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화의 대중화 이끈 대가의 인생역정, 고안(古岸) 김만희

서울시 무형문화재 민화장 고안 김만희
서울시 무형문화재 민화장 고안(古岸) 김만희

민화에도 원조 스타 작가가 있다. 주인공은 서울시 무형문화재 제18호 민화장, 고안(古岸) 김만희 화백이다. 47년 간, 50회 이상의 전시로 화업을 이어 온 그는 민화도 ‘히트’할 수 있다는 사실을 증명해 왔다. 많은 사람들이 감상하고 즐길 수 있는 문화콘텐츠로, 현대 민화의 대중화를 견인했다. 그의 존재는 ‘스타 작가’를 목마르게 바라는 현재 한국민화계에 모범적인 거울인 동시에 미래지향적 답안일수도 있다.

교직에서 내려와 가슴으로 민화를 품다

고안(古岸) 김만희김만희 화백은 대를 이은 교육자 집안에서 태어나 성장했다. 그의 부친은 경성제일고보(현 경기고)를 졸업하고 부산과 청주, 대전 등지에서 교직 생활을 했다. 그의 동생은 오스트리아 빈 대학 철학과의 김신자 교수(정년퇴임)로 유럽 지성계에서도 큰 역할을 한 인물. 김 화백 역시 한국전쟁이 발발하기 바로 전 해, 대전의 고등학교 교사로 부임해 10여 년간 학생들을 가르쳤다.
물론 그가 어느 날 갑자기 화업에 투신한 것은 아니었다. 선천적인 재능과 취미는 일제강점기 일본인 교사들의 눈에도 남달리 보일 정도였다. 하지만 당시 식민지 상황이었고 변변한 미술 교육을 받을 수 있는 교육 기관은 없었다. 또한 화가로 생업을 영위한다는 것은 불투명한 미래를 넘어 위험한 일로 인식되던 시기였다. 그의 재능을 아깝게 여긴 이들은 학생 김만희에게 사범학교 진학을 권유했다. 전 과목에 대한 교수법을 배우는 사범학교에서는 일정 수준의 미술교육도 받을 수 있었기 때문이다. 이 때 그는 데생부터 유화까지 서양화법을 체계적으로 체득했다. 실제로 이러한 실력을 살려 고등학교에서도 미술 교육을 맡을 수 있었다.
하지만 김 화백의 화업에 대한 열정은 학생들에게 미술 실기를 가르치는 정도로 만족할 수준이 아니었다. 삶이 뒤바뀔 전환기를 맞이했던 것이다. 그 시절은 교사 퇴직금이란 개념조차 없었다. 생업은 역시 교편을 잡고 있던 아내에게 맡기고 과감히 화가로서의 삶을 선택했다.
그렇다고 아무런 계획 없이 무모한 선택을 한 것만은 아니었다. 그는 예술가로 살기 위해서는 자신만이 할 수 있는 것을 보여주어야 한다는 점을 잘 알고 있었다. 그가 교편을 내려놓았을 때는 새마을운동이 한참 시작되어 ‘근대화’의 바람이 불 시기였다. 예술계도 외국 바람이 거세게 불었다. 원로들은 원로들대로 일본이나 중국 중심의 고전 동양화에 머물러 있었다. 거기서 김 화백이 찾은 ‘제3의 길’이 민화였다.
“글 쓰는 사람들은 동시대 민중의 삶을 기록하는 작업이 낯설지 않습니다. 저도 그와 같이 그림으로 우리 민중의 삶을 기록하는 작업을 하고 싶었고, 여기에 민화만큼 적절한 것이 없다고 믿었습니다.”

