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화와 한국현대미술작가 ⑮ 이왈종

일상과 상대편에 있는 것들, 점잖은체하는 것들의 저편에 존재하는 이글거리는 것들.
그것들이 함께한 화면. 그것이 바로 이왈종의 공간이다.
그 치열하고 겁이 나는 세상의 이치를 담은 그림들이 뜻밖에도 천연덕스럽고 정감이 가는 이유는 무엇일까.

글 조은정 (미술평론가)


아호로 불리는 근대작가와 달리 예명으로 불리는 현대작가들이 있다. 이왈종(李曰鐘, 1945~)도 그러한 작가 중 하나이다. 그의 예명에 얽힌 이야기는 전시에 작품을 출품한 사연과 연관되어 있다. 일찍이 작가의 길에 들어서서 인정받는 길은 ‘대한민국미술전람회(국전)’에서 상을 받는 것이었다. 미술을 전공한 작가도 당연히 야망을 가지고 국전의 문을 두드렸다. 주변의 친구들은 쉽게도 들어가는 그 국전의 문이 그에게는 호락호락하지 않았다. 작품을 내던 중 하나는 본명인 이우종李禹鍾으로, 나머지는 이왈종으로 작품을 접수하였다. 그런데 입상한 작품은 그의 본명이 아닌 ‘왈종’이라 이름 적은 작품이었다. 사실일까 웃음이 배어나게 하는 이야기이지만 어쩌면 당시 미술계의 파벌이나 작품 경향에 대한 일종의 편 가르기가 있었을 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드는 씁쓸한 사건이기도 하다.
그런데 1965년에 대한적십자사가 주최하는 국제친선미술전시회에서 <추색>으로 고등부 1등상을 받은 서라벌고등학교 3학년 이왈종이라는 이름이 있다. 그 또한 서라벌고등학교를 졸업하였으니 어쩌면 이우종이 이왈종으로 시도된 것은 이때일 지도 모른다. 하지만 본명인 이우종이 낙선하고 국전에 이왈종이라는 이름으로 수상하였다면 화가로서 그의 이름이 이왈종으로 선택된 것은 당연한 일이다.
세간에 알려진 그의 작품은 이렇게 예술적 열망과 실생활의 욕망 중간에서 탄생한 것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이왈종의 작품이 누군가에게 선택되기에는 시간이 필요하였던 것처럼 그의 작품은 일찍부터 무난함을 넘어선 어떤 지점에 위치해 있었던 것 같다. 그러한 특성은 파격破格으로 성장하여 한국화와 서양화, 조각이라는 경계를 지나 총체적인 예술의 모습으로 변해갔다. 유연하게 노장사상을 넘어 이른바 경계를 넘은 작품으로서의 중도中道는 성과 속 그 사이를 자재하게 넘나드는데, 그 길을 타고 넘는 유용한 도구 중 민화라는 요소가 작동하고 있음은 주의 깊게 들여다볼 일이다.


