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화와 한국현대미술작가 ⑯ 견고한 형태, 꽉 ì°¬ 색채 – 류민자

류민자의 화면은 화사한 색조의 대비와 함께 생에 대한 환희를 불러일으킨다.
하잘것없는 것들의 귀환. 민화가 주는 생의 찬미를 그의 빛나는 화면에서 만난다.

글 조은정 (미술평론가)


한국 근현대미술사에 서술된 여성작가의 이름을 기억하는 일은 아주 쉽다. 그 수가 적기 때문이다. 게릴라걸스가 뉴욕의 메트로폴리탄미술관 소장품을 비판하면서 “근대미술 부문에 여성 미술가들의 작품이 5%밖에 걸려 있지 않은 반면, 이 미술관에 걸린 누드화는 85%가 여성을 소재로 한 것”이라고 했던 말처럼 처음부터 끝까지 여성미술가로 존재하는 것은 참으로 쉽지 않은 일이다.
오롯이 작가로 존재하기도 버거운 미술계에서 남편을 작가로 둔 여성작가들이 겪었던 일상의 희생에 대해 우리는 익히 알고 있다. ‘화가의 아내가 아닌 화가로 기억’되어야 마땅한 한국의 여성 작가 중에는 류민자(柳敏子, 1942~)도 있다. 그의 작품은 결혼 이후 아내로서 어머니로서 살아야 하는 줄 알던 시대와 죽음의 문턱까지 다녀온 뒤 화산이 폭발하는 것처럼 터져나온 작품이 현저히 다른 세계임을 보여준다. 경직되고 만들어진 세계에서부터 솟아난 형태들은 어린 시절 할머니 손을 잡고 들른 자연의 어느 구석, 어머니와 함께 한 사찰의 한 공간의 경험을 드러낸다. 동양화란 이런 것이라는 틀에서 벗어나 오롯이 자신의 서사에서 피워낸 형태들, 견고하면서도 부단히 반복적인 형태와 색들은 경험적 신화 구조에 기반하여 서사성을 띤다. 철저히 자신의 경험에 기초한 이 다른 세계는 미술의 형식을 묶어놓은 세계와 구별되는 장소로서 존재한다.


<상相>, 1972, 한지에 채색, 42.0×67.0cm


화가가 되는 길

류민자는 일제가 기울어져가는 전쟁에서 승기를 잡기 위하여 식민지를 수탈하던 1942년 서울에서 류창현과 오을순의 2남 2녀 중 셋째로 태어났다. 위로는 오빠와 언니 그리고 아래로 남동생이 함께한 단란한 중산층 가정이었다. 할아버지는 무관학교 출신 류희장이었고 할머니는 근대기 묵란으로 유명한 화가 소호 김응원(小湖 金應元, 1855~1921)의 따님 김일승이었다. 류민자는 진외증조부 김응원의 그림이 걸린 집에서 ‘소호 할아버지’가 흥선대원군과 함께 중국에 갔었던 이야기를 들으며 성장하였다. 장인의 그림을 좋아했던 할아버지 그리고 자신의 외할아버지를 좋아했던 아버지의 영향으로 류민자는 소호 김응원의 그림에 둘러싸여 성장하며 화가의 재능에 대해 격려받으며 성장하였다.
타고난 다재다능함으로 류민자는 연극, 춤, 노래 등 다방면에서 재주를 보여서 장래희망이 다양할 수밖에 없었다. 물론 화가로서의 꿈도 한켠에서 자라고 있어서 전국미술대회에 나가면 상을 휩쓸어오는 미술반 학생이었다. 그가 다니던 덕성여중고는 학교 이름을 세상에 알려주는 미술반을 적극 후원하였다.
학교가 미술반에 내어준 실기실은 명성황후에 대한 이야기가 있는 감고당 옆 온고당이었다. 여고 1학년 때, 이 오래된 건물에서 밤새 그림을 그리다가 집으로 가던 새벽 경복궁 앞길(당시 중앙청 앞) 나무둥치에서 그는 부처를 보았다. 어둑어둑한 거리에서 밝은 빛이 비치는 곳을 바라보니 황금색으로 부처가 미소를 짓고 있었다. 한참을 황홀하게 쳐다보고 있는데 길가던 행인의 “학생 뭘 그렇게 들여다보고 있어?”라는 말에 정신을 차리니 그저 어두컴컴한 나무둥치 속이었다. 그는 평생 이 장면을 잊을 수 없었다.
나무둥치 속 부처가 그의 눈에 드러난 부처였을 수도, 여고생의 환영이었을 수도 있다. 확실한 사실은 그가 ‘한국미술대상전’에서 수상한 작품 <승화>가 바로 그때 보았던 부처의 모습이라는 점이다. 사실과 사실이 아닌 것, 그 간극을 미술의 상상력으로만 메꾼 것은 아니라는 말이다.


