뜨거운 학구열과 삶의 행복을 그리다 책거리

(그림3) 책거리, 이응록(李膺祿, 1808~1883 이후), 1864~1871년, 종이에 채색, 6폭 병풍, 각 43×120cm, 경산시립박물관

책거리(冊巨里)는 일거리, 이야깃거리처럼 책을 비롯한 문방사우 등 사랑방의 여러 물품을 그린 그림을 가리킨다. 책과 문방사우(文房四友) 등을 주제로 한 책거리 그림은 학문에 대한 열망에서부터 인생의 행복과 장수까지 상징하는 길상화(吉祥畵)였으므로 사대부는 물론이요, 조선 사람 모두가 좋아할 수밖에 없는 그림이었다.

책거리의 정의와 기원

책은 인간이 만든 문자와 언어, 사상과 기술을 담는 그릇이다. 인간의 문명이 비약적으로 발전한 배경에는 바로 책이 있었다고 해도 지나친 말이 아닐 것이다. 특히 조선시대 5백년은 유교와 더불어 문치주의 기풍이 왕성하였으므로, 조선의 선비는 책을 통해 자신을 닦고 나라에 이바지하고자 하였다. 책과 문방사우(文房四友) 등을 주제로 한 책거리 그림은 학문에의 열망에서부터 인생의 행복과 장수까지 상징하는 길상화(吉祥畵)였으므로 사대부는 물론이요, 조선 사람 모두가 좋아할 수밖에 없는 그림이었다.
책거리(冊巨里)는 일거리, 이야깃거리처럼 책을 비롯한 문방사우 등 사랑방의 여러 물품을 그린 그림을 가리킨다. 여기서 ‘거리’는 복수형을 의미하는 우리말로 한자 ‘巨里’는 이두식 표기이다. 책거리와 더불어 많이 사용하는 명칭으로는 책가도(冊架圖)가 있다. 책가도는 말 그대로 책가(冊架), 즉 서가와 같은 가구를 그린 그림이다. 책가가 없이 책과 기물을 그린 그림은 엄밀하게 책가도라 할 수 없을 것 같다. 즉, 책가도는 책가가 있는 그림을 말하고, 책거리는 책가가 있든 없든 책을 중심으로 그린 그림을 모두 포괄한다고 하겠다. 그러므로 책거리가 책가도보다 더 넓은 개념이라고 할 수 있다.
책거리는 중국 청대(淸代)의 장식장인 다보격(多寶格)이나 다보각(多寶閣)을 그린 그림에서 기원하였으며 서양화법의 수용과 밀접한 관련이 있다는 것이 정설로 받아들여지고 있다. 중국 청대에는 고동기, 자기, 문방 등을 진열하는 다보격이나 이보다 큰 규모의 다보각이 궁궐이나 상류층 저택의 실내를 장식하였고 그 모습이 선투시도법을 사용한 선법화(線法畵)로 제작되었다. 조선 후기 연행 사절단을 수행하여 북경을 방문한 화원들은 귀인의 저택에서 선법화로 그려진 다보각도를 접하거나 궁궐의 건축 채화(彩畵)에서도 유사한 문방기명의 모티프를 보았을 가능성이 매우 크다.
배움과 문기(文氣)를 추구하는 책거리는 조선시대의 궁중과 상류층의 공간을 치장하는 장식화에서 출발하여 점차 인생의 행복과 장수를 기원하는 민간의 길상화로 확산되었다.

 

정조의 책거리 구상과 왕실에서의 선호

조선 후기 책거리의 유행은 정조(재위 1776~1800)와 관련이 깊다. 정조는 강력한 왕권 정치를 실시해 가던 7년(1783) 11월, 규장각에 궁중 화원 직제를 신설하고, 정기적으로 실력을 시험하는 등 이들을 후원하고 재교육하였다. 정조는 화원 시험의 주제로 ‘책가’와 ‘책거리’를 정하여 그리게 하였다. 뿐만 아니라 편전(便殿)의 어좌 뒤에 오봉병(五峯屛) 대신 책거리 병풍을 장식하고 흡족해했다는 일화가 전해진다.
규장각의 제학(提學)을 지내며 평소 정조를 가까이 모셨던 오재순(吳載純, 1727~1792)이 1791년에 정조와의 대화 내용을 기록해 놓은 『홍재전서(弘齋全書)』의 「일득록(日得錄)」 기사는 당시의 상황을 잘 전해 준다.

