차례

• Ⅰ. 머리말
• Ⅱ. 두 개념의 역사성, 정치성, 가치지향성
• Ⅲ. 두 장르의 경계, 상호교차의 실상
• Ⅳ. ‘문인화’와의 비교로 드러나는, ‘민화’의 의미
• Ⅴ. 맺음말

※ 이 논문은 한국민화연구소가 발행한 제4집에 실려 있는 것을 전재한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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Ⅰ. 머리말

‘민화(民畵)’라는 용어와 ‘문인화(文人畵)’라는 용어는 각각 나름의 독자적 개념으로 회화예술의 지향점을 제시하고, 아울러 실제 회화작품에서 일정한 영역을 지칭하는 장르 명칭들이다. 그러나 두 용어 모두 그 발생부터 지시내용이 추상적이고 가치지향적이기 때문에 이 용어들이 지칭하는 실제 작품의 범주경계를 명확하게 갈라내는 데는 상당한 어려움이 뒤따른다.
이 글에서는 이러한 어려움을 이들 용어가 보유한 특성(特性)으로 주목하면서 ‘민화’의 개념과 의미를 ‘문인화’의 그것에 비추어 고찰하고자 한다. 이러한 비교고찰은 이질적인 것의 무모한 비교로 보일 수 있겠지만, 몇 가지 유효성이 있다.
첫째로 동아시아 회화의 특수성과 오랜 역사의 안목에서 ‘민화’의 위치와 의미를 진단할 수 있다. 한국과 중국의 회화사에 손꼽는 특수성 중 하나가 ‘문인화’의 오랜 군림이었기 때문이다. 이 고찰은 둘째로 ‘민화’라는 개념의 속성을 근본적으로 검토하는 기회를 제공한다. ‘민화’와 ‘문인화’는 생성되고 적용된 역사적 의미와 지향하는 향유층 및 조형의 가치방향 등에서 상반(相反)된 속성이 두드러지는 듯 보이지만, 놀랍도록 유사(類似)한 속성을 가지고 있다. 이에 대한 검토는 회화사의 흐름 저변에 근본적으로 존재하고 있는 기대와 평가의 세계를 살필 수 있도록 허락하고, 그 위에서 ‘민화’의 위상과 의미를 다시 가늠하게 해준다.
‘민화’에 대한 기존의 연구를 살펴보면, ‘민화’와 ‘문인화’의 차이 혹은 접점에 대한 집중적 고찰은 없었지만, 다양한 방식의 의견들이 이들의 관계를 제시해왔던 것을 찾아볼 수 있다. 우선 ‘민화’를 서술에 포함되지 않았던 일반적 회화사 서술의 입장이 있었다. 이러한 회화사의 기본구도에서는 문인화와 화원화가 중심에서 다루어진다. 이 경우 ‘문인화’는 회화사에서 중시할 만한 대상이라면 ‘민화’는 그렇지 못한 대상으로 크게 갈라진다.¹⁾ 이후, 민화를 중시하는 연구자들은 민화/문인화(혹은 사인화, 사대부화)/궁화(宮畵, 혹은 院畵, 화원의 제작품들)의 삼분(三分)구도를 세움으로써 ‘민화’를 회화사의 서술에 포함시키는 견해가 있다. 이러한 구분 속에서 문인화와 궁화는 ‘정통(正統)’의 교육된 문화로, 민화는 교육받지 못한 민간층의 문화로 구분된다. 이 구분에 대하여 화풍과 제작자의 측면에서 ‘민화’와 ‘궁화’의 경계문제가 거론되고 있다.²⁾
그러나 ‘민화’와 ‘문인화’의 관계에 대하여는 심각한 고려가 없었다. ‘민화’와 ‘문인화’는 비교할 대상이 아닐 만큼 현격하게 갈라져 있는 듯이 보이고, 이러한 갈라짐은 야나기 무네요시(柳宗悅, 1889~1961)에서 비롯한다. 그는 ‘민화’를 ‘민중(民衆)에서 태어나서 민중에 의하여 그려지고 민중에 의하여 구입된 그림’이라 정의함으로써³⁾ ‘민화’는 엘리트문화가 아니라는 인식을 강력하게 제공했다. 그의 ‘민화’에 대한 정의로 인하여 엘리트문화의 대표격인 ‘문인화’와 비엘리트의 ‘민화’를 완전하게 구분될 수밖에 없었다. 게다가 1970~80년대에는 ‘민중(民衆)’의 개념이 문화이론 전반에 도입되어 중시되면서, ‘민화’는 민중미술의 원천으로 의미화되었고 권위적 제도에 저항하는 자유의 정신으로 가치화되었다.
사실상 이미지의 발생-제작-수용의 전체 과정에서 민중이 주축이 된 그림 즉 야나기가 규정한 민화라는 것은 별로 없고, 대개 궁중회화나 문인회화를 이미지와 주제를 근원지로 하여 널리 그려지게 된 그림들이 민화로 불리는 실정이다. 이에 대하여 연구자들은 양반계층에서 민화를 향유한 사실을 지목하며 민화가 널리 애호된 양상으로 해석하기도 하고,⁴⁾ 세부의 이미지들이 궁전이나 문인화의 유래에서 민화라는 범주로 전개된 양상을 살피는데 집중하면서 민화를 계층개념으로 보는 관심은 흐려지는 경향이 발생하게 되었다.⁵⁾
최근의 연구들이 소위 민화라는 범주의 주제와 표현방법의 문인화나 궁중화와 상호 교류하는 점이나 민화의 작가발굴을 구체화시키고 있다.⁶⁾ 이러한 연구의 흐름 속에서 ‘민화’와 ‘문인화’의 관계는 다시 정리되었다. 안휘준은 전통회화가 민화로 형식화·인습화되면서 민화적 간단 진솔함을 보여준다고 보았고, 홍선표는 상층문화가 민화로 침강, 저변화되면서 민화의 사회적 기능이 확보된 양상을 살폈으며, 정병모는 민화가 ‘사인화(문인화)’의 기법과 문인감상의 회화주제도 수용하면서 나아가 민화로 각색하여 감상자를 즐겁게 해준다고 정리하였다.⁷⁾ 이러한 최근 견해들은 공통적으로 민화가 문인화의 주제 및 표현법에서 흘러나왔다는 사실을 표현하고 있다. 다시 말하면 ‘문인화’에서 ‘민화’로 흘러간 일방적(一方的) 영향관계를 말해주고 있다.
이 글은 지금까지의 논의에서 각도를 달리하여 ‘문인화’와 ‘민화’의 관계를 살피려고 한다. 우선, 이들 개념(槪念)의 생성과 전개를 비교할 것이다. 이로써 ‘민화’와 ‘문인화’가 하나의 공간에서 발생하여 공존(共存)한 서로 다른 영토였다기보다는, 회화사의 시간 즉 역사의 이행(移行) 속에서 경계를 맞댄 시간이었다는 관점에서 논의를 이끌어가려고 한다. 경계영역이 개념의 역사성 위에 존재한다는 사실을 밝힘으로써 한국회화사에서의 민화의 위치를 다시 가늠하고, 이를 통하여 ‘민화’가 가지는 현재의 지속적 의미와 기능에 대하여 생각할 여지가 열린다.

