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자도文字圖 두 번째 이야기 – 영기화생, 동서양에 공존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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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자도文字圖 두 번째 이야기
영기화생, 동서양에 공존하다

문자도는 단지 장식적으로 아름답게 만든 것이 아니다. 어떤 획은 구상적으로 그려내고, 어떤 획은 한자의 획을 묵색으로 살려 표현하지만 모두가 고도로 영화시킨 획들이다. 글자들을 영화시킨 이유는 덕목의 실천도 천도에 맞아야 오행이 순조롭게 순환하여 우주만물이 성스럽게 화생하기 때문이다. 이렇듯 옛 사람들은 고도의 정신세계를 지니며 살아왔으며, 민화의 조형언어가 그것을 증명해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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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의 삶을 되돌아보게 하는 글자

요즘 모두가 다 그런 것은 아니지만, 부모에 효도하지도 않고, 어른을 공경할 줄도 모르고, 형제 사이의 우애를 중시하지 않고, 윗분을 받들지 않으며 아랫사람을 믿지도 못하고, 예절을 지키지도 못하고 올바름을 추구하지도 않고, 청렴하거나 검소하지 않고, 부끄러워할 줄을 모르는 경우가 많다. 즉 효제충신예의염치孝悌忠信禮義廉恥가 거의 사라진 현실이어서 도덕적으로 타락한 시대가 아닌가 한다. 자식이 어버이를 죽이고, 스승을 배반하고, 친구간의 우정도 사라지고 위아래의 예의범절을 잊은 지 오래고, 염치도 없다. 나 자신도 그러할 때가 많으니 부끄럽다. 그런 현실을 대하고 사는 우리들은 문자도文字圖를 남의 이야기하듯 설명하지 말고 자기 통찰의 계기로 삼아야 한다. 모든 분야가 권력화되고 금전의 싸움터가 되어 무한경쟁 속에 살고 있다. 민화를 모르면서 아무나 말하는 사람이나, 민화가 무엇인지도 모르면서 모사만 하면서 민화 작가라고 말하는 것도 염치가 없는 것이다. 여덟 글자를 한자漢字로 쓸 줄도 모르고 사전에서 글자를 찾을 줄 몰라 뜻도 모르는 것을 염치가 없다고 한다. 스승을 배반하는 일은 많고 제자들에게 옳지 않은 일을 시키는 것은 예의가 없다고 말한다. 옥편도 찾을 줄 모르고 한자도 읽을 줄 모르고 문자도를 읽을 줄도 모르면서 모사만 한다면 파렴치한 일이다.

고도의 정신세계 담긴 문자도

조선시대 화원화나 민화에서 보이는 문자도에는 孝悌忠信禮義廉恥, 여덟 글자요, 그 여덟 글자가 유교의 실천덕목이라는 것은 알고 있을 뿐이다. 그러나 대부분의 사람들은 보주도 모르고 영기문도 모르고 영기화생도 모르지만, 옛 장인들은 알고 있어서 조형적으로 표현했으나 문자언어로 설명할 수 없었을 뿐이다. 그림에 표현된 영기화생의 세계를 조형적으로 표현한 조형언어를 읽지 못하고, 문자도에 보이는 물고기와 죽순, 부채, 옥매화, 접동새, 대나무, 가재, 거북이, 하도낙서河圖洛書, 봉황, 게 등 현실에서 보는 물건 등, 고사(故事)에 얽힌 조형들만 보일뿐, 문자도를 다룰 때 연관된 옛 이야기들을 지루하게 반복하여 이야기한다. 고사 역시 지난 세월에 일어났던 이야기이다. 그러나 여덟 글자에 관련된 이야기가 우리가 알고 있는 내용뿐일까. 아마도 이야기되지 않은 이야기는 더 많을 것이므로 그 이야기에 관한 그림을 그려 넣어도 좋을 것이고 따라서 창작도 할 수 있을 것이다. 孝悌忠信禮義廉恥 등 덕목들도 현실에서 그대로 실천해야 할 의무들이다.
