프랑스인 샤를바라Charles Varat(1842~1893)가 구입한 것이다.(도 1) 정방형의 화면에 그린 넉 점의 그림은 조형적 요소가 꽤나 다채롭다. 각 동물의 특징도 잘 살렸지만, 무엇보다 색상과 도안의 디자인이 매우 뛰어나다. 똑같은 그림을 목판에 찍어서 부적符籍처럼 사용한 사례도 있어 이러한 도상이 민간에 널리 보급되었음을 알려준다.
이 글에서는 계견사호 가운데 <사자>에 초점을 두어, 그 도상의 실체와 시대에 따라 변하는 도상의 특징을 알아보기로 하겠다. 민화에 등장하는 사자는 많지 않지만, 미술사에서는 주로 불법佛法을 지키는 용맹한 신수神獸로 나오며, 불교미술과 밀접한 관련이 있는 도상으로 다루어진다. 그런데 사자는 상상의 동물인 해치와 생김새가 유사하여 간혹 해치로 간주되기도 했고, 심지어 전형적인 해치를 그린 것으로 보는 경우도 있다. 그렇다면 계견사호 속의 <사자>는 과연 사자일까? 아니면 해치를 그린 것일까?

*작품을 클릭하시면 큰 사이즈로 보실 수 있습니다.

조선 중기 흉배 속 사자와 해치의 혼재

우선 시기가 올라가는 그림을 통해 사자와 해치의 특징을 비교해 보자. 두 동물은 조선 중기 초상화의 흉배胸背에 각각 등장한다. 이른 시기의 사례를 1624년(인조 2)의 정사공신靖社功臣 초상화에서 만나게 된다. <사자>는 정사공신 신경유申景裕(1581~1633)의 초상화 흉배에 그려져 있다.(도 2)
이 <사자>의 특징은 머리에 뿔이 없고, 머리 주위의 갈기가 마치 빗어놓은 단발머리처럼 단정하다는 점이다.
그렇다면, 해치는 어떤 모습일까? 정사공신 이중로李重老(1577~1624) 초상의 흉배에서 해치를 볼 수 있다.(도 3) 해치는 긴 주둥이와 머리의 뿔이 가장 큰 특징이다. 그런데 사자의 도상에는 원래부터 뿔이 존재하지 않았다. 따라서 사자와 해치를 구분하는 데는 뿔의 유무가 매우 중요한 단서다. 신경유와 이중로는 둘 다 종2품으로서 사자와 해치 흉배를 달고 있다. 원래 이 시기의 무관들은 호랑이 흉배를 부착해야 하는데, 이것이 지켜지지 않고 혼선을 빚고 있었다.
17세기 전반기의 것으로 추정되는 또 다른 <사자 흉배>(도 4) 하나가 무관 박진영朴震英(1569~1641)의 집안에 전해오고 있다. 박진영은 임진왜란과 이괄李适의 난 때 활약한 공로로 선무원종공신宣武原從功臣 3등, 진무원종공신振武原從功臣 1등에 녹훈된 바 있다. 이 흉배는 약간 바래었지만, 색감과 형태를 판별하는 데는 문제가 없다. 그런데, 앞서 본 신경유 공신상의 <흉배>와 약간의 차이가 있다. 가장 큰 특징은 역시 뿔이 없고, 갈기가 곱슬머리처럼 작게 말린 듯 여러 개의 원형으로 꾸며진 점이다. 이런 변화는 어디에서 온 것일까?
박진영의 흉배에 묘사된 사자 도상은 명나라 법전인 『대명회전 大明會典』(卷 61, 冠服 2, 文武官冠服)과 연관이 있는 듯하다. 『대명회전』에는 무관 1, 2품의 흉배가 사자로 규정되어 있다. 그러나 앞서 본 정사공신의 초상화 흉배는 『대명회전』을 따랐다기보다 임진왜란 때 원병援兵으로 온 명나라 장수들이 착용한 사자와 해치 흉배에서 영향을 받았다고 추측된다. 예컨대 임진왜란 때 선무공신宣武功臣에 녹훈된 조경趙儆(1541~1609)의 경우, 공신 초상에는 호랑이 흉배를 달았으나, 그의 무덤에서는 해치 흉배가 발굴되었다. 해치 흉배는 임진왜란 당시에 중국에서 전래되었던 것으로 추측되며, 사자 흉배도 같은 경로를 통해 조선에 전해진 것으로 보인다.
박영진의 <사자 흉배>는 의외로 『대명회전』의 <사자>와 매우 가깝다.(도 5) 앞발을 땅에 딛고 앉은 모습, 머리 오른쪽으로 빠지는 화염문, 등 쪽의 돌기와 같은 갈기가 그렇다. 『대명회전』에 실린 무관 흉배의 사자상이 17세기 전반기에 어떻게든 영향을 미치고 있음을 짐작할 수 있다. 아마도 『대명회전』의 도상을 따른 중국 흉배가 전래되었고, 이것을 모방하면서 얻게 된 결과가 박진영 흉배의 사자상이 아닐까 추측하게 된다.
그런데, 1665년(현종 6)에 사망한 무관 김여온金汝溫(1596~1665)의 묘에서도 흉배(도 6)가 나왔는데, 여기에는 해치와 사자의 특징이 조금씩 혼재되어 있는 특징을 보인다. 다만 김여온의 흉배에 수놓은 사자는 갈기가 산만하게 흩어져 있지만, 머리 위쪽으로는 원형의 갈기가 띠처럼 들어가 있다. 앞서 본 『대명회전』의 사자상과 연결지을 수 있는 특징이다. 따라서 김여온의 묘에서 나온 흉배의 도상은 해치가 아닌 사자상임을 알려준다. 이것이 해치라면 뿔을 갖고 있어야 한다. 그런데, 김여온의 <사자 흉배>에서 긴 주둥이와 돌기가 있는 등줄기의 형태는 해치 도상의 특징이 사자의 형상에 부분적으로 습합되거나 혼재되었을 여지를 남겨준다.

