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화에 담긴 행복한 인생 민화 곽분양행락도

도 1. <곽분양행락도> 8첩 병풍, 19세기, 견본채색, 131.0×415.0㎝, 삼성미술관 Leeum

*도 1. <곽분양행락도> 8첩 병풍, 19세기, 견본채색, 131.0×415.0㎝, 삼성미술관 Leeum

민화 곽분양행락도

조선 말기 궁중에서 생산된 화려한 장식 그림들은 궁 안에만 머물지 않고 여러 경로를 통해 민간으로 전해졌다. 전문 화원들이 그린 궁중 그림들을 민간에서는 어떻게 모방하며 소비하였을까? 궁중회화의 민간화民間化 현상을 조선 말기에 유행한 ‘곽분양행락도郭汾陽行樂圖’를 통해 접근해 본다.

옛사람들이 생각한 가장 행복한 인생의 조건은 무엇이었을까? 병 없이 오래 살고, 높은 관직에 오르며, 자손들의 번성함을 지켜보는 것을 가장 큰 행복으로 여겼던 것 같다. 실제로 누군가 이렇게 된다면 단연 성공한 인생의 주인공으로 주목을 받을 것이다. 여기에 소개하는 중국의 곽자의郭子儀(697~781)가 바로 그러한 화제의 인물이었다. 곽자의는 중국의 당나라 현종玄宗 때 무장武將으로 활약한 실존 인물이다. 안녹산安祿山의 난(755~763)을 평정한 공으로 지방의 제후인 분양왕汾陽王에 봉해져 ‘곽분양郭汾陽’으로 불렸으며, 당나라 최고의 공신으로 권세를 누렸다. 또한, 80세를 넘어 장수하였고, 그의 자녀들도 고위 관료나 귀족으로 영달하였다. 조선 후기에 곽자의를 주제로 한 곽분양행락도가 유행하면서 더욱 널리 알려지게 된 인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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궁중의 곽분양행락도

곽자의의 고사故事는 고려시대부터 우리나라에 소개되었지만, 복락福樂을 누린 인물로 관심을 끈 것은 조선 후기부터였다. 특히 숙종 대의 궁중에서는 곽자의의 다복하고 영화로운 삶을 화폭에 옮긴 ‘곽분양행락도’가 그려졌다. 그림의 초기 도상은 중국에서 전래하였겠지만, 이후 화려하고 장중한 궁중장식화로 정착되었다. 곽분양행락도는 조선 말기의 궁중은 물론 사대부층에서도 선호하였고, 민간으로 전해져 민화民畵의 주요 모티프로 변용되기도 했다.
현전하는 대부분의 곽분양행락도는 궁중 화원들의 솜씨가 발휘된 그림들이다. 채색이 화려하고 묘사가 정밀하며, 화격이 높아 궁궐의 주요 공간을 장식하거나 고위 관료들의 집에 놓일 수 있는 그림이었다. 궁중양식 곽분양행락도의 특징은 삼성미술관 Leeum의 <곽분양행락도> 8폭 병풍에서 엿볼 수 있다.(도 1)
곽자의가 자손과 신하들에 둘러싸여 연회를 즐기는 장면이 그림의 중앙에 펼쳐져 있다. 궁궐을 연상케 하는 가옥에 화려한 옷차림을 한 인물들이 등장한다. 곽분양행락도의 장중한 스케일과 치밀한 묘사는 뛰어난 기량의 화원이 아니고서는 가능하지 못한 것이었다. 그러나 1848년경에 지어진 가사집 『한양가漢陽歌』에는 광통교 아래의 그림 가게에 병풍용 곽분양행락도가 걸렸었다고 전해진다. 시전市廛에 나와 거래된 곽분양행락도는 구체적으로 어떤 그림이었을까.

