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배門排 세화歲畵 민화民畵, 그 개념과 관계 다시보기②

지난 호에서 문배와 세화의 개념과 사용에 대한 기록을 짚어보았다면 이번에는 문배와 세화가 어떻게 민화로 이어지게 되었는지를 살펴보면서 이번 원고를 마무리하도록 하겠다. 조선시대 서민뿐 아니라, 여유는 없고 걱정은 많은 현대인들에게도 위안을 주는 민화. 민중의 사랑을 받고 지금까지 전해온 과정에 어떤 이야기가 숨어 있을까?

민화民畵
조선 후기, 궁중의 세화가 점차 민간으로 확산

궁중의 세화가 민간에 확산해가는 가운데, 그 내용이 다양해지면서 민화民畵로 발전했다. 시대가 내려오면서 근본적으로는 대중만의 취향과 속성을 반영하는 의미도 지니게 되었다. 민화는 무교를 비롯한 불교, 유교, 도교 등 종교적 소재와 생활 주변 및 현실의 모든 물상을 제한 없이 선택해 소재로 사용했으며, 현실을 소재로 삼을 뿐만 아니라 상상의 내용, 전설과 설화 등 무한한 소재들이 등장했다. 나아가 이러한 내용과는 상관없이 그저 장식용으로 사용된 도형들이 등장하기도 했다. 이렇듯 조선 후기의 민화는 그들의 일상생활과 그들의 간절한 염원 그리고 과거의 경험과 미래에 대한 기대치를 고스란히 담고 있는 일종의 ‘백화전서’라 할 수 있다. 문화는 경제적인 발전과 밀접한 관계를 갖고 있다. 조선 후기는 경제력 상승에 힘입어 그 어느 때보다도 세화의 민간 확산이 두드러지고 그 내용도 다양해지면서 민화로 발전했다. 당시의 사회에서 양반 사회를 뒷받침하던 모든 제도가 그 기능을 상실해갔으며, 신분 질서가 붕괴하면서 상층 문화가 민간으로 확산, 변모된 것도 눈에 띈다.
당시 서울에서는 신분을 가리지 않고 누구나 여유 있는 자들은 양반의 의관을 착용하여 양반의 체모를 갖추고 다녔으며, 양반이란 말 자체가 서울 상인들 사이에 호칭이 되다시피 할 정도로 양반의 위신은 땅에 떨어지게 되었다. 17세기 이후에는 엄격한 신분 제도가 해이해지고 양반의 수가 급증했다. 예컨대 18세기 초인 숙종 말년에 전 국민의 9%~10%에 불과했던 양반이 18세기 말인 정조 연간에는 20%까지 상승하고, 19세기 중엽인 철종 무렵에는 신분상승이 더욱 가속화되어 60%까지 늘어났다. 부자 서민이 가난한 양반의 신분을 돈을 주고 사는 일이 빈번해져, 19세기에는 양반이 급증해 신분구조가 변화했으며, 조선 후기에 경제 발전과 신분제도의 와해로 인한 상층문화의 저변화 현상이 나타났고, 그와 같은 사회 분위기 속에서 민화 수요가 증대되었다.
중인 계층도 민화 수요 증대에 크게 한몫했다. 당시 중인 계층은 양반 사대부와 같은 위치에 오르고자 여러 가지 노력을 했다. 특히 역관譯官이나 의관醫官과 같은 기술직 중인들은 관직을 이용하여 치부를 통해 정치적인 권력을 증대시키려고 했고, 서얼庶孼들은 토청운동通淸運動(청직에 나갈 수 있게 해 달라고 요구한 운동)을 통해 사대부의 반열에 오르고자 부단히 노력했다. 이처럼 그들은 양반 사대부와 지적으로 동등해지고자 노력했으며, 따라서 자신들도 양반임을 생활 문화에서 보여 줄 필요를 당연히 느꼈을 것으로 보인다. 그리하여 중인 계층은 그들의 관직을 이용하여 축적한 부를 바탕으로 가옥의 규모를 키웠으며, 전 시대와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많은 글씨와 그림을 장식했다.
이렇게 중인, 서출, 서민의 문화적 역량이 고조된 상황으로 인해 양반들의 문화적 성과물들은 더 이상 그들만의 전유물이 될 수 없었다. 양반들이 향유했던 그림은 자연스럽게 중인 계층을 비롯한 시전 상인과 부농 그리고 양반을 상대하는 기방에 대량으로 붙여지게 된 것이다. 그들 집 안에는 고동서화古董書畵를 가득 쌓아 둘 정도로 호사 풍조가 성행했으며, 이러한 분위기가 전환점이 되면서 결국 세화의 민간 확산이 촉진되었다. 홍만선洪萬選(1643∼1715)의 『산림경제山林經濟』에는 병풍을 혼수품 또는 생활필수품의 하나로 분류해 놓고 있어 조선 후기부터 민화(관화/민화) 수요가 폭넓게 확산했음을 짐작할 수 있다.