사자, 해치, 호랑이 흉배가 혼란스러운 18세기

*작품을 클릭하시면 큰 사이즈로 보실 수 있습니다.

18세기 이후 사자의 도상은 어떻게 바뀌었을까? 18세기 중엽의 무관들은 사자보다 호랑이 흉배를 더 선호했던 것 같다. 1756년(영조 32) 2월, 영조는 무관들에게 이렇게 말했다. “무관 1품은 사자獅子인데 지금은 무신武臣들이 모두 호랑이 흉배를 하고 있다. 이후로 옛 규정을 지키도록 하라.”(『승정원일기』영조 32년(1756) 2월 25일. “武一品卽獅子, 而今則武臣皆虎, 此後申飭”) 그런데, 영조의 명은 매우 이례적이다. 무관 1품이 사자 흉배라는 것은 어느 기록에서도 볼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런데 유의할 것은 어떤 문헌 속의 기록이 기존에 밝혀진 사실과 맞지 않더라도 잘못된 것으로 단정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기존에 밝혀진 사실이 한 두 사례에 불과할 경우 불완전할 수 있기 때문이다. 영조가 내린 흉배 관련 지시의 근거에 대해서는 계속적인 확인이 필요하다. 어째든 위의 기록은 1756년(영조 32)을 기준으로 할 때, 그 이전에 사자가 무관 정1품의 흉배로 사용되었고, 18세기 중엽에도 지켜져야 했던 사실을 전해준다.
그렇다면, 영조가 언급한 사자 흉배는 어떤 모양일까? 가장 가까운 시기의 사례가 1774년(영조 50)에 제작한 《등준시무과도상첩 登俊試武科圖像帖》에 나와 있다.
이 화첩은 당시 현직 무관들이 참여한 특별과거시험의 합격자들을 그린 반신상半身像 초상화첩이다.
이 화첩 속의 무관들은 사자, 해치, 호랑이 흉배를 각각 하고 있다. 왕에게 올리는 초상화첩에 흉배가 이처럼 혼란스러운 것은 역설적으로 당시의 실상을 그대로 보여주는 듯하다. 그들 가운데 <유진하 초상>의 사자 흉배가 사자의 특징을 비교적 잘 유지하고 있다.(도 7) 앞서 본 17세기의 흉배를 그대로 따르지 않았지만, 정수리 부분에 여러 개의 작은 원형으로 갈기를 묘사한 부분이 있고, 갈기의 일부는 귀 옆으로 축 늘어져 있다. 묘사가 정밀한 것은 아니지만, 17, 18세기 사자의 특징을 모두 보여준다. 영조가 규정을 지킬도록 명한 사자 흉배는 대략 이런 범주의 도상이 아니었을까.
여기에서 조금 더 나아간 것이 1782년(정조 6) 작인 <이창운李昌運 초상>의 사자 흉배다.(도 8) 앞발을 세우고 앉은 모습에 다양한 문양들이 장식되어 있다. 특히 크고 작은 청색의 원형 문양이 머리와 몸에 빼곡하다. 귀 옆의 갈기는 다양한 색상의 색 띠처럼 늘어져 있다. <이창운 초상>의 격에 맞는 흉배로 손색이 없다. 앞에서 살펴본 도상의 맥락으로 볼 때 사자의 형상이 분명하다.
이러한 사자 흉배는 예컨대 서툰 화가가 그렸다 하더라도 갈기를 처리하는 기본적 원칙은 제대로 따랐을 것이다. 18세기의 무관 <김중만金重萬 초상>의 이모본에 그려진 흉배에서도 그러한 특징이 확인된다.(도 9) 어색하지만 사자의 특징이 무엇인가를 아는 대로 그린 도상이다. 그런데 다음 단계의 <신응주申應周(1747~?) 초상>에 오면, 먼저 사자의 자세가 바뀐다. 네 발을 딛고 일어선 모습이다.(도 10) 당시의 새로운 스타일에 따른 변화가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예컨대 호랑이 도상에서는 18세기 전반기에 <신응주 초상>의 사자와 같은 자세의 변화가 진행되었다. 어쨌든 <김중만 초상>과 <신응주 초상>의 흉배에 그려진 것은 사자상으로 보는 것이 타당할 것이다.

