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간연화 문자도와 민화 문자도의 상관관계 – 조선과 중국의 문자도, 닮은 듯 다른 이유

민간연화 문자도와 민화 문자도의 상관관계
조선과 중국의 문자도, 닮은 듯 다른 이유

문자도는 동아시아 민간회화에서 공통적으로 등 장하는 그림으로 한자문화권의 보편성을 상징적 으로 보여준다. 문자도에는 문자와 관련된 여러 이야기를 다양한 형상으로 담아내었기 때문에, 한자가 가지고 있는 고유의 이미지와 이야기를 담는 그릇 역할을 하였다. 이러한 조형방법은 한 자가 현실을 그대로 상징하는 표의성을 지닌 문 자로서, 글자 자체에 미학적 가치와 장식적 기능 도 함께 갖추고 있기 때문이다.

‘백수 백복도’의 원류를 찾아보다

고대 도시 하남성 낙양에서 출토된 비석에서 탁본한 <백수도>와 <백복도>를 살펴보면, 중국 길상문자도의 도 상을 유추해 볼 수 있다. 이 비석에는 앞과 뒤, 양면에 복 자福字와 수자壽字 각각 100개의 글자를 새겨 넣었다. 모두 이체자異體字로 이루어진 이 비석의 글씨는 해서, 전서, 예서, 행서, 초서 외에도 갑골문이 사용되었으며, 상·주·한나라의 청동기에 새겨진 글씨체도 찾아볼 수 있다. 또한 고예체, 비백서, 고두금문古斗金文, 과두문? ?文, 성두문星斗文, 화문火文, 수문樹文, 용문龍文, 봉 문鳳文, 취보문聚寶文(산호, 상아, 소뿔, 진주, 곰 발바 닥, 옥으로 된 홀笏 등)도 사용되었다. 이 비석은 소수민 족의 문화, 외래문화, 종교적인 문화까지도 흡수하여 제 작되었는데, 신화와 전설, 서방의 불교, 심지어 도교의 최고 신격神格인 옥황상제의 인장까지도 표현하였다. 유 명한 고대 서예가의 글씨체를 집자集字한 흔적도 찾아 낼 수 있는 이 비석에 각인된 <백수도>와 <백복도>를 합하 여 <복수도福壽圖>라 부르고 있는데, 중국인이 가장 사랑 하고 기원하는 바를 길상문자로 나타낸 것이다. (도 1)


남송시기에는 백수암의 <백수도>를 탁본한 후 장황하여 사용하였는데, 조정에서부터 사대부와 백성들에 이르기 까지 한 점 소유하기를 희망하였다고 전해진다. <백수도>를 거실 중앙에 걸어놓고 손님들과 감상하기를 즐겼으며, 집안의 평안을 빌었다. 또한 고대의 상인이 원 행을 하거나, 사대부가 관료사회의 부침浮沈을 겪을 때는 신변에 ‘백수도’를 호신부처럼 지니고 다시 조정에 나아가 기를 기원하였다고 전해진다. 명·청 시대에는 <백수도> 가 장수를 축하하고 기원하는 예물로 사용되었기 때문에, <백수도>를 그리거나 만드는 공방이 성업을 이루었다. 어 떤 것은 붉은 주사로 인쇄하였다. 이와 같이 한자가 소원 성취나 제액을 물리치는 기능을 가질 수 있는 이유는 문 력文力이 있다는 믿음에서 기인한다.(도 2) 청대 수장가이자 판본연구가인 전증錢曾(1629-?)의 『독서민구기讀書敏求記』에는 “남송 소정紹定 기축己丑 (1229)년에 정강靜江 (계림시의 옛 이름)의 관리에 의해 ‘백수암 (예전의 부자암)’에 ‘백 수자도百壽字圖 한권 (一卷)’을 각인하였다. 명대 정덕正德 정묘丁 卯(1507)년에 원대 곤 명 출신의 조벽趙壁 (1219-1276)의 24체를 더하여 한 권의 책으로 엮었다.”고 기재되어있다.