어좌 뒤의 서가를 돌아보며 입시한 대신들에게 이르기를 “경들도 보이는가” 하시었다. 대신들이 “보입니다”라고 대답하자, 웃으며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다. “어찌 경들이 진짜 책이라고 생각하겠는가? 책이 아니라 그림일 뿐이다. 예전에 정자(程子)가 이르기를, 비록 책을 읽을 수 없다 하더라도 서실(書室)에 들어가 책을 어루만지면 오히려 기분이 좋아진다고 하였다. 나는 이 말의 의미를 이 그림으로 인해서 알게 되었다. 책 끝의 표제는 모두 내가 평소 좋아하는 경사자집(經史子集)을 썼고 제자백가(諸子百家) 중에서는 오직 장자(莊子)만을 썼다.”

그리고는 탄식하며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다. “요즈음 사람들은 글에 대한 취향이 완전히 나와 상반되니, 그들이 즐겨 보는 것은 모두 후세의 병든 글이다. 어떻게 하면 이를 바로잡을 수 있단 말인가? 내가 이 그림을 만든 것은 대체로 그 사이에 이와 같은 뜻을 담아 두기 위한 것도 있다.”(제학 신 오재순이 1791년에 기록하다)

이 기록을 보면, ‘책가’ 그림은 책이 꽂혀 있는 서가를 그려서 방 안을 장식함으로써 방 안에 책이 놓여 있는 것 같아 마치 서실에 있는 듯한 문기 넘치는 분위기를 연출했던 것임을 알 수 있다. 그리고 정조는 그러한 분위기 조성을 넘어서서 그 당시 심혈을 기울이고 있었던 문풍(文風) 교정이라는 깊은 정치적, 문화적 우의를 생각하며 책거리 그림에 묘사하는 책의 제목까지 일일이 지정해 주었음을 알 수 있다. 평소 책 읽기를 좋아한 정조는 분주하여 책을 읽지 못할 때 책을 그린 책거리 병풍을 보는 것으로 대신했다. 그런데 책거리 병풍을 어좌 뒤에 펼친 것은 신하들에게 무언가 강력한 메시지를 전달하기 위한 연출로 볼 수 있다. 그것은 바로 문체반정(文體反正)의 교시이다. 즉 당시 청나라로부터 수입한 패관잡기(稗官雜記) 등의 통속적인 글을 비판하면서 정통적인 고문에 대한 진흥을 염두에 두고 책거리를 제작하게 했다. 그림을 통해 정조가 추진한 문체반정의 의미를 되살리고자 한 것이다. 열 첩 병풍 모두에 책을 빼곡하게 쌓은 책가를 그린 국립고궁박물관 소장 는 조선 왕실의 유물로 정조가 어좌 뒤에 설치한 책거리 병풍과 가장 유사한 도상으로 생각된다.
정조의 뒤를 이은 순조 14년(1814) 윤2월에는 김재공, 김득신, 이명규, 장한종, 오순, 김명원, 허용 등의 화원이 자비대령 녹취재에서 ‘중희당책가(重熙堂冊架)’라는 화제로 책가도를 그렸음이 『내각일력(內閣日曆)』에 기록되어 있다. 중희당은 창덕궁(昌德宮)의 낙선재(樂善齋) 부근에 있던 동궁(東宮)으로서 당시 여섯 살 난 왕세자 영(旲, 1809~1830, 諡號 孝明世子, 追尊 翼宗)이 2년 전에 왕세자로 책봉된 뒤 거처하고 있었다. 이때 왕세자는 전해 4월부터 정식으로 사부를 맞아 『천자문(千字文)』을 배우기 시작한 뒤 이제 막 이를 끝내고 새로 『효경(孝經)』을 배우기 시작하던 학동(學童)이었기 때문에 순조와 대신들은 왕세자의 공부와 그 교육적 환경에 지대한 관심을 기울이고 있었다. 따라서 이 중희당의 책가는 순조가 이제 막 글공부를 시작한 어린 왕세자의 교육적인 분위기 조성을 염두에 두면서 왕세자의 처소에 그려 주기 위해 특별히 출제한 것이었을 것이다. 이처럼 책거리의 서막은 조선 후기 왕실에서의 선호에서 비롯되었다.