<승화>, 1973, 한지에 채색, 125.0×67.0cm



“석류알처럼 촘촘히 밝혀 번쩍이던 금빛 부처님들
천불상千佛像, 만불상萬佛像의 그 광휘光輝들!
나는 그때부터 언젠가는 생동한 기억을 되살려
화포에다 표현해 봤으면 생각하고 있었다.”
-류민자, <그림 속의 부처님>, 《월간 세대》, 1979년 7월호


당시 덕성여고에는 “덕성 3총사”가 있었는데 서울 미대 동기생인 안상철, 하인두, 김서봉이 그들이었다. 덕성여자중학교에서 안상철에게 미술을 배웠던 류민자는 고등학교 진학 후에도, 홍익대학교 미술대학 동양화과에 들어간 뒤에도 안상철의 화실을 드나들며 지도를 받았다. 1959년 제8회 ‘대한민국미술전람회’에서 <청일晴日>로 대통령상을 수상하였던 안상철이 최고조에 이르렀을 즈음에 류민자는 그의 지도를 받았던 것이다. 하지만 안상철의 강렬한 표현적인 동양화를 보며 성정한 류민자의 거친 먹빛은 어느 교수에게는 ‘지도대상’이 되었다. 움츠러들기만한 시간이 지나고 3학년이 되자 지도교수가 바뀌었다. 천경자(千鏡子, 1924-2015)였다. 그는 걱정 가득한 학생 류민자의 얼굴을 보며 말했다. “아 괜찮다, 해라.” ‘국전’에 연달아 입선한 전도유망한 여성미술가였지만, 대학졸업과 함께 어머니의 죽음을 맞음으로써 서울을 떠나고 싶었다. 그렇게 지방 학교의 미술교사로 새로운 생활이 시작되었다.


(위) <풍년가>, 1982, 캔버스에 아크릴, 72.7×90.9cm
(아래) <여인정심>, 1982, 캔버스에 모래, 아크릴, 90.9×72.7cm


