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화의 새로운 가능성 – 리메이크, 한걸음 더 들어가기

민화의 새로운 가능성
리메이크, 한걸음 더 들어가기

아주 오래 전 최초로 그려졌던 민화들은 단 한 점의 예외 없이 모두가 다 창작품이었다. 그 후, 그 작품의 모사화들이 계속 그려지는 세월을 거치며 소폭小幅의 변화를 일으킨 결과, 오 늘의 전통 민화의 모습으로 자리 잡았을 것이다. 그런 이유에서 민화가 오늘의 전통민화로 이 어지게 한 최고 공로자는 사실 모사화가들임을 부정할 수 없다. 그러나 그럴지라도 필자는 최 초의 창작민화가처럼 화단에 창작의 샘을 제공하는 민화가로 있고 싶다. 시대별로 간헐적일 지라도 일부 창작 화가에 의해 새로운 모습의 민화가 등장해 전통의 폭을 더 넓히고 살찌웠을 것이라는 점은 의심의 여지가 없다. 오늘날의 창작민화가 바로 그 역할을 감당해야 하며, 창 작민화의 확실한 자리매김이 요즘 민화 화단의 시급한 과제라 할 것이다.

우리 민화 화단의 현실을 볼 때 완전한 창작보다 재현민화나 리메이크 민화를 오히려 먼저 고민해야만 할 것 같은 분위기다. 필자의 지난 연재 중 ‘창작민화론②(2016년 2월호 게재)’에서도 밝힌 바와 같이 민화 화단에 재현 부문이 재현다운 재현으로 우뚝 서지 못한 상태에서라면 창작민화가 아무리 발달하더라도 그것만으로는 민화 화단이 건강하다고 할 수 없다. 그렇게 되면 아마도 현대미술론적 창작민화는 오히려 이론적 취약으로 오해되어 불가불 민화가 아닌, 이미 존재하는 한국화 부문 등으로 분류 평가되든지, 장외의 미술로 대접받을 수밖에 없을 것이다.

-한국화로 분류되면 실용 목적 등의 부분이 혼재된 상태의 그림이라는 점에서 이론상 정통 미술로 받아들이기 쉽지 않을 것이고, 따라서 그 앞길을 보장받기 힘들게 된다. 결국, 상업미술로 전락할 위기에 빠지는 것이다. 그건 지금까지 민화가 연속적으로 겪었던 억울함과 조금도 다르지 않다. 아마도 우리 민화 화단의 건강성健康性이 오래 전부터 대외적으로 부러움을 살 정도쯤 되었다면 과거에 박생광 작품이나 김기창의 바보산수화 등도 한국화가 아닌 민화에 끌어들여졌을 것이다. 그뿐만 아니라 요즘의 잘나간다는 화가들, 즉 민화를 응용하여 사회적 성공을 거둔 화가들 몇 사람까지도 한국화보다 민화 장르에 속하여 좀 더 민화다운 면모를 더하면서 활약하고 있지 않을까 싶다. 서양 미술사에서도 비슷한 교훈을 주는 것들이 있어서 그 중 대표적인 예를 들자면, 오늘날까지도 세계 현대미술에 더없이 큰 영향력을 끼치고 있는, 앙리 마티스Henri Émile-Benoit Matisse(1869~1954)가 중심이 되는 야수파野獸派(Fauvism) 운동조차도 당시에는 그 인기를 받쳐줄 만큼의 설득력 있는 이론적 무게감을 갖추지 못함으로 인해 3년여 만에 종말을 겪고 말았다. 그 무렵에 일어났던 대부분의 서양 미술 운동들도 같은 이유로 각기 수년 정도의 수명밖에는 누리지 못하고 모두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졌었던 것은 우리 민화가들에게 시사하는 바가 매우 크다.-