이왈종, <생활 속에서>, 1986, 종이에 수묵 채색, 90×96cm

장터에서 만난 사실의 세계

경기도 화성에서 1945년 해방 4일 전에 출생한 이왈종은 병약한 어린 시절을 보냈다. 태평양전쟁에 패색이 깊어진 일제가 밥 수저까지도 수탈해가던 때에 어머니 뱃속에 있었고 미군정기와 6.25를 유년기에 보냈으니 제대로 영양을 섭취하지 못하였던 때문이다. 손도 작고 병약한 아이는 그림 그리는 일을 좋아했다. 다행히 근대기 가풍 있는 집안 대개가 그러했듯 집안 어르신인 아버지나 삼촌은 매일 서예를 하였고 어린 그는 먹을 가는 시중을 들었다. 옆에서 아버지 글씨를 베끼며 글과 서예를 배우는 과정에서 자연스레 먹과 종이는 그의 일상이 되었다. 게다가 교양 있는 어르신 덕에 그는 자주 국전 나들이도 할 수 있었으니 분명 문화적인 분위기에서 성장하였다고 할 수 있다.
서라벌예술대학(지금의 중앙대학교)을 졸업하고 1971년 국전에서 입선을 한 그는 1974년에는 문공부장관상을 수상하였다. 국전은 그의 든든한 활동 배경이 되었을 터인데 1976년 국전을 공개심사하기로 하자 “심사공개를 시발점으로 문화계의 모든 부조리가 뿌리째 뽑히기를 바란다”는 발언을 하였다. 그는 화려하게 비상하던 1974년에 30대의 동양화가들과 함께 현대화회를 창립하였는데 이들은 장판지, 캔버스와 오브제를 도입하여 기존의 동양화가 갖는 재료의 한계를 넘어서는 파격을 보이며 주목을 끌었다. 기존의 화단에 대한 비판과 동양화의 전통에 대한 자기반성, 그것이 바로 젊은 이왈종의 행보였다.
그는 이미 70년대에 화제畫題를 한글로 썼다. 동양화의 오래된 전통이었지만 실생활과는 거리가 있는 한시나 한자로 이루어진 문장들을 그림 안에 그대로 베껴 써 내려가다가 오자가 나오기 일쑤들이었다. 따라서 전통으로서 화제는 넣되 한글을 선택하여 지금의 것을 드러내는 방식은 동시대 다른 작가들과는 확연히 구분되는 점이다. 시간적, 공간적으로 차가 있어 정신세계의 간극이 있을 수밖에 없는 당나라시대 시인의 시를 현대 작품의 그림 안에 쓰는 것이 비판조차 되지 않던 시대였다. 따라서 한글로 쓴 화제를 그림에 넣었다는 사실만으로도 새로운 한국화를 구현하기 위한 적극적인 시도였다.
그는 일찍부터 ‘실경과 민속적인 인물’로 뉴욕과 독일화단에 작품이 소개되었다. 당시 추상작가로 소개되는 그의 화면은 사실 한국적인 특성으로 이해된 국토성, 즉 실경이라는 현실인식과 함께 인물이 등장한다. 형상이 드러남으로써 그의 화면은 이야기 구조를 갖게 되는 것이다. 하지만 배경의 산수는 발묵이나 적묵을 통하여 감각적인 화면을 창출함으로써 추상도 구상도 아닌 영역을 넘나드는 다른 영역의 것으로 이끌었다.


(위) 이왈종, <생활 속에서-중도>, 1990, 종이에 아크릴물감과 먹, 130×146cm
(아래) 이왈종, <생활 속에서-중도>, 1992, 종이에 아크릴물감과 먹, 97×131cm



“지나친 관념화는 위험합니다. 작가 자신의 의식세계를 정확하게 표출하는 게 중요하지요.
그러자면 우선 전통을 깨야 합니다. 전통을 깬다는 것은 참정신을 지키자는 것이지요.”