따라서 광해군光海君 2년(1610)에 남평 현감 조유한이 명나라에 갔을 때 백 수도 한 폭을 들여와 진상하였다는 『광해군일기光海君日 記』의 기록에 따르면, 1610년 중국에서 조선으로 유입된 ‘백수도’의 형식과 내용도 이와 유사한 것이었음을 유추 해 볼 수 있다. (도 3) 한편 청대 민간에서 사용하던 ‘백수도’는 중앙에 팔선八 仙을 그려 넣고, 주변은 다양한 ‘수자’를 배치하는 방법으 로, 그림과 문자의 비중을 다 같이 중시하여 표현하였다. 중심부 그림의 주위를 둘러싸는 다양한 형태의 ‘수’문자 는 해서, 예서, 행서, 초서도 아니지만, 때로는 해서, 예 서, 행서, 초서와도 유사한 서체를 보여준다. 장수에 대 한 기원을 ‘수’자에 담아 아름답게 형상화, 도안화한 것으 로 여겨진다. 이러한 형식의 문자도는 직접 비석으로 제 작되어 선경의 세계에서 불로장생을 기원하는 용도로 이 용되기도 하였다. 이처럼 전통적인 사상과 정서를 담은 다양한 문자도는 오랜 기간 장식적인 역할 이외에도 벽 사와 길상적인 기능을 수행하였다. (도 4) <복문자도>는 현재 중국인이 가장 사랑하는 세화이다. ‘복福’이라는 문자는 3,000여 년의 오랜 역사를 가진 문자의 하나이다. 갑골문 중의 복자는 주로 제사를 올릴 때 사용하는 제단과 주기酒器의 형상을 표현한 것이다. 이 는 가을에 추수한 곡식으로 빚은 술을 제단 위의 주기에 가득 채워 올리며 조상과 신들께 감사드리면, 제신諸神 들은 복을 내려준다는 의미이다. 고대의 농업활동과 원 시신앙이 결합하여 나타나는 여러 활동 중의 하나인 제 사에 술과 음식이 풍요로운 것은, 곧 복이 넘치는 의미와 동일시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고대의 복을 비는 행위는 제사와 관련이 있으며, 복을 비는 행위에는 관직에 나아 가는 것과 자손이 번창하기를 기원하는 것이 포함되어 있었다. 따라서 연화의 내용과 제재 중에서 ‘복’과 관련 되어 나타나는 길상연화가 많은 것은 당연한 것으로 보 인다. <복자도>는 길상을 기원하는 용도로 왕실에서도 중요할 뿐만 아니라 민간에서도 활발히 사용하였다.
18세기 왕 실에서 제작하여 사용하였던 ‘자수 복자도’가 대만 고궁 박물관에 소장되어 전한다. 이 <청건륭격사복자淸乾隆 ?絲福字>는 왕실에서 황제의 옥좌 뒤에 걸어서 사용 하던 것으로 1.5m 높이에 달한다. 어사御史 장교張敎 의 <수자도>처럼 전서체의 큰 복자 안에 다양한 서체의 작은 복자가 가득 채워져 있는 ‘백복도’ 형식의 자수 작 품이다.(도 5) 대문 앞에 복자를 붙이는 것에 관련되어 전하는 기록 은 송대의 『몽양록』에서 찾아볼 수 있다. “사대부, 서민 은 물론 크고 작은 집 모두 문과 골목을 청소한 후에, 더 러운 것을 제거하고, 정원의 문을 정결하게 하고, 문신 을 새로 바꾸고, 종규상宗規像을 걸고, 도부桃符를 붙이 고, 춘패春牌를 붙 인 후에 조상께 제 사를 지낸다.”라고 기재되어있다. 춘 패는 붉은 종이에 복자를 쓴 것으로, 대문 앞에 붙이는 것이다. 따라서 복 자를 붙이는 풍속 이 적어도 남송 때 이미 보편화 된 것 임을 짐작할 수 있 다. 고대의 제사에 서 시작한 복을 비 는 행위가 대문에 ‘복자’를 붙이는 풍 속으로 민간에서 자리 잡게 되고, 글씨나 그림으로 ‘복 자’를 아름답게 장식하는 행위로 연결된 것으로 보인다. 이와 같이 중국에서 출발한 ‘수복문자도’는 길상적인 의 미를 가진 글자를 반복해서 씀으로써 그 글자가 나타내 는 의미를 더욱 강조하고자 했던 의도를 담은 것이다. 이러한 한자문화권의 보편적인 생활예술은 조선으로 전 래되어 자수, 목판인쇄, 붓 그림 등으로 제작된 다양한 <백수백복도>가 생활 속의 공간을 장식하기에 이른 것 이다.