그러나 <문자도의 조형을 자세히 살펴보면 모든 조형이 영화靈化된 세계이고 영기화생靈氣化生하는 세계이다.> 그런 조형들과 광경들은 우리에게는 보이지 않는 조형이고 무엇인지 모르는 세계다. 필자가 바로 그런 세계의 영역을 넓혀나가고 있다. 그러면 문자도는 왜 만들었을까? 아무도 알아보지 못하는 영화된 세계를 왜 문자도의 문자로 읽기 어렵게 표현하였을까? 20세기 초까지도 사람들은 알고 있었으나 광복 후의 혼란과 한국전쟁을 치르면서 모두 잊어버린 것이다. 유럽에서도 독일의 미술사학자 바르부르크가 말한 대로 19세기 이전의 조형의 모든 상징을 잊은 것은 동서양이 같다.
문자도에서 글자 하나하나, 아니 한 획 한 획 모두를 영기문으로 만들어 영화시키고 있다. 단지 장식적으로 아름답게 만든 것이 아니다. 어떤 획은 구상적 영기문으로 대신하기도 하고, 어떤 획은 한자漢字의 획을 영기문으로 만들되 묵색으로 남겨 한자의 획으로 여기게 만들지만 모두가 고도로 영화시킨 획들이고 글자들이다. 모든 글자들을 영화시킨 뜻은, 덕목의 실천도 천도天道에 맞아야 우주만물이 순조롭게 순환하고 오행이 순조롭게 순환하여 우주만물이 성스럽게 화생하기 때문이다. 과연 옛 사람들은 그토록 고도의 정신세계에서 살았을까? 그렇다. 증명할 수 있는가? 바로 민화의 조형언어가 증명하여주고 지금 다루고 있는 문자도들이 증명하고 있지 않은가! 고도의 정신세계가 아니면 이러한 고도의 예술성을 지닌 문자도는 존재할 수 없다.

조형 언어로 표현한 궁극의 진리

무릇 모든 종교의 경전의 말들은 성현이나 창조자의 말씀들이다. 성경의 말들은 창조자의 말씀이요, 불경은 여래의 말씀이요, 코란은 알라 유일신의 말씀이고, 유교경전은 성현의 말씀이다. 그래서 그 말들의 문자들을 옛 장인들이 사경寫經할 때 글씨를 금으로 쓰거나 이슬람의 모하메드의 말도 금으로 쓰면서 온갖 영기문으로 영화시킨다. 성경도 마찬가지다. 그러나 뭐니 뭐니 해도 이슬람 종교의 캘리그래피가 굉장하다. 알라 유일신의 말씀이라 이슬람의 캘리그래피는 ‘꾸란(코란, 이슬람교의 경전)’ 그 자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입에서 입으로 전해지던 신의 말씀을 경전으로 만들어졌고, 꾸란 필사본은 믿음을 전파하는 중요한 도구로 이용되었기 때문이다. 한양대학교 박물관에서 이슬람 캘리그라피를 전시했을 때, 전시회 이름이 ‘신의 목소리를 보다’인 것 역시 이슬람에서 캘리그래피를 어떻게 여기고 있는지를 잘 나타낸다.
‘신의 목소리를 보다’라고 했지만 어디까지나 이슬람 글씨를 영화시킨 것에 지나지 않는다. 즉 그 글자들은 필자
의 <영기문=영기화생하는 이론>으로 완벽히 풀어낼 수 있다. 왜냐하면 획 하나하나를 가능하면 제1영기싹, 제2 영기싹, 제3영기싹 등으로 표현하려 했기 때문이다. 이슬람 미술전을 3년 전에 국립중앙박물관에서 대규모로 전시한 적이 있으며 ê·¸ 때 국립중앙박물관 강당에서 이슬람 미술에 대하여 강연한 적이 있었다. 전시품 가운데 <쿠란 필사본과 장정>의 표지를 채색분석한 적이 있었다.(도 1-1, 도 1-2, 도 1-3) 16세기 후반의 것으로 크기는 54.5×36.7㎝다. 글자의 내용은 <꾸란은 일점일획도 변하지 않는 경전이다.>또 <꾸란은 알라가 내려주신 것이다.> 등이다. 그래서 그려
서 채색분석해보면 획 하나하나에서 각각 길고 짧은 꽃줄기가 뻗어 나오고 있다. 단순한 장식이 아니라 필자가 말하는
영기문이다. 꽃줄기는 꽃의 씨앗이 승화되어 무량한 보주가 되므로 꽃줄기는 무량한 보주가 생기는 드라마를 보여준다.