–<84년에 건다 <3> 李曰鍾 한국화가>, 《매일경제》, 1984, 1, 9


그에게 있어 전통은 동시대가 공유하는 산수화의 기법이나 겸재에서 확인하는 진경의 정신과 같은 것을 의미한다. 그리하여 동시대 화가들이 전통을 찾아 나선 그 길목에서 그는 일탈逸脫이라는 선승禪僧의 수행 방식을 시도하였다. 그것은 바로 무엇에 얽매임 없음에 의해 획득하는 자유, 생명성을 향한 구도의 정신이었다. 전통을 구성하는 두 가지 요소 즉 정신과 형식 중에서는 그는 전통의 정신에 접근함으로써 전통이라는 ‘형식’을 깼다. 정신에 이르기 위하여 그는 일상을 주목하였다. 마치 원효대사의 무애행이 도를 향한 길의 하나인 것처럼 그는 시정市井에 주목하였다.
도시, 시장, 마을 등 자신이 거주하고 살아가는 삶의 근거지, 주변을 작품의 소재로 삼았다. 그것의 목적은 단순했다. ‘생동감과 활력이 넘치는 생활의 모습’을 나타내는 데 적합했기 때문이다. 그는 동시대 작가들과 구분되는 사실적 도시풍경을 보여주었다. 사실성이란 삶에 철저히 기반해야 하는 것이다. 그렇게 그는 삶을 성찰하는 도구로 철저히 주변에 산재한 ‘현실’을 드러냈다. 스스로 전통을 깸으로써 지켜낸 정신, 그것은 흔히 산수화라 일컬을 화면에서도 시도되었다. 산 아래 길이 기하학적 미감을 지닌 지그재그로 나 있거나 새가 되어 내려다보는 부감법을 통한 도시의 도로는 번진 먹으로 표현된 가로수의 싱그러움 속에서 장쾌해보인다. 하지만 들여다보면 그것은 도시에 놓인 다리와 그 주변의 삶의 모습을 주제로 한 <청명상하도>의 현대적 변용일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 곳곳에 집들이 있고 그 앞에 사람들이 일상을 영위한다. 길을 가는 사람들까지 풍경 안에 넣은 그의 시선은 현실을 보여주는 것이다.
‘기하학적 구도와 선을 사용하여 기존에 보지 못한 한국화의 구도를 보여주는’ 것은 그의 동시대성, 현실인식의 반영이다. 생생함이란 ‘같은 산수화지만 현대적인 주택과 고속도로, TV 안테나 등’으로 자신의 몸이 존재하고 의식이 경험하는 동시대성이었다. 가장 생생한 것은 경험이고 일상의 의식일 터이다. 그의 산수에는 동시대의 풍경과 그 안에 거주하는 이들의 일상과 실존의 공간이 존재했다.


이왈종, <생활 속에서>, 1988, 종이에 수묵 담채, 100×77cm



이왈종, <생활 속에서-중도>, 1994, 종이에 아크릴물감과 먹, 39×48cm


중도中道와 난만爛漫

산수에 기반한 수묵담채 성향의 작품에 기호가 도입되고 ‘부적’이라는 전통을 소재로 하여 그것의 물질감을 통로로 하여 정신적인 주제로 향한 것은 90년대 들어 두드러진 특성이었다. 제목 <생활 속에서>를 택하여 주변의 소소함과 단상을 그려내고 있던 그는 신문 독자투고란의 삽화를 그리게 되면서 본격적으로 화가의 정서가 아닌 일반시민, 시속의 ‘생활 속으로’ 들어가는 경험을 했다. 그는 자신의 일상에서의 감정이나 경험을 적어서 신문사에 보내온 이들의 삶을 간접 경험하였다. 그가 보여주는 작품의 ‘생활 속에서’ 일상이 다채롭고도 무궁무진한 이야기 구조를 갖는 것은 이러한 삶의 옴니버스적 형태를 많이 구가한 덕분일 것이다.

“제 작업은 일견 무질서하게 보입니다. 생성과 소멸을 반복적인 것으로 본다면 사물이 절대 고유의 존재성을 갖는다고 생각하기 어렵기 때문이죠. 모든 속박과 억압에서 벗어나 존재의 자유로움을 형상화시키는 것, 저는 그것을 동양철학 속에 있는 중도中道의 개념으로 생각합니다.”
–<속박 벗은 생명 화폭 가득히…>, 《동아일보》, 1990, 8, 31

