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화와 한국현대미술작가 ⑩ – 이중섭 도상의 근원 ‘마음’

이중섭은 서양화를 전공했지만 많은 작품들에서 캔버스 대신 종이를 사용했다. 재료를 구하기가 어려웠을 수도 있지만 애초에 종이를 선호했을 가능성도 있다. 그렇다면 그는 많은 화가들이 고민했던 서양화와 동양화의 조우遭遇를 재료에서부터 시도했다고 할 수 있다. 재료에서나 소재에서 이중섭은 당대에 이미 현재진행형 작가였던 것이다.


전후 한국화단에서 이중섭(李仲燮, 1916-1956)은 여전히 신화화와 전쟁 중이다. 그의 작품에 대한 관심은 사후에 증대된 것임은 틀림없지만, 그렇다고 생전에 알려지지 않은 작가도 아니었다. 그의 사랑과 질병, 죽음이라는 불행으로 귀결된 에피소드들은 이중섭 회화를 단순화하고 개인을 신화화함으로써 작품에 대한 적절한 미술사적 평가를 내리는 것을 저해한다.
그의 작품에 대한 레조네가 작성중이고, 탄생 100주년을 맞아 작품에 대한 연구와 관심이 높아져 다양한 측면에서 연구가 진행되고 있다. 그러한 와중에도 이중섭의 작품은 미학적 층위나 미술사적 분석에 앞서, 마음을 움직이는 힘에 의해 감상되는 작품임에 분명하다.
아주 작은 크기의 작품마저 이른바 ‘공간을 잡아먹는’ 힘으로 미술관 벽을 채우는 것을 종종 목격하기 때문이다. 이중섭 작품을 대표하는 <소나 아이들> 그리고 <천도복숭아> 이외에도 우리는 이중섭 작품의 이미지를 나름대로 가지고 있다. 누구에게나 ‘친근함’으로 다가오는 이중섭 작품의 힘은 어디에 있을까?

