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화와 한국현대미술작가⑥ – 이응노 문자, 상징과 의미를 넘어 이른 추상의 자유

민화와 한국현대미술작가⑥
이응노 문자, 상징과 의미를 넘어 이른 추상의 자유

지나고 보면 역사와 함께하지 않은 삶은 없겠지만 유독 더 역사의 소용돌이 속에 위치하는 사람이 있다. 고암顧菴 이응노李應魯(1904-1989)가 바로 그러한 사람이다. 그가 겪은 시대는 폭력적이었고도 파렴치했음에도 화가의 품위를 잃지 않은 그는 동시대인 모두에게 역경을 이겨나가는 예술가의 혼을 보여주었다.


이응노 화백은 안영교도소에서 죄수들이 밥풀을 이겨서 장기짝을 만드는 것을 ë³´ê³  한 방에 있는 수인(囚人)들이 남긴 밥이나 심부름하는 사람을 통해 얻은 밥찌꺼기를 이겨서 작품을 제작했노라고 설명을 해준다. 그는 희귀하게만 보이는 ê·¸ 부조가 밥풀로 제작되기는 했었으나 방부제를 넣었기 때문에 수명은 만년까지도 염려 없을 것이라고 말하면서 이제 기름에 절이고 채색을 해서 빠리 화단에 이것을 내놓으면 전무한 마띠엘로 화제가 될 것이라고 흐뭇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 – 「새 화풍옥중작 3백점」, 『동아일보』, 1969. 3. 15.-이른바 동백림사건에 연루되어 3년형을 받고 복역중 감옥에서 밥풀로 짓이겨 만든 작품에 대한 이야기다. 크기가 작지만 조형미가 뛰어난 콜라주식 조각은 사식을 넣어준 나무도시락을 뜯어서 만든 것이고 밥풀을 짓이겨 글루텐이 된 물질로 만든 셈이었다. 김칫국물로 구성된 드로잉, 고추장으로 채색된 한 작품들은 그의 창작의욕은 어떤 상태에서건 꺾일 수 없는 것이었음을 증언한다. 물론 감옥에서 3ë°± 점 이상의 작품을 제작한 ê·¸ 엄청난 에너지도.


수묵과 문자 그림의 만남

1904년 이응노는 낙향한 부친의 집성촌 홍성에서 태어났다. 선비적 세계관의 기초인 가학을 익히며 성장하던 고향은 거세지는 일제의 수탈과 3.1만세운동의 생생함으로 가득한 공간이었다. 청백리 잠와공의 후손으로서 대대로 동네 훈장을 맡은 선비의 의기와 총명함을 이어 받았으나 근대화의 길목에서 전통교육기관인 서당에는 학생들이 줄기 마련이었다. 집안은 가난했으나 선비가 일을 할 수는 없고 양반의 자제 또한 일을 하면 안 된다는 고루한 생각을 아버지 몰래 떨치고 밭을 매던 그의 마음에는 그림이 자라고 있었다. 아름다운 자연으로 이루어진 고향마을, 그러나 그림을 그리겠다는 그에게 돌아오는 것은 결코 지지가 아닌 ‘방해’였다. 그러나 항상 마음으로, 손가락으로 그리고 나뭇가지나 돌을 쥐고 끊임없이 그리고 또 그리곤 했던 그에게 기회가 왔다.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던 중에 마침 마을에 산제당을 새로 지어서 그림을 그릴 사람을 찾고 있는데, 그려보지 않겠느냐고 제의를 해왔습니다. 생각지도 않던 행운이었어요. 산제당이란 것은 마을을 지키는 신을 모신 곳이랍니다. 나는 어릴 적부터 가까운 절간에 놀러가 그 곳에 그려져 있는 그림을 보고 했기 때문에 잘 알고 있었지요. 절에는 탱화를 그리는 스님 밑에 ‘단청’을 그리는 화공이 있어서 틈틈이 산신이랑 선녀 그림 같은 것을 그리기도 했어요. 그 마을에서 세 끼 먹여주고 일당 1원에 그림을 그리지 않겠느냐는 겁니다. 당시 1원은 큰돈이었지요. 건장한 남자라도 겨우 20~30전을 벌 정도였으니까요. 그러니 하루에 1원이라면 굉장한 거지요. 다음날 청양으로 가서 그림 그릴 화폭과 물감 등을 사다가 곧장 여관에 틀어박히게 되었습니다.”

