립스틱 문자도 선보인 중견 작가 전병현

전병현 작가가 지난 9월 2일부터 9월 22일까지 나마갤러리에서 개인전을 개최했다.
50여점의 신작 중에는 립스틱으로 그려낸 문자도 초상화 시리즈가 처음으로 공개돼 큰 호평을 받았다.
행복을 욕망하는 현대인의 모습부터 생동하는 자연의 모습까지,
폭넓은 작품 세계를 아우르는 그를 만나보았다.

글 문지혜 기자 사진 이주용 기자


눈을 감은 얼굴 위로 문자도가 피어난다. 전병현 작가의 최신작 < rougestory >시리즈는 색색의 몽당 립스틱을 손으로 문질러 작업한 지두화指頭畵로, 화사한 색감과 몽환적 분위기가 시선을 사로잡는다.
“파란색은 맥, 검은색은 바비브라운…프랑스, 미국, 일본 등 여러 나라에서 보내온 립스틱으로 그린 겁니다.
4년 전쯤 부인과 딸이 서랍에 방치해 둔 립스틱에 착안해 < rougestory >프로젝트를 시작했어요. SNS에 ‘유통기한이 지나 쓰지 않거나 매장에서 샘플로 쓰다 버리는 립스틱을 보내주면 작품으로 선보이겠다’는 글을 올렸더니 세계 곳곳에서 립스틱을 보내주더군요. 프로젝트 첫 해에만 600개의 립스틱을 받았죠. 테스트해보니 생각보다 색이 잘 나왔어요. 오일파스텔과 비슷한 느낌이랄까.”
말하자면, < rougestory >는 전병현 작가와 수많은 여성들의 합작품인 셈. 출품작 18점 가운데 13점이 판매될 만큼 반응도 뜨겁다. 사실 그는 오래전부터 대중과 소통하는 미술을 추구해왔다. 1997년부터 인터넷 카페에 1일
1작품을 업로드하는 ‘싹공일기’를 시작했고 그의 그림일기에 많은 사람들이 열광했다. 큰 호응에 힘입어 연재 작품으로 전시를 두 차례나 열었으며 책도 두 권 펴냈다. < rougestory >시리즈도 싹공일기의 연장선으로, 2015년 개최한 개인전 <눈을 감으면 보이는 것들>의 초상화에 화려한 색을 덧입힌 작품이다.
“당시에도 눈을 감은 초상화를 선보였는데 색이 다소 어두웠고, 메시지도 철학적이라 대중들이 어려워했어요. 다른 방식으로 접근해야겠다 싶어서 이번에는 립스틱으로 컬러감을 더했죠. 여기서 립스틱은 ‘행복’을 뜻합니다. 목적이 무엇이든 여성들이 립스틱을 바르는 건 자신만의 행복을 추구하는 여정이라고 생각했거든요. 머리카락 부분에 그려진 문자도 역시 길상적 의미로 행복이라는 테마와 상통하지요.”

< rougestory >, 2019, 종이에 립스틱, 80×71㎝

파리에서 배운 고구려 벽화 기법, 그리고 한지의 美

투철한 실험정신으로 무장한 전병현 작가. 그를 말할 때 빼놓을 수 없는 작품이 바로 한지 부조 방식으로 작업한 < blossom > 시리즈다. 한지죽을 손으로 찢은 뒤 캔버스에 붙여 황토, 돌가루를 입히고 표면이 마르기 전 먹이나 안료로 채색한 작품으로 조각품을 연상케 하는 우둘투둘한 질감과 은은한 색감이 특징이다. 전병현 작가가 습식벽화 기법이라고 명명한 이 작업은 그가 파리국립미술학교를 다닐 당시 ‘고구려 벽화가 세계 벽화의 원류’라 말한 프랑스인 교수로부터 접했다.
“‘벽화’하면 대개 로마 시스티나 성당 벽화를 떠올리는데 프랑스인 선생님은 고구려 벽화가 실크로드를 따라 유럽에 영향을 끼쳤다고 말씀하셨죠. 그 말을 듣고 굉장히 충격 받았습니다. 그분의 조수 생활을 하며 벽화 기법을 배웠고 제가 개발한 방식을 더해 2006년부터 한지 부조 작업을 이어오고 있어요. 작업은 보통 6개월 정도 걸립니다.”
특히 놀라운 점은 이번 전시작에 사용된 한지 모두 전병현 작가가 기른 닥나무로 직접 만들었다는 것. 그의 남다른 한지 사랑은 파리 유학 시절 만난 이응노 화백의 영향이 크다. 이응노 화백의 작품에 매료된 그는 틈틈이 이응노 화백으로부터 동양화를 배웠으며, 졸업전에 한지 작품을 출품하기도 했다. 귀국 후에는 질 좋은 한지를 물색하다 국가무형문화재 故류행영 한지장인으로부터 한지 만드는 법을 배우기에 이르렀고, 3년 전부터 곤지암 농장에 닥나무 묘목 400그루를 심고 재배하기 시작했다. 그는 매일 새벽 4시 평창동 자택에서 곤지암 농장으로 출근하여 오전 9시 30분까지 농장을 돌본 뒤 집으로 되돌아온다. 낮잠을 자고나서 다시 하루 일과를 시작한다는 그는 “날마다 이틀을 사는 기분”이라며 쾌활히 웃었다.