리메이크 창작을 진지하게 고민해봐야 할 이유

재현과 창작이 서로 스크럼을 짠 메커니즘적 구조를 갖추고 발전해나가야 건강한 민화 화단의 위용으로 드러난다는 건 지극히 당연하다. 그 어느 쪽도 상대편 없이 홀로 존립할 수는 없다.
그래도 재현 민화 분야는 종사자 수가 많아서 그나마 일단은 마음을 놓을 시간적 여유가 있어 보이고, 창작 부문도 열심히 그 세를 넓히고 있는 듯하여 고맙다. 하지만 요즘 화단에는 또 다른 한 부류의 민화가 매우 타당한 기능성을 앞세우고 일어나고 있는데 이른바 ‘리메이크 민화’다. 그 리메이크 분야에 대한 이론적 지원이 다른 두 분야보다도 훨씬 더 급한 상황으로 떠오르고 있다. 리메이크가 이론적 근거에 대한 자신감 결여로 인하여 억울한 오명으로 주눅이 드는 경우까지 감지되기 때문이다. 리메이크 작업은 그 방법의 목적상 원작을 비틀거나 짜깁기 및 재구성하는 등의 기법이 불가피한 게 사실이다. 그러나 타 미술 장르(소위 순수미술)의 중심 이론 측면에서 본다면 순 창작이 아니라는 점에서 정통 미술로 인정되기가 모사 민화보다 더 어렵게 된다. 그들의 눈에는 재현도 아닌, 창작도 아닌, 그저 개념 변화 없는 ‘짜깁기’이거나 구도만 바꾼 ‘이무기 정도’의 그림으로만 보일 것이다. 또 리메이크 민화 화가로서는 그런 평가를 받는다 해도 이미 알고 있던, 소위 순수미술론적 이론에 비추어 볼 때 그 부당한 오해도 오히려 그럴듯한 것 같아 괜히 주눅이 들게 되는 것이다. 이번 글은 그러한 이유에서 지난 ‘창작민화론⑨(2016년 10월호 게재)’에 이어 다시 한 번 더 ‘리메이크 또는 재구성 차원의 창작’을 고민해보려 한다.

민화의 리메이크 기법, 시대가 요구하다

리메이크란, 이미 발표된 창작품의 모양이나 의미, 또는 타 장르의 작품을 작업자의 독자적인 해석으로 비틀거나 재구성하여 다르게 표현하는 작품을 말하며, 이미 원작으로 감동했었던 관람자에게 원작이 또 다르게 변모된 쾌감을 주려는 창작 방법으로써 실용 음악계에서는 이미 크게 성과를 거두고 있는 분야이다.

리메이크 민화는 이 시대에 들어서 문화 사회적으로 그 필요성이 매우 분명해졌다. 바로 직전 시대의 현대 미술, 즉 모더니즘 미술은 일종의 미술적 오류로써 미 술의 사회 기능에 대한 직무유기 1) 를 저질렀다. 당시 시대의 주역이었던 모더니즘이 인류가 마땅히 누렸어 야 할 미술적 유익에 상당한 역효과를 냈다는 것은 어 쩌면 포스트모더니즘의 당위성을 불러왔다는 것만으 로도 입증되는 것이라고 할 수 있겠다. 그 후, 모더니 즘에 대한 반작용은 미술이 자체의 철학적 해석 중심 관점으로부터 민중에게로 눈을 돌려, 미술의 직접적 인 사회 유익 효율성을 고려하자는 자성적自省的 분 위기를 나타내게 되는데, 이것이 바로 포스트모더니 즘의 한 사유가 된다는 것은 지난번에 살펴본 바와 같 다. 그 덕택에 민화가 상업성 우선이 아닌 한계 안에 서 실용적인 미술로 거듭난다는 것은 매우 확실한 시대적 당위성과 이론적 배경을 얻게 되었다. 이미 전 통민화는 그 전부터도 대대로 그 방식이 정통적 대물 림을 하며 이어오던 미술이었던 터다. 요즘 우리나라 동, 서양화단 등의 기득권 미술계에도 리메이크는 아 니지만, 실용적 분위기를 드러내는 작품들이 대거 나 타나고 있는 것은 위에서 말한 사회적 반향에 다름 아 니리라. 그런 입장에서 리메이크 작업에 대한 기술적 요인을 더듬어 보자.

