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화와 괴석의 기발한 만남

민화에 등장하는 괴석은 문인화의 괴석과 다르다. 민화에서 괴석은 장수를 상징한다. 조선의 서민들은 탈세속적인 선비의 절개를 상징하던 돌에 자유롭고 기발한 상상력을 불어넣었다. 이러한 시도는 인간의 가장 근원적인 행복을 추구하기 위해서 오늘날까지도 계속되고 있다. 다양한 상징과 모습으로 표현된 괴석에 대해 살펴본다.


민화에서 가장 많이 그려지는 그림은 쌍쌍의 새와 나비 등이 각양각색의 꽃과 함께 있는 화조도이다. 여기에 그림 전체의 균형과 안정감을 더하는 화재畫材가 있는데, 배경으로 그려지는 바위와 괴석이다. 괴석을 별도로 다루는 것은 조선 후기 문인화에서 시작된 괴석이 민화에 이르러 화려한 색채로 절정에 이르렀기 때문이다. 문인화에서 단독 소재로 그려진 괴석은 민화에서는 다른 소재와 결합하여 그림 전체에 생기를 불어 넣는 중심 역할을 하고 있다. 고독을 고집하던 괴석이 다른 소재와 어우러져 민중의 삶 속에서 함축된 의미를 전달하게 된 것이다. 그것도 꽃과 새, 나비의 배경으로써 말이다.

괴석의 곧은 덕을 칭송하다

괴석怪石은 괴이한 모양의 돌을 뜻한다. 오랜 세월의 풍화와 침식작용으로 생겨난 기기묘묘한 형상은 태고의 신비로움을 그대로 간직한 항구불변의 존재이며, 천지의 온갖 신령한 기운을 부여받은 대상물이었다. 고려시대 말 이곡은 “암석은 견고하고 불변하여 천지와 함께 종식되는 것, 두터운 땅에 우뚝 박히고 위엄 있게 솟아서 진압하며, 만 길의 높이에 서서 흔들어 움직일 수 없는 것, 깊은 땅에 깊숙이 잠겨서 아무도 침노하거나 제압할 수 없는 존재”로 암석의 영구불변함을 칭송했다. 조선시대 세조 때의 강희안은 그의 저서 《양화소록養花小錄》에서 “석石은 굳고 곧은 덕을 가지고 있어서 참으로 군자의 벗이 됨에 마땅하다”라며 군자의 품성을 돌에 비유했다. 박인효의 가사에도 “할 말도 없는 바위 사귈 일도 없건마는 고모진태古貌眞態(옛 모습대로의 참된 자태)를 벗 삼아 앉았으니 세상에 익자삼우益者三友를 사귈 줄 모르노라”는 내용이 나온다. 세상에 바위처럼 아무 말도 없으면서 친밀하고 믿음직한 것이 없다는 의미다.

군자의 품성을 표현한 괴석도

괴석도怪石圖는 조선 후기 청나라 문물이 유입되면서 문인화가들 사이에 유행하기 시작했다. 괴석이 지닌 불변성은 이상적인 군자의 모습에 부합되어 문인들 사이에서 사군자와 더불어 회화의 소재로 즐겨 그리게 됐다. 정원의 장식물로 사용한 괴석은 사군자나 화훼와 함께 그려졌다. 이후 점차 장수를 기원하는 축수도祝壽圖 성격의 단독 괴석도로 변모했다. 명분과 의리를 중시한 조선시대 선비들은 노년에 탈세속적인 삶을 영위하고자 했다. 권력과 명예를 뒤로 하고 자연의 축소판인 괴석을 가까이 두고 감상하며 즐겼다. 최립은 《간이집簡易集》에서 “내가 이 괴석을 얻은 뒤로는 화산 쪽에 머리를 돌려 앉지 않았다”며 괴석이 중국의 명산보다 더 아름답다고 자랑했다.
황현은 《매천집梅泉集》에서 “늙은이의 반생이 달리 좋을 게 없다 보니 한번 괴석을 만난 뒤로는 보배처럼 생각했네”라며 노경老境에 들어 괴석의 아름다움과 가치를 발견한 기쁨을 노래했다.
특히 괴석도는 19세기 추사 김정희를 비롯한 문인들에 의해 본격적으로 제작됐다. 추사는 《완당전집阮堂全集》에서 “반이랑 구름 섬돌에 뭇 돌이 무리 지어 머리마다 주름지고 구멍마다 영롱하다”고 하여 괴석이 가진 산수의 운치를 노래했다. 문인들은 천 년 운무雲霧속에서 빚어진 괴석의 기이한 형태를 보고 태고의 모습을 떠올렸을 것이고, 영적인 기운이 서린 괴석의 구멍에서 선계동천仙界洞天의 그윽함을 보았을 것이다. 그들에게 괴석은 명산의 축소판이자 신선의 세계였고, 수신修身과 격물치지格物致知의 대상이었을 것이다. 초기에는 수직으로 솟아 있는 구멍 뚫린 각진 괴석도 화풍이 유행했으나 점차 나름의 해석을 거쳐 개성적 화풍을 형성했다.

