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화의 중조中祖 조자용 선생의 흔적을 찾아서

민문화民文化 연구의 선각자 고 조자용 선생이 말년을 보낸 속리산 자락 곳곳에는 일생의 연구를 집성한 작품들과 헌신적인 노력이 어려있다. 본지 창간 5주년을 맞이하여 조자용 선생의 흔적이 깃든 속리산 일대와 더불어 최근 복원작업이 한창인 에밀레박물관을 둘러보았다.


드넓은 산을 덮고도 남을 호기

속리산에서 제2의 인생을 시작한 조자용 선생은 천왕봉의 너른 품에서 말년의 투혼을 불살랐다. 오히려 낙향을 기회로 삼아 속리산 전역을 민문화 체험장으로 꾸려보리라는 포부를 품으며 힘차게 나아갔다. 이같은 그의 호방한 면모는 마을 어귀 말티삼거리에 있는 큼직한 돌장승 한 쌍과 돌탑에서도 엿볼 수 있다. 과거 선조들이 그랬듯 마을을 수호하고 벽사를 기원하며 만든 것으로, 왼쪽 장승에는 ‘天下大將軍(천하대장군)’, 오른쪽 장승에는 ‘地下女將軍(지하여장군)’이 새겨졌다. 특히 긴 수염을 가진 천하대장군 장승은 조자용 선생의 모습을 닮았으며 왕방울 눈, 주먹코, 톱니를 갖춘 얼굴의 형상은 한국 도깨비를 연상케 한다. 마을 입구를 묵묵히 지키고 선 장승의 모습이 유머러스하면서도 한없이 듬직하다.

속리산에서 펼친 활발한 민문화 운동

깊은 산세에 인적도 드물던 속리산 일대에서 흙길을 터벅터벅 걷던 조자용 선생은 저 멀리 천왕봉 인자바위가 보이는 곳에서 발길을 멈추고 바위를 향해 큰절을 올렸다.
조자용 민문화연구회 이만동 대표는 “천왕봉 인자바위의 모양이 마치 호랑이 입 같고, 그 일대의 봉우리가 호랑이 얼굴을 연상케 했기 때문”이라고 귀띔했다. 실제로 조자용 선생은 1983년 속리산 입구로 에밀레박물관을 옮긴 이유가 속리산 천왕봉 때문이라고 고백한 바 있다. 마을노인으로부터 ‘속리산 천왕봉은 대천왕봉의 천신, 소천왕봉의 지신, 그리고 인자바위의 인신을 합친 천지인 삼신의 영봉靈峯’이라는 설명을 들으며 천지인 삼신을 모셔야겠다는 운명적인 깨달음을 얻었다는 이유에서다. 조자용 선생은 속리산 생활 초창기 천왕봉이 한눈에 들어오는 도화리(구 대목리)에 위치한 초가집에서 생활했는데, 현재 조자용 선생의 인척인 이만동 대표가 그 자리에 너와집을 새로 짓고 살면서 조자용 민문화관(구 에밀레박물관)을 포함한 조자용 선생의 유물, 유적을 관리 중이다.
조자용 선생은 기나긴 연구 끝에 민문화의 시발점은 삼신(칠성천신七星天神, 산신지신山神地神, 용왕인신龍王人神)을 중심으로 한 삼신신앙三神信仰임을 확신하고, 관련 연구에 몰두했다. 장수바위나 할미돌, 삼신제석의 탱화나 삼신할머니 그림을 보면서 우리나라 모태문화에 대한 해답을 찾았으며 그간의 연구를 바탕으로 직접 조각, 민화작업을 진행했다. 도화리 천왕봉 등산로 입구에는 조자용 부부의 묘소가 있으며, 바로 옆에 그가 만든 삼신바위와 북두칠성, 윷판, 하늘의 별자리인 28수를 본떠 알구멍을 파놓은 알바위가 놓여있다. 삼신바위에는 천지인天地人을 상징하는 각 신은 봉황새를 탄 칠성, 호랑이를 탄 산신령, 거북을 탄 용왕이 그려져 있는데 주목할 점은 모든 신이 여성이라는 점이다.
“조자용 선생님은 삼신신앙이 유래된 상고시대에는 모계 사회였으므로 제사장도 여성이리라 추측하셨습니다. 그래서 삼신작품에 등장하는 신들은 모두 여신이죠.” 삼신바위 건너편에는 무성한 억새밭이 군락을 이루고 있다. 본래 묘소 근방도 조자용 선생이 낙향 생활 초창기에 운영하던 소규모 캠핑장과 알마당이 있었지만 속리산국
립공원의 제재가 심한데다 면적도 좁아 현재의 위치로 캠핑장을 옮기고 남아있던 알마당은 잡초로 덮어버린 실정이다. 2010년 조자용기념사업회가 묘소 근처에 조자용 선생의 추모비를 세웠지만, 이 역시 속리산 국립관리공단의 규제로 주변에 있는 작은 절 앞마당으로 옮길 수밖에 없었다.
삼가리에서 구병산으로 넘어가는 길목에 위치한 삼가2리에는 조자용 선생이 만든 산신단을 볼 수 있다. 길목을 지키고 선 왕방울 눈의 돌장승이 친근한 인사를 건네는 듯 하다.
“이 산신단을 만들 때는 새마을 운동의 영향으로 우리 옛 것을 허물던 때였죠. 이를 안타깝게 여긴 조자용 선생님이 여기에 산신단을 만들어보겠다고 말씀하셨더니 근방의 사람들이 매우 좋아했다고 합니다.”
이처럼 조자용 선생은 전통을 등한시하던 시류에 맞서 ‘복福마을 운동’이란 이름을 내걸고 마을 신단神壇 재건 및 마을축제를 되살리는데도 적극적으로 앞장섰다.