미술적 어법으로 스토리텔링하라

옛 작품을 리메이크할 때는 반드시 요즘 문화적 트렌 드를 염두에 둔 채 작업하여 작품을 트렌디하게 할 필 요가 있다. 요즘 민화 화단에서 종종 보이듯이 아무리 리메이크했다 하더라도 작품이 옛스럽고 올드하다면 오늘날의 시대적 감성을 반영한 작품이라고 하기는 힘 들기 때문이다. 화가 자신은 창작한 것이라고 하지만, 정작 그 작품을 보는 사람에게는 창작으로 보이지 않 는 경우가 바로 이에 속한다. 옛 그림은 그 당시 트렌 드에 맞춰 제작된 것이다. 현대민화가가 감동을 주어 야 할 대상은 두말할 것 없이 바로 현대인이다. 그러므 로 현대민화가의 작품은 어느 정도라도 현대미술적 논 리체계가 적용된 작품이어야 한다는 것이다. 옛 작품 을 리메이크하는 목적은 현대와 과거, 두 시대를 오가 는 정서적 가교 구실을 하여 관람자의 공감 진동의 폭 을 증가시킬 수 있는 특성 때문이다. 그렇다면 ‘트렌디 한 전통적 느낌의 공감대’가 리메이크 창작민화가의 최 대 작업 목표가 되어야 할 것이다. 필자가 1986년 말에 제작했던 리메이크 민화 작품을 놓고 설명해 보기로 한다. 이는 작품의 문제점을 지적 해 보이려는 것일 뿐 다른 이유가 없음을 미리 밝힌다. 원작 이미지를 잃어버려 소개하지 못해서 아쉬우나 그 대신 박생광 선생님께서 필자보다 먼저 80년도에 리메 이크하신 전작前作이 있어서 소개하니 리메이크 작업구상 요령을 비교해보면 조금은 참고가 될 것이다. (그림 1. 전작/박생광의 리메이크, 그림 2. 필자의 리메이크 작품 참조)
필자는 우선 작품 제작을 위해 패러디(혹은 오마쥬Hommage) 하기에 적합해 보이는 원작을 하나 골랐다. 그 원작은 소나무 숲속에 한 쌍의 학이 졸고 있는 모습의 그림이었는데, 화면 대부분을 다 빼고 낮잠을 즐기는 학 두 마리만 따다가 클로즈업하여 거기에 이야기를 만들어 넣는다면 원작과는 또 다른 느낌으로 관람자에게 다가갈 이야기 그림을 만들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머릿속으로 즉시 하나의 이야기를 구성했다. 작품 제목을 미리 ‘학마을의 전설’로 정했다. 작품을 할 때 제목을 꼭 미리 정해야 하는 건 아니다. 오히려 그 반대의 경우가 더 많다. 내가 만든 이야기는 다음과 같았다.


– 옛날, 옛날 첩첩 산골에 학마을이라는 동네가 있었다. 옹기종기 집이라고는 몇 채 안 되는 작은 마을인데, 마을 뒷산의 우거진 소나무 숲에는 언제부터인지 학무리가 떼 지어 살고 있어서 이름이 ‘학마을鶴洞’이다. 마을이 언제나 신비감에 쌓여 영험한 분위기를 자아낸다고 사람들은 ê·¸ 마을 주민들을 신선처럼 대하기까지 했다. 그도 그럴 것이 ê·¸ 마을은 천하에 둘도 없는 장수촌으로도 통했다. ê·¸ 마을이 장수촌이 되기까지는 그럴만한 기막힌 일이 있었는데, ê·¸ 이유를 다정한 한 쌍의 학 부부를 중심으로 살펴본다. 때때로 양지바른 곳에 학들이 모여 앉아 졸면서 한낮 햇볕의 따사로움을 즐겼는데, 작품의 주인공인 늙은 학 부부도 그중 하나다. 삶의 고단함이 모여 살포시 잠으로 밀려와 얕은 꿈을 꾸게 된다. 꿈 내용은 이렇다. 지금은 평화로운 마을이지만 사실 과거에는 오랫동안 검은 이리 떼와도 같은 험한 액운에 마을 사람들은 마치, 죽음과도 같은 슬픔의 고통과 근심과 좌절과 우울함에 시달리며 살아가고 있었다. 그러던 어느 날, ê·¸ 마을에 눈같이 하얀 신비로운 학무리가 끝도 없이 무리 지어 입에 불로초를 물고 날아들었고, 그로 인해 쉽사리 마을에서 어둠의 세력이 쫓겨나가고 평안과 장수의 마을로 바뀌었다. 이 학부부도 그때 ê·¸ 일에 동참하면서 날아든 후로는 누구보다도 이 마을을 사랑하며 지켜왔다. 그러던 중, 천 년을 사는 학이라지만, 이제는 수명을 다해가는 학 부부가 조용히 눈을 감고 자신들의 자랑스러운 추억을 꿈으로 회상한다. 그리고 아름다운 사연이 담긴 이 그림을 집안에 들여 행복을 이어가고픈 이를 위한 그들의 기도로 오늘까지 전해 온다 –