그에게 수입을 가져다 준 첫 그림은 바로 민중이 필요로 하는 그림, 민화였던 것이다. 그는 훗날 이 경험을 ‘실용적인 그림’으로 칭하면서 선녀, 호랑이 등을 그린 과정에 대해 회고하였다.

“생활을 위해서 할 수 없이 실용적인 그림을 그리게 되는데 말입니다. 내가 화가로서의 첫 작업을 한 것도 바로 선인과 선녀와 호랑이가 온 그림을 산제당에 그린 것이랍니다. 어쨌든 온 힘을 다해서 그렸더니 마을사람들이 ‘잘 그렸네. 잘 그렸네’ 하면서 칭찬해 주었고, 난 그동안 의 일당으로 5원을 받았지요. 그러자 이번에는 주재소의 일본인 순사가 찾아와 호랑이 그림을 그려달라고 하더군요. 1원을 받고 그려주었습니다. 그렇게 해서 6원이라는 돈이 수중에 들어왔어요. 그 6원으로 운동화와 기차표를 사고 나니 1원이 남더군요. 그때 처음으로 기차란 걸 보게 되었어요.”

민화를 그려서 돈을 벌어 서울에 온 그가 상여집에서 한 달 정도 일하다가 달려간 곳은 묵죽화의 대가 해강 김규진의 집이었다. 수십 번의 방문을 통한 간곡함으로 간신히 식객으로 묵으며 김규진에게 조언을 들으며 조선미술전람회에 입선을 한 뒤로는 번번이 실패하였다. 그렇게 김규진의 집에서 허드렛일을 하다가 표구집에서 일을 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이 또한 젊은이의 일이 아니라고 생각하고 간판집을 찾아가 글씨 쓰는 일을 하기 시작했다. 글씨 쓰는 일과 간판 그림을 그리던 그는 서양배우 사진 같은 것을 보면서 서양화 식으로 음영을 그려 넣기도 했다. 그는 이내 30~40명의 칠쟁이를 거느리는 주인이 되었다.
우리는 그의 눈물겨운 고생담에서 장례식의 장신구를 만드는 일, 표구, 글씨에 테두리를 치는 일 등의 과정이 그의 작품세계 전반과 연결되어 있음을 본다. 밥풀로 짓이겨 만든 입체는 풀의 성질을 알아야 하는것일 게고, 평면에 글씨를 조형화하는 그의 문자 세계는 키치적 간판 그리기에서 출발하지 않았다고 딱히 주장하기도 어렵기 때문이다. 그의 「문자도」는 대중의 취향에 걸맞은 단순화한 이미지에서 시작하였고, 감각적 키치의 세계에서 성장하였던 것이다. 하지만 그는 사대부 집안 출신이었고, 깊은 곳에 자리한 묵희墨戱의 관념은 자유로운 조형의식으로 자라났을 것이다. 사대부적 세계관을 기반으로 한 묵죽화가 이응노가 먹의 세계를 뚫고 세계를 구축할 수 있던 것은 이러한 경험적 세계의 결과이다.


