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화와 한국 현대미술작가② – 민화, 정체성의 미로에 던져진 한 타래의 실뭉치 박생광

민화와 한국 현대미술작가②
민화, 정체성의 미로에 던져진 한 타래의 실뭉치 박생광


내고乃古 박생광朴生光(1904-1985)은 시대의 고민을 안고 진실을 찾아 배회하던 화가 중 하나였지만 가장 치열했던 화가였으며 누구보다 늦게 출발했으나 완벽히 그 미로를 헤치고 나와 생존한 인물이었다. 또한, 고매한 정신의 유희가 아닌 몸의 에너지, 느끼는 감정, 마음의 울림들을 원한 예술가였다.

광복 직후 한국현대미술 최고의 화두는 ‘민족미술 구현’이었다. 그것은 지난 잃어버린 식민 기간의 아픔을 회복해주는 처방전으로 자존심 회
복과 더불어 미술이 사회에서 기능하는 유일한 돌파구이기도 했다. 광복과 함께 논의된 민족 미술은 당연히 왜색 극복에 대한 구체적 방안을 강구하는 것을 목표로 했다. 동양주의, 향토색 등에 기반을 둔 민족미술은 김용준을 중심으로 한 이론가들에 의해 해석된 전통 수묵의 세계였다. 장승업과 추사 김정희의 도저히 닿을 수 없는 다른 세계관에도 불구하고 이 두 세계는 민족미술의 이상향에 위치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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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채색화는 일본화와의 차별성에 역점을 두는 태도를 취할 수밖에 없었다. 전통 도화서 화원의 전통을 지니고 있던 안중식과 조석진 서거 이후 서화미술학교에서 이들에게 교육받은 김은호와 노수현에 의해 채색은 전승되었지만, 김은호의 채색은 채색에서 전통을 벗어난 지점이 있었던 것이다. 또 이영일, 이한복, 정찬영 등은 일본에서 공부를 하고 와 일본화의 세밀하고 고운 채색을 보여주고 있었다.
이들 채색화가들의 고민은 광복의 기쁨과 함께 대두되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닌데 전통을 알지 못하는데 도대체 어디로 돌아갈 것이며 무엇을 전망할 수 있을 것인가 난처한 상황이었던 것이다. 실지로 1920년에 창덕궁 대조전 일곽의 벽화를 화가들에게 의뢰하자 심전과 소림 두 스승이 서거하신 상황에서 교수 강진희는 서화미술회의 젊은 작가들과 시중의 민화작가들이 함께 궁중 벽화를 그리려는 계획을 세웠다. 장식적인 그림을 그리고자 하였던 것이고 진채의 채색화를 그들이 해결할 수 있을 것으로 전망했을 것이다. 하지만 ‘두껍닫이 그림을 그리는 시중의 작가들’과 함께할 수 없다는 ‘예술가’들의 판단에 의해 계획은 어그러지고 말았다.
그리하여 한국 채색화의 전통, 그것은 장식과 결연한 채 순수 예술의 모습을 추구하였고 결국 일본화의 외피에 위치하게 된 것이다. 이러한 역사적 상황 아래 채색을 다루는 화가들은 나름의 방식으로 나아갈 수밖에 없었고 그것은 개인의 양식이 곧 민족미술의 형식이자 왜색 극복의 방안이라는 결과로 연결되었다. 내고乃古 박생광朴生光(1904-1985)도 이러한 시대의 고민을 안고 진실을 찾아 배회하던 화가 중 하나였지만 동시에 가장 치열했던 화가였으며 누구보다 늦게 출발했으나 완벽히 그 미로를 헤치고 나와 생존한 인물이 되었다.


