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유럽의 보석 폴란드의 전통예술 격동의 역사속에 피어난 찬란한 예술

폴란드의 전통예술

천년의 역사를 간직한 폴란드는 유럽 과학문명의 혁명을 가져온 코페르니쿠스를 배출한 나라이자, 피아노의 시인 쇼팽의 조국이다. 우리에게는 멀게만 느껴졌던 폴란드의 역사와 예술이 우리나라를 찾아온다. 국립중앙박물관은 바르샤바국립박물관과 함께 중세부터 20세기까지의 폴란드의 회화, 조각, 공예품 250여 점을 선보이는 전시를 마련했다. 유럽의 동·서가 나뉘는 경계에서 격동의 역사 속에 찬란히 피어난 폴란드의 예술. 그 가운데 16세기에서 20세기의 작품을 집중 소개한다.

*작품을 클릭하시면 큰 사이즈로 보실 수 있습니다.

사르마티아 시대, 왕실과 귀족에 복무한 예술

폴란드의 정치적·경제적 힘은 16세기와 17세기에 정점에 달했다. ‘동양과 서양의 경계’라는 지리적 위치의 이점을 최대한 활용한 덕에 폴란드의 문화 역시 번성을 구가했다. 이 시기를 일러 ‘사르마티아’ 시대라고 부른다. 이는 폴란드 귀족의 선조가 용맹한 사르마티아 사람이었다는 믿음을 바탕으로 형성된 문화사조다. 사르마티아인들은 동쪽의 볼가강 하류부터 돈강 사이에 이르는(지금의 중앙 러시아) 광대한 지역에 살고 있었다고 추정되는 고대인들이다. 이 전설의 계보학이 사람들에게 널리 받아들여진 것은 역사적 전통의 뿌리를 찾고, 유서 깊은 주변국들 사이에서 자신의 자리를 찾겠다는 마음의 발로였다. 이 사르마티아 사상은 16세기부터 18세기까지 폴란드의 정신, 관습, 문화에 막대한 영향을 끼쳤다. 폴란드가 정치적 압제에 시달리던 19세기에도 사르마티아 정신은 폴란드 전통의 중심이었다. 사람들은 폴란드 귀족이 사르마티아인들로부터 자유에 대한 사랑과 환대와 힘과 용기를 물려받은 자들이라고 생각했다. 사르마티즘은 고유한 문화, 관습을 낳기도 했다.