죽음을 넘어 만난 이상향

모교 교사였던 하인두(河麟斗, 1930~1989)와 만나 결혼한 뒤의 삶은 이전과 달랐다. 가족의 생계를 책임지며 아이들을 키우고 교사를 하고 과외까지 하는 고달픈 생활이었다. 여성이 작가로 존재하기 어려운 이유는 주변의 이해부족이 가장 큰 이유인데, 그는 가장으로서의 무게가 이유였다. ‘국전’ 이후 그가 화가로서 전시장에 이름을 내건 것은 결혼 3년 만에 하인두와 함께 한 <하인두 류민자 동서양화전>, 이른바 ‘부부전’이었다. 20점의 그림은 직장인 학교 미술실에서 틈틈이 그려낸 것이었다. 그저 화단의 꽃, 눈앞의 어떤 것들이 주제가 되는 번잡한 삶의 결과물이었다.
1973년 둘째를 낳은 지 한 달 만에 그는 급성간염에 걸렸다. 아이가 보고 싶어 병원을 나갔다가 돌아와 혼수상태에 빠졌던 그가 깨어나자 하인두는 ‘명동화랑’에서의 개인전 날짜가 잡혔음을 알렸다. ‘내가 갑자기 어떻게 개인전을 하냐’며 허허실실에서 시작한 웃음은 그치지 않았다. 결국 숨을 쉬기도 어려워하던 류민자는 주사를 맞고서야 웃으며 잠에 빠져들었다. 그렇게 생애 첫 개인전을 하였고 죽음의 문턱에 다녀온 사람들이 그러하듯 류민자도 이전의 세계와는 다른, 충실한 자신의 이야기를 쏟아내는 작품들로 전시장을 채웠다.
그것은 어린 시절 할머니 손을 잡고 갔었던 사찰의 어느 지점, 어머니가 곱게 가꾸신 정원의 꽃들이 건네던 웃음, 길거리 나무둥치 속에서 보았던 빛나는 부처님들의 미소와 같은 것들이었다. 자신이 위치했었으나 이제는 결코 돌아갈 수 없는 그 시간의 장소들은 단순한 형태, 다양한 색채로 이루어졌지만 다가가면 사라져버리는 신기루와 같았다. 멀리서 보면 확연한 형태, 하지만 다가가면 흐릿해지는 것은 그가 종이에 물감을 찍어서 그렸기 때문이다. 솜방망이에 물감을 묻혀서 화면에 형태를 나타내는 방법이었다. 돌에 새겨진 글씨나 음각선을 드러나게 하여 형태를 파악하는 탁본처럼 아무 것도 없는 형태를 그는 무한 반복하는 신체의 수련을 통해 화면에 소환하였다. <화엄>, <승화>, <윤회>, <산조>, <풍악> 같은 불교적 색채가 농후한 제목과 전통의 신명이 가득한 제목들이었다. 그리고 작품은 탈모양, 춤추는 사람들, 절마당의 탑 등이 자유로이 솟아나고 서로 휘몰아치는데 오방색의 띠가 휘감은 장면들이 있기도 했다. 어린 시절의 하루들이 화면에 펼쳐졌던 것이다. 그것은 이제는 돌아갈 수 없는 이상향, 아르카디아였다.
이태 후 그는 양지화랑에서 2회 개인전을 가졌다. ‘색감의 풍부한 조화와 우아한 곡선, 불교적인 주제’가 특징이며 ‘작품주제가 불상이나 탑이 중심이며 감각적 여성적 색채를 구사’ 하고 있다는 평을 들었다. 전통을 중시하던 70년대, 그의 작품은 동시대의 이상을 담았다. 탑, 불상과 같은 이미지들은 정신적인 상태인 불교를 가시화한 것으로 구축적인 구도, 반복적인 형태, 중성적인 색채로 구성되었다. 단색조에 가까운 중성적인 색채를 여성적인 색채라 칭한 것은 그가 여성작가이기 때문일 것이다. 어머니를 따라가 들렀던 사찰에서 탑과 기단석에 핀 이끼를 보며 자란 류민자에게는 그 부드러운 초록의 색채가 바로 부처님 계신 곳의 빛이며 어머니와 함께한 안온한 시절의 완벽한 시간을 의미하였다. 첫 개인전에서 이렇게 자신이 추구하는 세계와 직접 만난 것은 행운이라고 해도 좋을 것이다. 하지만 그것은 죽음의 경지를 넘어서 돌아온 자의 그리고 싶은 것을 마음껏 그려낸 열정의 결과였다.


(왼쪽) <옛 우리마을>, 1985, 샌드캔버스에 아크릴, 145.5×97.0cm
(오른쪽) <소망>, 1997, 캔버스에 아크릴, 112.1×145.5cm



<풍요>, 2009, 캔버스에 아크릴, 200×600㎝, 하나다울신탁 소장


눈앞의 것들을 마음으로

80년대 들어 그의 화면은 화사한 색채들로 덮인다. 오방색과 화려한 보라색에 이르기까지 색으로 덮이기도 하였다. 재료와 기법에 대한 고민은 동양화이지만 캔버스를 이용해보는 시도로 나아갔고 물감 서양화의 재료까지 확장되었다. 종이에 끊임없이 두들기고 칠해갔던 기법에서부터 미디엄을 올린 캔버스, 까칠까칠한 사포 같은 느낌의 캔버스에 아크릴 물감의 사용은 새로운 형태와 색감이 가능하게 하였다. 그동안 푸른 색조 혹은 중성적인 색으로 지칭되던 그의 화면에 색채의 폭발과도 같은 사건이 일어났다.
<여인정심>은 상단 초가집과 나무가 있는 마을이, 가운데는 파랑, 빨강, 보라색의 직선 위에 짧은 초록색, 보라색, 주황색 선이 쌓여 있다. 그 아래 나무들 사이에 머리에 함지박 같은 것을 인 두 여인이 마주 보고 있다. 상하를 나누고 좌우대칭인 간결한 구도이지만 색의 작은 토막들로 이루어진 형태는 빛난다. 마치 자개농에 박힌 조개껍질로 만든 형태들처럼 그것은 다양한 색상을 포함하고 서로 대조된 색채에 의해 빛을 얻는다. 공예적인 세계를 회화로 재현한 그의 화면은 그림이란 무엇인가라는 질문에 다가선 듯하다. 점, 선, 면, 색과 같은 회화의 구조가 구상적인 형태에도 불구하고 먼저 인지되는 것이다.
구상작품에서 추상의 원리를 보다니. 그의 화면은 형태를 갖되 형태의 구성요소를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풍년가>는 보라색과 대조되는 녹색의 사용으로 화사한 화면을 보인다. 고구려 고분벽화에서 볼 수 있는 춤그림처럼 네 명의 인물이 좌우대칭으로 도열하였고, 나무들도 좌우대칭이다. 한편 꿀렁대는 물의 표현, 동그란 열매의 표현과 같은 유치할 정도로 단순하고 원초적인 형태감은 그의 작품이 순수의 영역에 기반하고 있음을 드러낸다. 가장 기본적인 것들, 가장 단순하고 규칙적인 추상의 법칙인 좌우대칭은 결코 자연에 존재하지 않는 것이다. 무한한 반복적 배열 또한 그러하다. 이 완벽히 추상의 언어를 자연의 형태로 드러냄으로써 그것은 우주만상의 원리를 가시화한 것이 된다.