이렇게 원작 그림을 비틀어 내가 만든 이야기를 위한 것인 양 설명하는 방식으로 그려낸 작품이다. 원작과 다르게 보이기 위해 화면 바닥에 중간색 먹물을 섞은 아교 물을 불규칙하게 뿌려서 말린 종이 위에 먹선은 생략하고 호분을 중심 채색으로 그렸고, 완성 후에는 작품이 올드하게 보이는 걸 덜기 위해 백록색 크레파스로 원형의 링과 무지개 식 고리를 그려 넣었다. 이 그림은 1987년 4월에 열린 ‘민화-오늘의 시각과 방법 제1회전’에 출품했었다. 당시로는 필자의 공부가 짧아 의욕만 앞섰던 그림이 되었던바 그 문제점을 이제야 확인한다. 그 문제점이란, 이 그림을 위한 이야기 줄거 리는 위에서 보듯이 어디까지나 ‘문학적 구성’이고, 이 그림은 그걸 토대로 하여 설명하듯 그려낸 작업이다. 그러나 오늘날의 세계 미술사적 상황에서 볼 때 미술 은 다른 어떤 방법보다 ‘미술적’ 어법으로 표현하는 게 좋다. 그리고 당연히 그 미술적 어법은 미술, 문화사 적 거름망에 걸러져 나온 것이어야 한다. 그렇지 않으 면 작품의 느낌이 지나간 세월의 것처럼 진부하게 되 기 때문이다. 필자의 작품 역시 관람자가 작품 주제의 내용을 쉽게 알 수 있도록 그려보겠다는 욕심만 앞세 워 옛날 사람들이 사용하던 방식으로의 설명화說明畵 가 되어 버려 그 느낌이 골동품적 미술 경계에까지 이 른 것이었다. 그러나 필자는 당시 본인 그림의 적지 않 았던 인기에 스스로 속아 자신이 그림을 잘 그리는 사 람이라는 어리석은 착각까지 했었다. 설명적 그림이 팔리기는 쉽다. 필자의 작품은 당시에 작품과 이미지 가 따로 나뉘어 팔렸는데, 특히 이미지는 그 후 3년간 이나 크리스마스 카드와 연하장 등의 도안으로 팔려나 갔었다. 그러나 지금 생각하면 당시의 내 부족한 편견 이 매우 부끄럽다. 그로부터 한 가지 깨달았던 것은 작 품이 인기를 얻거나 잘 팔리는 것이 꼭 수준 높은 훌륭 한 작품이기 때문은 아니라는 점이다. 자기 목적이 상 업화가商業畵家가 되려는 게 아니라면 꼭 검토해 볼 일이다. 문제를 조금 더 살펴보자. 아마도 필자의 그림 을 보면서 모든 관람자는 제각각 나름대로 ‘느낌’을 얻 게 될 뿐 필자가 전달하려는 ‘이야기’를 ‘지각知覺’하기 는 힘들 것이다. 필자는 그런 의미에서, 작품이 스토 리텔링의 목적을 가졌더라도 그림의 내용을 이야기(문 학)식으로 설명하려고 한다면 미술 목적상으로는 손해 가 불가피해진다는 것을 미처 몰랐다. 차라리 필자가 꾸민 ‘학마을의 전설’에 관한 내용을 감성적 차원에서 더 정확하게 알리기 원했더라면 나는 붓보다 펜을 들 었어야 했다. 감성적인 글로 잘 다듬어 써내려가는 게 내용이나 감정 전달도 쉽고 더 효과적일 뻔 했다. 이는 미술이 문학적 설명 용도로는 별로 효율적이지 못하다 는 증거다. 미술은 음악이나 문학으로 표현하는 것과 는 또 달리 ‘미술’로서의 독자적 어법을 갖춰야 한다. 2) 미술의 특수한 속성적 장점은 어떤 상황이나 현상을 설명하려는 것보다 그 자체, 즉 상황이나 현상의 형상 적 의미를 나타내는 상징언어라는 점이다. 상징! 그 상 징을 표현하는 것이 특히 현대라는 시대에 이르러 미 술이 치중해야 할 가장 중요한 덕목으로 자리 잡았다. 너무 심한 문학적 설명을 하는 작품이라면 이발소 그 림만큼이나 천해 보이면서도 그 내용을 파악하기는 문 학적 글자 매체로의 서술방식으로의 표현보다 한결 뒤 진다. 음악적 방식을 나타내려는 작품도 역시 또 다른 난해함을 안겨 줄 뿐 그 목적을 이루기가 쉽지 않다. 그러므로 창작민화는 스토리텔링을 하더라도 옛날식 의 문학적 어법 등 구태의연한 방법에서 벗어나 미술 적 상징 표현으로의 소통 방식을 개발해야 하겠다. 이 말이 우선은 어렵게 들릴 수도 있겠지만, 사실을 알고 보면 오히려 편하고, 쉽다. 신기하게도 현대인은 그 어 떤 것의 상징만 표현해 놓더라도 보는 이마다 자기 나 름의 스토리를 찾아내서 즐기고, 그렇게 하는 과정에 서 마음이 힐링되는 효과를 얻는다. 아마도 이것이 포 스트모더니즘 시대의 묘미여서, 작가가 문제 제기만 하고 답을 유보해두면 보는 이마다 각기 다른 답을 머 리에 그리면서 자유롭게 즐기는 게 아닌가 싶다.