궁중양식을 모방한 단병短屛

민간에서 궁중양식을 모방하여 그린 곽분양행락도에는 다음의 두 가지 특징이 보인다. 첫째, 화면의 크기가 작아진 점이다. 병풍의 형식은 유지하지만, 높이가 낮은 단병短屛에 그려진 사례가 많다. 그러나 화면을 무리하게 재구성하여 한 폭에 전체를 그려 넣지는 않았다. 둘째, 그림의 구성과 묘사가 성근 점이다. 밀도 있는 궁중양식과 비교하면 화면상의 구성과 묘사의 수준이 소략함을 볼 수 있다.
그렇다면 민간화가의 작품을 하나 살펴보자. 국립민속박물관 소장의 <곽분양행락도>에는 궁중양식으로부터 민간양식으로 변모되어 가는 특징이 잘 드러나 있다.(도 2) 병풍 한 폭의 세로 길이가 70㎝, 가로가 40㎝ 정도 되는 단병이다. 보통의 궁중 병풍은 그림의 세로 길이가 약 150㎝ 이상, 병풍의 높이가 2m가 넘는 것에 비하면 훨씬 작아진 셈이다. 병풍의 크기는 화면 안의 공간과도 연관된다. 작아진 병풍에는 가옥의 묘사가 간략하고, 사람의 수도 급격히 줄며, 전반적으로 긴장감이 떨어지는 화면의 구성을 보여준다.
국립민속박물관의 <곽분양행락도>를 궁중양식과 비교하면, 그림의 구성에 변화가 많다. 하지만 화면 왼편의 축소된 연못과 누정, 중앙에 공연이 펼쳐지는 공간, 오른편으로 가옥 내 여성들의 공간을 보면, 그림의 기본 전형을 어느 정도 따랐음을 알 수 있다. 국립민속박물관의 <곽분양행락도>는 민간화가가 자신이 소화할 수 있는 범위 안에서 궁중양식을 재구성하여 그린 것으로 볼 수 있다. 궁중회화의 민간화를 말해주는 대표적인 사례이다.

궁중양식을 변용한 민간화가

한양대학교박물관이 소장한 <곽분양행락도>에서는 또 다른 민간화가의 구상을 엿볼 수 있다.(도 3) 이 그림은 기존에 알려진 궁중양식과 화면의 구성이 확연히 다르다. 궁중양식에서 벗어나 화가의 주관대로 인물과 경물을 강조하거나 생략하여 재구성한 그림이다. 궁궐과 같은 건축물은 거의 사라졌고, 다소 공간이 축소되어 이야기를 구성하였다.
특히 가옥의 지붕을 그린 부분은 이전 곽분양행락도의 궁궐 같은 도상에 비해 매우 단순화되었다. 그림이 시작되는 맨 왼쪽에는 연못이 사라졌고, 초가와 기와로 된 두 채의 누정이 들어섰다. 제4, 5폭에는 음식을 준비하는 여성과 이를 옮기는 남성 하인들이 그려져 있다. 음식 준비 공간이 매우 소박하며, 값비싼 도자기와 같은 기물들은 보이지 않는다. 고전적인 곽분양행락도를 한국적인 스타일로 바꾸어 놓은 변용의 과정이 돋보이는 그림이다.
특이한 것은 그림의 중반부에 곽자의와 한 여성이 각각 독립된 전각 안에 자리 잡고 있는 점이다. 이전의 그림에서는 볼 수 없던 설정이다. 자녀와 신하들은 예의를 갖춘 모습으로 마당에 둘러서서 공연을 바라보고 있다.(도 3-1) 그런데 곽자의처럼 비중 있게 그려진 전각 안의 여인은 누구일까? 아마도 곽자의의 부인일 것으로 추측된다. 기존의 그림에도 누각 안에 부인이 등장하지만, 이처럼 곽자의와 대등하게 설정하지는 않았다. 그런데 왜 곽자의의 부인을 이렇게 강조하여 그렸을까? 아마도 부부가 함께 장수長壽와 해로偕老를 누리라는 의미를 그린 것으로 추측된다.
한양대학교박물관의 <곽분양행락도>는 궁중장식화에서 현실적으로 수긍하지 못한 부분이나 바꾸어 그려야 하는 이유가 있을 때, 민간화가의 생각대로 변용과 재구성이 이루어졌음을 보여준다. 민간화가만이 그려낼 수 있는 자유로운 화면구성에는 이러한 현실적인 해석과 조형적 의지가 있음을 알게 된다.
곽자의와 그 부인의 시선이 향한 곳에는 두 명의 무희가 역동적인 춤사위를 뽐내고 있다. 그 좌우로 다양한 악기를 연주하는 여성들이 늘어서 있다. ‘행락’에 걸맞은 연회의 흥겨운 분위기를 구성하는 핵심 장면이다. 이 그림에서 인물의 묘사는 궁중 화원의 정교한 솜씨를 따라가지 못하지만, 기본적인 형태감은 어느 정도 잡혀 있다. 하지만 인물의 표정 처리는 형식적인 부분이 많아 대부분 비슷한 형태로 반복되어 있다.
곽자의와 그 부인이 앉아 있는 누각은 주변과 자연스럽게 하나의 공간으로 연결되어 있다. 그 중간에 사모를 쓰고 각대를 맨 신하들이 곽자의와 부인을 향해 각각 서 있지만, 그 방향과 시선이 엇갈린 부분들이 다소 애매하게 보인다. 이 그림을 그린 화가는 곽자의 혼자만이 아니라 부부가 함께 대접받고 복락을 누리는 것이 아름답고 자연스러운 모습이라는 생각으로 화면을 재구성한 듯하다. 변용을 창작을 위한 노력이라고 본다면, 민간화가들의 생각이 화원들 보다 오히려 더 창의적이었다고 할 수 있겠다.