즉 영기꽃이다. 그리고 짧은 영기문들은 제1영기싹, 제2영기싹, 제3영기싹 등이 아닌가! 큰 둥근 원 밖에도 일체가 역동적인 영기문이다. 그러므로 이 큰 원은 보주다. 여러분은 보주의 표현이 동서양에서 얼마나 많이 표현되어 있는지 모른다. <보주>의 본질은 필자가 십여 년의 각고 끝에 처음으로 알아낸 것이므로 세계의 조형을 다룰 수 있는 것이다. 즉 알라 신은 보주, 대 보주, 즉 대우주의 영기를 압축하여 놓은 것이다. 즉 창조자는 대우주의 영기다. 그것이 기독교와 이슬람교와 불교와 유교에서 말하는 주님, 알라, 여래, 하늘의 道이다. 대우주는 어느 종교를 막론하고 큰 원으로 표현했고 그 안의 역동적인 영기를 갖가지 영기문으로 만들어 만물생성의 근원으로 삼았다. 글자 획 하나하나를 조선의 문자도에서처럼 영기문으로 변형시켰는데 사람들의 눈에 안보일 뿐이다. 그렇다! 궁극적 진리는 보이지 않아 문자언어로 표현할 수 없었지만, 조형언어로 표현할 수 있었다. 그러나 그 조형은 보이지 않는 것을 표현하였으므로 역시 사람들의 눈에 보이지 않는 것은 당연할지 모른다. 보이지 않는 영기를 조형언어로 표현했으니까 물론 보일 리 없다. 결국 어느 경우든 궁극적인 것은 보이지 않으나 필자가 하나하나 풀어나가고 있다. 꾸란의 획 하나하나가 경전이라 했으니 얼마나 놀라운 일인가. 이러한 이슬람의 캘리그래피는 이슬람 미술의 모든 장르에 널리 표현되어 있다.

기독교 문자도에서도 나타나는 영기화생

그러면 다음에는 기독교의 문자도를 보기로 하자. 유네스코가 선정한 세계기록유산에 전 세계적으로 중세 기독교 예술의 최고의 작품 중 하나로 손꼽히는 것이 아일랜드의 그리스도교 수도사가 남긴 『켈스의 서(Book of Kells)』란 책이 있다. 서기 800년경에 제작된 것으로 교회의 언어이자 서구문명의 언어였던 라틴어로 기록되었다. 아일랜드는 한 번도 로마제국의 영향력 아래 놓인 적이 없었기 때문에 3세기 경 그리스도교로 개종한 이후에도 이 섬나라는 대륙과 단절된 상태에 있었다. 다시 말해 이것은 아일랜드 교회가 로마교황청에 길들여져 있던 서방교회와는 완연히 다른 상황에서 독자적으로 발전했다는 것을 뜻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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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39쪽으로 이루어진 『켈스의 서』 삽화 중에서 키로(XPI) 문양의 그림은 얼른 보기에 새의 머리처럼 보이지만 기실은 그리스어로 그리스도를 의미하는 크리스토Christos를 XPI로 요약한 그림 문자이며, 책 한 면을 가득 채우다시피 그려져 있다. 하지만 이것은 단순한 그림 문자가 아니라 『마태복음』의 “이제 예수 그리스도의 나심(Christi autem generatio)”의 성구를 쓴 것이다. 여기서 autem은 h로 줄여 썼고, generatio는 우측 하단 I 밑에 온 단어로 기록하고 있다. 『켈스의 서』를 보기 위해 매년 약 50만명의 방문자들이 더블린에 있는 ‘트리니티 칼리지Trinity College’를 찾는다고 한다. 아일랜드 전역과 해외에서 이 책을 보기 위해 찾아온 수많은 이들에게 이 책은 아일랜드의 문화를 상징하는 중요한 가치를 지닌다. 하지만 아직도 이 책의 정확한 제작 연대와 제작 배경에 관해선 수많은 연구자들이 의문을 품고 연구하고 있는 중이다.