20여년 만에 기지개 킨 에밀레박물관

보은 속리 정이품송 근처에는 조자용 선생이 운영하던 에밀레박물관과 삼신사 민족문화수련원이 위치했다. 부지 면적이 55,580m2(16,842평)이고 건축면적이 13개 동에 1,205m2(365평)에 이르는 이곳은 단순히 전시만 하는 것이 아니라 방문객이 직접 민족의 흥과 얼을 체험하는 문화공간이었다. 당시 국내 최고의 시설과 프로그램을 자랑하는 캠핑장으로 명성이 자자했으나 2000년 조자용 선생의 타계 이후 20여년 가까이 방치되었으며 2014년 6월 화재까지 겹쳐 거의 폐허가 되다시피 했다. 더이상 그의 유적이 훼손되는 것을 두고 볼 수 없어 조자용 선생의 인척들이 마음을 모아 2018년 ‘조자용 민문화연구회’를 결성했고 에밀레박물관 복원을 위해 팔을 걷어붙였다. 이만동 대표는 처음 이곳에 들어섰을 때 도깨비 난장판이나 다름 없었다고 회상했다.
“1998년 대홍수의 여파에다 화재까지 겪은 이 일대는 전쟁터 같았습니다. 바닥 가득 쌓인 진흙더미 위로 문짝과 온갖 쓰레기들이 어지럽게 널려있었죠. 쓰레기만 해도 1톤 트럭 10대의 분량이 나올 정도였으니까요. 아직 갈 길이 멀지만 시작이 반이라고 생각합니다. 지난해 학술포럼과 음악회를 열 수 있게 된 것만 해도 다행이에요.”
많은 이들의 도움에 힘입어 지난해 5월 에밀레박물관에서 <왕도깨비의 부활> 행사가 열렸고, 충북학연구소가 주최하는 학술세미나, 에밀레박물관 복원추진 기념 음악회, 조각가 고선례 작가의 개인전이 개최됐다. 또한 지난 10월 3일에는 조자용 선생이 개천절마다 열었던 국중대회國中大會도 재개, 300여명의 방문객과 함께하며 성료했다.

왕도깨비의 귀환을 고대하며

에밀레박물관 안의 주요 공간으로 전시장인 ‘팔각전’을 손꼽을 수 있다. 이름 그대로 팔각 회랑의 형태로 지어진 곳으로 빙 둘러진 벽면을 따라 전시를 즐길 수 있는 구조다. 한가운데 중정中庭이 있어 자연채광을 만끽할 수 있다.
“작년에 팔각전에서 초대전을 개최하며 이곳을 알리는데 주력했어요. 올해 하반기에도 민화전시를 열 계획입니다. 아직 손볼 곳이 많지만, 힘 닿는데까지 노력해보려 합니다.”
조자용 선생이 부석사의 조사당을 본 떠 지은 ‘삼신사’도 빼놓을 수 없다. 조자용 선생은 삼신사를 지어 삼신을 봉안했는데, 이는 종교적 이유 때문이 아니라 민족의 문화유산을 받들기 위함이었다. 앞서 간략히 설명한 바 있지만, 오늘날 무교의 삼신할머니 등으로 전해지는 삼신이 문화적으로 중요한 이유는 민족종교의 삼신인 환인, 환웅, 단군을 원류로 했기 때문이다. 이렇듯 조자용 선생은 우리 문화의 본질을 중시했고, 젊은 지식인들에게 흥겨운 체험을 통해 민족문화의 모태를 깨닫게 만드는 데 힘썼다. 박물관 내부의 드넓은 마당에는 만신과 만인이 어우러지며 밤새워 춤추고 노래하도록 지어진 놀이장 ‘만신산’, 순두부를 직접 제조하고 먹을 수 있도록 지어진 ‘순두부 제조 체험 굴피집’, 즉석에서 냉면을 뽑아 맛볼 수 있도록 준비한 ‘냉면 제조 체험틀’, 흥풀이를 위해 조성한 ‘알마당’, ‘고깔 귀틀집 체험전시관’ 등 다양한 건물들이 위치했다. 설립 당시에는 지붕마다 산죽을 올려 소탈하고도 단정한 모습이었으나 오랜 세월 속에서 물난리, 불난리 등 갖은 고초를 치루며 지붕은 소실되고, 목재의 상당 부분이 삭아버려 건물마다 보조 철근을 설치하거나 시트 등을 덧댄 상황이다. 현재는 초기 수련장의 아름다운 모습을 사진으로나마 감상할 뿐이지만, 조자용 선생의 유적에는 우리 민족문화의 전통을 이어나가고자 고군분투한 그의 흔적이 역력해 보는 이에게 적지 않은 울림을 건넨다.
“제 소원은 언젠가 에밀레박물관이 성공적으로 복원돼 저기 속리산 도깨비도 마당으로 내려와 함께 춤출 수 있는 신명나는 축제를 여는 겁니다.(웃음) 아직 손이 많이 달리긴 하지만 서두르진 않으려 해요. 조자용 선생님의 유지를 받들어 많은 사람들에게 우리 민문화를 알릴 수 있도록 노력하겠습니다.”

