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화 무늬가 돋보이는 화려한 기물 조선시대 나전칠기

조선시대 나전칠기

나전 칠기나전기법은 섬세하고 화려한 기법이다. 그래서 나전기법이 적용된 나전칠기는 고급스럽고 사치스러운 기물이라는 느낌이 든다. 실제로 나전칠기에 시문된 무늬는 아름답고 화려하다. 내용으로 보면 우리 민화에서 흔히 보이는 무늬들이 아주 많다. 그것은 이 두 분야가 동시대의 공예, 혹은 미술로서 일정하게 영향을 주고받았음을 의미한다. 나전칠기를 좀 더 친근하게 만나보자.

1억이 넘는 금액에 낙찰된 ‘나전모란당초문상자’

지난 연말, 서울의 한 옥션에서 진행된 경매에서 조선시대(16~17세기)에 제작된 나전모란당초문상자 한 점이 우리 돈 1억 원이 훨씬 넘는 금액으로 낙찰됐다.
이 유물은 흑칠을 한 장방형으로 뚜껑이 있는 상자 형태다. 연화 줄기는 끊음질 기법으로 하였으며 꽃과 잎은 주름질과 타찰기법을 병행해 제작한 전형적인 조선 중기 나전칠기다.
물론 우리의 우수한 나전 기술로 만들어져 전해 내려오는 소중한 유물이지만, 낙찰 금액에 대한 반응은 각각 다를 것이다. 우선 이 유물의 소중함을 잘 모르는 이들은 금액이 몹시 커 보일 것이다. 그러나 우리의 나전칠기에 대해 어느 정도 식견이 있는 사람들이라면 충분히 그럴 만 하다고 생각할 것이다. 당연히 필자의 생각도 그러하다.
실제로 조금만 신경을 써서 문헌이나 자료를 들춰 본다면 아직도 우리의 유물에 대한 평가는 아주 낮은 수준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나전과 같이 우리의 자랑스럽고 훌륭한 유물에 대해 높은 평가가 이루어질 때, 깊숙한 곳에 묻혀 있던 유물들이 세상 밖으로 나오게 되고, 관심 있는 많은 사람이 보고 즐기고 감탄할 수 있을 것이다.
자, 이제 앞서 언급한 조선시대의 나전칠기가 어째서 그렇게 귀한 유물인지 한번 살펴보기로 하자.

나전에 대해 잘 모르는 사람도 나전, 혹은 나전칠기라는 말은 더러 들은 적이 있을 것이다. 또 본 적이 있는 사람이라면 어딘지 모르게 고급스럽고 사치스러운 기물이라는 느낌이 들기도 할 것이다. 실제로 나전칠기에 시문된 무늬는 아름답고 화려하다. 내용으로 보면 우리 민화에서 흔히 보이는 무늬들이 아주 많다. 그것은 이 두 분야가 동시대의 공예, 혹은 미술로서 일정하게 영향을 주고받았음을 의미한다.
조선 나전의 문양을 보면 초기에는 고려시대의 영향으로 모란과 연화무늬가 주를 이루다가 중기가 되면 화조나 사군자, 포도나무 등 조선 특유의 특성을 보이고 후기에 이르면 길상적 의미가 강한 십장생을 비롯한 다양한 길상문 등이 주를 이루게 된다. 이는 서민들의 현세적 염원을 담은 그림으로서 민화가 조선 후기에 크게 유행한 현상과 무관하지 않다. 수복강녕이나 부귀 등의 염원은 민화에 담겨 생활의 공간을 장식하기도 하고 소반이나 함, 가구 등 살림기물에 시문되어 생활을 함께하기도 한 것이다.