위풍당당한 폴란드풍 자세와 관棺 초상화

이 당시 예술계에 불던 변화의 바람은 예술의 스타일만 바꿔놓은 것이 아니다. 예술의 목표와 목적 역시 달라졌다. 전통적 형식의 제단화는 점점 수요가 줄어들었다. 그림이 세속화되면서 그림이 수행하는 기능 역시 끊임없이 진화했는데, 폴란드에서 이 변화는 주로 초상화의 역할이 커지는 것으로 드러났다. 하지만 특정인을 기념하고 그의 자손들에게 선조의 지위와 업적을 남기고 싶은 욕망은 당시 대거 만들어진 무덤 조각상으로 발현되었으며, 실제 이것은 폴란드 16세기 예술 형태의 한 특징이기도 하다. 17세기 중반에 정점을 찍고 귀족의 오랜 사랑을 받은 사르마티아 문화 역시 그림보다는 동양풍의 화려한 무기와 드레스, 장인 정신이 깃든 러그 및 값비싼 물건 등에서 훨씬 더 두드러지게 드러났다. 그럼에도 이 문화의 정신을 가장 온전히 표현한 예술 장르는 그림에서 나왔으니, 바로 ‘사르마티아 초상화’다. 이 장르가 유명해진 데는 그 시대의 풍습이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당시에는 상상 속의 선조들을 그린 그림으로 갤러리를 만드는 것이 관습이었는데, 후손들은 이 그림에 자신의 모습을 조금씩 덧붙임으로써 본인의 혈통을 증명했다.
폴란드 초상화의 전통적인 틀은 오랜 세월 변하지 않았다. 늠름한 자세, 소위 폴란드풍이라고 하는 의상, 영웅적인 면모의 남자 인물과 이상화된 여성이 주된 주제였다. 또한 후대가 오래도록 기억할 수 있도록 가문의 문장紋章과 명문銘文, 특히 휘장이나 당사자의 직위 및 품위와 관련된 상징물은 빠트리지 않고 그렸다. 이러한 전통적인 초상화의 예술적 가치는 가지각색이었다. 궁정 화가들이 그린 빼어난 초상화가 있는가 하면, 지역 화가들의 훨씬 평범하고 가끔은 촌스럽기도 한 초상화도 있었다. 초상화에 대한 수요가 늘어나면서 색감과 장식에 힘을 준 지역 화가들의 취향과 역량이 점점 두드러졌고 장인들은 드레스, 무기, 레이스, 직물 패턴, 자수, 털, 기타 장식의 섬세한 부분 하나하나까지 신경 씀으로써 본인의 역량을 드러냈다. 그러나 예술적 가치가 뛰어난 왕족 초상화는 물론이고 보다 평범한 귀족 초상화 모두 전통 폴란드 문화를 규정짓는 현상임에는 틀림없다.
초기 초상화의 독특한 변형이자 폴란드 외의 나라에서는 거의 찾아볼 수 없는 장르가 관棺 초상화다(도 1, 2). 이는 장례를 매우 길고 화려하게 치렀던 17~18세기 폴란드의 당시 풍습과 연관되어 있다. 장례식은 가족들이 모두 모인 가운데 몇 주씩 계속되곤 했으며, 장례식이 열리는 교회에는 고인을 애도하는 특별한 장식이 걸렸다. 이것은 모두 귀족의 부와 지위의 상징이었다. 관 초상화는 장례 기간 동안 관에 붙여 놓은 고인의 초상화를 가리킨다(따라서 망자가 누구고 어떻게 생긴 사람인지를 사람들이 볼 수 있었다). 고인을 마치 살아 있는 양 그린 이 그림들은 놀라울 정도로 적나라해서, 죽은 자가 딱히 아름답지 않더라도 타협하지 않고 있는 그대로의 모습을 담았다. 기존의 재현 초상화와는 반대로 관 초상화는 인간을 구체적으로 묘사하며, 언제나 보는 이를 정면으로 응시하는 눈빛은 초상화 속 인물의 표현을 더욱 돋보이게 한다.
이러한 초상화는 보통 익명의 지역 예술가들이 그렸으며, 장례가 끝내면 교회에 걸렸다.
폴란드 역사의 주요 사건을 그린 역사화
폴란드의 역사적 사건을 그린 역사화는 지나간 영광을 되새기고, 처참한 억압을 보상하고, 국가적 정체성을 옹립하고 유지하기 위한 목적을 띠고 있었다. 세계적으로 유행하는 주제나 경향으로부터 자유로운 ‘폴란드만의 그림’을 만들자는 요구가 점점 강해진 것 또한 역사화가 부상한 이유 중 하나였다.