한국 고유의 얼을 찾아

민문화 운동에 헌신한 선각자 조자용

고 조자용 선생은 1926년 황해도 황주에서 태어났다. 북에서 잠시 초등학교 교사로 근무하던 그는 1945년 해방 이후 남으로 급히 내려와 미군부대에서 일했고, 미국유학생을 모집한다는 신문광고를 보고 지원해 유학길에 올랐다. 1948년 테네시 웨슬리안 초급대학에 입학해 일 년 만에 졸업한 그는 밴더빌트 대학에서 토목공학과를, 하버드 대학원에서 구조공학을 전공했다. 한국전쟁으로 폐허가 된 조국을 재건하는데 힘을 보태기 위해 1954년 귀국했으며 종로2가 YMCA 빌딩, 대구 계명대, 경북대, 세종대학교(전 수도여자사범대학) 박물관 등 수많은 건물을 지었다. 특히 1967년 설립한 정동 미국대사관저는 한옥의 전통적 미학을 살리면서도 여러 건축양식의 장점을 결합한 건물로, 국내외에서 큰 호평을 받았다.
그가 한국문화의 본질에 대해 관심을 갖기 시작한 것은 귀국한 직후 작업장 근처인 부산 금정산의 범어사 일주문을 마주하면서부터다. 건축가의 관점에서 봐도 너무 신기해 충격적이기까지 했던 범어사 일주문을 접하고, 조자용 선생은 우리 전통건축의 우수성에 매료됐고 그 기저에 깃든 한국전통문화에 대한 호기심을 가졌다. 이후 1960년대에는 바쁜 일정 속에서도 옛 유물과 기와를 수집하다 인사동에서 운명적으로 <까치호랑이> 민화와 만나게 되고 1970년부터 본격적으로 민화를 수집하기 시작했다. 1971년에는 민학회를 설립해 뜻이 맞는 사람들과 우리문화에 대한 답사, 연구 활동을 적극적으로 진행하기 시작했다.
1968년에는 서울 강서구에 에밀레박물관을 설립하고 민중박물관 운동을 시작했다. 문화재는 박물관에 전시돼 많은 사람들이 보고 느낄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이 그의 신념이었기에 1976년 전국 사립박물관 1천여개 설립을 목표로 한국민중박물관협회를 창립했다. 동시에 조자용 선생은 강연, 해외 전시, 저술 활동 등을 활발히 하며 우리 문화를 대내외적으로 적극 알리는데 주력했다.
1세대 미국유학파 건축가로, 또 민문화운동가로 열정적으로 살았지만 그가 50대에 접어들 무렵 갑작스레 심장병이 찾아왔다. 이 때문에 전라남도 담양군에서 한동안 요양생활을 하기도 했다. 그는 건강 악화로 서울을 떠나기로 결심하면서도 민문화 운동을 계속해나갈 새로운 박물관터를 물색했다. 1981년 11월 말, 정2품 소나무 옆 속리중학교의 빈 교실을 임대해 에밀레박물관 분관을 개관했고 1982년 속리산 분관을 정식으로 개관했다. 조자용 선생은 낙향 이후에도 민족문화 모태에 대한 공부를 이어나갔으며 1986년 민족문화수련장의 핵심 시설인 삼신사 수련장을 건설하고 캠프를 진행했다. 2만여 명이 넘는 사람들이 이곳에서 한국인의 삶, 얼, 멋을 흥겹고 신명나게 체험했다.
특히 조자용 선생은 미래의 희망인 어린이들을 위한 전시, 교육 활동에 주력했다. 떠나는 날까지 어린이들을 주관객으로 하는 <왕도깨비, 용, 호랑이 큰 전시회>를 준비하다 2000년 1월 30일 75세로 타계했다. 저서로는 <한얼의 미술>, <한국의 민화>, <삼신민고>를 비롯한 40여 권을 남겼다.


글 문지혜 기자 사진 이주용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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