성공이냐 실패냐, 치밀한 원작 연구에 달렸다

흔히 리메이크는 창작보다 어렵다고도 평한다. 작품 의 애정과 깊이 있는 이해, 혹은 원작 또는 전작前作 과 대등한 수준의 토대 위에서 구축되어야 하므로 원 작이나 전작과 비교되고, 원작이나 전작을 넘어서는 정도의 수준이 아니면 성공하기 어려운 작업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조금만 잘하면 원작이나 전작이 이미 성공했던 것인 만큼 관심을 끌기가 더 유리한 작업이기도 하다. 다음으로는 다른 매체의 작품을 민화로 리메이크하는 방법도 바람직하다. 민화가 김부환은 얼마 전 큰 인기 속에 방영되었던 TV 드라마를 창작민화로 바꿔서 표현했다. 그는 과거에도 드라마 ‘해를 품은 달’을 민화로 보기 좋게 리메이크하기도 했었다. 이미 소설을 드라마나 연극으로, 영화로 리메이크하여 성공시킨 예는 많은데 드라마를 회화로 리메이크한 작품은 별로 보질 못했다. 이 분야도 역시 더욱더 깊이 있는 연구가 필요할 것이다. 이 경우의 과거 전력을 볼 때 깊이 있는 작품이면 뜻밖의 큰 성공을 거두지만, 원작을 능욕하고 흥행 위주의 어설픈 일신, 원작에 대한 판단 실수 때문에 원작 팬에게 욕을 먹는 경우도 제법 있었으므로 기왕에 하려면 원작을 치밀하게 연구하여 해당 리메이크가 역작으로 평가되도록 작업해 의외라고 생각될 정도의 탁월한 평가를 얻어낼 일이라고 생각된다. 그런 의미에서 김부환은 매우 중요한 리메이크 민화화가로 보인다. (그림 3, 그림 4 참조) <계속>

글 정하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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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간 민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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