그런데 이 시기 주목되는 작품으로는 80년대 말 그의 작품에 불쑥 아무렇지도 않은 듯 등장한 새로운 주제를 담은 화면이었다. 그것은 분명 성性을 다룬 <춘의도>이다. 대학 교수직을 수행하던 그는 작가의 삶과는 거리가 있는 답답한 말들로 가득한 회의에서 주머니 속 담배갑을 찾아내 그 자리에 끄적이던 데서 출발하였다고 한다. <춘의도>의 바탕은 일명 <춘화도>에 있다. 옥죄인 현실의 탈출구로서 짙은 성적 농담이나 우스갯소리가 수행하던 역할이 있었다. 그런 점에서 <춘의도>가 ‘답답한 회의’에서 출발하였다는 것은 설득력이 있다.
점잖은체하지만 속물이기 그지없는 이들에 대한 그 욕망의 저변을 들추어내는 것, 그것이 미술사를 통해 확인하는 성을 다룬 작품의 사회적 기능이다. 여기서 더 나아가 예술이란 은밀하여 드러나지 않는 것까지도 이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것들에 대한 사유임을, 생활이란 그 모든 것이 존재하는 것임을 그는 드러낸다. 엄숙함과 비속함의 중심잡기, 그것만큼이나 정신과 육체의 균형을 잡는 것도 중요한 일이다. 그의 작품에서 성은 그러한 중심점을 찾기 위한 추錘이다. 그러한 중심을 잡는 것을 우리는 중용이라 한다. 그의 생활 속에서의 단상들은 중용을 향하게 된 것이다.
일상과 상대편에 있는 것들, 점잖은체하는 것들의 저편에 존재하는 이글거리는 것들. 그것들이 함께한 화면. 그것이 바로 이왈종의 공간이다. 그 치열하고 겁이 나는 세상의 이치를 담은 그림들이 뜻밖에도 천연덕스럽고 정감이 가는 이유는 무엇일까. 천진난만天眞爛漫한 이미지의 무한한 반복에 열쇠가 있다. 인간을 무장해제 시키는 목어를 닮은 물고기, 고구려 고분벽화에 시원이 있는 주름산, 암벽화의 어둡지만 치졸해 보이는 형상, 민화에서나 봄직한 연꽃, 아이들 그림에서 볼 수 있는 초가집에서 연기 나는 모습 등이 산재해 있는 화면은 소박해보이지만 그것은 조직적이며 치밀한 구조체이다. 선과 점, 면과 허공이 빈틈없이 계산되어 화면을 구성한다. 그것은 그저 허허로움이 아니라 ‘이것이 있음에 저것이 있는’ 생성의 공간이다. 또한 반복적인 어법은 마치 민화가 무한한 복제 이미지를 만들어내듯 그의 화면은 도상이 반복되고 변주된다. 상형문자에 기반한 한자가 아닌 한글을 화제로 사용하여온 그이기에 작품에 글자가 형상으로, 또 단순한 기호로 보이는 형태들이 등장한 것은 우리 전통의 다른 맥락에서 새로움을 찾아낸 결과라고 보아야 할 것이다. 욕망의 전통언어, 그것은 민화에 만연한 기호들이다.


(위) 이왈종, <제주 생활의 중도>, 1999-2009, 장지 위에 혼합 재료, 193×253cm
(아래) 이왈종, <제주 생활의 중도>, 2010, 장지 위에 혼합 재료, 194×288cm



“예술이든 상업성이든 그런 개념에 개의치 않고 즐겁게 그렸고 그것으로 나는 만족할 수 있었다. 예술의 길이 한시적인 평가로 점쳐질 수 있는 것이 아니라고 나는 생각한다. 삶이 녹아드는 그림, 그래서 즐거움과 안식을 줄 수 있는 그림이면 그런대로 의미가 있지 않을까?”
-이왈종, <제주생활에서 중도의 삶>, 《LEE WAL CHONG》