1) ‘민화’에 해당하는 그림은 별로 다루지 않고 ‘문인화’를 가장 중시되는 서술의 경향은 중국회화사 및 한국회화사 개론서에서 쉽게 확인할 수 있다. 한국회화사의 개설서로 널리 공인되는 安輝濬, 『韓國繪畵史』 (一志社, 1980)에서 民畵를 다루어지지 않았다; 安輝濬, 「韓國民畵散考」, 『民畵傑作展』 (삼성미술관 리움, 1983)에서는, 시대적 변화와 창의성을 반영하는 대표적 작자와 작품을 중심으로 서술하는 한국회화사의 史料로서 민화는 그 요건을 충분히 갖추지 못한다고 지적하였다.
2) 김홍남, 「朝鮮時代 ‘宮牧丹屛’ 硏究」, 『美術史論壇』 9호 (한국미술연구소, 1999) 참조.
3) 야나기 무네요시(柳宗悅), 「工藝的 繪畵」, 『工藝』 73호(1937).
4) 金哲淳, 「民畵란 무엇인가」, 『韓國의 美, 民畵』 (중앙일보사, 1977) pp. 183-203에서 문인과 화원화가가 그린 正統畵와 달리, 민화는 민간계층의 제작으로 회화세계를 구분하고, 전통사회의 상층계급도 대중문화를 즐겼다는 현상에 비추어 민화를 사회전반의 ‘生活畵’, ‘實用畵’로 제시하였다; 임두빈, 『민화란 무엇인가』 (서문당, 1997) p.12 에서도 정통계층과 민중계층의 회화문화가 이원적 공존구도를 유지하면서, 사대부층에서도 민화를 좋아했다고 설명하였다.
5) 20세기초 ‘민화’ 발생의 상황과 문제점, 1970년대 以前의 평론가들의 민화에 대한 애정, 1980년대의 민중론에 입각한 민화의미 재부여, 1990년대의 문화다원론에 따라 민화제작과 소통에 대한 실제적 해석 등으로 이어지는 오랜 ‘民畵觀’의 전개에 대하여는, 홍선표, 「치장과 액막이 그림-조선 민화의 새로운 이해」, 『항산 안휘준 교수 정년퇴임기념논문집, 미술사의 정립과 확산』 1권 (사회평론, 2006), pp. 488~490 참조. 1990년 이후로 연구되는 중국년화(年畵), 도자이미지, 궁중장식화 등과의 비교고찰은 실제제작과 유통양상을 통하여 민화류이미지의 기원을 구체적으로 살핌으로써, 민화이미지 생성의 출처도 중국 혹은 상층문화였음을 보여준다.
6) 홍선표, 위글(2006)에서 민화가 왕실과 상류층 및 새로운 중국유입물에 유래하고, 민간의 기복호사풍조에 부합하여 성행하게 되었다고 설명하였다; 정병모, 『민화, 가장 대중적인 그리고 한국적인』 (돌베개, 2012)에서는 민화/사인화(문인화)/궁화의 작품들이 주제와 화풍이 서로 교통한 사정을 다각도로 밝히면서 민화 형식과 내용의 풍부함을 제시하였다; 윤열수, 「문자도를 통해서 본 민화의 지역성 특성과 작자연구」 (동국대박사논문, 2007) 및 「민화의 새로운 해석을 위한 시도」, 『꿈과 현실이 아름다운 동행』, (온양민속박물관, 2008), pp. 228~235에서 민화 작가층의 발굴을 시도하였다.
7) 안휘준, 앞 글(1983) 및 安輝濬, 「韓國의 瀟湘八景圖」, 『韓國繪畵의 傳統』 (文藝出版社, 1988) pp. 162~249; 홍선표, 위글(2006) 참조; 정병모, 위책 (2010) 참조.