19세기 말 도식화된 사자상이 민화로 전파
(계견사호)의 사자, 샤를바라 1888년 수집

▲(계견사호)의 사자, 샤를바라 1888년 수집

이로부터 구한말로 내려오면, 흉배 속의 사자는 좀 더 고식적古式的이면서도 일어선 자세가 분명한 모습으로 고착된 듯하다. 예컨대 고려대학교 박물관의 <사자 흉배>가 그렇다.(도 11) 이 흉배의 사자를 앞서 말한 계견사호의 <사자>와 비교하면 어떨까? 일단 동세에 유사성이 있고, 약간 왜소해진 세부 디자인에 차이가 있지만, 머리에 뿔이 없는 점과 단정히 빗어 내린 갈기에 변용이 있다하더라도 이 도상은 결국 사자의 계통으로 설명할 수 있는 부분이다. 이처럼 초상화 속 흉배의 계통을 토대로 살펴본 19세기 흉배의 사자상은 구한말 계견사호가 유행하던 때와 시기를 같이 한다는 점을 확인할 수 있었다.
이 글에서는 계견사호의 <사자>가 어떤 맥락의 조형적 역사를 갖고 있는 그림인가를 살펴보고자 했다. 그래서 도상의 선후관계를 설명해 주는 단서를 무관 초상화의 흉배에서 찾았다. 그렇다면, 계견사호의 <사자>는 해치가 아니라 사자로 보아도 무리가 없을 것이다. 사자와 해치를 구별하는 특징은 바로 조선 중기 공신상의 흉배 그림으로부터 그 계보가 내려오고 있음을 알 수 있다. 핵심은 사자는 한 번도 뿔이 있는 모습으로 그려진 적이 없다는 것이다. 구한말에 계견사호를 그린 화가는 혹시 이런 이야기를 하고 싶지 않았을까? 자신이 그린 것은 ‘계견해호鷄犬虎’가 아니라 ‘계견사호鷄犬獅虎’라고.

 

글 : 윤진영(한국학중앙연구원 책임연구원)

 

저자에 관하여

월간 민화

Leave a Reply

이메일은 공개되지 않습니다. 필수 입력창은 * 로 표시되어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