나전칠십장생무늬 빗접, 높이 33.0cm, 폭 30.5×27.0cm,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조선 19~20세기)

▲나전칠십장생무늬 빗접, 높이 33.0cm, 폭 30.5×27.0cm,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조선 19~20세기)

나전칠원앙무늬 배겟모, 지름 10.7cm,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조선 19~20세기)

▲ 나전칠원앙무늬 배겟모, 지름 10.7cm,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조선 19~20세기)

 

나전칠기, 자개와 옻의 절묘한 콜라보레이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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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통 조선 나전칠기는 요즘의 휘황찬란한 전깃불 아래나 대낮의 밝은 곳에서는 본연의 맛을 느낄 수 없다. 그 시대의 환경처럼 밤이면 희미한 촛불이나 호롱불 아래, 낮이라면 창호지를 통해 들어오는 어스름한 빛으로 보았을 때 그 진가를 느낄 수 있다. 그것은 나전칠기가 지닌 특유의 대비효과 때문이다. 즉 어두움(옻칠바탕)속에 화사한 빛(자개무늬)을 박아 놓았기 때문이다.
내친 김에 조금 더 가까이 다가가서 살펴보자. 우선 나전 칠기에서 제일 넓은 부분을 차지하는 검은 색은 옻칠이다. 옻漆은 옻나무에 상처를 내 흘러나오는 액을 칠로 이용하는 것을 말한다. 옻은 일반적으로 6월에서 11월까지 채취하는데 이 기간 중에서도 7월 중순에서 8월 하순의 것을 최상으로 친다.
전통적인 칠기漆器는 목기에 이 옻칠을 사용하여 만든 기물을 총칭한다. 흑칠은 정제 과정을 거친 투명한 옻칠 원료에 3% 정도의 수산화철을 섞어 검게 만든 것을 말하고, 주칠은 붉은색을 띠는 주사가루를 섞어 만든 것을 말한다. 또한 용도에 따라 석황, 자황 등 색깔 있는 안료를 첨가하여 채칠을 만들어 사용하기도 한다.

지금도 그렇지만 옻은 귀한 재료이다. 조선시대에는 옻나무의 관리를 나라에서 주관해 일반인들은 옻칠 기물을 좀처럼 사용하지 못했다. 특히 주칠은 궁궐 외에는 사용을 금한, 아주 귀한 것이었다.
옻의 성분은 밀착력이 매우 높다. 또한 기후, 수분, 습도, 열, 산, 알카리 등에 강하고 방부성이 좋아 고대로부터 실생활에 유용하게 사용되었다. 무덤 등에서 발굴된 유물 자료에서도 확인되듯이 내구성이 뛰어나 기물을 보존하는 데는 최상의 도료였다.
여기에 따라 붙는 ‘나전螺鈿’은 조개껍질 중 광채가 좋은 부분을 가공하여 장식한다는 뜻이다. 좀 더 풀어 보면 나螺는 ‘소라 라’이고 전鈿은 ‘비녀 전’, 혹은 ‘자개박을 전’ 또는 ‘보배롭게 꾸민 그릇 전’ 등의 뜻을 가지고 있다.
참고로 중국에서는 나전을 함방陷蚌 또는 감나嵌螺라 하여 조개껍질을 가공, 장식한다는 뜻으로 쓰이며 일본에서는 칠이 마르기 전에 금은분이나 색분을 뿌려 무늬를 나타내는 마끼에법 등 여러 기법들이 있다. 결국 나전은 자개로 기물의 표면을 장식한다는 뜻이다.
간혹 고미술품가를 돌아다니다 보면 ‘건칠’이라는 말을 들을 수 있는데 단어 자체만으로는 그 뜻을 유추해 내기 어려운 듯하여 잠깐 언급해 본다. 건칠기법은 나무나 진흙 등으로 원하는 기형을 만든 다음 그 위에 베 헝겊이나 종이 등을 여러 겹 바른 후 나무나 진흙으로부터 떼어내고 반복하여 토분 등과 함께 칠을 하여 완성하는 것을 말한다. 일반적으로 둥근 형태의 대야나 반짓고리 등을 이 기법으로 만든다. 이에 비해 목재로 기형을 제작하고 표면에 반복하여 칠을 입히는 가장 보편적인 기법으로 만든 칠기물을 목심칠기라 한다.