책가도의 역사를 다시 쓰게 한 장한종
(그림2) 영화 <역린>의 한 장면

▲(그림2) 영화 의 한 장면

조선 후기에 책거리를 잘 그린 화원으로는 정조의 총애를 받았던 김홍도(金弘道, 1745~1806 이후)를 비롯하여, 풍속화가 신윤복의 아버지인 신한평(申漢枰, 1735~1809), 이형록의 할아버지인 이종현(李宗賢, 1748~1803) 등이 알려져 있으나, 이들의 책거리 그림은 전하는 것이 없다.
조선시대 도화서에 소속된 화원들이 공적 업무로 그린 그림에는 대개 이름을 남기지 않았다. 그런데 궁중이나 상류층에서 썼던 것으로 보이는 책가도에는 간혹 작품의 한 쪽에 작가의 이름을 새긴 도장인 은인(隱印)을 슬쩍 숨겨놓아 슬그머니 작가를 드러내기도 한다. 은인이 있는 책가도로는 화원 이형록(李亨祿, 1808~1883 이후)의 작품이 널리 알려져 그가 책가도의 대명사격으로 불리게 되었다. 그러다가 이형록보다 40년 연상인 장한종(張漢宗, 1768~1815 이후)의 가 최근 알려지면서 책가도의 역사를 고쳐 쓰게 되었다(그림1). 장한종의 는 ‘쌍희(囍)자’ 문양을 새긴 노란 휘장 안에 책가가 있는 여덟 폭 병풍이다. 은인은 왼쪽 첫 번째 폭 아래에 있다. 책가 안에 진열된 문방구와 도자기 등은 거의 중국제로 조선 후기 중국 사행에 동행했던 역관들이 북경에서 구입하여 들여온 것들이다.
최근 개봉된 영화 에서 정조가 앉은 용상 뒤에 오봉병 대신 장한종의 책가도를 배치한 것을 보았다. 이에 대해 한국민화학회 회장인 정병모 경주대 교수는 “책거리 병풍은 의 배경이 되는 시기인 정조 즉위 초인 1777년보다 14년 뒤에 제작되었다”면서 “이재규 감독은 너무 일찍 책거리 병풍을 펼친 것이다”고 지적했다. 약간의 오류에도 불구하고 정조가 책거리를 애호했다는 미술사적 사실을 영화에 반영하고자 했던 <역린> 제작진에게 박수를 보내는 마음이다(그림2).

(그림1) 책가도, 장한종(張漢宗, 1768~1815 이후), 18세기 말~19세기 초, 종이에 채색, 8첩 병풍, 361×195cm, 경기도박물관

▲(그림1) 책가도, 장한종(張漢宗, 1768~1815 이후), 18세기 말~19세기 초, 종이에 채색, 8첩 병풍, 361×195cm, 경기도박물관