(왼쪽) <물뫼리>, 2002, 캔버스에 아크릴, 162.2×130.3㎝
(오른쪽) <만남>, 2002, 캔버스에 아크릴, 162.2×130.3㎝



그의 화면은 단순한 구조를 띤다. 종이에 불명료한 것들을 드러낸 작업 이후는 캔버스에 아크릴로 풍부한 색채를 통해 세상을 구현하는 작업을 보여준다. 풍부한 색채, 강렬한 오방색의 사용에도 불구하고 그의 화면은 매우 정갈해 보이는데 바로 좌우대칭과 반복의 법칙을 견지하고 있기 때문이다. 마치 <일월오봉병>이 그러하듯 그의 마을은 색띠로 구획된 바위와 꿈틀대는 물과 선으로 구획되어진 나무와 그 위에 얹힌 잎들로 구성된 소나무로 신비로운 마을을 보여준다. 집들이 다닥다닥 붙어 있는 그 삶의 공간인 마을은 도식화를 통해 이상향이 된다.
파란 바탕에 선으로 둘러진 소나무 그리고 색띠로 구성된 바위와 들판은 민화가 보여주는 장식성을 갖고 있다. 동양화가의 정체성을 갖고 전통을 새롭게 해석하는 그의 화면은 채색화가 이르는 세계를 한정 짓지 않아 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민화에서 볼 수 있는 원앙, 단순화한 꽃과 집 같은 것들을 보여줌으로써 가장 순수한 마음의 상태에서 구현되는 세계를 드러내 보여준다. 기도하는 맘을 드러냈던 반복되는 부처의 이미지에서 웅얼거리는 불경의 문구들을 확인할 수 있었던 것처럼 그의 마을 풍경에서 우리는 민화가 갖는 소박한 꿈을, 도상의 반복을 본다. 전통의 오랜 힘은 무한한 반복을 통해서 DNA 같은 연속성을 보이지만, 또한 결코 같지만은 않은 화면을 만들어 내었다.


“류민자 여사의 작품세계 안에 있는 친밀성-이상하리만치 사람의 마음을 끌어당기는 친화력-은 그가 다루고 있는 형태의 특성을 이루고 있는 어질고, 텁텁하고, 어수룩하면서도 어딘지 빈틈이 있을 법한 둥실둥실하고 단순하면서도 두툼하고 부드러운 형상線形에서 오는 것이 아닌가 여겨진다. 그것은 어쩌면 먼 옛날 조상들의 뼛속에서 스며있다가 살포시 손을 내밀어 끌어당기는 우리 한국민의 무의식 속에 깃든 미감과도 관련이 있을 듯도 하다.”
-조정권, 조선화랑 류민자 전 전시도록 서문, 1984. 6.


전통 화조화花鳥畵의 화목이 된 적이 없는 버섯, 고사리, 개망초 같은 하잘것없는 식물들이 출현하는 그의 화면은 화사한 색조의 대비와 함께 생에 대한 환희를 불러일으킨다. 하잘것없는 것들의 귀환. 민화가 주는 생의 찬미를 그의 빛나는 화면에서 만난다.


조은정 | 미술평론가(고려대학교 초빙교수)

이화여자대학교 대학원에서 미술사학을 전공하고 박사학위를 받았다.
구상조각평론상, 석남미술이론상을 수상하였다. 한국근현대미술사학회 회장,
인물미술사학회 회장을 역임하였고, 박수근미술상 운영위원장,
성북구립미술관 운영위원장 등으로 활동하고 있다.


저자에 관하여

월간민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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