기호에서 상징을 넘어 이미지로

이응노의 그림을 말할 때면 번번이 조선미술전람회에서 낙선하던 그가 특선하게 된 사연, 비바람 속의 대나무 이야기가 나온다. 대나무를 열심히 그렸지만 번번이 낙선하였고, 그림가게에서도 하나도 팔리지 않던 그의 그림이 특선에 이르게 된 것은 어느 날 우연히 대나무 숲을 지나치다가 비바람에 술렁이는 대나무를 본 때문이었다. ‘깊은 인상’으로 단숨에 그린 그림이 특선에 이르게 됨으로써 그는 ‘다른 사람의 작품이나 전통을 모방하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 애써서 찾아내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것을 배웠다고 했다.
전통을 화두로 하여 새로움을 추구하는 온고지신의 정신은 자의든 타의든 작가들의 운명이 다. 특히 한국 근대미술에서 전통은 동아시아의 유구한 정신으로서 서書와 화畵는 일익을 담당해왔다. 전통은 극복의 대상이자 자양분일진대 그것을 어떻게 극복하느냐보다는 계승하는가에 초점이 맞추어졌던 것은 범세계로 나아가기 위한 일본의 야망을 위하여 일본과 한국의 공통적인 틀을 찾던 시기였던 때문이다. 자연히 전통은 과거의 영화라는 모습으로 동아시아가 공동의 관념으로 구성할 수 있는 시기였으므로 전통의 계승은 은연중 강요된 미덕이었다. 헌데 이응노는 고답의 틀을 깨고 새로움에 다가서는 자연만물의 창조라는 개념에 이른 것이었고, 그것이 바로 바람에 흩날려 새로운 모습으로 다가온 대나무의 인상을 기록한 화면이었던 것이다.
그의 문자도가 갖는 특징은, 비록 남관과의 원조를 둘러싼 논쟁에서 심기가 불편했을지라도, 이미지를 대한 이들 모두에게 새로운 감각을 불러일으켰음에 틀림없다. 그것은 바로 단순히 그림을 대신한 형상으로서 문자가 아닌, 기호화한 뜻을 넘어선 조형성이 구축되어 있는 것이다.

“끝없이 주술적 매력을 불러일으켜 우리를 매혹시키고 사로잡는다. 여기에는 아름다운 이외의 어떤 것도 없다. 이 극동의 예술 거장은 기호나 기호 비슷한 것에 대하여 풍부하고 깊은 지식을 갖고 있으며 그것이 우리를 더욱 열광케 한다.”

미셸 타피에의 말은 단지 칭찬을 위한 말만이 아니었음을 우리는 그의 문자도에서 확인한다. 그것은 때론 비문碑文처럼 견고하지만 민화의 경쾌하고도 농염한 뜻을 드러내는 방식을 취한다. 글자 그대로 들어있는 의미를 이미지로 현대화한 장소, 그것이 바로 이응노 문자도의 위치이다.


평면의 회화, 입체적 삶의 인식

습작기 이응노의 그림은 사군자 이외에 풍경, 산수, 인물, 화조 등 망라하여 기능을 일신하는 데 힘을 쏟고 있음을 볼 수 있다. 이미 중견작가가 된 그는 〈도불전渡佛展〉에서 그 중에서도 문자를 기반으로 한 그의 작품은 파리로 떠나기 전부터 의미와 상징 그리고 조형의 자유로운 세계의 경계를 넘나들고 있었다. 글자의 의미를 그림으로 조형화하는 방식은 전통에 기반하여 두 가지 길로 접근할 수 있다. 하나는 상층의 유교적 세계관과 다른 하나는 민화 문자도의 세계관이다.
종이에 먹으로 그린 〈수레 끄는 사람〉(1955년)은 화면 우측에 짐을 실은 수레의 일부가 보이고 머리에는 모자를 쓰고 눈이 튀어나올 듯이 허리를 굽혀 힘을 쓰는 인물이 먹의 중첩과 갈필을 통해 형태를 드러낸다. 그리고 조금이라도 한자문화권에서 글씨를 배운 사람이라면 수레를 끄는 인간의 형태가 종정문鐘鼎文에서 볼 법한 문자 ‘노奴’와 닮아 있음을 알아차리는 것은 어렵지 않을 것이다. 힘들게 일하는 사람들, 그 마음의 헤아림이 글씨에 담겨 있음을, 문자의 의미가 상징을 넘어선 지점에 있음을 본다. 한편 같은 문자에서 시작한 경우라도 주역의 괘를 나타내는 일련의 시리즈는 조형성이 두드러진다. 1974년 스페인 왕실의 주문으로 출판을 목적으로 한 프로젝트였으나 실현되지는 못했던 그림들이다. 서양인에게 동양의 자연에 대한 이치를 설명하는 목적에 더하여 작가의 작품세계를 인지시키기 위한 조형성을 두었을 터인데, 글자를 이루는 획들은 인간의 모습을 띠고 있다.