동양과 일본 그리고 민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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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생광은 1904년 진주에서 박기준과 김성녀의 2남 1녀 중 둘째아들로 태어났다. 진주농업학교에 다니다가 일본인 스승 쿠미니요네타로가 주선하여 일본에 가서 3년 동안 화업을 닦았다. 교토시립회화전문학교를 수료하고 명랑미술연구소에서 조교를 하였으며 오치아이로우후를 만나 도
쿄로 이주하였다. 26세 때인 1930년 조선미술전람회 서양화부에 출품하여 〈소묘〉가 입선하였고 이듬해에는 동양화부에 〈채소밭〉를 출품하여 입선하였다. 이후로 그는 조선미술전람회에 출품하지 않고 명랑미술전에서 활동하였고 일본미술원 동인이 되는 등 일본에서 화가로서의 길을 단단히 밟아갔다. 광복이 되자 25년 동안의 일본 생활을 접고 귀국하여 진주에 머물며 활동하였다. 전쟁 중 월남한 이중섭이 그림을 그릴 수 있도록 후원하고 그가 운영하던 성림다방에서 전시도 열어주는 등 활동도 쉬지 않았다.
1967년 서울로 이사하여 홍익대학교 동양화과, 경희대학교 미술학과 등에서 강의하였고, 67세인 1971년에 서울수유리 그린벨트에 위치한 작은 집으로 이사를 하였다.
그는 생애를 이곳에서 마쳤는데, 한 칸짜리 방이 화실이어서 대작은 펴놓지도 못하고 바닥에 놓고 둘둘 말아가며 그렸다고 윤범모는 기록하였다. 그리고 그의 나이 77세에 백상기념관에서 가진 개인전은 세인의 관심을 불러일으켜 인도와 프랑스를 다녀오고, 1984년에 그랑팔레 한국미술 특별전에 초대받고 샤갈을 만나기 위해 한복도 지어 입었다. 하지만 그해 후두암 진단을 받았고 1985년 5월에 특별 초대작가로 파리 그랑팔레에 출품한 뒤, 그 해 7월 18일 서거하였다.
박생광의 활발한 활동은 노년에 집중되어 있다. 그는 오랫동안 일본에 머물렀고 또 그만큼의 시간을 진주에 머물렀던 때문에 중앙화단에 소개되기까지 시간이 걸렸던 것이다. 하지만 화가가 많지 않던 그때에 그의 행보가 더딘 것이 비단 지방에 거주한 탓만은 아니었을 것이다. 그는 자기 수행에 집중했다. 그 수행은 물론 평생지기 청담스님처럼 불가에 들어서 행자생활을 했던 것을 포함한다. 그는 몸 안에 배어있을 일본적인 요소와의 전투를 치렀다. 그 전투가 얼마나 지독했는지 한 번 집에서 나서면 두세 달 소식이 없다가 나타났다. 자녀들은 그런 아버지가 낯설어 그가 어서 다시 길을 떠나기만을 고대했다고.
박생광의 주변인들은 돈이 생기면 전화하여 네 그림 사줄게 하는 선배 화가, 남의 돈으로 술을 마시면 맛이 없는 사람, 키가 작지만 인품이 큰 사람으로 그를 기억한다. 그의 탈속한 태도는 절집과의 인연 때문이기도 하겠지만 예술가로서 자유로운 영혼과 무애행의 실현이 당연하였기 때문일 것이다. 열심히 노력한 만큼 손에 배인 일본화의 전통, 그것을 버리기 위하여 나선 길은 그의 이전에 보지 못한 새롭고도 힘이 넘치는 새로운 세계를 열기 위하여 치렀던 피비린내 나는 전쟁터에서 전쟁터로 이어졌다. 물론 그가 조선미술전람회에 더 이상 출품하지 않은 것은 작품에 일본적인 요소가 있어야 수상할 수 있음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 스스로 일본에 매몰되지는 않았다고 하였으나 손에 익은 기법을 떨치는 것은 쉽지 않았을 것이다.