II. 두 개념의 역사성, 정치성, 가치지향성

‘민화’와 ‘문인화’라는 용어는 회화의 가치에 대한 지향적 내용을 가진다. 이 용어들을 축어적으로만 보자면, 사회구조의 일정한 계급층위로서의 ‘민(民)’/‘문인(文人)’을 위주로 한 회화문화를 분류하는 명칭으로 보일 것이다. 오늘날 우리 회화사에서도 ‘민화’와 ‘문인화’ 및 ‘화원화’로 구분하며, 작자층(作者層)에 기준을 두는 것이 바로 그러한 이유이다.
그러나 애당초 ‘문인화’와 ‘민화’라는 개념이 발생할 때 작가층(혹은 ‘향유층’)을 ‘순수하게’ 말한 것은 아니었다. 이 용어들이 발생하고 전개된 시대의 사회구조 및 사회구조에 대한 인식이 이 두 명칭의 의미에 정치적으로 얽혀 들어 작용했고, 무엇보다 이 두 용어는 예술정신과 예술문화를 바라보는 특정한 가치관을 반영하고 회화관(繪畵觀)을 제시하는 저면이 있다.
‘문인화’와 ‘민화’의 발생과 전개를 개념의 측면에서 간략히 살펴보도록 하겠다.⁸⁾ ‘문인화’의 실제 개념은 소식(蘇軾, 1036-1101)이 제기한 ‘사인화(士人畵)’에서 비롯하여 소식의 제기에 동의하는 수많은 문인들이 확충하고 확고히 하였다. 문인화의 기원을 따지자면 더 멀리 올라가겠지만, 본격적 개념은 북송대에 형성되었다고 할 수 있다. 소식은 “사인화를 보면 천하의 뛰어난 말을 보는 듯하니 그 의기(意氣)가 이르는 바를 취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화공의 그림은 왕왕 채찍, 털가죽, 구유와 여물만을 취할 뿐 한 점의 준발한 기운이 없으니 조금만 보아도 싫증이 난다”고 하였다. 훌륭한 말을 찾을 때 겉모양을 보는 것이 아니라 말의 기(氣)를 보는 것과 같다고 함으로써, 그림도 겉으로 잘 그린 그림보다는 내면에 뜻과 기운이 있어야 좋은 그림이라 하였다. 또한 이런 그림을 알고 그리는 사람은, 마치 말을 볼 줄 아는 사람처럼 학식이 있는 사인(즉, 文人)이라 하였다.⁹⁾
문인화의 우위를 주장하는 문인들은 “가슴 속에 수백 권 책이 있게 하면”(黃庭堅), 혹은 “가슴 속에 만권의 책이 있고 눈으로 앞 시대 명적을 실컷 보고 수레바퀴와 말발굽의 자국이 천하의 반은 되어야만”(趙希鵠) 그림을 제대로 그릴 수 있다고 하였다. 즉 학문적 소양과 고상한 경험을 좋은 그림의 조건으로 제시한 것이다.¹⁰⁾ 소식은 또한 ‘화중유시(畵中有詩)’를 높은 경지의 그림으로 칭송하여¹¹⁾ 우수한 그림의 조건으로 시문의 이해를 선포하였다.¹²⁾ 북송문인들이 주장하는 이러한 사인화론에 따르면, 학문과 시문학을 제대로 섭렵하고 이해하는 문인들만이 좋은 그림을 그리고 이해하는 요건을 가질 수 있다.
북송대 문인화론의 본격적 형성 이후로 중국의 회화이론은 문인화의 미학을 구체화하는 형태로 전개되었다. 북송의 문인들은 신(神)·묘(妙)의 솜씨보다 파격을 꾀하는 ‘일(逸)’의 품격을 가장 높이 제시하였고, 원나라 말기의 문인화가들은 ‘일’을 주장하며 대상의 외형묘사에는 더욱 무심한 입장을 주장하고 서예적 미학을 그림에 첨부하였다. 명청대 화론에서는 ‘사기(士氣, 문사의 기운)’가 있는가의 여부로 그림평가의 기준을 삼았다. 명대말기의 동기창(董其昌, 1565~1666)이 주장한 남북종론은 중국회화사를 남종과 북종으로 가른 뒤 남종에 해당하는 ‘문인화’를 정통(正統)으로 간주하고 남종문인화의 막강한 우위론을 펼쳤다.¹³⁾
소식이 사인화론을 들어 과거의 왕유와 고개지 정도를 재평가하였다면, 동기창은 문인화론을 들어 중국회화사 전체를 재정리하였다고 할 수 있다. 동기창은 “만리를 여행하지 않고 만권을 읽지 않고 그림의 대가가 되려 하면 되겠는가. 이와 같이 되는 것은 우리 무리가 힘쓰는 데 달려있는 것이고, 평범한 화가들에게서는 바랄 수 없는 것이라”고 하여,¹⁴⁾ ‘우리 무리(吾曹)’라고 자신이 속한 문인(文人)의 계급을 따로 분류하고 그들만이 누리는 학식과 사유방식, 이를 기반으로 이루어지는 회화예술의 절대적 우수성을 주장하였다.
소동파가 전문직 화공의 솜씨를 경시하였듯이, 동기창은 북종화가들의 전문적 화업기량에 대하여 학문과 경험이 미흡한 존재로 경시하였다. 이후 명청대 회화론에서 중시하는 ‘서권기(書卷氣)’ ‘문기(文氣)’ 등은 서예와 학문에 능한 문인계층을 지지하는 회화이론이었으며, 나아가 전문적인 화가들도 따라야 하는 원칙으로 기능하였다.¹⁵⁾ 송에서 청에 이르는 중국의 지성사 속에서 문인들은 정치·경제의 모든 영역에서 우위에 있었기에 이들이 취향과 경제력이 회화문화를 이끌었다. 중국 문인들이 펼쳐낸 문인화론은 문인계층의 가치로 예술을 해석하고 독차지하려는 요구 속에서 지속되었고, 사회제도와 권력구조가 이를 뒷받침해주었다.
문인화론은 이러한 배경 속에서 구체적인 회화양식을 제공하였고 그 회화양식은 화법의 정식이 되어 화원화가들에게도 영향을 주었다. 북송 문인들은 섬세한 붓질을 거부하는 졸박한 선묘(일명 백묘白描), 거칠게 찍는 묵점(일명 미법 혹은 미점米法/米點) 등의 필묵법을 사용하면서, 대상의 외양이나 필묵의 테크닉보다는 그리는 이의 내면을 표현하노라 주장하였는데, 이러한 필묵법은 송대화원의 화가들이 운용하지 않는 거칠고 미숙한 필묵법이었지만, 문인계급의 정치·경제력에 편승하여 시대가 흐르면서 막강한 영향력을 발휘하게 되었다. 원대의 문인관료층에서 발달시킨 묵죽(墨竹)과 묵난(墨蘭) 또한 한국과 중국의 근대기에 이르도록 실제와 이론에서 꾸준히 발전했다. 명대 문인화가들이 원나라 문인의 화법으로 특별히 존중된 피마준법은 명청대 문인화법의 공식으로 활용되었다. 청대회화에서는 사왕(四王)이나 유민(遺民)화가의 큰 갈래가 문인화의 두 갈래로 해석되기에 이르렀다. 문인화의 영향력이 실제 화단에서 화원화를 섭렵한 역사적 결과이다.
문인화 우위론은 그 위세가 천년 이상 지속되다가 역사의 격변을 맞은 중국 근대기에 의심과 지탄의 대상이 되었다. 한국에서도 명청대 정립된 문인화법으로 그림을 그리던 마지막 화원화가들이 사라지고, 조선미전이라는 근대 제도가 들어서면서 전통시대 문인계층의 사라짐과 함께 문인화의 존재도 사라졌다.
야나기의 ‘민화’의 용어와 개념의 선포는 1959년에 발표되었다. 그는 서구를 학습한 일본의 지적 토대 위에서 식민국가를 거느린 지배국가의 지식인으로서, 피지배국의 민족이 만든 산물이라 여겨지는 그림들을 일러 ‘민화’라 칭하기 시작했다. ‘민화’는 야나기에 의하여 ‘만들어진 개념’이다. 야나기가 수집했던 ‘민화’는 그의 묘사로 미루어 연꽃과 물고기, 게 등이 그려진 화면, 정물이 그려진 것, 원근법이 반듯한 선으로 사용된 것, 유교적 불교적 도교적 내용의 민간신앙적인 것 등 다양했다.¹⁶⁾ 야나기의 ‘민화’는 조선후기 이규경(李圭景, 1788~?)이 지목한 ‘속화(俗畵)’와 그 실제적 대상이 같은 것으로 이해할 수 있지만, ‘민화’라는 의미로 부른 대상과 ‘속화’로 지칭된 대상의 의미는 현격하게 다른 것이어서, ‘민화’가 ‘속화’의 이름으로 대치되어 이해될 수 없다.¹⁷⁾ 야나기가 부른 ‘민화’는 그 개념에서나 실상에서나 사실은 우리 역사 속에 없었던 것이다. ‘민화’의 개념과 가치에 대한 한국 내부에서의 본격 담론은 야나기가 ‘민화’의 용어를 제기한 수십 년 후의 현대기를 기다려야 했다.
야나기가 제출한 ‘민화’의 개념은 그의 ‘민예(民藝)’론과 연관된다. 야나기에 따르면, ‘민예’란 ‘민중(民衆)’의 ‘공예(工藝)’ 즉 ‘민중적 공예’로, ‘이름 없는 공인’이 제작한 ‘실용공예품’을 의미한다. 이러한 개념에 대하여 야나기는 의미 혼동을 피하고자 ‘folk craft’로 번역될 것을 제안하였고, 개인적 고급예술은 포함되지 않는다고 규정하였다.¹⁸⁾ ‘folk craft’란 유럽에서 19세기말 ‘fine art’라는 새 개념의 상승에 대응하여 중세 전통의 정신회복을 요구하고자 하는 차원에서 등장한 개념이다. 야나기가 사용한 ‘民’이란 전근대기 문헌상의 ‘民’을 연상케 하기도 하고,¹⁹⁾ 거대한 의미로 이해되기도 하지만,²⁰⁾ 서구적 근대기 역사개념 속의 ‘people’ 혹은 ‘folk’의 개념, 즉 민족국가와 민주주의가 성장하는 시대적 조응이란 시대성을 반영한다는 역사성을 간과하여서는 안 될 것이다.
20세기 초 서구미학론에서 ‘민족성’(民族性 – 종족, 민족적 감성, 민족에 기반한 국가성)은 미술형식의 변화와 지역적 차이를 이해하는 중요한 요소로 자리 잡혀 있었다.²¹⁾ 이러한 배경 위에서 야나기가 생각하고 사용한 ‘민화’란 용어의 ‘民’은 ‘민중’이라는 사회정치적 하위계급의 의미와 ‘민족’이라는 국가구성원 전체를 포괄하는 개념이 혼용되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야나기가 생각한 ‘민’이라는 용어에는 공동체에 대한 상상(想像)의 요소가 개입되어 있었다.
야나기의 ‘민화’ 개념에는 또 다른 시대 정치적 입장이 간취된다. 그는 민화를 대하면서 ‘동양(東洋)의 마음’을 느끼고 ‘행복’을 느꼈노라며 진정을 토로하였는데,²²⁾ 이러한 행복감에는 그가 추구한 미(美)가 민예적 미와 지배국가의 입지가 있었다는 점을 이해해야 할 것이다. 그는 민예의 미가 유럽의 단순화 복귀와 비견된다고 하며, 그 당시 미의 가장 발달된 경지가 단순화된 모더니즘적 양상이라는 기준점에 의거하여 민예의 가치를 높이 보았다. 이 점에서 야나기가 동양을 발견한 행복에는 일본지식인으로서의 옥시덴탈리즘의 관점이 오묘하게 도사리고 있다고 해석될 수 있다.²³⁾
‘민화’라는 개념이 실상에 의거한 명명이라기보다는, 야나기가 처한 정치상황과 학문풍토 속에서 그의 감정과 지식을 교묘하게 만족시킨 대상에 대한 명명이었기 때문이다. ‘문인화’ 개념의 발생이 그러했듯이 ‘민화’의 개념은 그 역사적 실상을 설명하려는 실증적 노력이 아니라 자신이 처한 입지적 가치관에 의거한 문예관의 주장이고 선포였다. ‘문인화’가 그렇듯이 ‘민화’는 역사현상을 지칭하는 듯한 전략을 숨기면서 회화의 특정한 가치와 방향을 주장하는 미래지향적 요소가 있다. ‘문인화’와 ‘민화’는 각 시대의 시대성에 입각한 계층문화를 반영한다. ‘문인’ 혹은 ‘민’이라는 계층은 실제적으로 그림을 가장 잘 그렸던 프로페셔널 화가들(화원화가, 궁정화가)의 역량과 그들이 전문적으로 담당한 회화문화의 실제적 역할을 능가할 수 없는 계층이었다.
여기서 간과할 수 없는 사실은 ‘문인화’와 ‘민화’에서 ‘문인’과 ‘민’은 마치 초능력적 혹은 비현실적으로 자유로운 정신을 소유하고 이를 발휘하여 표현할 줄 아는 예술가로 이상화되어 있다는 점이다. 그것이 각각 ‘문인’과 ‘민’으로 다른 것은 시대성이 반영된 전략이다. ‘문인화’는 문인의 사회적 입지와 학식에 토대를 둔 예술문화를 높이 평가하는 입장에서 11세기 중국에서 개진되어 한국과 중국에서 오랜 기간 지속된 개념이고, ‘민화’는 ‘상상된 공동체’로서의 민(民)의 예술행위에 대한 믿음과 이 믿음에 기반을 둔 미학적 특수성을 옹호하는 입장에서 20세기 전반에 생겨난 개념이다.²⁴⁾
‘문인화’(혹은 사인화)의 개념이 제기되던 11세기 ‘민화’에 해당할 수 있는 속(俗)된 회화문화가 있었을까. 문인들의 회화이론은 기량 있는 화원화가의 세계를 문인의 세계와 비교하여 다루었지만, 세속의 기능적 장식그림은 다루지 않았다. 그것들은 문인들에게 담론의 대상이 아니었고, 말하자면 그림이 아니었다. 한편 ‘민화’ 개념이 대두되기 시작한 시기에 ‘문인화’에 해당되는 영역은 역사에서 위상을 잃어가고 있었다. 근대국가 민족(民族) 개념의 도입 속에서 문인이란 계층이나 계급은 그 실상과 의미가 상실되고 있었다. 20세기에도 종종 ‘문인’을 언급하는 화가들이 있는데 다분히 시대착오적 현상이라 아니할 수 없다.
‘민화’와 ‘문인화’는 용어의 원칙적 개념에 의거하여 볼 때, 일정한 형식이나 양식에 한정되지 않는다. 북송대 소식이 ‘사인화’를 용어로 제시한 이래, 명대의 동기창(董其昌)이 문인화가의 모범을 설정하여 기법을 규정짓고 있지만, “사인(士人)이 그림을 그리는 것은 마땅히 초서와 예서의 기이한 글자 쓰는 법으로 하며, … 달콤하고 세속적인 습속[蹊徑]을 끊어내야 사기(士氣)를 이루게 된다”는 원칙으로 문인화의 근본적 핵심을 명시하였다.²⁵⁾ 북송의 문인화론에서 추구된 ‘평담(平淡)’, ‘천진(天眞)’, ‘천기(天機)’ 등의 추상적 미의식과 동기창의 화론에서 필묵법의 ‘종횡(縱橫)’ 즉 자유로움, 공교함(工)과 졸박함(巧)에 구애받지 않는 지향을 제시한 것은 자유로움과 비기교의 측면에서 상통한다. 송대 이래 청대까지 문인화론의 본질은 얽매이지 않는 정신의 천진한 경지로의 추구였다.
근현대의 중국연구자들은 ‘문인화’에서 형식이 중요하지 않다는 것을 거듭 말했다. 근대기의 진형각(陳衡恪)은 “문인화의 요체는 창작자가 기탁한 내용에 있는 것이지 형식이 어떤가는 실제의 관건이 되지 못한다”고 하였다.²⁶⁾ 현대의 석수겸(石守謙)은, 문인화는 “근본적으로 하나의 이상적 형식관념이지 역사적 사실이 아니기 때문에 … 일종의 이상적 형식(ideal type)을 상징”하기에 문인화는 ‘영원한 전위(前衛)정신’으로 창조적 역할을 담당함으로써 회화사적 가치를 가진다고 하였다.²⁷⁾ 오늘날의 우리 학계에서도 중국과 한국의 문인화는 ‘지성과 철학과 예술이 결합’한 의미로 해석된 바 있다.²⁸⁾
‘민화’의 형식적 측면도 무형식이 특성이다. 야나기는 ‘제멋대로 그려진 그림’이라 표현하면서 “상식을 무력화시키고, 의도하거나 구애받지 않기에 천재나 지혜가 있거나 없거나, 공교하거나 졸박하거나는 문제가 되지 않으니, 소박(素朴) 그 자체”라고 규정하였다.²⁹⁾ 야나기는 ‘어처구니없이 불합리한 민화’라고 부르면서 그 속에 깃든 아름다움의 근원은 무법(無法)의 그림, 불합리를 담담(淡淡)하게 그려나가는 자유로움, 이원대립의 사라짐, 불합리와 파형의 아름다움, 무애(無碍)와 무심(無心)의 경지라 하였다.³⁰⁾
현대의 한국학자들이 민화의 특성에 대하여 다시 서술하기를, ①쉽고 간단 ②솔직 ③익살 ④꿈 ⑤믿음 ⑥따뜻함 ⑦조용함 ⑦자랑하지 않음 ⑧멋 ⑨깨달음 ⑩신바람 등으로 정리하였고,³¹⁾ 혹은 ①자유 ②자연 ③단순 ④흥취 ⑤웃음과 풍자 등으로 정리하였다.³²⁾
이와 같은 ‘문인화’와 ‘민화’의 특성은, 구체형식의 제시를 거부하면서 나아가 형식이나 법식에 얽매이지 않는 자유로운 예술세계를 지향하고 있다. 몹시 흥미로운 사실은 민화와 문인화가 지향한 이상이 상당한 수준으로 상통(相通)한다는 점이다. 격식으로부터의 자유로움과 천진함, 단순, 담담한 등의 경지가 ‘문인화’의 추구로 혹은 ‘민화’에의 애정으로 표현되고 있기 때문이다. 우리나라 선비그림 연구에서 선비그림의 두 가지 특성으로 진취성과 익살골계미가 지목된 바가 있었던 것을 고려하면,³³⁾ 민화와 문인화가 추구한 궁극적 미학에 상통되는 부분이 매우 많다는 것을 알 수 있고, 지향하는 예술세계를 민화와 문인화의 특성에 적용시키는 경향도 볼 수 있다.
11세기 이래 문인이 사회문화의 리더로서 활동한다고 인정되던 시절에 문인의 정신으로 추구되던 자유가, 20세기 이래 민(people)이 공동체의 주제로 활동한다고 인정되어야 하는 시대를 맞이한 뒤 민의 정신으로 추구되는 자유로 교체되었다고 거칠게 정리할 수 있다. 극단적으로 표현하자면, 전근대기 ‘문인화’의 이름으로 추구되던 이상이 현대에 들어 ‘민화’의 이름으로 추구되었다.
말하자면, ‘민화’와 ‘문인화’라는 용어는 그 시대의 사회구조를 기반으로 만들어져 등장한 개념이라는 점에서 역사성(歷史性)을 가지며, 그 시대 특정 계층의 신뢰할 만한 측면을 부각시키는 전략적 주장을 한다는 점에서 용어선포의 정치성(政治性)을 가진다. 또한 이상적 예술관을 지향하는 추구(追求)의 개념으로 기능하기를 소망하며 개진된 개념들이다. 이러한 ‘문인화’와 ‘민화’의 개념에서 볼 때, ‘문인화’와 ‘민화’는 동시대에 함께 했던 두 개의 영토라기보다 시대의 이행 속에서 시간대를 달리했던 세계로 드러나게 된다.

