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자, 그림으로 다시 태어나다! 문자도 (文字圖)

(도 5) 제주도 효제문자도 8폭 병풍, 프랑스 기메박물관

민화의 문자도는 말 그대로 문자, 즉 한자를 소재로 하여 만든 그림이다. 다른 민화와 마찬가지로 장식과 부귀, 길상, 벽사적 성격 또한 지니고 있지만, 윤리성과 이념성이 특히 두드러진다. 대개 병풍으로 제작된 문자도는 18세기에 사대부가에서 유행했고, 19세기에는 서민들 사이에서 인기를 끌었다.

조선시대 민화의 다채로운 아름다움은 지금까지 본 시리즈를 통해 소개되어왔고 또 소개될 예정이지만, 이번에 소개하는 문자도는 특히 조선시대 우리 선조뿐 아니라 현대 한국인의 심성에 깊이 뿌리박힌 유교적 윤리성과 이념지향성을 잘 보여준다. 물론 문자도도 다른 민화처럼 장식과 부귀, 길상, 벽사적 성격을 가지고 있지만, 윤리성과 이념성이 특히 문자도에서 더욱 강조되는 특징이라는 말이다. 문자도는 말 그대로 문자, 즉 글자를 소재로 하여 그림을 만든 것으로, 그 기원은 한자의 상형성에 기인한다. 우리 민화 문자도의 특징과 아름다움을 논하는 마당에 그 첫 시작이 중국의 한자 이야기부터 한다는 것을 의아하게 생각할 필요는 없다. 19세기 이전 동양 문화권에서는 중국이 가장 선진국이었고, 모든 서적과 기록이 한자를 중심으로 이루어졌음을 우리가 콤플렉스로 받아들일 필요는 없다. 마치 21세기에 영어를 배우는 것을 부끄러워할 필요가 없는 것과 마찬가지다.
문자도와 같은 우리 문화의 값진 한 페이지는 한자를 받아들여 생활화한 조선시대 사람들의 일상에서 만들어진 것이다.
이처럼 문자도의 발생이 한자와 관련되어 있음에서 문자도의 발생과 성행 역시 중국에서 먼저 이루어졌음을 짐작할 수 있다. 그러나 조선시대 문자도는 중국과는 다른 방향으로, 중국에는 없는 다채로운 형식과 양식변천을 이루어나갔다. 한자라는 외래의 문자 수단이 우리나라에 정착되어 본래 기원지와는 전혀 다른 문화를 이루었다. 이점은 현재 한글 전용 주장과 교육으로 인해 전문가는 물론 많은 일반 국민들이 함께 겪고 있는 전통의 단절과도 관련된다. 한글은 한자를 배격한 전용을 통해 발전하는 것이 아니라, 크고 깊은 역사와 의미가 깃든 한자와 공존함으로써 거기에서 자양분을 얻어 더 발전할 수 있다.

유교 핵심 윤리 요약한 효제문자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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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화 문자도 중에는 다양한 유형이 있다. 그 중 수적으로 가장 많은 것이 효제문자도이다. 효제문자도는 효, 제, 충, 신, 예, 의 ,염, 치 여덟 자를 소재로 하여 주로 8폭 병풍으로 많이 그려졌다. 이 여덟자는 유교의 핵심윤리를 요약한 것으로 문헌상 여덟 자가 갖추어 등장한 것은 주희朱熹 (1130∼1200)가 아동들의 교과서로 편집한 『소학』에서 유래한다. 효제문자도의 근본 성격과 관련해 중요하므로 아래 그 일부를 인용한다.

아이들을 가르칠 때 날마다 고사故事를 기억하게 하고 옛날과 지금에 구애받지 말고 먼저 ‘효제충신예의염치’ 등의 일을 들려주고, 황향黃香이 침석枕席에 부채질 한 일, 육적陸績이 귤橘을 품은 일, 손숙오孫叔敖의 음덕, 자로子路가 등에 쌀을 져 나른 일 같은 것을 세속의 이야기처럼 들려준다면 곧 그 도리를 깨닫게 되고, 이것이 오래되어 마음에 젖으면 덕성이 자연적으로 우러나오게 될 것이다.