눈꺼풀을 들어 올린 민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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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생광은 “샤머니즘의 색채, 이미지, 무당, 불교의 탱화, 절간의 단청, 이 모든 것들이 서민의 생활과 직결되어지는 그야말로 ‘그대로’ 나의 종교인 것 같아.”라는 말을 남겼다. 그가 자신의 호 ‘내고’를 ‘그대로’로 표기한 것은 익히 알려져 있으니 이 말은 자신의 종교가 서민의 생활과 직결되는 것들임을 천명한 것이다. 고매한 정신의 유희가 아닌 몸의 에너지, 느끼는 감정, 마음의 울림들을 그는 원했다.
그 길은 결코 서둘러 간 것이 아니었는데, 그가 서울로 이사한 1967년에 제작한 〈탈1〉은 그러한 상황을 전한다. 세로로 긴 종이에 하단에는 두 개의 선면이, 그 위에는 사각형의 흰 종이가 그려져 있고 이 안에는 탈들이 그려졌다. 화중화畵中畵, 백납병풍百衲屛風 형식을 취한 것이다. 진기한 것을 한곳에 보게 만든 병풍에 민중의 탈 따위가 끼어있을 리 없을 터, 박생광은 자신이 좋아하는 것, 자신이 신앙이라고 칭한 것을 ‘그대로’ 그렸던 것이다. 호사 취미의 외형을 빌린 그림은 애초에 민초가 만들어낸 고졸한 모습 그대로 담겨있다. 이 생경하고 우스꽝스런 화면은 그가 민족민족적인 색채의 것들을 바닥에서부터 쌓아 올라갔음을 보여준다.
그는 전통 채색화에서 탈피하기 위하여 고졸의 세계로 침잠해 들어갔다. 그 길목에서 불화, 만신그림 그리고 민화를 만났을 것이다. 그의 작품은 장식적 요소가 강하고 메시지를 분명히 전달하는 형태로 구성되어 있다. 그런데 울림이 가득한 맘을 흔드는 색채는 저 깊은 곳 자연에서 우러난 것이다. 그의 작품은 외형의 묘사가 아닌 본질의 표현을 이룬 것이다. 그의 작품에서 감지되는 색채와 도상을 불화나 무속화에서 가져왔다는 것은 주지의 사실이다. 물론 불화는 그의 주요한 테마였고 무속화 또한 마찬가지였다. 하지만 그가 지나간 통로 가운데 노골적이지는 않으나 지나간 흔적이 드러나는 ‘민화의 길’은 그의 고뇌와 망설임 그리고 자기를 깨는 방식에 대한 단서를 남겨놓고 있다.
1980년에 제작한 두 점의 호랑이는 그의 모색과 창안의 여정을 보여준다. 수묵화 〈호랑이1〉은 꿈틀대는 선과 한가지 색의 농담을 통한 깊이감의 구현이라는 그의 채색이 보여주는 특성을 지니고 있다. 지나치게 얼굴이 크고 툭 불거진 눈에 앞발을 내민 양상이 수묵으로 그렸을지라도 문인화와는 거리가 있다. 화려한 채색이 눈을 사로잡는 〈호랑이2〉는 그 조야한 색감이 기시감을 불러일으킨다. 화면에 발려진 색채의 띠로 이루어진 산과 운무雲霧는 시골장터에서 발견하는 혁필화를 연상시킨다. 그것의 조야한 색채감은 고구려 고분벽화의 주름산과는 분명 다른 계통이다. 표범의 털을 가진 호랑이는 생김새와 자세가 군기에 사용하는 그것을 연상시키지만 바람을 가르는 날개는 없다. 이 빈약한 선으로 경계 지워지고 현란한 색채로 메워진 호랑이는 민화의 도상에 근거하고 있는 것이다.
절집과 친연이 있던 그에게 단청이나 사찰 벽에 그려진 그림들은 당연히 주요한 모티프이다. 그런데 그것을 다루는 방식은 오방색이라거나 구조에 있는 것은 아니다. 〈옛1〉에서 그는 콜라주처럼 단청, 토기, 문양 등 소재들을 나열하였다. 그것은 세상에서 가장 좋은 것, 가장 예쁜 것들의 결합이라는 원칙을 고수하는 듯하다. 그 원칙이야말로 민화의 기본이 아니던가. 그는 민초들이 생산하고 노동하고 즐겨 보던 것들을 화면에 재생시키며 배열의 방식을 연구한 듯하다. 나비는 경첩을 닮았고 화조화는 단청의 축소판이다. 