이 시기의 대표적인 작품은 폴란드 역사상 가장 유명한 화가인 얀 마테이코가 그린 ‘Batory at Pskov’(1872)(도 3)다. 폴란드의 스테판 바토리Stefan Batory(1576~1586 재위)왕이 프스쿠프Pskov를 오랫동안 포위한 끝에 항복을 받아낸 후, 프스쿠프의 원로들로부터 공물을 받는 모습을 그린 작품이다. 역사적 사실을 모르는 사람이라도 이 장면의 의미는 쉽게 파악할 수 있다. 패배한 대신들이 굴욕적으로 무릎을 꿇고 있는, 폴란드의 완벽한 승리다. 폴란드-러시아 전쟁의 막을 내린 이 영광스러운 승리는 이미 수 세기 전에 일어난 사건이었음에도 반反러시아 봉기의 실패 이후 실의에 빠져 있던 당시 폴란드 국민들에게 큰 만족을 주었다. 정치적으로 결박되어 있던 시기에 폴란드인들은 지난 세월의 영광과 힘을 떠올리며 위안을 얻었다.
얀 마테이코(1838~1893)는 역사화에 깊이를 불어넣은 작가로서, 그의 탁월한 재능 덕에 역사화는 그저 과거의 사건을 아름답게 재현하는 것 이상으로 발전하였다. 역사화는 가장 생생하고도 장엄한 형태로 표현된 폴란드 과거에 대한 역사철학적 비전이나 다름없었다. 처음 마테이코의 그림은 독립 상실의 주범인 반역자와 부패한 왕들을 그리는 등, 역사에 대한 고발을 주로 담았다. 하지만 Batory at Pskov 같은 후기 그림에서 화가는 과거의 화려한 영광 쪽으로 방향을 튼다. 마테이코의 목표는 중요한 역사적 사건과 관련해 알려진 모든 사안들을 한 폭의 그림으로 통합하는 것이었다. 역사적 사건의 원인과 결과를 드러내기 위해 화가는 설령 역사적 충실성이 훼손되는 한이 있더라도 여러 사람과 사건들을 같은 장면 안에 표현했다. 덕분에 관람객들은 그저 화려한 의상을 감탄하는 것에 그치지 않고, 역사의 메커니즘 및 국가의 역사에 대해 더 잘 이해하고 알게 된다. 역사 표현에 대한 이 철학적 접근으로 인해 마테이코는 주로 하나의 사건을 그리는 데 집중했던 서양의 다른 역사화가들과는 차별된다.
마테이코의 그림은 교과서, 지폐, 우표 등을 통해 끊임없이 재생산됨으로써 지금까지도 폴란드 국민의 일반적인 역사관을 형성하고 있는데, 그의 예술이 지닌 중요성은 폴란드의 역사관을 만들었다는 데에만 국한되지 않는다. 예술의 숭고한 소명을 굳게 믿은 이 예술가 덕에 폴란드에서 그림은 낭만주의 시와 나란히 ‘국가적’ 예술, ‘예언적’ 예술의 지위를 얻었다. 폴란드의 양심을 움직이는 동시에 나라 잃은 슬픔을 달래고 희망을 주는 예술, 그것이 폴란드에서 그림이 가진 의미다.
역사화는 폴란드의 국가적 정체성을 확립하고 애국심을 불러일으키는 데 공헌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사적인 면을 소홀히 여긴 것은 아니다. 역사화는 역사의 위대한 순간뿐 아니라 영웅들의 개인적 운명 역시 그림으로 담아냄으로써, 전쟁의 압도적인 장관과 더불어 과거 왕들의 사적인 삶을 그대로 보여주었다. 여기서 우리는 사랑과 질투와 절망 같은 보통의 감정을 고스란히 겪는 영웅들의 인간적인 면모를 확인한다. 그리고 관객은 이러한 그림을 통해 자신이 좋아하는 과거 인물들에게 감정이입을 한다. 사람들은 그림 앞에 서서 눈물을 흘리거나 죽은 자의 영혼을 위해 기도하곤 했다. 역사적 장면 및 그 시대의 의상과 소품을 그대로 재현해내는 화가의 재능 덕에 관객은 자신이 저 먼 과거의 시대로 이동해 역사적 사건에 동참하는 듯한 느낌을 갖는다.