화가의 길

이중섭은 평안남도 평원군의 유복한 가정에서 태어났다. 아버지가 일찍 돌아가신 후, 그는 어머니와 형, 누이의 극진한 사랑을 받고 자랐다. 그는 평양의 외가로 가서 교육받았는데 외할아버가 유력한 기업인이었기에 겨울이면 스케이트를 타고, 실컷 그림도 그리는 생활을 할 수 있었다. 그가 보통학교 시절에 만난 친구 김병기의 아버지 김찬영은 고희동, 김관호에 이어 동경미술학교에서 서양화를 전공하고 돌아온 세 번째 화가였다. 이중섭은 김찬영의 집에서 그림에 대한 눈을 틔웠다. 그리고 당시 고구려고분벽화를 발굴하고 강서대묘벽화를 모사한 그림이 전시된 평양부립박물관을 드나들었다.
평양에서 상급학교 진학을 위해 시험을 봤지만 실패하자 평안북도 정주에 있는 오산고등보통학교로 진학하였다. 미술과 스포츠로 시간을 보내던 그가 2학년이 되었을 때 학교에는 3.1만세운동 등 독립운동 기운이 일기 시작했다. 이때 미국 예일대학에서 미술을 전공하고 파리를 돌아 귀국한 임용련(任用璉, 1901-?)이 이중섭의 학교에 영어와 미술을 가르치는 교사로 부임하였다.
임용련과 결혼한 백남순(白南舜, 1904-1997)도 일본에서 공부하고 돌아와 다시 파리로 갔다가 결혼 후 귀국한 터였기에 동행하였다. 서구미술의 본토에서 공부한 이들에게 감수성 높은 소년시절의 이중섭이 영향을 받았음은 의심할 바 없다. 그리하여 1932년 9월 제3회 전조선남녀학생작품전람회에 출품하여 입선할 수 있었다. 내로라하는 학생들이 집중한 전람회에서 시골의 학교에서 그림을 그리던 이가 입선한다는 것은 대단한 일이었다. 졸업기념사진첩 장정을 맡은 그는 일본에서 불덩이가 한반도로 날아드는 도안을 하여 경찰서까지 오가는 의기 넘치는 청년으로 자라났다.
일본의 제국미술학교로 입학한 그는 이어 분카학원으로 옮겼고 자유미술협회전에서 입선하는 등 화가로서 활발한 활동을 시작하였다. 졸업 후 원산으로 돌아와 그림 그리며 지내던 그에게 일본에서 데이트를 하던 마사코가 찾아왔다. 두 사람은 결혼을 했고 한국인과 일본인이라는 국적을 넘어서 가정을 이루었다. 광복과 함께 원산과 서울을 오가며 분주히 활동하던 그때 첫아들을 낳았지만 한 해를 넘기지 못하고 사망하였다.
이때 아이와 함께 하라고 그려서 넣어준 그림에 대해 문학가 구상선생은 전하고 있다.
공산당 치하에서 지주 집안은 고초를 겪을 수밖에 없었다. 그는 조선미술동맹 원산지부 회화부원으로 편입되어 활동하였다. 하지만 이중섭의 화풍은 사실적이며 낭만적인 선전미술과는 거리가 있었다. 신분도 지주계급, 성격도 자유주의자, 부인도 일본인인 탓에 그는 광복 후 북한 땅에서 녹록치 않은 생활을 하였다. 하지만 이후 겪을 어려움에는 비교할 수 없었다. 집안의 가장인 형이 공산당에 끌려가 고문 끝에 사망하고 전쟁이 발발하자 그는 조카와 아들들, 부인과 함께 화물선을 타고 남쪽으로 향했다. 3일 동안의 항해 끝에 부산에 이르렀지만 곧바로 피난민을 제주도로 보내려는 당국의 뜻에 따랐다. 전쟁이 오래 될 것으로 예상한 정부가 제주도로 사람들을 대피시키고 있었기 때문이다. 1951년 봄, 그는 제주항에서부터 가족을 이끌고 걸어서 서귀포에 다다랐다.
그는 종군화가단으로서 문총구국대 경남지부 회원이었다. 그것이 월남한 그의 유일한 신분증이기도 했다. 그는 남의 집 방 한 칸에서 가족과 함께 게를 잡아먹으며 옹색한 생활을 이어갔다. 하지만 ‘즐비하게 그림을 그려 놓기도’ 할 정도로 그림만을 그리며 제주도 생활을 영위했다. 극심한 생활고에 시달리던 그는 가족들을 일본으로 보낸 뒤 제주를 떠나 도자기회사에서 그림을 그리기도 하고, 통영에서 전시를 하기도 하는 등 화가로서 생계를 유지했다. 가장의 역할을 할 꿈을 꾸었지만, 성공적인 전시는 커녕 금전적 어려움과 병마에 시달리다가 생을 마쳤음은 우리 모두가 아는 일이다.

문양과 반복되는 이미지

피카소나 샤갈과 같은 거장의 반열에서 도상을 이해하게 하는 미술사적 접근은 그의 작품이 쉽게 나타난 어떤 것이 아님을 확인시킨다. 하지만 아이들이 있고 천도복숭아가 있는 자그마한 그림들은 먼저 간 그의 어린 아들에 대한 일화와 더불어 개인화한다. 하지만 최근에 연구되기 시작한 엽서 그림 같은 것에서 그의 아들이 태어나기 전부터 나타나는 어린아이들은 친구이자 동료화가인 김병기가 전하는 것처럼 화가로서의 단련을 통해 나타난 도상이다.