나전기법은 이렇게 완성된 건칠기물이나 목심기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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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에 굵은 베 헝겊을 바르고 조개껍데기나 쇠뼈가루 또는 개흙에 칠을 섞어 바른 후 자개를 원하는 문양대로 오려 붙이고 표면에 옻칠을 하여 완성한다.
나전의 제작 기법에는 전통적으로 크게 ‘주름질기법’과 ‘끊음질기법’이 있다. 주름질은 자개를 한 장 또는 여러 장 붙여 원하는 문양대로 오려내는 것을 말하는데 주로 면의 형태나 무늬 등의 제작에 이용된다. 조선 후기, 실톱이 도입되기 전에는 자개를 물(찻물)에 불려 부드럽게 한 후 가위로 한 장씩 오려 내거나 예리한 칼끝이나 송곳 등을 이용하여 윤곽선을 따라 도려내는 방법을 사용했을 것으로 추정된다.
끊음질은 폭이 가늘고 길게 자른 직선형의 자개를 토막토막 끊어 이어 붙이는 방법으로 직선의 기하학적인 무늬나 가는 곡선 표현에 유리한 기법이다. 이 끊음질 기법은 조선 후기 유물에서 많이 볼 수 있는데 뇌문, 귀갑문, 만자문, 문자문 등 연속적이고 기하학적인 무늬 표현 등에서 보이며 산수풍경 등 회화적인 표현에서도 많이 사용했다.
그 외에 주름질한 자개를 나무망치나 주발 등의 기구를 이용하여 두들겨 균열을 만든 후 기물에 붙이는 ‘타찰법’이 있으며 자개에 음각, 양각, 선각 등으로 조각하여 문양의 정밀 효과 및 입체 효과를 나타내는 조패법(조각기법) 등도 있다.
전반적으로 볼 때 조선시대 전·중기에는 주름질 기법이 많이 쓰였으며 중·후기로 가면서 이 기법과 병행하여 끊음질 기법 및 타찰, 조패법 등이 발달하였다.

조선 나전칠기의 분류와 특성

나전의 세계로 조금 더 들어가 보기로 하자. 조선시대 나전칠기를 기물의 유형, 제작 방법, 문양의 시문 형태 등에 따라 시기를 구분해 보면 보통 전기, 중기 및 후기로 나누어 볼 수 있다. 전기는 15~16세기로 고려가 멸망하고 조선이 건국된 어수선한 분위기를 배경으로 한 시기이다. 화려했던 고려의 나전 기법이 조선으로 계승되는 과도기로 조선 나전칠기의 태동기로 보아야 할 것이다.
중기는 17~18세기로 고려 나전칠기와는 전혀 다른 제작 기법이 개발되고 제작되어 그 유형과 품목이 다양해지고 문양 또한 서민적 취향이 수용된 시기이다.
후기는 19~20세기 초로 제작 도구의 발달로 정교하고 다양한 제작기법이 등장하고 대량생산이 가능하게 되었으며 유형과 품목에서도 일반 생활용품까지 널리 확대 보급된 시기이다.