소주지역 민간연화 <수자도壽字圖>가
민화 문자도에 끼친 영향


18세기 소주蘇州에서 제작된 문자도 형식의 길상연화인 <수자도壽字圖> 는 다른 지역에서 찾아볼 수 없는 화풍 을 보여준다. 이 작품은 큰 크기의 ‘수’자를 먹선으로 인 쇄한 후에 다색목판과 육필을 혼합하여 채색한 작품으 로 <수자길상도>라고 부른다. (도 6) <수자길상도>는 기본적으로 커다란 해서체의 ‘수자’ 안 에 장수를 상징하는 길상물과 신선들로 내부를 채워 넣 는 형식을 따르고 있다. 이 문자도를 채우고 있는 고사 인물은 조선의 <요지연도>에 등장하는 신선들이다. 그 리고 배경으로 등장하는 경물과 지물들은 모두 <십장생 도>의 소재들이다. <수자도>의 조형과 내용을 보면, 굵은 선으로 윤곽을 그린 ‘수’자 내부에는 서왕모, 복·록·수 삼성과 팔선, 동방삭, 마고 신선을 그려 넣었다. 다양한 신선의 형상 은 각각의 특징을 잘 살려 표현하였으며, 특히 여신선의 얼굴은 명대 구영의 전통을 계승한 강남 미인도의 화풍 을 계승하였다. 신선들과 함께 인물중심으로 그려진 문 자도의 배경으로 고대 이래로 장수를 상징하는 복숭아 나무, 구름, 소나무, 대나무, 사슴, 학, 영지, 물(파도), 태양 등의 다양한 길상물이 등장하고 있다. 마고신선은 선녀와 함께 봉황을 타고 있으며, 봉황이 먹는다는 오동 나무는 중간 부분 오른쪽에 그려져 있다. 이철괴가 가진 커다란 호로모양의 병에서 빠져나오는 것은 그의 분신인데, 오복의 상징인 다섯 마리 박쥐이다. 박쥐들은 한 상자(漢상자)의 피리소리에 춤을 추며 이 철괴의 호로병 속을 빠져나오는 것처럼 서로를 마주보고 있다. 조국구 의 시선은 남채화의 바구니에 담긴 영지를 바라보게끔 시선을 처리하였다. ‘수’문자의 획과 획 사이는 유기적으로 연결되어있다. 만 약 상단의 사士자 획 부분과 일一자 획 부분이나, 중심 부의 공工자 획과 일一자 획을 분리하였다면, 하늘 한 자락을 차지하고 있는 누각 위에 다정하게 서있는 복, 록, 수 삼성의 모습을 표현하기는 어려웠을 것이다. 종 리권과 여동빈은 사이좋게 누각으로 연결되어있는 아치 형의 다리 위에 서있는 모습이다. 민간화가들은 분본粉 本을 만들 때 도교의 신선들에게 고유의 초능력과 서열 이 있다고 여기는 민중들의 믿음을 그대로 수용하여 상 단부터 하단까지 신선들을 배치하였을 것이다. 이와 같 이 민간화가의 상상력은 대중의 염원과 소망을 유쾌한 표현과 다양한 상징물로 변화시켰을 것으로 보인다. 그 결과 <수자도>는 고사인물과 경물이 커다란 ‘수’자 안을 가득 채운 형식으로 제작되었을 것이다. 또한 민간화가는 그림이 문자 바깥으로 삐져나오지 않 게, 획수를 줄이고 가로 획을 넉넉하게 만드는 동시에, 문자의 모양을 간결하게 처리하여 안정감 있는 화면을 구성했다. 녹색에 가까운 남색으로 전체 바탕을 채우고 주황색과 연한 황색을 주조색으로 사용하여, 전체 화면 을 통일하여 혼잡하고 난삽한 느낌 없이 전통적인 감흥 을 드러냈다. 문자 중심부에 있는 일一자 획 부분의 오 른쪽 끝은 갈필로 인하여 나타나는 현상처럼 3개의 갈 고리 모양으로 표현하였다. 하단 촌寸획의 삐침을 네 개 의 갈고리모양으로 처리한 것은 그림이지만 붓글씨의 묘미를 살리려는 노력으로 보인다. 복숭아나무는 촌寸 획 점點부분의 동그란 땅에 뿌리를 내리고 자라나서 풍 성한 열매를 맺은 형상이다. 선도가 자라는 곳은 인간세 상의 땅이 아니고 둥근 하늘의 기운을 받아 자라는 것을 의미하듯, 촌寸획의 작은 점 안에서 복숭아나무가 자라나고 있는 가운데, 동방삭이 그 복숭아나무 가지 하나를 들고 넓은 걸음으로 달아나는 유쾌한 모습을 그렸다. 이처럼 <수자도>는 아주 미미한 것에도 소홀함이 없이 유기적으로 관련을 맺고 있는 모습으로 내부를 구성하 였다. 이러한 작품의 구성과 표현은 뛰어난 상상력과 오 래 전부터 이어져온 전통회화의 표현을 십분 반영한 것 으로 보인다. 민간회화의 표현과 회화적인 아름다움이 어느 날 갑자기 나타난 것이 아니라 전통회화와 새로운 민중의 의식이 결합하여 형성되었다는 것을 보여준다. 18세기 건륭연간에 제작된 소주 민간연화 <수자도>는 중국 강남지역에서 제작된 문자도의 기본 형식으로 자 리매김하고, 한국과 일본, 베트남에도 영향을 끼쳤다. 정병모 교수는 청대 소주의 <수자길상문자도>와 삼성미 술관 리움소장 <효제문자도>와의 관련성에 대해 언급한 바 있다.(도 7) 문자도가 처음에는 중국에서 영향을 받 아 그려지기 시작하였지만, 한국 고유의 특색과 아름다 움을 자랑하는 민화로 거듭나게 되었다는 것을 아래와 같이 분명하게 설명한다.