위의 인용문에서 효제충신예의염치의 유교적 덕목의 구체적인 예 몇 가지가 언급되어 있다. 황향이 여름날 부모가 더워 잠을 못 이루자 미리 침석에 부채질하여 시원하게 한 일, 육적이 부모님에게 가져다 드리려고 귤을 몰래 가슴 속에 감춘 일, 손숙오가 머리가 둘 달린 뱀을 보고(당시 쌍두사를 보면 죽는다는 속설이 있었음) 다른 사람이 볼까 봐 땅에 묻은 일, 자로가 부모를 봉양하기 위해 쌀을 져 나른 일 등이 인용되어 있다. 효제문자도는 이런 구체적인 고사에 나오는 인물과 소재들을 그림으로 표현한 것이다. 황향의 부채, 육적의 귤, 그리고 위에서는 언급하지 않았지만 왕상의 잉어, 맹종의 죽순 등 다양한 소재들이 효제문자도 중 ‘孝’자의 표현에 이용되었다. 이밖에 ‘悌’는 형제간의 우애를, ‘忠’은 임금과 국가에 대한 충성, ‘信’은 사람 간의 믿음을, ‘禮’는 사회를 지탱하는 예의를, ‘義’는 올바름, 의로움을, ‘廉’과 ‘恥’는 염치, 즉 청렴함과 부끄러움을 아는 덕목을 각기 지칭한다. 이들 각각은 또 그에 해당하는 고사와 인물, 관련된 사물들이 다양하게 존재하며 그중 다수가 효제문자도에 표현되었다.
『소학』은 조선시대 성리학자들에 의해 크게 중시되어 조선말기까지 『대학』을 읽기 전 아동은 물론, 성인들의 일상생활 규범을 요약한 서적으로 중시되었다. 효제문자도는 성리학을 기반으로 건국된 조선왕조가 성리학의 대성자 주자朱子(=주희)에게 바친 경의, 그리고 그 규범이 조선시대의 왕으로부터 일반백성에 이르기까지 미친 것을 보여주는 시각적 증거이다. 그런데 일반 백성들은 성리학의 규범을 딱딱하게 받아들인 것이 아니다. 중국에서 유래했으나 중국에서는 표현되지 않는 조선의 방식으로 여러 고사에서 채용한 인물, 꽃과 새, 동물, 물고기, 사물 등을 이용하여 다양한 변주를 이루어냈던 것이다. 효제문자도는 한국인의 창의성, 미술적 재능을 잘 보여주는 분야이다.
효제문자도는 크게 세 시기로 양식변천을 이루며 발전하였다. 처음에는 여덟 자 글씨의 원형을 유지하며 글자 획 속에 각종 그림 장식을 집어넣는 방식이었다.(도1) 이를테면 ‘孝’자에는 역사상 효자로 이름 난 순 임금, 겨울에 어머니에게 죽순을 구해 드린 맹종, 또 겨울에 어머니에게 잉어를 구해 드린 왕상, 부채로 부모님의 침상을 시원하게 해드린 황향 등의 고사에 나오는 잉어, 죽순, 부채, 거문고 등의 소재가 들어가 있다. 이런 초기의 효제문자도 중에는 판화로 된 것도 다수 있는데, 조선시대 전래된 주자의 효제충신예의염치 여덟 자와 관련이 있을 것으로 추정된다.(도2) 그렇다면 주자는 소재 면에서 뿐만 아니라 필적을 통해 효제문자도의 발전에도 직접 연결된다.
효제문자도는 두 번째 단계에서 원래 글자의 형태를 과감히 탈피하여 필획의 일부를 아예 그림으로 대체하게 된다. 즉 앞 단계에서 자획 내부에 표현되는 소재들, 특히 잉어, 죽순, 새, 용 등이 글자의 자획을 구성하게 되어, 더 본격적인 회화로 발전하였다.(도3) 또 문자도는 책가도, 화조도, 산수도, 인물화 등 다양한 다른 소재들과 결합하여 다채롭게 발전하였다. 삼성미술관 리움 소장 <효제도 8폭 병풍>의 경우 상하단에 책가도를 삽입하고 중앙에 문자도를 배치하였다. 국립민속박물관 소장 <효제도>의 경우 하단에 간단한 산수 문양을 배치하고, 상단에는 효와 관련된 시구를 써 넣었다.
이 경우 죽순에 싹이 나 대나무가 무성하게 된 형태로 표현되었다. 한편 연구가 진행됨에 따라 제주도, 강원도, 경상도 등 지역에 따라 지역적 특징이 가미된 양식이 발전하였음을 알 수 있다. 이를테면 제주도 효제문자도에는 제주도의 지역적 특징을 보여주는 물고기와 새, 꽃 등이 들어가고, 자획 내부에 물결 문양이 들어가는 등의 특징이 있다.(도5)