엘레너 허트니(E. Heartney)는 그가 ‘한국사회에서 전통의 가치관과 옳은 것을 찾으라는 서구의 철학이 부딪치는 그 혼란 속에서 한 가지 길을 제시’한 것이라고 하였지만 제주도에서 찾은 그의 세계가 환상이나 이상만은 아님을 우리는 안다. 화가를 구속하는 학교라는 시스템을 떠나 제주도로 간 것은 건강을 지킬 수 있는 장소의 선택이었다. 이는 마치 예전 선비들이 세속을 떠나 자연에 은둔하는 것과 같은 것이다. 그 은둔은 한가함이 아니라 밭을 갈고 학문을 닦는 분주한 다른 삶의 모습이었던 것처럼 이왈종에게 제주도의 생활은 작품에 매진하는 치열한 공간이었다. 작가로서 수련은 자기를 담금질하는 것이다. 자기의 극한 지점을 찾아 스스로 놓아버리는 상태 그 무아의 상황을 꿈꾸는 것이다. 그래서 그의 작품은 산등성이 기와집 안에서도 남과 여가 한가하게 마주앉아 있지만 신경전으로 불꽃 튈 것임을 예견할 수 있고, 골프는 신체와 정신의 전투와 같기에 난데없는 탱크가 주위를 맴도는 것도 이해하는 것이다.
우화寓話의 모습을 띤 상징은 체험적 현실이다. 점잖은체하는 눈을 거두고 세상을 진솔하게 바라보면 모두가 전투가 아닌 곳이 없으며 그 또한 모두 별것 아니다. 그의 작품에서 발견하는 물고기, 연꽃, 호랑이, 물고기를 탄 신선, 탑, 산, 집, 꽃, 자동차, 텔레비전, 배, 말, 나무, 등산객, 골프 치는 사람, 앉아서 이야기하는 사람, 전화 받으라고 소리치는 사람 등등 그 기호들은 삶의 모습이자 욕망하는 것들이기도 하다. 그것들은 결코 평평하지 않은 화면 위에서 평면성으로 존재하는 모험을 한다. 그 아슬아슬한 균형. 바탕의 질감과 스며들 듯 존재하는 형태 사이의 감각적인 거리는 심리에 의해 보완된다. 깨알만큼 작은 형태들을 화면에서 찾아낼 수 있을 정도로 전통적이고도 웃음이 배나오는 친근한 형태를 민화적 요소라고 한다면, 그것은 양식으로서의 민화를 넘어선 의식의 세계로서의 민화일 것이다. 흥얼흥얼 여기저기 기웃대며 머리에 꽃이나 꽂는 것처럼 보이지만 실은 우주를 통찰하는 안광을 갈고 닦는, 그래서 새로운 세상을 꿈꾸는 삶을 관조하는 자세 말이다.


(왼쪽) 이왈종, <제주 생활의 중도>, 2014, 장지 위에 혼합 재료, 72.5×62.5cm
(오른쪽) 이왈종, <생활 속에서 중도-이명수폭포>, 1999, 장지 위에 혼합 재료, 42×32.5cm



참고자료
<제주의 화가 이왈종과 김예순 씨>, 《주간조선》 2141호, 2011. 1. 24.
<국제미술제 입선작품 전시>, 《동아일보》, 1965. 11. 6.
김종근, 칼럼 <이왈종 작가에 관한 궁금한 7가지>
<화단발전에의 자극제 국전 공개심사의 뜻과 문제점>, 《경향신문》, 1976. 4. 19.
<동양화畵題(화제)이래도 좋은가>, 《경향신문》, 1978. 4. 13.
<李永燦·李曰鍾 씨 뉴욕서 東洋畵展>, 《경향신문》, 1981. 6. 20.
<84년에 건다 <3> 李曰鍾 한국화가>, 《매일경제》, 1984. 1. 9.
인터뷰 <새 山水畵 모색하는 화가 李曰鍾 씨 “앞으로도 <생활 속에서>의 작업 계속할 생각”」, 《경향신문》, 1985. 9. 2.
조은정, <전통에 묻다>, 솔거미술관, 2019.
<가을美展 풍성 “作品 감상 눈을 키우자”>, 《동아일보》, 1985. 9. 17.
<착한 마음 진솔한 삶에 “뭉클” 本報 독자칼럼 <생활 속에서>
6개월…삽화 맡은 李曰鍾 씨>, 《동아일보》, 1990. 4. 10.
<속박 벗은 생명 화폭 가득히…>, 《동아일보》, 1990. 8. 31.
<美術界에 性 주제 造形 붐>, 《경향신문》, 1988. 3. 5.
이왈종, <제주생활에서 중도의 삶>, 《LEE WAL CHONG》,
Yon Art Publishung, 2005, p.231
엘레너 하트니, <색즉시공 공즉시색-이왈종 화백의 작품>,
《LEE WAL CHONG》, p.220-225



조은정 | 미술평론가(고려대학교 초빙교수)


이화여자대학교 대학원에서 미술사학을 전공하고 박사학위를 받았다.
구상조각평론상, 석남미술이론상을 수상하였다.
한국근현대미술사학회 회장, 인물미술사학회 회장을 역임하였고,
박수근미술상 운영위원장, 성북구립미술관 운영위원장 등으로 활동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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