 
17~19세기 아시아 전반에 민간 기층문화 열풍

한편 중국은 청대淸代에 이르러 전국적인 유통망을 구축하며 확장된 연화年畵가 유행했다. 이 연화는 국내로 유입돼 민화로 수용되기도 했다. 당시에는 청과의 관계 개선으로 인한 인적·물적 교류가 활발해지면서 내적으로 쌓인 부富를 소비하는 문화적 현상으로 청으로부터 서적이나 서화 등 청 문화의 적극적인 유입이 이루어졌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 17∼19세기 민화의 유행은 중국, 일본, 베트남 등 동아시아 일대를 휩쓴 추세였다. 당시 동아시아에서는 중국의 민간연화를 중심으로 한국의 민화, 일본의 우키요에와 오츠에, 베트남의 테트화 등 민간회화가 유행하였다는 것을 상기할 필요가 있다. 어찌 보면 민화는 목판인쇄의 발달로 동일한 이미지를 대량 생산, 유통하게 됨에 따라 가능해졌다고 볼 수 있다. 우리 민화의 발전은 오히려 여기에 가까운 것이다. 나라마다 약간의 차이는 있지만 공통으로 민화가 동시에 성행하였으며, 하나같이 민간의 위상이 높아지면서 민간의 기층문화가 역사의 전면에 부상하게 된 것은 이 시기의 특색이다. 예컨대 음악에 있어서 판소리, 탈춤, 남사당놀이 같은 향악, 향속이 민중 사이에 널리 유행할 수 있었으며, 진경산수, 풍속화 등과 더불어 양반들의 세화가 서민만의 자유분방한 형태와 색깔을 간직한 민화로 널리 퍼질 수 있었던 것으로 이해된다.
당시에는 민중 자신들의 생활 감정이나 바람, 신앙에서 비롯된 풍부한 상상력과 장식성을 가미한 민화(관화/민화)가 창출되었다. 당시에는 민화를 유통하는 병풍전屛風廛이나 지전紙廛과 같은 상점과 행상 및 연말 연초의 특수를 노려 종각 근처에 배설된 임시 가게가 출현하게 되었다.

속화俗畵라고 불렸던 민화의 쓰임

그런데 짚고 넘어가야 할 것은, 당시에는 민화를 ‘속화俗畵’라 불렀다는 사실이다. 18세기 말 강이천姜彛天(1768∼1801)은 「한경사漢京詞」라는 시를 통해 광통교 기둥에 걸고 파는 속화에 대해 읊었다. 19세기 전반 이규경李圭景(1788~1865)은 『오주연문장전산고五洲衍文長箋散稿』의 「제병족속화변증설題屛族俗畵辨證說」에서 속화라는 명칭과 함께 「수성노인 그림」, 「십장생 그림」, 「용호도」, 「화초도」 등의 제재를 속화라 말한다. 이렇게 새롭게 확산된 민간이나 여항에서의 민화 수요는 ‘속사俗師’와 ‘향사鄕師’ 또는 ‘환쟁이패’로 지칭되던 화장畵匠들이 맡았다고 한다. 당시의 화장들은 ‘지전紙廛 그림쟁이’ 또는 ‘지전紙廛 사람’으로 불릴 정도로 지전을 중심으로 활발하게 활동했다. 1902년, 서울에서 총영사로 1년여 거주했던 이탈리아인 까를로 로제티Carlo Rossetti는 “‘이것들을 문짝에 붙여 놓으면 집에서 악귀를 내쫓는다’며 집집마다 그림을 붙여 전시장을 방불케 했다”고 당시의 상황을 기록했다. 도배지와 함께 집안을 장식하는 데 쓰이는 이런 식의 그림들은 1930년대까지도 지전을 중심으로 활발하게 유통되었다. 또한, 장식 병풍들이 1960∼1970년대까지도 혼례를 비롯한 각종 의례에 사용되었음을 쉽게 확인할 수 있다. 물론 오늘날에도 전통 혼례를 치를 때 마당에 볕가리개을 쳐놓고 대례상大禮床을 가운데 둔 채 식을 거행하는 풍습이 남아 있어, 혼례식을 행할 때 신랑·신부의 배경에 둘러치는 것이 바로 이와 같은 그림 중 하나였다는 것을 새삼 이해하게 된다.