“리움의 <효제문자도>는 가장 이른 18세기 후반에 제 작되었는데, 이것은 17세기 초(1610년) ‘백수도’가 조선 에 유입되고, 그에 영향을 받아 제작된 ‘문자도’와는 다 른 면모를 보인다. 문자의 내용이 복자나 수자가 아니 라 ‘효제충신예의염치孝悌忠信禮義廉恥’의 유교덕목으 로 바뀌었을 뿐만 아니라 형식도 달라졌다. 문자 안을 내용과 관련된 고사인물화로 채운 것이다. 새로운 문자 도의 형식은 소주의 <문자도>와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 다. 전서체로 그려진 이전의 문자도와는 다른 형식으로, 해서체의 ‘수’자 안에 장수와 관련된 서왕모의 설화그림 으로 가득 채워져 있다. 조선문자도가 유교의 덕목을 내 용으로 담고 있다면, 소주 문자도는 ‘복록수’의 길상적인 내용을 담고 있다. 이 작품을 기점으로 조선의 문자도는 중국의 문자도와 그 궤를 달리한다. 조선 문자도가 중국 문자도의 영향을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그 속에 담은 내 용이 달라짐에 따라 그 형식도 바뀌게 된다.”

이후 19세기에 이르면 중국의 <수자길상문자도>는 재물과 관련 있는 신선들과 길상물이 첨가되어 문자도 내부 를 채우게 되었다. 유교문화를 중심으로 형성된 사회문 화적인 의식이 반영된 조선의 ‘유교윤리문자도’와는 달 리 도교문화와 현세적으로 풍요로운 삶을 추구하는 내 용의 <수자길상도>는 강남과 주변 지역으로 전해져 큰 도상의 변화 없이 사용된다. 이와 같이 민간회화는 동 일한 내용과 형식으로 출발하였음에도 불구하고 각각의 지역적 특색이나 환경에 따라 변화하고, 발전하여 독특 한 예술적 풍격을 띠게 된 것이다.