장수와 부귀영화를 누리라

괴석이 화조나 화접, 화훼와 함께 한 화면에 그려지기 시작한 것은 조선 말기에 나타난 현상이다. 민화에서 암석은 장수를 상징한다. 십장생도에 나오는 바위뿐 아니라 화조도의 배경이 되는 기이한 형상의 괴석 역시 장수를 의미한다. 이전에 그려진 민화에 괴석이 추가되면서 상징성이 확장됐다. 예를 들어 모란도는 부귀영화를 의미하지만, 괴석을 같이 그린 괴석모란도는 ‘장수하면서 부귀영화를 누리라’는 상징적 의미가 담긴 그림으로 해석할 수 있다.
유교를 정치이념으로 삼았던 조선시대 선비들은 부귀富貴를 경계하여 선비로서의 올곧은 절개와 드높은 기상을 추구했다. 《논어》에 “거친 밥을 먹고 물을 마시며 팔을 베고 누워도 즐거움 또한 그 가운데 있으니 의롭지 못하고 부귀한 것은 나에게 있어서 뜬구름과 같으니라”라는 말이 있다. 이것은 조선의 문인들이 공자의 가르침을 가슴에 새겨 항상 실천하고자 한 경구였다. 선비 주도의 사회 풍조에서 부귀영화를 상징하는 모란을 문인화의 소재로 받아들이기는 어려웠을 것이다. 그러나 19세기 민화가 유행하면서 모란은 왕실은 물론이고, 민가에서 가장 많이 그려진 소재였다.
민화 속 괴석은 문인화에서 선비의 절개를 상징하는 것과는 사뭇 다른 뜻으로 그려진다. 문자나 동물 형상의 괴석에 화려한 모란을 조합해 그린 괴석모란도, 남근男根 또는 여근女根) 형태로 표현한 괴석에 화훼를 결합해 그린 괴석화훼도 등. 민화의 괴석에는 궁중화와 문인화에서 볼 수 없는 자유롭고 기발한 상상력이 돋보인다. 괴석에 새로운 생명을 불어넣었기 때문이다. 당시의 사람들이 꿈과 소망을 순수하게 표현할 수 있었던 민화. 그로 인해 오늘날 우리는 민화의 괴석 앞에서 미소 지을 수 있는 것은 아닐까? 문인화의 틀에서 과감히 벗어나 인간의 가장 근원적인 행복을 추구하기 위해 다양한 변형을 시도하는 과정은 오늘날까지도 계속되고 있다. 우리 민족만이 가질 수 있는 소박하고 따스한 심성을 화폭에 표현한 주인공들은 바로 우리와 같은 평범한 사람들이었다.

변하면서도 변하지 않는 것

전통은 흐르는 강물과 같다. 강물은 같은 자리에서 흘러가는 것처럼 보이지만 매순간 변한다. 전통도 강물처럼 한 곳에 머무르지 않고 늘 새로운 변화와 도전으로 성숙해가는 것이다. 우리가 민화를 사랑하는 이유는 조선 사대부 중심에서 벗어난 시선으로 민중의 꿈과 희망을 담아내서다. 시대가 바뀌어도 인간으로서 추구해야 할 행복과 자유, 생명에 대한 숭고함, 건강한 삶에 대한 소망은 변하지 않을 것이다. 마치 영원불변의 돌처럼……
다음은 박두진의 시 〈돌의 노래〉 중 한 구절이다.

오, 돌.
어느 때나 푸른 새로
날아 오르랴.
밤이면 달과 별,
낮이면 햇볕.
펄 펄 내려,
철 따라 이는 것에
피가 감기고,
스며드는 빗깔들,
아롱지는 빗깔들에
혼이 곱는다.
어느 땐들 맑은 날만 있었으랴만,
오, 여기 절정絶頂
바다가 바라 뵈는 꼭대기에 앉아,
하늘 먹고, 햇볕 먹고,
먼, 그, 언제,
푸른 새로 날고 지고
기다려 산다.


글 금광복(대한민국민화전승문화재, (사)한국민화협회 상임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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