문배의 확산형이 세화, 민간 침투형이 민화

문배는 문에다 어떠한 형상의 그림을 그려서 붙이면 잡귀들이 드나드는 것을 막을 수가 있다고 생각하여 문에 화상을 그려 붙였던 것이 문배 풍속으로 이어졌고, 이러한 문배가 새해 첫날 붙이는 세화 풍속으로 확대되었다.
세화는 사회 서민층까지 깊숙이 침투하여 유행하면서 그 용도가 더욱 다양해져 집안 전체를 치장하는 소박한 품격을 담은 민화로 발전했다. 궁정 취향의 세화를 흉내냈지만 그림의 형식과 내용을 줄이고 보태고 고치는 작업을 통해 각색하고 변용했던 것이다. 세화가 다양한 민화의 특성을 형성하는데 밀접한 관계가 있음을 보여주는 대표적인 예는 ‘까치호랑이 그림’이다. 새해가 되면, 까치호랑이 그림은 궁궐을 비롯한 사대부 집안 대문이나 집안 곳곳에 붙여졌다. 이와 같은 까치호랑이 그림은 시대가 내려오면서 화격畵格의 차이를 가져오고 또 유형화된 도상에서 벗어나는 길을 걷었다. 시대의 변화에 따라 재해석되면서 해학적으로 그려졌으며 그 상징도 다양하게 받아들여졌다. 이 과정을 통해 평민들의 자연관과 생활철학과 미의식이 자연스럽게 그림 속에 스며들게 되었다. 물론 민화는 궁전 장식화뿐만 아니라 일반회화, 종교화, 중국 민간연화와의 관계 등 훨씬 복잡한 연계 속에서 형성된 회화이기도 하지만 문배와 세화는 민화 발생의 직접적인 원류라고 본다.
끝으로 세화와 민화가 우선순위로서 그 존재의 의미가 엄격히 변별된다면, 우리가 추적하기 어렵게 생각하는 민화의 시원은 의외로 쉽게 확인될 것으로 생각한다. 바꿔 말해 세화가 민화 이전에 만들어졌다는 것을 우선 고려하면, 또, 세화와 민화가 밀접한 연관성이 있다고 보면, 결국 민화의 역사는 확연하게 드러나게 될 것이다. 중국의 민간연화는 문신→연화(년화) →민간연화(년화)의 전승 과정을 통해서 형성된 것으로 현재 활발하게 연구되고 있다. 이때 연구자들은 문신이나 연화는 민간이 아닌 궁정에서 먼저 시작되었다는 것을 염두에 두고 연구를 진행하고 있다. 우리의 민화도 문배→세화→민화로 연결되는 과정을 발견한 것은 매우 중요한 의미가 있는 것으로 평가되고 있다.
일찍부터 우리 선조들은 그림이나 글귀를 집안이나 대문에 붙여 가택을 보호하도록 했으며 행복과 장수를 기원하고 자손 번성을 바랐다. 그런데 시대가 바뀐 오늘날에도 이러한 염원은 달라지지 않았고, 어쩌면 오늘날은 더욱더 그러한 풍습이 필요하지 않나 싶다. 우리는 현대의 바쁜 삶 속에서 너무나 싫었던 경험들을 많이 겪었고, 정신적 피로가 누적되어 시들해져 가고 있다. 일상생활에서 야기되는 갈등, 놀람, 불안, 초조, 짜증 등의 스트레스에 의해 만신창이가 되어 가고 있다. 모두 잊고 살면 마음이 편하겠지만, 언제 닥칠지 모르는 사고와 재난에 휩싸여 사는 것이 현실이다. 민화는 바로 이러한 현대의 바쁜 삶에 우리들의 간절한 소망이나 무병장수할 수 있는 에너지를 전달받을 수 있는 것으로 여전히 필요한 존재다.

 

글 : 김용권(문학박사/경희대학교 교육대학원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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