“중섭은 문화학원 당시 방학이면 귀국해 박물관을 다니며 스케치를 하곤 했는데 군동화는 그 직후부터 나타나기 시작했습니다. 포류수금당아 대접이나 진사당아포도문병에 나오는 동자상의 해학이 담긴 데포르메와 중섭이 그리는 동자상에는 유사성이 있습니다. 이경성이 지적한 청자상감진사포도문주자의 동자상과도 닮은 점이 있습니다. 중섭은 박물관 스케치를 통해 전통예술작품이나 민예품에 깃들어 있는 회화성을 우리의 전통 속에서 끄집어내었던 것입니다.”(강원희 지음, 이중섭, pp.33-34.)

김병기는 이중섭의 그림에 나타나는 어린아이가 전통에서 온 것이라고 하였다. 그리고 도자기와의 연계성으로 설명하고 있다. 그가 이중섭의 어린아이 도상을 도자기의 문양에 나타나는 동자상과 연계한 것은 박물관에서 이중섭이 전통을 공부하였다는 점에서 찾은 것이다. 그리고 이미 알려진 것처럼 고구려고분벽화의 회화에서 배워온 것들 또한 전통과 연계하여 이해할 수 있다. 그런데 도자기의 문양과 고분벽화의 그림들이 갖는 공통점은 무엇일까? 일반화할 수 없겠지만 그것은 아마도 ‘고졸古拙’이 아닐까? 순수한 대상의 오래된 표현인 고졸의 미를 이중섭은 세련된 화면에서 슥슥 펼쳐냈던 것이다. 게다가 서양화가인 그가 캔버스가 아닌 종이를 즐겨 사용하였다는 점도 전통에 대해 모더니스트 이중섭이 깊은 관심을 지니고 있었음을 증명한다.
유화물감을 사용하면 대개 캔버스 혹은 천에다 그리는 것이 일반적인데 이중섭의 많은 작품은 마치 드로잉처럼 종이를 사용하고 있다. 종이를 사용하는 것은 재료의 부족을 의미할 수도 있지만, 양질의 종이인 경우 그런 것만도 아니다. 즉 애초에 종이를 선호하였을 가능성이 높고, 그는 당대 화가들이 마주했던 서양화와 동양화의 조우遭遇를 재료에서 시도했다고 판단할 수 있다. 재료에서, 소재에서 이중섭은 당대의 고민을 하였던 현재진행형 작가였던 것이다.
미학자 김윤수는 이중섭이 표현주의에 속하지만 한국적인 것을 찾아내고 애정에서 나온 것이어서 서구의 표현주의와 다르다고 하였다. 정병관은 《낙관과 비관의 이중적 세계관》을 통해서 “이중섭의 그림은 본질적으로 상상력에 의해 그려진 그림들이며, 상징적인 작품이나 표현적인 작품이 모두 자연주의를 떠났을 때 자유롭고 활달하며 힘이 있는 선과 율동으로 통일성을 얻게 된다”고 하였다. 그의 작품에서 ‘모호한’ 형태가 유화의 붓질에 의해서 나타난 결과임을 분석해내었다.
그의 작품에 사용하는 모든 소재가 사실 상징주의적 해석이 가능함도 정병관은 지적하였는데, 이는 소를 열심히 그렸다는 사실에 근거한 대상의 묘사라는 생각들을 떨쳐내게 하는 견해이다. 즉 그의 작품에 등장하는 모든 소재는 눈앞의 것이자 에피소드의 대상이지만 그것을 작품화한 것은 상징적 의미가 있기 때문인 것이다.
그래서 그의 작품에 등장하는 어린아이들은 죽음의 길을 떠난 아들의 동무라는 사실적 세계에서부터 저승을 함께하는 고분벽화의 신선계로 이른다. 복숭아와 함께 노는 아이들은 그것의 상징성으로 인해 아들의 친구 또는 아들들에서부터 그림 속 아이들 즉 도자기 속 문양의 아이들과 동급이 되는 것이다. 그 무한한 반복은 백동자의 이미지가 무한한 변용으로 이루어지는 것처럼 내용화하고 장식화함으로써 변주된다. 닭을 그린 그림은 신혼시절 닭을 치던 기억에서부터 분청사기 도자기 뚜껑의 닭으로, 그리고 부부로 의미가 확장된다. 그의 이미지, 대상들은 그렇게 실체에서 상징으로 변화하는 것이다.