9) 蘇軾, 『東坡題跋』 卷5, 「又題漢傑畵」, “觀士人畵, 如閱天下馬, 取其意氣所到, 乃若畵工, 往往只取鞍策皮毛, 槽櫪芻秣, 無一點俊發, 看數尺許便倦.” 갈로 지음, 강관식 옮김, 『중국회화이론사』 (돌베개, 2010) pp. 219~221 참조
10) 黃庭堅, 『山谷題跋』 卷3, 「題宗室大年永年畵」, “使胸中有數百卷書,”; 趙希鵠, 『洞天淸綠』 「古畵辨」“胸中有數萬書, 目飽前代奇蹟, 又車轍馬迹半天下, 方可下筆.” (갈로 지음, 강관식 옮김, 위책, pp. 242-243 참조)
11) 蘇軾, 『東坡題跋』 卷5, 「書摩詰藍田煙雨圖」, “味摩詰之詩, 詩中有畵. 觀摩詰之畵, 畵中有詩.”
12) 전영숙, 「北宋의 詩畵一律論 硏究」 (연세대 박사논문, 1997)은 소식의 문인화론에 숨은 지식인의 예술계 지배를 논하였다; 홍지희, 「蘇軾의 對象世界 認識과 繒畵論: 北宋代 士人畵의 理念構造」 (연세대 석사논문, 1998) 참조.
13) 韓正熙, 「董其昌論; 문인예술의 이상적 구현인가 예술계의 탐욕인가」, 『美術史論壇』1호, (1995) 참조.
14) 董其昌, 『畵眼』, “不行萬里路, 不讀萬卷書, 欲作畵祖, 其可得乎. 此吾曹勉之, 無望庸史矣.” (동기창 지음, 변영섭·안영길·박은화·조송식 옮김, 『화안』 (시공사, 2003) p.261
15) 명대 高濂의 ‘士氣’와 ‘院氣’의 구분, 청대 芳薰(1736~1799)의 ‘卷軸氣’ 등이 대표적이다. 이에 대하여는 고연희, 「文字香과 書卷氣, 그 함의와 형상화 문제」, 『美術史學硏究』 237, (2003) 참조.
16) 야나기 무네요시, 「조선시대의 민화」, 『民藝』 59호 (1957. 11); 야나기 무네요시 지음, 이길진 옮김, 『조선과 그 예술』 (신구, 1994), pp. 270~272; 「不可思な朝鮮民畵」, 『民藝』 80호(1959, 『全集』 6, pp. 507~9); 야나기 무네요시 지음, 이길진 옮김, 위책(1994), pp. 273~280
17) ‘民畵’와 ‘俗畵’의 개념상의 커다란 차이에 대하여는, 정병모, 위책(2012), p. 25 참조. 무엇보다 俗畵라는 말은 내다팔리는 시속의 그림이란 뜻 외에도 풍속화의 명칭으로도 혼용되고 있었다는 점이 지적되었다.
18) 야나기 무네요시, 「民藝의 意味」 (1931), 『全集』16, p.182.
19) 전근대기 일반적으로 ‘民’은 관직이 없는 백성을 뜻한다. 조선후기 ‘四民’에서는 문인이 스스로를 ‘士民’이라 하여 士·農·工·商에 드는 이들을 모두 民으로 보았다.
20) 趙子庸, 「朝鮮民畵槪論」, 『李朝の民畵』 (講談社, 1982) pp.243-244는 야나기의 民에 대한 논의를 치밀하게 시도하였는데, 논의의 결과를 확장시키는 무리가 보인다.
21) 이에 대하여는, 이인범, 『조선예술과 야나기 무네요시』 (시공사, 1999), p. 75 참조
22) 야나기 무네요시, 「조선시대의 민화」 (주 16 참조)
23) 야나기의 옥시덴탈리즘의 측면은, 홍선표, 「조선민화의 새로운 이해」, 계명대학교 한국민화연구소 제 2회 학술세미나 발표지 (2010, 11, 15) 88면 참조.
24) 민화가 ‘超歷史的’으로 존재하고 있다는 해설의 방식은, 이 개념이 역사적으로 산출된 개념이자 시대적 용어였다는 점을 이해하는 데 가장 커다란 걸림돌이다. ‘민화’라고 명명하고 의미를 부여하는 순간, 비로소 그 이전에 민간에 존재했던 이런저런 그림들이 ‘민화’라는 범주로 묶어지고 그 의미로 존재하기 시작한다. 즉 20세기 전반에 ‘민화’라는 개념이 만들어지면서 비로소 우리 회화사에서 ‘민화’라고 믿어지는 회화의 범주가 생겨났다.
25) 董其昌, 『畵眼』, “士人作畵, 當以草隸奇字之法爲之. ……絶去甛俗蹊徑, 乃爲士氣.” (동기창 지음, 변영섭·안영길·박은화·조송식 옮김, 위책, p. 39
26) 陳衡恪, 「文人畵的價値」, 『近代中國美術論集』 (臺北: 藝術家出版社, 1991)
27) 石守謙, 「중국의 문인화는 결국 무엇인가」, 『美術史論壇』 4호 (1996), pp. 11~39.
28) 韓正熙, 「文人畵의 개념과 韓國의 文人畵」, 『美術史論壇』 4호, pp. 41~57.
29) 야나기 무네요시, 「朝鮮畵 眺めて」 (1957), 『全集』 6, pp. 496~497. 　
30) 야나기 무네요시, 「不可思な朝鮮民畵」 (주 15)
31) 金哲淳, 위글(1977), 民畵의 魅力으로 위의 10가지를 제시하였다.
32) 정병모, 『무명화가들의 반란, 민화』 (다미디어, 2011) 1장 ‘민화의 상상력’에 제시한 특성이다.
33) 權寧弼, 「조선시대 선비그림의 理想」, 『朝鮮時代 선비의 墨香』 (고려대박물관, 1996) pp. 141~149 등 참조