전시회 대성공으로 삶의 목표를 결정짓다

김 화백이 카메라를 들고 전국에 산재한 민속자료나 민화자료를 취재한 사실은 잘 알려져 있다. 그럴 수밖에 없었던 것이 민화는 일제강점기를 거치면서 거의 말살되다시피 했으며, 전승자도 없었던 탓이다. 그가 의지할 수 있는 것은 고서적과 사진뿐이었다. 이렇게 모은 사진자료를 토대로 스케치를 하고 작품을 구상하는 작업을 반복했다. 이렇게 시작된 작업은 외로웠고, 누가 알아줄 것인가에 대한 고민도 깊었다.
그러던 김 화백에게 일생일대의 기회가 찾아왔다. 1970년 한국관광공사가 주최하는 제1회 의 신문광고가 눈에 들어왔다. 당시 민화, 혹은 민속화란 카테고리가 아예 없었다. 그는 그동안 전국을 돌며 수집하고 작업한 슬라이드 100장을 엮어 을 출품했다. 결과는 입선이었다. 출품 전 각각의 슬라이드에 번호를 기록해 두었는데, 적지 않은 사람들이 해당 그림을 구매하겠다고 나섰다.
그가 일약 ‘스타’로 떠오른 것은 1972년 덕수궁 돌담길에 연한 국립공보관 전시였다. 경쟁 방식으로 전시작가를 모집하는 공모전 성격의 이 전시는, 국가가 여러 혜택을 제공하는 만큼 경쟁이 치열했다. 김 화백은 여기에 전시 작가로 선정됐다. 출품작품은 민예품경진대회에 제출한 작품과 같은 방식을 선택하되 500매의 슬라이드를 연결한 거대한 작업을 선보였다.
그러나 이 때까지도 확신이 있었던 것은 아니다. 2년 전 입선했고 입소문을 타 작품이 판매되기도 했지만, 당시까지는 민화나 민속화에 대한 관심이 그저 일부 마니아들의 취미에 그치는 정도였다. 전시회 첫날, 그는 ‘혹시나 보러 오는 사람이 많지 않으면 어떡하나’라는 걱정을 안고 조심스럽게 덕수궁에 들어섰다. 그는 “관람객이 제법 많아 안심이 되었지만, 관람객 모두가 제 작품을 보러 왔을 거라고는 생각하지 못했습니다”라고 그때의 벅찬 기억을 떠올렸다. 세 곳의 전시 공간 중 자신의 민속화 슬라이드 작업이 전시된 전시실만 문전성시를 이루었다. 그의 표현을 빌자면, 그때부터 점심 먹을 사이도 없이 인터뷰가 진행됐다. 예상치 못한 전시의 대성공은 그에게 중요한 과제를 던져주었다.
“당시 동양방송의 주수광 아나운서와 생방송 인터뷰를 할 때였죠. 화제, 그리고 그림 속에 등장하는 요소들이 가진 상징성에 대한 대화가 오갔는데 진땀이 났습니다. 당시로서는 화제나 도상학적인 부분에 대해서는 지식이 턱없이 부족했습니다. 그나마 나보다 연배가 위였던 주 아나운서가 노련하게 정리해 인터뷰를 무사히 마칠 수 있었습니다.”
그는 당시 인터뷰를 계기로 작업 시간의 절반을 이론 공부에 할애했다. 그렇다고 이론 공부와 작업의 병행이 녹록한 것은 아니었다. 인기 작가의 반열에 오른 그를 주변에서 여유롭게 놔둘 리 없었다. 당장 이듬해인 1973년 국립공보관 앵콜전이 기다리고 있었다. 그 후 10년 간 진행된 초청전만 22회에 달했다. 어느새 국내 민화 개인전 이력은 2014년까지 무려 50회를 훌쩍 넘긴다.
한편으로는 그간 수집한 자료를 체계적으로 정리해 서적으로 발간하는 작업도 진행했다. 일약 스타 작가로 인기를 얻기 시작한 1973년에 향후 20권이 될 의 첫 책을 펴냈다. 그리고 화제, 화목별로 17권의 시리즈를 영한대역본으로 펴내기도 했다. 당시 우리 옛것과 전통문화에 대한 관심이 일어나긴 했지만, 대부분은 골동품 수집 수준인 반면, 그는 작품활동을 하면서도 역사적 자료를 수집하는 작업을 게을리하지 않았다.