재료에 대한 치열한 탐구와 융합

그가 곤지암에서 닥나무 농장을 운영하며 얻은 또 하나의 수확은 색색의 풀꽃이다. 한지를 만들 때 사용할 요량으로 황촉규를 심었는데 꽃이 예뻐 화폭에 담기 시작했고 이후 맨드라미, 꽈리 모양의 풍선초, 엉겅퀴 등 100여종의 야생 풀꽃을 연이어 캔버스에 피워냈다. 전시장에서 선보인 풀꽃 시리즈 < blossom >은 캔버스에 아크릴로 작업한 작품으로 전병현 작가는 여기에도 습식 벽화기법을 적용, 서양화 재료로 동양적 미학을 담아냈다.
“서양화의 경우 아크릴 물감이 마르고 나면 또 다른 물감을 겹겹이 올리는 방식이라면, 저는 바탕이 채 마르기 전에 그 속에 다른 물감을 집어넣음으로써 동양화의 수묵 기법을 적용했습니다. 실제 수묵화처럼 바탕지에 안료가 스민다는 이야기가 아니라, 그림을 마주하는 제 생각이 그렇다는 거예요.”
전병현 작가는 백색 바탕이 채 마르기도 전에 물감을 묻힌 붓으로 바탕을 찍어 눌러 각 색상을 캔버스에 아로새긴다. 이로 인해 생긴 두터운 붓자국은 사선으로 빗질된 바탕과 어우러져 자칫 단조로울 수 있는 백색 화폭에 생동감을 불어넣는다.
“바탕으로 쓴 백색은 제가 지난 20여년간 천착해온 색입니다. 청렴결백을 중시한 조선시대 성리학자들은 백색을 정신세계로 통하는 문으로 보았다고 하지요. 조선 시대를 풍미한 성리학 정신, 그 전통의 맥을 백색으로 표현하고자 했습니다.”
이번 전시에서 선보인 풀꽃 시리즈는 ‘완판’됐다.

(왼쪽) < rougestory >, 2019, 종이에 립스틱, 80×71㎝
(가운데) < blossom >, 2020, 캔버스에 아크릴, 100×60㎝
(오른쪽) < blossom >, 2012, 혼합재료, 170×80㎝

작가라면 끊임없이 작품 세계 확장해가야

40년 화업의 전병현 작가는 국내에서 일찍이 두각을 나타낸 중진 작가로, 1982년 제1회 대한민국미술대전에서 고졸 학력으로 대상을 차지해 화제가 되기도 했다. 당시 시샘 어린 뒷담화에 오기가 생겨 이듬해 같은 공모전에 출품, 대상을 또다시 수상할 순 없어 우수상을 받은 일화가 유명하다. 이호재 가나아트센터 회장의 후원으로 유학길에 올랐으며 파리 국립미술학교에서 서양화를 졸업한 후 국내로 귀국하여 끊임없이 작품세계를 확장해오고 있다.
“스스로를 ‘특정 장르’에 속한다고 규정하는 건 편협한 생각인 것 같아요. 작가라면 새로운 길을 만들 수 있어야합니다. 저 역시 하나의 히트작에 의존하지 않고 새로운 작품을 계속 연구하지 않습니까. 여기에 휴머니티까지 더해진다면 더욱 가치 있는 작품을 만들 수 있겠지요. 돈이 많아야 좋은 예술을 할 수 있는 게 아닙니다. 열악한 환경 속에서도 넓은 관점을 갖는 작가야말로 훌륭한 창작품을 만들 수 있다고 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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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간민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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