전기에 해당되는 15세기 나전칠기 제품은 전해지는 유물이 부족하고 기록 또한 마땅치 않아 나전의 기형과 제작방법에 대해 확실한 근거를 갖지 못하고 있다. 더욱이 고려의 멸망과 함께 찬란했던 귀족문화가 쇠퇴하면서 높은 제작비용과 긴 제작기간이 필수적인 나전칠기가 어떤 변화를 겪었는지 짐작하기 어렵다. 또한 고려의 나전칠기는 경상, 향상, 염주합, 불수 등 주로 불교와 관련된 특수한 용도로 제작된 것들이 많아 나전제품이 일반적인 생활용기로까지 확대된 조선의 그것과 연관시켜 유추하는 것도 쉽지 않다.
그러나 16세기의 나전칠기에서는 고려의 잔영이 반영된 15세기 나전기법과는 크게 다른 변화를 발견할 수 있다. 무늬를 독립된 한 덩어리로 크게 오려내고 바닥면에 여백을 두는 이른바 ‘주름질 기법’의 발전이 그것이다.
고려 나전칠기는 수많은 미세한 조각으로 이루어져 자개 표면의 칠을 긁어내기 어려워 자개의 색을 제대로 볼 수 없었으나 16세기부터는 넓은 문양으로 인해 칠을 긁어낼 수 있어 자개 본연의 아름다운 색상을 나타낼 수 있게 된 것도 큰 변화라 할 수 있다.
중기에 해당하는 17~18세기는 회화, 도자, 금속, 섬유, 목칠공예 등 모든 분야에서 제작기술 및 예술성의 큰 발전을 이룬 문예 중흥의 시대였다. 학문을 중시한 유교적 이념을 바탕으로 강직하고 안정되고 단아한 선비의 미의식과 함께 외형보다는 내적인 아름다움, 인위적인 것보다는 자연의 미를 추구하는 경향을 보여주고 있는 시기다. 이 시대의 나전칠기는 새로운 제작 기법의 전성기로서 문양대로 오려내는 주름질 기법과 함께 휘어져 있는 자개의 곡면을 문양대로 오려낸 후 자개 표면을 나무망치 등으로 쳐 바닥면에 부착시키는 타찰법이 사용되었다.
정교함보다는 자개의 영롱한 빛을 잘 살려 운학, 포도, 꽃, 사군자, 벌과 나비 등 장수와 다산을 기원하고 자연의 아름다움을 주제로 한 문양들을 돋보이게 하는데 의미를 두고 있다. 제품은 작은 상자가 주를 이루고 있으나 서류함, 의함, 빗접 등 다양한 생활용품도 제작되었다.
후기로 분류되는 19세기에 들어와서는 자개를 문양대로 자유롭게 오려내고 쉽고 얇게 잘라낼 수 있는 공구의 발달로 나전칠기 제작이 한결 용이해 진 시기이다. 또한 문방용품에서 가정용품에 이르기까지 전 품목에 걸쳐 나전칠기 제품의 수요가 급증되었고 이에 제작 단가가 줄어들게 되었다.
경상도 통영 지방과 경기 지방 등에서는 나전칠기를 지역 특성 공예로 지정하여 공방과 장인들에게 적극적인 육성과 지원책을 시행하였으므로 장인들은 안정된 환경 속에서 제작에 전념할 수 있게 되었다.
이 시기에는 국수처럼 가늘고 길게 오려낸 후 끊어가며 시문하는 끊음질 기법이 발달하여 물결, 구름, 산수문, 글자문 등을 빠르고 쉽게 제작할 수 있었다. 이와 함께 주름질로 오려낸 문양 표면에 날카로운 조각도로 사실적인 세부 무늬를 새겨 넣는 조각기법이 주류를 이루어 꽃과 새, 짐승 등 자연물 문양들이 많이 시문되었다.

조선 후기로 분류되는 이 시기에서 특이한 점은 좌경, 빗접, 반짇고리, 의복을 수장하는 대형 의함을 비롯, 나전 이층농, 나전 이층장 및 나전 삼층장 등 여성용품과 가정용품이 주류를 이루었다는 점이다.
요즘 외국인의 발길이 잦은 인사동을 비롯, 기념품점들에서는 옛날 것을 모방하였으되 현대식으로 만들어진 나전 기물들을 많이 볼 수 있다. 물론 이 제품들과 고미술품점에서 볼 수 있는 진짜 조선 나전 유물을 구별하기는 어렵지 않을 것이다. 한 눈에도 표시가 나기 때문이다.
그러나 큰맘 먹고 조선시대 나전칠기를 구입하려고 할 때는 신중을 기해야 한다. 간혹 나전이 떨어져 나가 버린 경우에는 어쩔 수 없이 그 부분만큼은 새로 제작하여 붙일 수밖에 없는데, 이렇게 수리한 제품은 당연히 고미술품으로서의 가치가 떨어진다. 그러므로 조금이라도 이상하다 싶은 부분이 있는 경우에는 좀 더 환한 곳으로 들고 나와 이리저리 기울여 보고 살펴보아야 한다. 그러면 빛의 반사 방향 등이 다른 것과 어긋나게 시문된 부분을 찾을 수 있을 것이다. 모두들 왼쪽을 보고 있는데 한 사람만 오른쪽을 바라보고 있다면 이상한 일이 아니겠는가. 늘 공부하고 틈틈이 실물을 마주하는 시간을 많이 가지면 좋을 것이다. ‘아는 만큼 보인다’는 말은 특별히 고미술품을 대할 때 더욱 가슴에 와 닿는 진리다.

박주열 대표

Profile. 박주열

나락실 갤러리 대표
명지대학교 대학원
미술사학과 박사과정

 

 

글 : 박주열(나락실 갤러리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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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간 민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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