조선 최고의 책거리 화가 이형록

오늘날 국내·외에 알려진 이형록의 책거리가 얼추 열 점이나 되는 것을 보면 그야말로 ‘조선 최고의 책거리 화가’였다고 해도 지나친 말이 아닐 것 같다. 그가 책거리를 잘 그릴 수 있었던 것은 유명한 화원 집안 출신이었기 때문이다. 할아버지 이종현과 아버지인 이윤민 모두 책거리로 이름을 떨친 화원이었으며 이형록은 그 기량을 이어받았다. 이형록은 조선시대 화가로는 드물게 두 번이나 개명을 했다. 57세인 1864년에 이름을 ‘응록(膺祿)’으로 바꾸더니 불과 7년 후 64세인 1871년에 다시 ‘택균(宅均)’으로 개명했다. 이 때문에 이형록의 작품은 이름만 갖고도 대략 제작 시기를 추정해 볼 수 있다. 이형록이란 인장이 보이면 57세인 1864년 이전이고, 이응록이라면 1864년에서 1871년 사이이며, 이택균이라면 64세인 1871년 이후의 작품인 것이다. 이형록의 책거리 그림을 보면 화면의 구도와 투시법의 구사, 기물의 묘사 등에서 장한종과의 유사점을 쉽게 찾을 수 있다. 장한종이 기물의 윤곽선을 강조한 것에 비하여 이형록은 기물에 음영을 가하여 입체감을 더하는 등 서양화법의 구사가 강화되었음을 알 수 있다(그림3).
앞서 보았듯이 조선 후기에 책거리 그림을 그린 화원들이 많았지만, 화원의 이름을 알 수 있는 현존 유물은 많지 않다. 장한종의 책가도 1점과 이형록의 책거리 10여 점이 알려져 있다. 이 밖에 ‘강달수(姜達壽)’와 ‘한응숙(韓應淑)’의 인장이 새겨진 작품이 알려져 있으나 이들의 생몰년을 비롯하여 구체적인 활동 양상은 밝혀지지 않았다.

(그림3) 책거리, 이응록(李膺祿, 1808~1883 이후), 1864~1871년, 종이에 채색, 6폭 병풍,  각 43×120cm, 경산시립박물관

▲(그림3) 책거리, 이응록(李膺祿, 1808~1883 이후), 1864~1871년, 종이에 채색, 6폭 병풍, 각 43×120cm, 경산시립박물관

행복과 길상의 상징 민화 책거리

조선 후기에 궁중이나 상류층의 장식화로 유행한 책거리가 민간으로 확산되면서 민화 책거리가 발달하게 된다. 주로 대형 병풍으로 제작되었던 궁중 책거리에 비해 민화 책거리는 민간의 주거 공간에 맞게 키가 작은 병풍 그림으로 바뀌었다. 이에 따라 책가 대신 서안 위에 책과 기물을 쌓는 양식의 책거리가 유행하게 되었다. 그림의 소재도 책과 문방구류를 기본으로 하고 길상의 뜻을 지닌 꽃과 과일, 채소 등이 많이 등장한다.
책과 문방구류는 배움과 선비정신, 그리고 문방청완의 취미를 의미한다. 공작꼬리와 산호는 고위 관료, 물고기는 여유와 이익, 수선화는 신선, 매화는 지조와 절개, 연꽃은 순결과 탈속·연생귀자(連生貴子), 국화는 은거처사의 절개, 모란은 부귀, 석류는 다자(多子)·다산, 불수감은 부처와 불교·부(富)를 뜻한다. 또 귤은 큰 행운[大吉], 복숭아는 장수, 포도는 부와 다산, 수박·참외·오이·가지와 같은 넝쿨식물은 다자·자손만대(子孫萬代)를 기원하는 상징으로 그려졌다. 서양식 화법과 투시법을 적용했던 궁중 책거리와는 달리 민화 책거리는 역원근법과 함께 비합리적인 표현을 구사하였는데, 이것이 오히려 민화의 매력으로 작용한다.
책거리에 나타나는 주요한 소재인 중국제 도자기와 문방사우, 골동품 외에도 서양 시계와 같은 이국적인 소재 때문에 책거리는 우리 국민뿐만 아니라 세계인이 좋아하는 그림이 되었다. 오늘날의 한국 작가들은 책거리에 많은 영향을 받았는데, 전통적인 임모(臨模)에서 출발하여 유화, 팝아트와 사진, 조각과 설치미술 등 다양한 장르로 나타나는 현대 작가들의 책거리 작품을 어렵지 않게 만날 수 있다.

박본수 profile

*현 경기문화재단 정책개발팀 선임연구원
*한국민화학회 학술이사(2012~현재)
*경기도박물관 학예연구사 및 학예팀장(2008~2012)
*문화체육관광부 아시아문화중심도시추진단 근무(2004~2008)
*호암미술관·삼성미술관 학예연구원(1993~2001)

 

글 : 박본수(경기문화재단 정책개발팀 선임연구원)

 

저자에 관하여

월간 민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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