민화를 다룸에 있어 켈스의 서를 다루는 까닭은 글씨를 영화靈化시켰다는 점에서 공통점을 발견할 수 있기 때문이다. 물론 서양학자들은 영기문도 모르고 영기화생의 개념도 모르므로 단지 정교하고 화려한 장식으로만 여기고 있다. 이처럼 종교미술에서는 종교에서 <생명>을 존중하는 것을 궁극적 목표로 삼기 때문에, 영원히 생명이 생성하는 과정을 보여주는 영기문으로 성당이나 사찰이나 모스크 등 종교건축의 안팎을 장엄하고 있는 것이다. 비록 서양의 복음서에 정교하고 화려한 무늬가 있는 것은 성경의 말씀을 중히 여겨 영기화생靈氣化生, 즉 줄여서 영화靈化시키고 있기 때문이다. 그런 점에서 이글에서 함께 다루고 있다.
린디스판 복음서 머리글자 XPI의 조형을 보자.(도 2-1) 런던 영국박물관 소장으로 689년 경 작이다. 매우 화려하다. 글자의 획마다 영수와 영조의 몸이 매듭처럼 복잡하게 얽혀서 전개하여 있으며, 둥근 무늬는 모두 제1영기싹으로 이루어진 순환하는 영기문이나 삼태극과 이태극 등 역동적인 보주들로 가득 차 있다.(도 2-2) 주변에는 붉은 점들이 이중으로 둘려져 있는데 이 작은 점들이 모두 보주들이다. 그러면 이 많은 보주들은 어디에서 생겼을까? 매듭을 이룬 영수와 영조의 입에서 나온 것이라 생각한다. 이 생각에 이르러 동양, 특히 중국과 한국의 영기문과 조금도 다를 것이 없다. 용과 봉황의 입에서 무량한 보주가 나오는 것과 무엇이 다르랴! 이처럼 경전의 글자에 강력한 영기문을 부여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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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 <켈스의 서書> 마르크 傳 머리 문자 IN이란 복음서의 첫머리 글자에 영기문을 부여한 작품이다. 800년 경 장식사본으로 아일랜드 더블린에 있는 트리니티 대학 도서관 소장품이다. (도 3-1) 한눈에 구성미가 뛰어나고 채색이 화려하다. 그러나 자세히 살펴보면 용 같은 영수靈獸가 둘이 얽혀서 복잡한 매듭을 짓고 있는가 하면, 봉황 같은 영조靈鳥 역시 길게 복잡한 매듭을 곳곳에서 맺고 있다. 그리고 곳곳에 둥근 삼태극들이 많으며 원 안에 둥근 작은 보주들이 많은 것도 있고 형상을 넣어서 우주의 대순환을 상징하기도 하며, 단순한 원들이 이으며, 원 안에 복잡한 매듭이 들어 있는 것도 있으며, 제1영기싹이 두 개 엇물린 우리나라 태극 같은 것이 있는 등 모두가 다양한 보주들이 가득 차 있다.(도 3-2.)
그러면 <풍차風車의 시편詩篇>을 보자. 솔로몬 왕과 머리문자 E이다. 1270~1280년 작으로 역시 장식사본이라 부르고 있다. 잉글랜드 전래로 뉴욕 피에르퐁트 모르간 도서관 소장이다.(도 4-1) 부분을 보기로 하자.(도 4-2) 바탕에 연이은 제1영기싹 영기문이 영기잎을 내며 전개하고 있으며 여백에는 작은 보주들로 가득 차 있다. 그리고 매우 놀라운 것은 이 전체로부터 위와 양쪽으로 전면적으로 뻗어나가는 추상적 영기문들이다.(도 4-3)
더욱 놀랍게도 연이는 채색을 하지 않은 하얀 둥근 보주들로부터 영기문들이 발산하여 나온다는 것이다.(4-4.) 그런데 우리나라 조선시대 불화를 보면 두광이나 신광으로부터 무량한 보주들이 발산한 후 그 보주들로부터 추상적 영기문이 생긴다는 것은 더욱 놀랄일이다.(도 5-1. 도 5-2) 즉 복음서 글씨 전체로부터 영기문이 발산하는 것과 여래의 온 몸으로부터 영기문이 발산한다는 것은 똑같은 맥락이며 똑같은 영기문 조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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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교이자 철학으로서의 유교의 역할

이제 우리나라 유교의 문자도를 보기로 한다. 그런데 유교는 종교라 하지 않는 학자들이 많은 것으로 알고 있다. 우선 유교는 종교인가 하는 문제가 있다. 유교도 불교와 마찬가지로 종교이면서 철학이다. 일반적으로 종교는 “무한無限, 절대絶對의 초인간적인 신을 숭배하고 신앙하여 행복을 얻고자 하는 일”이라고 알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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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독교나 이슬람교 등은 유일신을 믿는 종교다. 이 정의에 따르면 무한, 절대의 초인간적인 신을 숭배하지 않는 불교
나 유교는 종교라고 말할 수 없는 것이 되고 만다.