화가에 대한 기억

이중섭이 서거하자 조선일보는 “그 탁발卓拔한 기법으로 우리 화단의 이채를 이루던 이중섭 씨는 작년 봄 이래 숙환 위장병으로 신음 중이었는데 병세가 악화하여 지난 6일 오후 11시 45분 시내 서대문 적십자병원에서 마흔한 살을 일기로 별세하였다”는 보도를 내었다. 많은 화가들이 죽어가지만 그의 부고를 알리는 것이었다. 그리고 고은은 이 외롭게 죽어간 화가의 장례식에서만은 병원 가득히 사람이 들어차서 그의 죽음을 애통해했다고 적고 있다. 박고석은 “너만이 착하고 아름답고 너만이 좋은 그림을 그린 것이 우리들에게 무슨 소용이 있단 말이냐. 너같이 너만이 깨끗하고 아름답게 살려는 놈은 죽어야 마땅해”라며 애간장 끓는 슬픔을 전했다.
생전의 그는 화가로서 일찍부터 인정받고 있었음을 알 수 있는 일화 중 한국문화원장으로 부임한 맥타가트와 관련된 일화가 있다. 그는 한국일보에 기고한 ‘위대한 창의성의 소유자’란 글에서 자신이 이중섭의 작품을 미국에 소개하고 또 작품이 미국의 유수 미술관에 소장된 과정에 대해 말하였다. 그는 이중섭 그림이 위대하다고 생각하는 이유는 그의 회화작품이 ‘완전히 한국적이라고 할 그의 위대한 정신과 아울러 전체 문화세계 유산의 일부를 반영시키고 있다’는 점 때문이라고 하였다. 그가 보기에 이중섭은 ‘한국의 정신적 전통+세계 미술사의 반영’으로 들기에 좋은 작가라는 것이다. 또한 소재를 적재적소에 정확히 이용하고 있는 점이 ‘모든 한국 작가가 존경하는 점’이라고 밝히고 있다. 뉴욕현대미술관에 작품이 소장된 최초의 한국인으로 “한국은 고인을 자랑할 수 있으리라”고 하였다.
맥타가트는 이전에도 외국인에게 수집을 권하는 글을 신문에 게재하였지만 그와의 만남에서 소 그림을 보고 스페인의 투우를 연상한다고 하여서 이중섭을 혼란에 빠트리기도 하였다. 전하는 말에 이중섭은 그 말에 심한 상처를 받았고 분노하였으며 이후로도 맥타가트를 만나고 싶지 않아했을 뿐만 아니라 그림도 팔지 않겠다고 하였다는 것이다. 하지만 외국인의 눈에 이중섭의 그림은 동시대 다른 한국 작가들과 매우 다른 점이 있는 것이었다. 그의 사망 뒤 1957년 프세티가 내한하여 미국에 전시할 선정작품 114점 중에서 이중섭의 작품은 2점이 포함되어 있었다.
이중섭의 개인전이 있었던 1955년, 이경성은 가장 좋은 작품으로서 국제미술전에 출품할 정도의 작품 중 이중섭의 <흰 소>를 들었다. 그리고 오늘날 우리는 표현주의 회화적인 소와 간략한 선으로 그어진 어린아이들 그리고 탐스런 복숭아와 고분벽화에서 만나는 겹겹이 색띠로 이루어진 산과 물결을 만난다. 그리고 어느 그림에나 드리워진 미소를 띄게 하는 순진한 몸짓의 인물들을 만나고 그 신선한 마음의 향기를 맡는다. 세련된 모더니스트 이중섭의 회화에서 만나는 것은 그의 마음임을 확인하는 것이다.


글 조은정(미술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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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간민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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