III. 두 장르의 경계, 상호교차의 실상

‘문인화’와 ‘민화’의 개념을 역사적 회화작품들의 실상에 적용하여 그 범주를 정하고 그들 간의 경계를 살피는 것은 회화사연구에서 불가피한 작업이다. 다만 야나기가 명명한 ‘민화’들이란 그것들이 원래 제작되던 실제상황과 부합하지 않고, ‘문인화’도 형식화된 것들이 많아 실제적 범주의 규명이 쉽지 않다. 여기서는 ‘민화’와 ‘문인화’로 구분이 비교적 선명한 것들을 예로 들어, ‘양식(樣式)’, ‘주제(主題)’, ‘기능(機能)’ 및 ‘영향력’의 측면에서 이들 그림들이 회화사의 현장(現場)에서 어떠한 모습으로 만났는지 살필 것이다. 이로써 경계영역의 실상과 범주화의 구체적 문제 및 그 의미를 짚어보도록 하겠다.
‘양식’의 전개로 드러나는 회화사의 실상 속에서 조선시대 문인화를 살펴보면, 조선전기와 중기의 문인들이 절파(浙派)의 화풍을 사용하여 성리학적 정신세계를 표현하거나 조선후기 문인화가들이 중국의 화보(畵譜)류를 적극적으로 활용하는 경우 모두 새로운 화풍을 수용하고 시도한다는 점에서 문인화의 진취와 자유를 보여주었지만, 조선말기 화원화가들은 문인화풍으로 그림을 그리게 되어 문인화의 경계가 흐려진다. 중국에서도 원대와 명대의 문인화가들이 구축한 정신과 양식이 있다고 믿어지는데, 중국 북송대 문인 소식이 제기한 화중유시의 개념이 남송대 화원에서 특유의 원체화풍으로 나타났던 점, 명대 오파(吳派)가 이룬 회화양식이 명대말기 전문적 직업 화가들의 상업적 도구가 된 점, 명대말기 동기창이 제기한 문인화론에서 고법(古法)의 창의적 방(倣)이 청대의 보수적 방으로 이어지고 화원화풍으로 정착된 점 등은 문인화의 경계를 흐리게 한다. 이러한 현상들은 문인이 주도한 회화문화가 ‘영향력’을 발휘하여 문인화양식의 고착화와 보수화를 초래한 결과이며, 문인화의 오랜 전개와 높은 위상으로 빚어진 실상이다.³⁴⁾
‘민화’의 형식상 특성에 대한 정리가 여러 차례 시도되었다. 일찍이 야나기는 원근(遠近)·경중(輕重)·강약(强弱)이 반대로 될 수 있고, 불합리하게 보이는 형태라 하였다.³⁵⁾ 이후로 한국의 연구자들은 ①자유로운 형태, ②선묘 위주, ③오방색의 조화와 변화(민화의 가장 뚜렷한 특징), ④구도·원근·움직임·소리 등의 자유로움, ⑤화공(畵工)들의 화관(畵觀)의 자유로움과 창의성, 음악성³⁶⁾ 혹은 ①다시점, ②원근법 무시, ③과거·현재·미래의 동시적 표현, ④사물의 비례 무시, ⑤개별 색채효과 극대화, ⑥평면화, ⑦대칭형 나열형의 구도 등으로³⁷⁾ 정리하였다. 그런데 이러한 특성은, 문인화의 형식적 특성과도 통한다.³⁸⁾ 특히 자유로움이라고 표현되는 조형의 특성이 그러하다. 아울러 형식의 자유로움이란 문인화론에서 동기창이 그림을 못 그리는 사람의 피난처가 될 것을 우려하였듯이, 회화형식의 수준에서 불안감을 동반하게 된다.
문인화와 민화의 ‘주제’를 보면, 민화는 문인화의 모든 영역을 거의 다 망라하고 있다. 이미 야나기의 민화수집에서부터 화원화가들이 전문으로 그린 영역(예, 책가도, 채색모란도 등)과 민간종교화까지 그 범주 안에 넣었기 때문에 민화의 주제범주는 문인화에 비하여 상당히 넓다.
‘기능’의 측면에서 문인화와 민화는 이렇게 구분되고 있다. 문인화는 선비들이 뜻을 기탁하고 전통을 익히고 감상 혹은 감계의 개발을 하는 그림으로서의 기능이 요구되었다면, 민화는 장식, 기복, 액막이 등의 기능으로 제작되어 팔렸다는 구분이다. 화면의 주제 및 모티프에 대한 상징과 알레고리의 파악으로 보아, 민화는 감상용이라기보다는 분명히 장식, 액막이, 벽사 등의 현실적 기능을 담당하는 것이 현저하게 많다.³⁹⁾ 그런데 이러한 구분은 엄밀하게 적용되지 않는다. 문인화는 문인들의 정신적 감상 감계를 위하여 존재했고, 민화는 서민집안의 장식용, 액막이용 축복용 등 실용적으로 쓰였다는 구분으로 지나치게 구분되는 것은 문인화와 민화의 경계영역에서 위배되는 양상이 발견되기 때문이다.
감상을 추구한 민화(혹은, 민화로 분류된 그림)가 다양하게 존재했다. 이들은 현실적 기복추구 혹은 벽사 등의 기능을 거부하고, 문인화의 이상적 기능과 동일한 감상용이 되고자 한 이른바 민화들이다. 화면 위에 시구(詩句) 혹은 문학적 전통을 제시하는 이미지가 그려져 있고, 심지어 그린 이의 관지도 쓰여져 있다. 이러한 화면의 제작에는 해당 시문에 대한 소양과 애호가 동반된다. 따라서 이런 류는 상위층의 예술문화를 흠모한 제작이거나 혹은 문인의 직접 제작이거나 문인층이 향유한 물건인데 세련된 필묵법이 구사되지 않았다는 이유로 민화로 분류되고 있을 가능성이 있다. 감상감계용으로 그려진 민화는 산수화, 고사인물화, 사군자류를 포함하는 화조화에서 두루 나타난다.
산수화 중에서는 정통산수화에서 역사가 매우 깊은 소상팔경도(瀟湘八景圖)와 조선후기에 크게 부상하여 문인들이 다투어 그렸던 금강산도가 그 대표적 예가 될 것이다.⁴⁰⁾ 민화 소상팔경도로 대표적 한 폭에는 ‘관폭(觀瀑)’이란 문인화의 오랜 주제가 오버랩되듯 화면에 첨가되어 있고, 그 곁에는 당나라 시인 이백(李白)의 여산폭시가 적혀져 있고(도1, 도2), 소상팔경시가 온전히 적혀진 것도 있다(도 3). 이런 그림은 문인들이 즐겨온 고상한 자연경에 고전시문을 곁들여 문학적 감상을 꾀하는 화면이다.