인간인 석가나 공자를 믿는 것은 유일신이 아니기 때문에 종교가 아니라고도 한다. 이런 배타적인 기독교나 때문에 불교와 유교가 만들어온 한국문화를 거부하고 있으며, 이런 말을 쓰는 것조차 사람들은 두려워한다.
종교는 숭배 대상, 교리, 신자 및 교단, 교단의 의식이 있고, 행복조건과 충족에 대한 믿음이 있을 경우, 이를 종교 또는 종교집단으로 간주할 수 있을 것이다. 종교 행위를 좀 더 구체적으로 살펴보면, 숭배할 대상으로써 불교는 부처님과 보살, 기독교는 여호와와 예수, 유교는 공자와 제자들이 있다.
도교는 노자와 신도들이 있다. 교리로서는 불교는 불경, 기독교는 성경, 유교는 사서삼경, 도교는 노자 등 많은 경전이 있다.
신자 및 교단으로서는 스님과 신도, 목사와 신도, 제주祭主와 유도회儒道會가 있다. 교단의식으로서는 불교의 예불과 법회, 기독교의 예배와 목회, 유교에는 제사祭祀가 있다. 행복의 충족에 대한 믿음이나 내세관으로는 불교의 해탈과 인과 및 윤회, 기독교의 영혼 구제와 내세 천국, 유교의 바른 삶과 안심입명 등을 꼽을 수 있다.
더구나 공자님의 가르침인 유교는 실로 심오하고 깊다. 공자와 중용 등을 보더라도 인의예지신仁義禮智信 성충효제선誠忠孝悌善을 가르치어 인간이 살아갈 도리를 말씀하고, 인간과 인간이 서로 더불어서 올바로 살아가는 도리를 가르친다. 이웃과 남들도 행복하게 살도록 하는 공동선共同善을 가르치는 것이어서 어느 종교보다 현실적이고 또 진실
한 종교라고 말하지 않을 수 없다.
공자는 직접 제사를 주관하여 종묘와 신에게 제사지냈고, 또 중용에서도, “귀신의 덕스러움(위덕爲德)은 세상에 가득 차 있구나(성盛). 그것은 보려 하여도 보이지 않고, 들으려 해도 들리지 않으나, 만물의 본체이고 버릴 수 없는 것이다”라고 하였다. 그러나 저승세계에 대한 논의보다 현실의 생활에 도덕을 바로 세우고, 인간관계를 올바로 정립하는 것에 주요한 목표를 두었다. 결국 유교는 철학이자 종교이므로 조선시대의 문자도 글씨를 그림, 즉 조형으로 나타낸 점은 이슬람 캘리그라피와 다른 것 같이 보일지 모른다. 그러나 이슬람의 캘리그래피를 영기화 시키거나 영화된 문자에서 영기문이 발산한다는 점은 같은 맥락이다. 기독교 복음서에서도 보다시피 문자에 온갖 영기문을 부여하는 점은 동서양이 똑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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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늘의 소리 담은 조선의 문자도

그러면 조선시대 문자도의 여덟 글자는 무엇을 뜻하는가? <하늘의 소리>다. 천리天理, 즉 천지자연의 이치이다. 이치의 실천 강령綱領이다. 그러므로 하늘의 소리요, 하느님의 소리다. 그래서 성스런 글자다. 그래서 여덟 글자들을 영화시키는 것이다. 누구나 배웠던 <千字文>이 가지고 있는 내용은 동아시아 정신세계의 바탕을 이루는 가장 근본적인 이야기다.