폴란드의 서민생활이 담긴 풍경·민속화

역사와 더불어 그림의 주요 주제가 된 것은 풍경이었다. 역사화와 마찬가지로 풍경화 역시 나라의 역사를 가르치기 위한 목적을 띠고 있었으며, 이러한 현실적인 풍경화는 조국에 대한 사랑을 드러내는 방편이었다. 19세기 기라성 같은 폴란드 화가들이 모두 풍경화를 그렸다. 광대한 평야부터 아찔한 산꼭대기에 이르기까지, 다종다양한 그림의 모티브는 폴란드의 자연이 얼마나 다채로운가를 대변한다. 또한 그림을 통해 우리는 봄, 여름, 가을, 겨울의 계절 변화를 느끼고, 하루의 여러 시간대를 맛보며, 빛과 색과 분위기의 변화를 경험한다. 화가들은 폴란드 영혼의 정수라고 여겨지는 시골 풍경 및 시골에 있는 폴란드 귀족들의 대저택들을 주로 그림의 주제로 삼았다. 새와 숲 속 동물들 역시 그림에 자주 등장하는 대상이다.
풍경화는 역사화와는 완전히 다른 예술적 입장을 취하는 장르이기도 하다. 19세기 후반이 되자 사실주의적인 경향이 점점 제 목소리를 내기 시작했다. 사실주의 예술은 역사라는 옷으로 장식이나 위장을 하지 말고, 있는 그대로의 현실을 드러내고자 한다. “그림은 시골길을 그대로 훑는 거울 같은 존재가 되어야 하며, 화가는 역사의 재현을 거부하고 동시대 평범한 사람들의 현실을 그려야 한다”고 그들은 주장했다. 이러한 경향은 “예술의 핵심은 ‘무엇’이 아닌 ‘어떻게’ ”라는 간결한 원칙을 세우는 데 일조했다. ‘그림은 유명한 역사적 인물만큼이나 시골 소녀 역시 잘 재현해야 하는 법이며, 중요한 것은 소재가 아닌 예술적 가치’라는 관점은 그림을 애국이라는 의무에서 점차 해방시켰으며 예술이 온전히 자율적인 영역임을 사람들에게 인식시켰다.
하지만 그렇다고 하여 사실주의 화가들이 고국의 풍경과 거리를 둔 것은 아니다. 더 나은 교육과 직업적 기회를 찾아 해외로 나간 작가들조차 폴란드 고유의 ‘낯익음’에 천착하며 폴란드의 풍경, 들판, 마을, 도시, 농부, 초가 오두막 등을 계속해서 그렸다.
시골 풍경은 마을사람들의 일상뿐 아니라 형형색색의 전통의상, 관습, 공예품, 축제, 의례 등을 표현하는 배경이 되기도 했다. 화가는 물론이거니와 작가와 음악가 같은 예술가들은 폴란드의 전통문화, 민속의상, 수공예품, 그리고 마을 소녀들의 아름다움에 매혹되었다. 소작농은 사실 매우 고단한 삶을 살았음에도 예술가들은 그들에게서 도시 문명의 때를 입지 않고 자연의 이치에 따라 살아가는 이상화된 삶을 보았다. 당시의 그림이 재현하는 폴란드의 시골 마을은 양치기가 피리를 불고, 아름다운 전통의상을 입은 예쁜 커플들이 마을 여관 앞에서 신나게 춤추는 곳이다. 예술가들은 마을 사람들이 들려주는 민간 설화와 신앙에도 호기심을 느꼈는데, 이 역시 민속과 판타지를 주제로 한 그림에 많은 영감이 되었다.
코워미이카Kołomyjka는 남동유럽 사람들이 즐겨 추던 민속춤이다(도 4). 그림 속에서 빙빙 돌며 춤추고 있는 세 커플과 그들을 둘러싼 음악가들 모두 후출Hutsul 의상을 입고 있다. 후출 사람들의 의식과 예술에 대한 관심은 19세기 후반에 그야말로 폭발했다. 특히 크라쿠프 미술아카데미 졸업생들과 크라쿠프에 연고를 둔 예술가(아크센토비치를 포함)들은 그림의 주제를 찾아 후출인들이 사는 지역으로 탐사를 떠나기도 했다. 이들은 후출인들의 음악, 다양한 공예품, 독특한 의상 등에 관심을 가졌다. 이 바르샤바 그림이 사실은 1895년 당시 화가가 살던 프랑스 파리에서 그려졌다는 사실은 흥미로운 지점이다. 파리의 저명한 국립미술사회Société Nationale des Beaux-Arts 그룹의 일원이었던 아크센토비치는 후출 토착민들의 이국적이고도 강렬한 의례가 대중·저널리스트 할 것 없이 프랑스 관객들의 관심을 사로잡으리라 확신했다. 작가는 코워미이카를 주제로 두 개의 수채화를 그렸으며, 후출의 문화는 평생 그에게 깊은 영감의 원천이 되었다.
아폴로니우시 켕지에르스키는 화가이자 책과 잡지의 삽화가였다. 동시대 많은 예술가들이 그러했듯 그 역시 가구 디자인이나 도자기 같은 응용 예술에 관여했다. 그의 작품 대부분은 제2차 세계대전(1939~1945)때 손실되었다. 그가 제일 선호한 주제는 마을의 일상적이고 사실적인 장면들이었으며, 차츰 장식적이고 화려한 스타일의 영향을 받기 시작했다. 다채로운 색상의 피나포어pinafore에 얼굴을 묻고 있는 그림 속 소녀 역시 표현이 장식적이다(도 5). 민속의상 중 하나인 피나포어는 머리나 어깨를 덮는 옷으로 다양한 색상의 울로 만든다. 폴란드 중부에 위치한 워비치Łowicz는 극도로 화려한 색상의 여성 의상을 비롯해 다채로운 민속문화로 명성이 높다. 이 곳의 여성들은 주로 자수 코르셋과 밝은 색상의 줄무늬 스커트, 피나포어를 입는다. 이 지역의 민속문화는 지금도 잘 유지되고 있어서 여성들은 중요한 종교축일이나 가족 잔치 때 전통의상을 입는다.

 

자료제공 : 국립중앙박물관

 

저자에 관하여

월간 민화

Leave a Reply

이메일은 공개되지 않습니다. 필수 입력창은 * 로 표시되어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