중국의 ‘유교윤리문자도’

일찍이 춘추시기 제나라 관중管仲은 ‘예禮, 의義, 염廉, 치恥’ 국가를 버티게 하는 네 가지 덕목을 ‘사유四維’라 고 칭하였다. 송대부터는 『맹자』의 ‘효孝, 제梯, 충忠, 신信’을 더하여 여덟 가지 덕목을 한족의 ‘팔덕八德’이 라고 하였다. 이러한 덕목은 중국인의 오랜 윤리관으로 자리 잡고 있지만, 도교의 영향 때문에 유교윤리를 강 조한 문자도는 많이 전하지 않는다. 오직 한국과 지리 적으로 가깝고 유교윤리가 강했던 작품을 제작했던 산 동성 지역의 연화공방에서 제작된 것만이 전한다. 게다 가 이것들은 청 말에 제작된 것이기 때문에 오히려 조 선의 <효제문자도>에서 영향을 받지 않았을까 하는 의 문을 갖게 한다. 민간연화 <유교윤리문자도>는 민중의 교화용으로 공방에서 제작된 것 몇 점만이 전하고, 회 화성이 두드러지지 않아서 디자인적인 요소가 많은 조 선의 <효제문자도>와는 큰 차이를 보인다.(도 8) 중국 유교문자도의 내용은 중국 고대로부터 전해오는 설화나 고사 속의 인물들이 직접 화면에 등장하는 방식 으로 그려졌다. ‘충’은 포증包拯이 모함을 받아 황제 대 신 용포龍袍를 때린 이야기나 측천무후 때의 재상 적인 걸狄仁杰의 이야기를 그렸다. ‘신’은 증자曾子가 『효경』 을 저술한 이야기 및 황제와의 관계에 관한 이야기나 춘추시대 제齊나라의 재상 안영晏?의 이야기를 회화 화 하였다. ‘염’은 당나라 현종황제가 하사한 목패로 어 디서나 술을 마실 수 있도록 허가 받은 이백의 이야기나 소무목양蘇武牧羊(이백이 지은 소무장군의 충성스 런 일생에 관한 시)을 형상화하였다. ‘치’는 공자의 제 자인 자사子思의 겸손과 당 태종 이세민의 왕권찬탈을 위한 ‘현무문玄武門의 변變’을 희화화한 고사 등을 그렸 는데, 모두 중국인들에게 전통적으로 사랑받던 이야기 들이었다. 때로 문자도의 내용에는 희극에 등장하는 소 재도 사용되었다. 이러한 내용을 형상화한 문자도에는 제찬을 곁들이듯 반드시 고사를 설명하는 친절을 아끼 지 않았다.(도 9) 한편 중국 양식에서 더 발전하여 독창적인 양식을 이룩 한 조선민화 ‘효제문자도’의 조형은 해서체와 가까운 문 자와 이미지가 공존하다가 점차 상징적인 이미지가 회 화성을 띠게 되는 과정으로 나아간다. <효제문자도>가 18세기 전후 정형을 이루고, 중기를 지나며 전국에 유행 하기 시작하면서 혼란스러운 사회상황을 반영하고 도교 적인 요소, 기복적인 소재들이 첨가된다. 다양한 민화 문자도는 봉건사회를 탈피하고 근대로 나아가는 시기에 민중의 의식이 표현된 생활회화이면서 우리 민족 고유 의 민간회화가 뛰어난 조형적인 아름다움을 지니고 있 음을 보여준다. 한국과 중국의 문자도에 대해 한자라는 한 가지 요소로 전체를 설명하기는 매우 어렵다. 동일 문화권에서 언어 는 보편성을 갖게 되는 기반으로 작용하지만, 실제로는 사회변동, 풍속, 제작기법에 따라 보편성과 특수성을 가 지게 된다. 다음호에서는 중국의 기명도와 세조도, 다보 격과 깊은 관련이 있는 조선시대 책가도(책거리)에 대해 살펴볼 것이다.

글 우영숙(미술사 박사, 민화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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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간 민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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