그것은 책의 첫 문장에서부터 잘 드러난다. ‘天地玄黃천지현황하고 宇宙洪荒우주홍황이라’, 즉 ‘하늘은 검고 땅은 누러며, 우주는 넓고도 거칠다’라는 天地와 宇宙라는 천자문의 첫 문장은 고대인들이 하늘과 땅, 우주가 열리는 창세기에 대해 어떤 생각을 가지고 있었는지를 알려주는 글이다. 즉 천자문의 시작이 천지와 우주에 대한 이야기다. 그러므로 문자도 여덟글자는 천지와 우주에 대한 이야기다. 그래서 문자도는 하늘의 소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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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양의 우주생성론[宇宙生成論:cosmogony]은 물리학으로, 우주생성론자들은 주로 지구의 기원에 대해서 연구를 하였다. 그러나 필자가 말하는 우주생성론은 생명의 기원에 관한 문제이며, 그 생명생성의 과정을 표현한 영기문에 관한 연구이며, 생멸生滅의 생각보다는 <영원한 생명의 생성>에 관한 조형적 연구다.
그러면 문자도의 여덟 문자는 무슨 뜻이 있는지 다시 살펴보자. 흔히 효제인지본孝弟仁之本이라 하여 효도孝道와 공경恭敬은 인의 근본根本으로 여겼으므로 맨 앞에 두었다. 그 다음 효제충신예의염치孝悌忠信禮義廉恥를 여덟 글자로 보지 말고, 어버이에 대한 효도孝道, 형제兄弟끼리의 우애友愛, 임금에 대한 충성忠誠과 벗 사이의 믿음을 통틀어 이르는 말이므로, 의미로는 한자 한자 따지지 말고, ‘효제’, ‘충신’, ‘예의’, ‘염치’ 등 네 단어로 읽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글자마다 고사故事가 따르는데 신信자에 얽힌 고사는 다른 글자와 맞지 않기 때문이다. 우선 궁궐에서 쓰던 문자도는 매우 화려하고 웅장하여 우리를 압도한다. 삼성미술관 소장 문자도를 살펴보자.(도6) 얼마나 강렬하게 문자의 획에 영기문을 부여하여 영화시켰는지 알 수 있다. 글자를 붓으로 쓴 것 같이 굵은 획을 띠고 있으나 큰 붓으로 쓴 것이 아니고 쓴것처럼 디자인한 것이다. 그리고 굵은 획의 공간에 현실적 이야기와 비현실적 조형으로 가득 채웠다, 비중
으로 보면 비현실적 조형이 압도적으로 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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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悌자를 보면 마음 심心변의 획에는 두 용이 하나의 보주를 서로 움켜쥐고 있다. 물론 사람들은 두 용이 보주를 쟁취하려고 한다고 설명하고 있다. 그것은 용의 본질을 모르고 하는 말이다. 우주의 기운을 압축한 조형인 용이라는 진리를 안다면 그런 설명은 할 수 없다. 또 보주 역시 우주의 기운을 압축한 것이라면 그런 설명을 할 수 없다. 나머지 획들 안에는 고사와 관련된 이야기가 그려져 있으나 그 행위들도 영화되어 있다고 보아야 한다. 빨간 둥근 원은 보주들을 의미한다. 보주들 안에 고사에 관한 글자들이 쓰여 져 있다. 즉 고사가 보주에서 화생하는 것이다. 그리고 두 백호가 있다. 이 역시 산에서 보는 호랑이가 아니다. 사신도四神圖의 백호로 오행사상에 의해 백호라는 명칭이 생겼으며 청룡과 마찬가지로 우주의 기운을 압축한 모양이다. 그리고 지배적인 녹색과 붉은 색으로 이워진 것은 구름이 아니고 영기문이다. 획들 속에 가득 찬 고사와 영수들은 바로 이 구름 모양 영기문에서 화생하는 광경이다. 그러므로 여기에서 중요한 것은 고사가 아니라 여러 가지 영화시키는 갖가지 방법이다.
이상 동서양 종교의 문자도들을 다루어보았다. 비록 상류사회의 문자도의 성격을 가지고 있는데 함께 다루어 본 것은 그 모든 문자의 획들에 강력한 영기문을 부여했으며 그 영기문에서 영기문이 발산한다는 공통된 점들을 지니고 있기 때문이다. 영기문에 관한 한 동서양이 공통성이 있다는 것은 여간 흥미로운 일이 아닐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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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 강우방(일향한국미술사연구원 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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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간 민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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