효제문자도의 세 번째 단계는 추상화가 큰 특징이다. 자획을 여러 가지 상형소재로 다채롭게 꾸미던 중기에서는 원래의 소재가 뭐였는지 모를 정도로 추상화되는 곳이 많아진다. 예를 들어 ‘忠’자의 경우 ‘中’ 부분은 원래 용으로 표현되다가 점차 새우로 단순화되는데, 세 번째 단계에는 더욱 간략화되어 얼핏 보면 그 형태를 알아보기 어렵게 된다.(도6) ‘신’자의 경우에도 필획이 마치 무늬 벽돌을 쌓아 올린 듯 추상화되었다.
효제문자도의 세 단계 양식변천과정의 배경은 무엇일까? 첫째, 문자의 모습이 그대로 유지되고, 굵은 획 속에 여가가지 관련된 고사가 삽입되던 단계는 문자의 고유한 의미가 존중되던 시기였다. 효제문자도의 유교적, 교화적 의미와 목적에 충실했던 단계로, 주로 궁중과 사대부들에 의해 주로 사용되었던 것으로 볼 수 있다. 그러다가 두 번째 단계에서 문자의 획이 그림으로 대체되기 시작하고, 문자도 상하단에 산수, 책거리, 화조 등이 첨가되는 등 다양한 형식으로 변형되는 것은 백성들의 자유로운 미감과 상상력이 반영된 것으로, 본격적 민화의 단계라 할 수 있다. 이 두 번째 단계의 문자도가 가장 다양하고 재미있는 민화적 특성과 조형성을 갖고 있다. 세 번째 그림과 필획이 더욱 추상화, 단순화되는 것은 하층 백성들에게 널리 퍼져나가다가 마침내는 그 원래의 의미와 취지까지 잊혀 버리는 단계, 즉 단순 장식으로의 쇠퇴기로 볼 수 있다.
민화 문자도에는 효제문자도가 수적으로 가장 많아 나머지 기타문자도를 같은 급으로 다루기에는 다소 균형이 안 맞는 감이 있다. 그러나 기타문자도를 유형별로 나누어 대략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주술적 의미를 지닌 백수백복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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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수백복도는 주로 전서篆書로 ‘수壽’자와 ‘복福’자를 화면에 행과 열을 맞추어 가득 쓴 것으로 병풍 형식이 대부분이다.(도7) 글자는 채색이 많으나 수묵으로만 표현된 것, 또 종정문鐘鼎文이나 인문印文 형식으로 표현된 것도 있다. ‘壽’와 ‘福’을 반복하여 써서 장식함으로써 오래 살고 복 많이 받기를 기원하는 주술적 의미이다. 백수백복도는 중국에서 먼저 그려졌는데, 「광해군일기」 2년(1610) 4월 16일조에 보면, 남평현감 조유한趙維韓이 백수도百壽圖 1폭을 진상하였는데, 천조장관(天朝將官, 명나라 장교)으로부터 얻었다고 한다. 이 백수도는 ‘壽’자를 크게 쓰고, 그 획 속에 수백 자의 작은 ‘壽’자를 여러 서체로 쓴 것이었다 하는데, 우리나라의 백수백복도와 소재는 같으나 표현형식은 다른 것이었음을 알 수 있다. 광해군에게 진상된 백수도는 경기대박물관 소장의 <만호도萬虎圖>나, 근정전에서 나온 <수자水字 문자부적>과 같은 형식이었던 것으로 보인다.(도8) 근정전에서 나온 부적은 ‘水’자의 자획 안에 수많은 ‘龍’자를 써넣은 것으로 화재 방지의 주술적 용도이다. 백수백복도는 궁중에서도 사용되었는데, 구한말 의친왕義親王 이강李堈, 1877-1955, 고종의 제5자)이 흑견黑絹에 금니金泥로 그린 백수백복도 병풍을 배경으로 찍은 사진이 전해진다. 또 현재 고궁박물관에는 자수로 짜인 병풍도 있다. 백수백복도는 재료의 종류와 완성도로 사용처를 짐작할 수 있다.