조선전기와 중기에 널리 그려지고 양반사대부들에 의하여 감상·감계용으로 그려지고 감상되던 고사인물도(故事人物圖)들도 민화로 분류된 그림에서 상당한 양을 차지한다. 고사인물도의 회화전통은 본래 문인들이 정치적 자기표현이나 현실적 처세 혹은 자기성찰의 귀감으로 삼았던 내용을 보여주는 문인관료들의 그림문화였다. 관료생활의 기회가 주어지지 않는 서민계층에서는 별 의미가 없는 그림들이다. 고사인물도의 소비층이 얼마나 서민층으로 확대되었느냐의 문제는 풀기 어려운 문제 중 하나이다. 일례로 문인들이 즐겨 감상하던 그림 고사인물도 중 ‘이교(圯橋)에서 짚신을 받다’라는 장량(張良)의 고사가 있다. 이는 충신이며 영웅인 장량이 어린 시절 자신을 극복하고 스승을 접대하는 미담으로 역사를 일구는 엘리트의 포부와 기상을 키워주는 교훈담이다. 18세기 전반의 조선왕실에서 제작된 그림책의 한 페이지에 실린 왕실교육용 그림이며 여기에 대학자 윤순(尹淳)이 그림의 내용을 설명하는 글을 곁에 붙여 한 면을 완성하였다(도 4). 이와 동일한 주제의 그림이 민화류에 있다(도 5). 장량 뿐 아니라, 강태공, 부열, 이윤, 제갈량, 허유와 소보 등 정치적 이야기를 다룬 이야기그림이 민화로 분류된 그림 속에 적지 않다.
이러한 그림들은 민화의 기능으로 지목된 현실기복의 차원을 목적에 두지 않고, 문학작품 감상 중 그림감상의 한 차원을 이룬다. 다만 필묵법의 거침과 경물배치의 불합리성에 의거하여 민화로 분류되었고, 민화로 일단 분류되면 민화연구자들에 민화적 특성이 긍정적으로 강조되어 해석되는 경향이 있다.
그런가 하면, 거꾸로 조선후기 문인들이 직접 그린 회화작품 중에 현실기복적으로 통속화된 주제를 담은 그림이 현격하게 증가하고 있다. 예컨대 대나무·소나무·국화·매화·괴석 등 정신적 고상함의 상징이 주제였던 물상들이 문인들에 의하여 ‘수복(壽福)’의 의미로 바뀌어진 경우가 적지 않다. 소치 허련이 그린 수(壽)자 매화(도 6)뿐 아니라 19세기 사군자류 화면 위 제화시에서 수복의 의미가 적혀진 경우를 많이 찾아볼 수 있다. 이러한 현상은 이미 중국의 명나라 중반기 군자의 덕망으로 비유되던[比德] 고상한 식물이미지들이 기복의 기능으로 와전되는 통속화 경향과 그 궤를 같이 한다. 예컨대 조선후기 문인화가 정학교(丁學敎)가 돌과 국화를 그리고 수복의 의미로 화제를 넣었다.
조선후기 이래로 문인화로서의 사군자류 회화의 주제는 고상한 도덕적 매체로 유지되기도 하였지만, 동시에 노골적인 현실적 기복의 매체로 통속화된 현상이 뚜렷하게 나타났다. 신선적 요소가 산수화에 나타나서 불로장생의 현실적 기복의 의미로 가미되는 경우들도 순수한 산수화의 정신적 경지와 다른 통속화의 양상이었다. 문인들의 회화 주제 자체에 나타나는 변화는 문인화 내부에서의 세계관의 변화 혹은 문인화의 이상이 소멸되어가는 역사적 현상으로 볼 수 있으며, 당시 사회계층상 양반층의 확대와도 밀접한 관련이 있을 것으로 판단된다. 통속화된 문인화와 민화의 기능은 어떻게 구분될까. 오히려 민화로 분류된 그림들 사군자가 정통의 정신세계를 표현하려고 한 노력이 적지 않다. 이는 문인화와 민화가 상호 교차하는 경계영역으로 드러난다. 문인화가 민화로 영향을 주었다는 일방적 영향론은 여기서 제고를 요하게 된다.
문인화가의 그림과 민화로 분류된 그림이 사실상 별 차이가 없는 경우도 허다하다. 예컨대 남계우(南啓宇)나 신명연(申命衍) 등 문인화가들이 그린 군접도(群蝶圖) 혹은 꽃과 나비의 조합으로 그려진 문인화가의 소품들은 민화로 분류된 화조도 혹은 군접도와 차별성을 구별하기 힘들 정도로 유사한 기법과 주제를 보여준다. 심사정(沈師正)이나 강세황(姜世晃)등의 대표적 문인화가들이 열어놓은 화조화소품들과 민화 화조화들은 같은 범주로 놓고 연구를 하는 것이 차라리 바람직해 보인다.
흥미로운 예를 제시할 수 있다. 심사정의 는 매가 토끼를 움켜잡은 장면으로(도 7), 매의 위력이 간악한 토끼를 잡았다는 메시지를 전달함으로써 충신이 간신을 포획하는 충성과 용기의 상징으로 정착된 그림이다. 이러한 매의 위력은 주술력을 가지는 이미지로 인정되면서 조선후기에 매 그림은 실로 널리 제작되었고 매 부적으로 발전하였다. 삼재부적용으로 그려진 매 그림(도 8)을 비롯하여 민화로 그려진 매 그림(도 9)들이 모두 그러한 기능성을 가지게 된다.⁴¹⁾ 여기서 매가 토끼를 움켜지는 이미지는 문인화가 심사정의 매 그림 이미지를 따르고 있으며, 이 이미지는 조선전반기 이암(李巖)의 매 그림으로 연원이 올라간다.⁴²⁾ 매 그림을 즐겨 감상하던 왕족 및 관료문화의 회화문화가 민화로 분류되는 그림 속에 드러나는 경우라 할 수 있다. 화조화 가운데 매화그림도 문인화와 민화가 섞여드는 영역이다. 19세기 문인들에게 홍백(紅白)으로 조합된 매화그림이 크게 유행하였고, 민화병풍 중에도 거대한 매화병풍들이 매우 많다. 19세기 문헌상에 기록되는 신사임당의 회화작품은 그 이전의 문헌에서 별로 등장하지 않았던 매화도가 대부분이다. 이 시기 매화그림의 성행 및 고상한 문인정신의 표현으로 통용되었던 양상을 보여주는 단면이다. 민화로 전하는 많은 매화도 거작 및 문인의 매화도들은 한 울타리에서 의미를 공유하는 회화문화로 보인다.
더하여 조선시대 문인문화 내부에 자리한 소탈함이나 비이념성의 특수성이 민화의 세계와 자연스럽게 연결되는 양상이 있다는 견해를 더한다면, 문인화와 민화의 경계가 흐려지는 양상의 자연스러움을 쉽게 이해할 수 있다. 조선시대 문인의 정서가 귀족적·이념적이라기보다 서민적·생활적 요소가 있었기에 문인계급과 서민계급은 이미 소통하고 있었다는 점은 중국과 일본과 비교되는 차이다.⁴³⁾ 이러한 사고를 극단으로 몰고 간다면 문인화와 민화의 구분이 와해될 수도 있을 것이다.
문학계의 조선후기 특성 중 하나로 서민의 정서를 다루는 민요풍 한시, 사설시조(辭說時調), 그리고 가사(歌辭) 등이 있다. 그런데 이들 작품들이 실제로는 양반계층에서 제작되었다. 이러한 문학계의 연구결과로 미루어 감상용으로 제작된 민화는 물론이요, 서민적 정서의 민화의 조형특성을 갖춘 민화작품들도 그 제작층에 양반사대부가 포함되었을 가능성이 있다.
민화적 상상력으로 해석된 민화의 표현이, 사실은 문인문화가 흡수된 결과인 경우들이 있다. 민예관에 소장된 《소상팔경도》 중 에서 ‘이태백이 놀던 달’을 동정의 달로 그리고 물에 뜬 달을 붉게 표시한 것은(도 10), 조선중기 이조판서를 지낸 문인 이후백(李後白)의 시조 소상팔경에서 “아미산에 반달 뜬 가을 적벽강산 무한한 경치를 / 소동파와 이백 시인 못다 놀고 남은 뜻은 후에 나 같은 호걸이 다시 놀게 함이로다”라고 읊었던 노래문화가 반영된 것이다. 이러한 연원도 따지자면, 북송대 시인으로부터 여러 문인들이 노래가 있었지만, 민화류 소상팔경의 동정추월 중 ‘月’을 이태백이 놀던 달로 이미지한 점은 조선문인 노래문화와의 연장선상에서 이해할 수 있다. 이러한 붉은 달의 표현에 대하여 민간층의 ‘상상’이라거나 ‘의외의 흥미로운 이야기’의 삽입으로 해석하며⁴⁴⁾ 민화다운 상상 표현으로 평가하는 경향이 있다. 그보다는, 이는 민화와 문인화의 경계영역에서 도출된 시·화의 교통이자 민화와 문인세계의 교차현상으로 파악되어야 할 것이다.