‘행락’이 빠진 곽분양도郭汾陽圖

곽분양행락도의 핵심은 연회가 펼쳐지는 ‘행락行樂’의 장면에 있다. 그런데 이 행락의 부분이 빠진 그림도 전하는데, 이는 지금까지 알려진 곽분양행락도와 다른 성격의 그림이다. 조선 후기의 대학자 윤증尹拯(1629~1714)의 고택에서 발견된 그림이 그런 경우다.(도 4-1. 4-2) 이 그림은 곽자의가 여러 신하와 자녀들로부터 조문과 문안을 받는 장면을 각각 그린 두 폭의 그림이다. 연회장면은 없지만, 이 그림 속의 곽자의는 이미 높은 관작官爵과 다자손多子孫을 성취한 모습으로 등장한다. 그런데 이 그림 두 폭은 병풍 형식의 곽분양행락도와 구성이 다르다. 민간화가가 그린 민화로 분류되지만, 그림의 범본은 궁중이나 사대부 계층에서 비롯된 ‘곽분양도郭汾陽圖’가 아니었을까 추측된다.
이 그림에 그려진 조회 장면은 분양왕인 곽자의의 권위적인 모습이 매우 강조되어 있다. 따라서 이 그림은 ‘행락’의 장면이 빠진 ‘곽분양도’라 할 수 있다. 그러나 부귀와 다자손을 추구하는 의미는 변함없이 간직된 셈이다.
이처럼 민간화가들의 곽분양행락도는 궁중양식으로부터 비롯되었다. 궁중양식의 속성을 약속된 도상처럼 따라야 하는 관행이 있었다. 그래야만 ‘곽분양행락도’로 인정받을 수 있기 때문이다. 대부분의 곽분양행락도가 병풍 형식을 고수한 것도 그런 이유에서다. 그런데 시전에 나온 민화라 하더라도 병풍일 경우는 한 폭짜리 그림의 몇 배에 달하는 가격을 치러야 했을 것이다. 병풍을 소유하려면 약간의 경제적 여유가 있어야 하고, 이를 가져다 펼쳐놓을 가옥의 공간도 커야 한다. 따라서 민화풍의 곽분양행락도는 서민층이 소유하기 힘든 그림이었고, 경제력을 지닌 중인층이 주된 수요층이었을 것이다. 민간화가들이 그린 곽분양행락도는 소박한 화격에 머물렀지만, 때로는 궁중양식에서 벗어난 창의적인 변용을 통해 행복의 염원을 담은 그림으로 그려지고 있었다.

 

글 : 윤진영(한국학중앙연구원 책임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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