“내가 그림을 시작한 것은 벌써 70년인데 되돌아보니, 소년기 때 자유자재로 했던 시절을 제하고 약 10년을 주기로 하여 6번으로 나누어져 변화하였음을 발견하게 된다. 20대를 우리나라 전통의 동양화와 서예적 기법을
기초로 한 모방 시기라 한다면, 30대는 자연물체의 사실주의적 탐구시대, 40대는 반추상적 표현이라고 할 수 있는 자연사실에 대한사의적寫意的 표현, 그리고 50대는 구라파로 와서 추상화가 시작된다. 그로부터 오늘까지를 다시 나누어 10년을 사의적 추상이라면 후기 10년간을 서예적 추상이라고 이름지어 보겠다.”

그에게 있어 서예적 추상이란 필의를 담은 그림들이 추상에 이른다는 뜻이다. 〈수지비水地比〉(1974년)는 두 사
람의 모습으로 자연의 진의를 나타내는데 해학적인 느낌마저 든다. 형태가 사람으로 인지되는 순간 두 사람의 긴장감이 느껴지기 때문이다. 〈천화동인天火同人〉 또한 인간의 일상과 내면의 비루함과 욕망을 동시에 느끼게 하는 것은 문자에 형상을 부여한 상형문자의 기원에서부터 민화적 발상의 결합이라 할 것이다. 이응노의 민족적인 것의 표현에 대한 열망은 경계가 없었다. 사대부가 출신이 장례에 사용하는 물건을 만드는 일을 하고, 표구를 하고 간판을 그리고 신문보급소를 차리고 여관을 운영했었으니 한학에 더하여 그는 기층문화에 대한 충분한 이해를 지니고 있었던 때문이다.
1941년에 금강산 여행을 하며 해금강에 이르러 그가 나타낸 것은 물풀이 우거진 물 위에 배를 뒤집으며 위로 뛰어
오르는 물고기 한 마리였다. 배가 볼록한 복어 같기도 하고, 짚단에 얹어져 삭혀지는 생선 같기도 한 형태는 동글한 눈과 수염에 이르면 등용문의 잉어가 떠오르기도 하지만, 밥 잘 먹고 배 두드리는 작가의 모습 같기도 하다. 은유와 무한한 상상력의 세계는 소박하기만 하고 그것은 해학과 낭만이 공존하는 세계이다. 1946년에 그린 〈백일홍〉의화제는 화조화일 터이나 굵은 외곽선 안에 단순한 색채로 처리되어 평면적이다. 전통 화조화에서는 택하지 않는 기법과 꽃을 편화하는 방식은 자유로움의 상징이자 소박함의 모습이다. 문인화적인 닭이나 물고기의 자유로움은 색채를 입어 더욱 자유로워졌고, 산수는 투박하고도 자유로운 선을 얻어 흩어진 나뭇가지처럼 자연의 원리를 드러낸
다. 이 자유롭고도 근원적인 형태와 색채는 민화의 요소를 차용한 것임은 당연하다.


글 조은정(미술평론가/미술사학 박사)

저자에 관하여

월간 민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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