우리 것에 대한 사회적 욕구가 한참이던 때에 그는 가형토기를 그대로 묘사함으로써 집에 그려지는 단청, 뜰 앞의 나무와 꽃밭을 배치하여 집이라는 입체의 공간을 평면으로 펼쳐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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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로를 빠져나오는 아마 실타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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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집 전각의 벽에 그려진 벽화는 신선, 무녀와 함께 이상적인 낙원의 세계로 인도한다. 〈창2〉의 사실을 재현한 듯한 화면은 이중으로 겹쳐
지고 텍스트화한다는 점에서 자신만의 내레이션 구조를 드러낸다. 봉황을 탄 선인의 도상을 가형토기와, 민화에 그려지는 학과 함께 배치한 〈옛2〉는 전지공예로 오린 듯한 나비와 구름을 그려 넣었다. 검은선으로 둘러쳐진 나비는 그 가벼운 본질에도 불구하고 놀라울 정도로 화면에 무게감을 부여한다. 단청과 귀면와와 목어가 긴장감을 높이는 〈목어〉는 현란한 색채가 구획되고 깊이에서 차오르는 자기 양식의 확립과정을 드러낸다. 거칠 것 없는 활달한 필치와 조응되는 색상과 쌓인 물감의 흔적은 조심조심 형태를 따내는 방법에서부터 그곳에서 끌어올리고 있는 것이다. 그 재기환발함이 박생광이 이룬 양식이다.
불화 같지만 불화는 아니고 무속화 또한 아니며 민화라고 하기에도 좀 그런 영역에 위치한 그의 화면은 ‘그대로’ 박생광의 것이다. 하지만 오늘날 우리가 민화라고 하는 방식으로 그려진 두 모란을 비교한다면, 아름다운 채색에서 꽃을 피우는 에너지로 변환된 세계의 질서를 발견하게 될 것이다. 1963년 작 〈모란〉은 붉고 자색이고 희기도 한 모란의 외형을 보여준다. 모란도 병풍의 꽃들처럼 나무에서 피어오른 모란 아래에 참새 두 마리가 검정 색 벌레 한 마리를 넘본다. 그것은 세로로 써진 박생광 자신의 이름이다. 1983년에 그린 〈모란〉에서는 난만한 색채로 뒤덮인 색채의 얼룩 속에서 푸른 잎새 사이 솟아나는 꽃잎을, 이미 모란 향기에 취하여 중심을 잃은 나비를 발견하게 된다. 화면 우측에 점잖은 자태로 입을 벌린 푸른 목어는 비늘에도, 아가미에도 박생광의 이름으로 구성되어 있다. 이 자신만만한 그림 앞에서 박생광 그의 조용하지만 확신에 찬 목소리를 듣는다.

“모란의 씨에서 피어난 가지가 결창을 맺는 것은 곧 모란꽃이듯이 우리는 민족의 회화를 꽃피울 수 있는 사명감을 가져야 해.”

박생광은 그 사명감 하나로 정체성 찾기라는 길고도 긴 미로를 빠져나왔다. 예술가 자신의 미노타우로스에게 잡혀 먹히지 않고 미로를 빠져나오는 법은 오로지 하나. 거친 아마실타래를 들고 들어갈 것. 내내 농사지어 그 줄기를 갈라 손바닥에 피가 나도록 단련해야 사용할 수 있는 그 아마실을, 아낌없이 테세우스에게 실타래를 던져준 아리아드네가 그에게는 없었다. 오롯이 자신이 가꾸고 농사짓고 자아낸 그 실로 미로를 빠져나온 그의 화면은 그래서 이토록 화사해서 눈물겨운 것이다.

글 조은정(미술평론가/미술사학 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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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간 민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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