각종 부귀와 길상 문자도

백수백복도와 큰 의미는 같지만 다른 문자로 된 다양한 작품들이 여기에 해당한다. ‘수복壽福’, ‘강녕康寧’, ‘부귀富貴’, ‘다남多男’ 등 다양한 문자도가 있다. 그리고 이들은 백자도百子圖, 신선도神仙圖, 모란도牧丹圖, 연화도蓮花圖 등과 결합하기도 한다.(도 9) 또 그림 부적符籍도 여기에 해당한다. 이런 길상 문자도들은 회화에서뿐 아니라 고대부터 각종 공예나 장신구, 건축물의 장식, 가구나 의복 등에서 광범위하게 사용되었음을 여러 가지 유물을 통해 알 수 있다.
비백서와 혁필서비백飛白이란 원래 서예에서 굵은 필획을 그을 때 운필의 속도와 먹의 분량에 따라 그 획의 일부가 먹으로 채워지지 않은 채 불규칙한 형태의 흰 부분을 드러내게 하는 필법을 말한다.(도 10) 그리고 혁필革筆이란 가죽 조각에 다양한 채색을 묻혀 그림을 그림으로써 그은 획 속에 다양한 색의 선이 나타나게 되는 그림을 말한다. 따라서 비백과 혁필은 원래는 다르나 그려진 필획 속에 운필에 따른 평행선 문양이 나타나는 점에서는 상통한다. 혁필화는 우리나라 전국 각지의 전통시장에서 과거에는 많이 볼 수 있었다. 비백이나 혁필로도 효제문자도를 그릴 수 있다. 유득공柳得恭(1749-?)의 「경도잡지京都雜志」에서는 비백서를 “버드나무 가지를 깎아 그 끝을 갈라 쪼개서 먹을 찍어 효제충신예의염치 등의 글자를 쓴다”고 설명하고 있다.

龍·虎·龜 등 수호와 벽사 상징 문자

용이나 호랑이, 거북이 따위는 용호도나 오방신장五方神將, 사신도四神圖 따위의 그림으로도 그려지지만, 글자 자체로서도 동일한 효과를 지닌다고 믿어져 많이 그려진 것으로 보인다. 또 정초 세화歲畵로 대문에 그려 붙이는 용호 그림 대신 글씨로도 써서 붙였다고 전해진다. 그러나 이런 세화 문배門排 따위는 대개 일회용 소모품이었기 때문에 실물은 거의 남아있지 않은데, 충남 외암리 민속마을 대문에 쓴 용호 글씨가 그 예이다. 여기서는 글씨지만 그림도 많이 사용되었을 것이다.

 

글 : 진준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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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간 민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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