34) 한국회화사에서 이러한 구분의 문제는, 문인화의 양식성 위주로 보는 ‘남종화’, 문인화의 원칙적 측면을 중시한 ‘선비그림’의 용어가 사용되었다. 安輝濬, 「韓國南宗山水畵의 變遷」, 『韓國繪畵의 傳統』 (문예출판사, 1988) pp. 250~309; 강관식, 「南宗畵의 思想的 基盤」, 『韓國思想史大系』5, (韓國精神文化硏究院, 1992) pp.535~592; 趙善美, 「조선왕조시대의 선비그림」, 『澗松文華』 권16 (1979.5); 權寧弼, 위글 등 참조.
35) 야나기 무네요시, 「不可思な朝鮮民畵」 (주 16)
36) 金哲淳, 「民畵란 무엇인가」, 『韓國의 美, 民畵』 (중앙일보사, 1977), pp. 196~198
37) 임두빈, 『民畵란 무엇인가』 (서문당, 1997)
38) 왕백민 지음, 강관식 옮김, 『동양화구도론』 (1989)에 ‘취사선택’ ‘다시점’ 등이 동양일반회화의 특성으로 지적되어 있다.
39) 정병모, 「조선민화의 상징세계」, 『항산 안휘준 교수 정년퇴임 기념논문집』 1권, pp. 460-487에서, 민화의 내용이 벽사, 길상(행복, 장수, 다남자), 고사(故事) 등 기능적임을 밝혔다.
40) 민화 소상팔경도와 오랜 소상팔경도 전통과의 관련양상에 대하여는, 安輝濬, 「韓國의 瀟湘八景圖」, 『韓國繪畵의 傳統』 (文藝出版社, 1988), pp. 162~249; 고연희, 『조선시대 산수화』 (돌베개, 2007) ; 민화 금강산도에 대하여는, 이영수, 「민화 금강산도에 대한 고찰」 (홍익대 석사논문, 1996); 박은순, 「김하종의 해산도첩」, 『미술사논단』 4호 (1996) 등.
41) 조선후기 매 그림의 유행과 주술적 기능에 대하여는, 고연희, 「동아시아 회화의 복제와 파생에 대한 일고찰 — 휘종의 매 그림 유행을 중심으로」 (성균관대학교 대동문화연구원, 『대동문화연구』83권 0호. 2013) pp.131~162 참조.
42) 매가 토끼를 움켜잡는 이미지는, 중국에서는 발견되지 않는다. 이암의 매그림에 대한 제화시에서 그 유래를 찾을 수 있고 심사정 작품 외 조선후기 화조화에서 발견되며 부적 민화류의 그림으로 계승된다. 이암의 토끼 잡는 매그림에 대하여는, 고연희, 「한중 화조화의 정치적 성격」 (이화여대 박사학위논문, 2012) 참조.
43) 조선시대 문인문화의 회화·도자기 등의 양식적 불완전성이 조선시대 예술의 특성 혹은 한국성(韓國性)의 핵심요소로 받아들여져 다양한 용어로 표현되고 있다. 이는 이미 高裕燮, 「조선고대미술의 특색과 그 전승문제」, 『韓國美術及美學論考』 (『고유섭전집』 3, 1993) pp.16-17에서, “조선에 개성적 미술, 천재주의적 미술, 기교적 미술이란 것이 발달하지 않았고, 일반적 생활전체적 생활미술 즉 민예란 것이 큰 동맥을 이루며 흘러 내려왔다”; 李禹煥, 『李朝의 民畵』 (悅話堂, 1977)에서는 조선시대 문인문화속에 생활적 요소가 강하다고 하여, 조선시대 문인화 속에 이미 민화적 속성이 특성이란 특이한 논지를 펼쳤다. 이우환의 논지는, 조선시대 회화문화 자체가 민화적 특성을 가지므로 이것이 응결된 민화의 문화사적 가치는 높다는 결론이 가능하다. 애당초 일본의 야나기가 조선민중의 민화로 조선민족의 미를 대표하고자 한 것도 이러한 이해에 기반된다.
44) 이 그림에 대한 해석은, 『別冊太陽, 朝鮮·韓國の繪畵』 (平淡社, 2008.11), p.130; 정병모, 『민화, 가장 대중적인 그리고 한국적인』 p. 48. 참조.