 
해외에서의 성공적인 전시, 민화의 가치를 일깨우다

고안 김만희국내에서의 성공적 결과는 해외전시의 주목할 만한 성과로 이어졌다. 대만(타이페이, 타이난), 일본(고베), 오스트리아(빈), 미국(샌프란시스코, 워싱턴 등), 독일(립스타트, 베를린) 등 5개국 각 도시에서 10회가 넘는 초대 전시를 가졌으며, 해외 미술계와도 교류했다.
특히 첫 해외전시는 당시의 시대상황을 생각하면 파격적인 것이었다. 국민들의 출국은 아무리 공적인 업무라 하더라도 까다로운 절차를 거쳐야만 가능했다. 우선 해외 전시기관이나 단체의 초청이 있어야 했고, 여기에 해당 전시와 연관되는 국내단체 소속임을 증명해야 했다.
“어느 날 한남석 전 국립공보관장께서 직접 찾아왔습니다. 대만에서 전시를 하자고 하더군요. 내가 자격 요건에 대해 걱정했더니 그것은 걱정하지 말라고 하면서 일사천리로 해결해주었습니다. 그리고 대만에서 전시가 성공하니 국내에서도 ‘국위선양’ 사례로 떠들썩했었지요.”
대만에서 그의 개인전은 그 후로도 이어져 양국의 국교가 단절될 때까지 총 5회가 열렸다.당연히 모두 초대전이었다. 대만에서의 초대전은 민화가 아닌 ‘민속화’라는 이름으로 소개됐다.
유럽에서도 그는 큰 인기를 누렸다. 2005년 독일 립슈타트 시청에서의 전시는 50일씩 2회, 100일 간이나 지속될 만큼 선풍적인 관심을 모았다. 특히 그는 독일에서 역사를 대하는 방식에 대해 많은 것을 느꼈다고 한다.
“2차대전 때 폭격을 맞아 만신창이가 된 성당, 냉전시대의 상징인 마르크스·엥겔스 상 등을 시민들이 지켰다는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아픈 장면도 기억하고 교훈으로 삼아야 할 역사로 받아들인 것이죠. 이것이 한국 근현대사를 대하는 우리의 방식에 시사하는 점이 크다고 생각했습니다. 민화가 가지는 역사기록으로서의 중요성에 대해 다시 생각하는 계기가 됐지요.”
실제로 김 화백 자택 거실에 있는 , 등의 화제는 다분히 근현대사에 대한 기록화적 성격이 짙다. 특히 그림의 배경이 된 공간의 상호명을 보고 옛 추억을 떠올리는 관람객도 적지 않았다. 실제 이 그림들을 자세히 보면 당시 시대상을 특징적으로 반영하는 요소들이 담겨져 있어 먼 훗날 대한민국의 근현대사를 고증할 때 사료로서의 가치가 크다는 평가를 받았다.
그의 민화는 채색 풍속화가 전통적으로 발달한 일본에서도 인기가 높았다. 이미 1989년 고베 시립박물관에서 민화개인전을 열었을 뿐 아니라 일본 내 거물급 문화계 인사들과도 교류를 가져왔다. 특히 한국 와당수집가였던 이우치 이사오는 김 화백과의 깊은 인연으로 국립 중앙박물관에 자신의 수집품 절반에 해당하는 2,300점의 기와를 기증하기도 했다. 그는 일제강점기 사범학교 과정을 이수했던 인연으로 일본어 능력도 출중해 일본에서 한국민화에 대한 강의를 수차례 맡았다. 요즘으로 치자면 원조 ‘한류작가’였던 셈이다.

최초이자 유일한 무형문화재, 롤모델이 되다

김 화백 하면 가장 먼저 떠오르는 타이틀은 아무래도 서울시 무형문화재 제18호 ‘민화장(民畵匠)’일 것이다. 민화 분야에서는 최초이고 유일한 무형문화재로, 1996년에 자랑스러우면서 책임감 무거운 영예를 안았다. 문화재청은 민화와 민화장에 대해 ‘민화란 생활공간의 장식을 위주로 한 일상생활과 풍습에 따라 그려진 실용적 그림을 말하며, 이런 민화를 그리는 사람을 민화장이라 한다’고 정의하고 있다. 즉 시기에 따라 흘러오고 가는 예술의 한 조류가 아니라 민족의 정신과 역사를 증명하는 문화재가 바로 민화라는 것이다.
1996년은, 80년대부터 본격적으로 대중화 바람을 타기 시작한 민화가 각 대학 사회교육원이나 문화센터를 중심으로 확연한 붐을 일으킨 시기여서 더욱 의미가 컸다. 그 역시 많은 프로페셔널 민화작가를 비롯해 현재 민화인구의 대다수를 이루고 있는 여성 민화인들을 가르쳤다. 현재 그의 전수조교 역시 80년대 그의 문하에 입문한 여성 민화인이다.
그의 평생 민화작업은 외롭고 힘든 것이었기에 무형문화재로서의 등재도 녹록치 않았을 것으로 예상할 수 있다. 하지만 김 화백은 “오히려 큰 어려움이 없었다”며 “그 외로운 작업의 가치를 선구자적 역할로 인정해주는 이들이 있어 수월하게 진행됐다”고 인연 있는 이들에게 고마움을 전했다. 잘 알려져 있다시피 한국 민화수집과 연구 기준을 세운 대갈 조자용을 비롯하여 많은 작가 및 연구가들과 교분을 나누었다. 그들 상당수가 지금은 고인이 됐다.
김 화백도 미수(米壽, 88세)를 앞두고 있다. 사촌형인 김만규 전 종로구청장이 지어 준 ‘오래 된 언덕’이라는 뜻의 호 고안(古岸)처럼 민화라는 강의 흐름을 오래도록 지켜보며 살아왔다. 이 대가에게 더 남기고 싶은, 혹은 화업으로 찍고 싶은 방점이 있다면 무엇일까. 그의 대답은 의외로 소박했다.
“평생 내가 잘 할 수 있는 유일한 일이 그림을 그리는 일이었으니 지금도 작업을 멈추지 않고 있습니다. 인간이 70대까지는 자신의 기력을 온전히 쓸 수 있지만, 80대가 넘어서는 말처럼 쉬운 일이 아닙니다. 이제 제가 더 할 수 없는 것들은 후학들의 몫이 아닌가 싶어요. 평생 그리고 싶은 그림을 그렸으니 그것만으로도 행복합니다.”

 

글 : 한명륜 기자
사진 : 이주용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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