IV. ‘문인화’와의 비교로 나타나는, ‘민화’의 의미

첫째, ‘민화’는 근대기에 접어들어 회화문화의 한 지향점을 열어준 시대적 존재로 그 의미가 가장 크다. 야나기가 명명하며 수집한 조선민화들은 그의 시대적·정치적·감상적 애호 속에서 의미화되었다. 그러나 야나기가 정의한 민화, 즉 ‘민’(민중 혹은 민족)이라는 거대한 공동체가 생성해내고 소통시킨 문화예술로서의 민화라는 것은 조선말기의 회화 현실의 현장에 존재했던 것은 아니었다. 현대기에 들어 지금에 이르기까지 많은 사람들이 민화를 아끼는 이유는 민화의 역사적 실상보다는 민화에 대한 현대적 가치관에서 비롯한다. 오늘날 ‘민화’의 개념과 그 존재가 제공하는 지향적 의미는 근대이전 ‘문인화’의 명칭이 담당했던 측면이 적지 않다.
둘째, 민화의 가치와 회화사적 의미는 아직 단정 짓기 힘들다. 현대 한국의 회화 현장에서 현재 진행 중이기 때문이다. 민화와 문인화의 경계영역 즉 문인화의 세계에서 민화적 가치로 넘어오는 시기를 보면 민화에 속하는 그림 속에 문인화와 상통하는 요소가 많고 한편 문인들 스스로 민화의 주제와 기능을 제작하였다. 이로 보아 이들은 경계시점에서 다음 시대로의 변화를 겪고 있었다. 이후 현재에 이르는 민화의 시대적 조응은 그 시대에 몸담은 작가들의 몫이 될 것이다. 20세기 중후반에 중앙화단에서 활동한 몇몇 화가들은 근대기의 민화를 생산하였다고 평가받을 수 있다. 운보 김기창(金基昶)이나 오윤(吳潤) 등은 각각 다른 방식으로 민화의 방법과 주제를 당대의 문제와 감성을 담아 창의적 회화활동을 이끌었다고 본다(도 11, 도 12). 오늘날 민화에 대한 개설서가 다시 씌여지고, 민화를 전문적으로 다루는 학회가 만들어지고, 전통의 민화류 이미지 제작법을 학습하여 현대적 창작 민화를 그리려는 사람들이 증가하는 것은 민화의 회화사적 위상이 든든하게 만들어질 조짐이다. 현대 민화에서의 ‘民’은 하층 혹은 민중의 개념보다는 보편적 민족정서의 표현으로 의미화되면서 활용되고 정착할 가능성이 크다.
끝으로 야나기가 수집하고 명명한 민화, 즉 역사적 재분류 혹은 재평가로서의 민화류 작품들이 조선시대 회화사 내부에서 어떤 위상을 차지할 것인가는 문제로 남게 된다. 그 가치평가의 문제는 사실상 앞으로의 민화라는 세계의 실제적 역량에 의해서 변화할 수 있다. 조선후기 민화로 분류되는 작품들은 제작 당시 민화로 제작된 것이 아니라 이른바 ‘속화’로 불리던 것이 많고, 상층문화에 대한 동경으로 주문 제작되었거나 대량 판매되기도 하였지만, 상층사대부가에서 사용한 것들도 많다. 말하자면 당시의 가치관이나 유통상태나 작자층으로 야나기가 정의한 바대로의 민화의 가치를 한정지을 수 없다. 민화류 이미지의 확산과 보편화에 나타나는 회화사적 변화에 대하여 다각적 의미논의가 있어야 할 것이다. 본고에서 제시한 바 문인화와 상통하며 문인화의 세계가 와해되는 과정의 한 면모로 이해하고 문학현상과 비교하여 평가하는 것은 야나기식과는 다른 가치평가의 한 예가 될 것이다.
역사적으로 분류된 조선후기 민화류 회화에 대한 회화사적 자리매김은 지속적 연구를 통하여 드러날 것을 기대한다. 그 연구는 각 장르의 각 주제에서 문인화와 민화의 영역을 나누지 않고 하나의 주제와 양식의 흐름 위에서 나타나는 회화사적 전개를 찾아보는 작업이다. 이를테면, 한 폭의 민화 금강산도를 민화라는 범주에 넣고 민화적 특성으로 혹은 상상의 추구나 해학으로 해설하고 끝낸다면 이 한 폭의 그림이 한국회화사에서 어떤 자리를 차지하는지 알 수 없게 되고 민화라는 동떨어진 섬으로 소외된다. 오히려 문인이나 화원이 그린 금강산도의 유행과 주제의 표현을 연구하고 그 맥락에서 민화류 금강산도들을 편입시켜 변모의 구체상을 살피는 것이 한 폭 한 폭 민화 금강산도의 회화사적 위치를 제대로 밝혀주는 작업이 될 것이다. 이러한 자리매김은 전근대기의 민화로 분류되는 회화작품들 전체에 적용시켜야 한다. 금강산도와 같은 것은 그 이미지의 연원이 길지 않지만, 소상팔경과 같이 중국의 송나라로 오르는 산수화도 있고, 학이나 봉황의 이미지처럼 중국의 고대로 연원이 올라가는 화조화도 있다. 그 역사가 어떻게 변화되고 누적되어 민화 속에 의미화 되었는지 역사적 관점으로 살필 필요가 있다는 말이다. 이런 연구 위에서만 ‘민화’라 불리는 각 폭의 그림 속에 회화사의 오랜 역사가 어떻게 반영되어 이미지로 나타났는지 보여줄 수 있을 것이다.

V. 맺음말

이 글은 전근대기 수세기 동안 한국과 중국의 회화사에서 가장 이상적 회화로 군림했던 ‘문인화’와 20세기의 한국회화사에 새롭게 등장한 개념 ‘민화’를 비교하면서 ‘민화’의 개념을 탐색하고 그 회화사적 위상의 정립문제를 다루었다.
‘문인화’와 ‘민화’가 그 시대의 사회구조상 계층을 의미하는 주제어로 내세운 ‘문인’과 ‘민’의 작자층은 사회구조상 상하층으로 대별되는 듯이 들린다. 그러나 사실상 이러한 장르명은 그 시대의 사회구조를 반영하는 역사성을 지닌다는 점에서 공통적이다. 또한 각 시대 특유의 이상적 계층으로서 문인 혹은 민이라는 상상된 개념을 내세워 문인화와 민화의 가치를 설득하면서 문인화와 민화의 내용을 미화시키는 전략적 정치성을 가진다. 나아가 그 시대의 문제로부터 자유로운 가치관을 추구하고 일체의 형식으로부터의 자유로움과 천진무구한 정신성을 지향하는 내용을 주장하는 것을, 문인화와 민화는 각각의 최고가치로 삼고 있다.
문인의 시대는 근현대기를 맞이하면서 그 실상과 의미가 사라져갔고, 민이 영위하는 시대는 현재 진행 중이다. 이 글은 문인화가 민화가 다른 역사성을 가진 다른 시간대의 추구개념이라는 것을 논하고자 하였다. 즉 문인화와 민화는 동시에 공존하며 충돌하던 세계가 아니라 역사를 달리하는 시대에 각각 시대적 필요에 의하여 생성된 개념이라 할 수 있다.
문인화의 실제세계와 민화라 불리는 그림들의 세계를 비교하되, 이 글에서는 이들의 경계영역을 집중적으로 살펴보았다. 즉 이행기의 경계에서 보았을 때, 문인화는 스스로 통속화되는 과정을 보여주고 있었고, 민화는 문인화의 오랜 권위를 추종하는 양상을 보여주고 있었다. 이는 최고의 위상을 자랑하는 문인화가 그 시대적 존재의미를 상실하면서 현실적 요구의 주제에 부응하는 통속적 요구를 반영하는 시대적 변화이며, 전통적 세계의 주제와 형식을 차용하며 전개되는 민화의 새로운 세계가 공존하고 있는 것을 의미한다. 이 글에서 밝히고 있는 경계영역의 양상은 기존의 연구에서 밝힌 바 민화는 문인화의 영향으로 만들어진다는 일방적 영향론에 제고를 요구한다.⁴⁵⁾
한국회화사의 거대한 흐름 속에서 볼 때, 민화라는 개념은 근대기에 생성되어 문인화의 추구이상을 대체하면서 그 가치는 20세기 중반 이후로 인정되기 시작하였다. 현대화단의 화가들이 민화의 표현법을 애호하여 활용함으로써 민화의 영향력이 중심화단으로 들게 되었다. 이러한 점에서 볼 때, 민화가 가지는 한국회화사에서의 위상과 의미의 정립은 아직 미완상태이며 현재진행 중이라고 판단하였다.
다만 조선시대 민화로 분류된 그림들의 위상과 의미를 말하자면, 동아시아 전체 회화사의 양식과 주제의 흐름 속에서 민화를 보아야 회화사적 위상이 밝혀진다는 점을 제시하였고, 민화의 회화사적 역량은 현재 진행 중이기 때문에 조선후기 민화로 분류되는 그림들의 회화사적 가치평가의 문제도 열려있는 상태이고, 야나기식 가치평가에 제한되어서는 안 될 것이라 보았다.

45) 문인화에서 민화로의 일방적 영향관계에 대한 논의는 이 글의 주 7의 내용 참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