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양의 보석, 옥을 빛내다 서울특별시 무형문화재 제37호 옥장(玉匠) 엄익평

옥장玉匠 엄익평
서울특별시 무형문화재 제37호 옥장(玉匠) 엄익평

옥은 예로부터 석지미자石之美者라고 불렸을 만큼 아름다운 돌로 취급됐다. 특히 서양에 다이아몬드가 있다면 동양에는 옥이 있다는 말이 있을 정도로 동양권에서 귀한 대접을 받았다. 다듬기 전에는 그저 빛깔 고운 돌에 불과한 옥은, 자르고 쓸고 쪼고 가는 과정을 통해 빛을 머금은 보석으로 거듭 태어난다. 엄익평 옥장이 지금에 이르기까지 거쳤던 절차탁마切磋琢磨의 과정은 어떠했을까.

금지옥엽金枝玉葉, 금과옥조金科玉條, ‘옥쟁반에 은구슬’, ‘금이야 옥이야’, 옥동자. 옥은 성어나 속담, 혹은 관용적인 표현에서 부정적으로 쓰이는 경우가 없을 정도로 귀한 대접을 받아왔다. 옥은 크게 경옥과 연옥으로 나뉜다. 백옥으로 대표되는 연옥은 비취로 대표되는 경옥보다 굳기가 무른 것으로, 색상은 비슷하지만 화학적으로는 판이하게 다르다. 옥의 특성이나 다루는 방법 또한 차이가 있다.
옥은 삼국시대에는 왕이나 성골만이 가질 수 있는 전용물이었다. 고려시대에는 옥을 다루는 장인을 일컬어 옥인玉人이라고 부른 기록이 남아있고, 조선시대에는 임금의 의복과 궁내의 일용품, 보물 따위의 관리를 맡아보던 관아인 상의원에 열 명의 옥 장인이 배속될 정도였다. 1996년 옥장이 중요무형문화재 제100호로 지정됐으며, 엄익평 장인은 2006년 서울특별시 무형문화재 제37호 옥장으로 지정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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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여섯, 스스로 학업을 중단하고 옥을 만나다

엄익평 옥장이 옥을 처음 만난 건 열여섯 살 때였다. 1959년 칠 남매 중 여섯째로 태어나 지긋지긋한 가난을 겪던 그는 중학교 2학년에 스스로 학업을 중단했다. 둘째 형의 소개로 상도동 터널 근방의 홍종호 씨의 옥공방에서 본격적으로 옥공예를 배우기 시작했다. 1970년대 지금의 춘천시에 속하는 강원도 춘성군 동면에서 양질의 옥인 춘천옥이 발굴, 생산되기 시작했다. 전승이 끊기다시피 했던 옥공예가 다시 꽃을 피웠다. 수습기간에는 옥 원석을 자르고 옥판에 밑그림을 그리고 투각하는 등 절탁 기술의 초보과정만을 배웠는데, 어느 날 스승인 홍종호 씨가 사돈에게 옥공방을 넘겨 버렸다.
“옥공방의 새로운 주인은 장인이라기보다 옥을 잘라본 적도 없는 경영주였습니다. 단순 노동에 그치지 않고 기술 향상이 없는 상황을 어린 나이에도 견디기 힘들었어요. 당장 가게를 그만두고 집 근처 버려진 원두막에 중고기계를 설치해서 옥공장을 차렸죠.”

열아홉, 원두막 옥공장에서 백옥향로를 만들다

19세의 나이에 차린 원두막 옥공장. 남들은 그 초라한 행색에 웃었지만, 그에게는 인생이 걸린 모든 것이었다. 처음으로 도전했던 것은 백옥향로를 만드는 일. 그의 스승이었던 홍종호 씨도 아직은 시기상조라고 말렸지만, 단순히 완성의 의미보다도 이 길을 계속 갈 수 있을까를 가늠하는 시험의 의미였다.
“처음부터 난관이 있었죠. 공구가 없었어요. 완만하게 굽어있는 향로 내부를 다듬는 기구가 그 당시는 흔하지 않았거든요. 저는 청계천 일대를 뒤져가면서 그 기구를 직접 만들기 시작했어요. 당시 2만 4천 원짜리 금속톱을 부숴서 공구를 만들었죠.”
엄익평 장인이 받은 첫 월급이 4천 원가량인 시기였다. 그의 시도는 무모해보일 정도로 저돌적이었다. 복잡한 시도 끝에 그는 결국 백옥향로의 내부를 갈아내는 탁마공구를 스스로 만들어냈다. 공구 자체가 아니라 스스로 구상해서 해결책을 찾은 그 과정이 뿌듯하게 느껴졌다. 백옥향로 제작에 성공한 이후로 일감이 몰려들기 시작했다. 엄익평 장인의 옥공장에 본인과 기능공을 포함한 직원이 모두 일곱에 다다를 정도였다. 그는 아직도 당시 만들었던 기념비적인 공구를 소중히 간직하고 있다고 한다.

화마의 고통 딛고 실력 인정받기까지

나이가 되어 옥공방을 잠시 닫고 방위병으로 군복무를 마쳤다. 다시 옥공방으로 돌아왔을 때 기능공들은 모두 떠난 후였다. 외로웠지만 그가 가야할 길은 옥을 다루는 일뿐이었다. 1995년에는 화마에 의해 작업실 겸 공방이 모두 전소되는 등 시련도 있었다. 가까스로 복구하고 일을 시작했지만 회복은 쉽지 않았다. 그래도 다시 시작할 수 있었던 건 옥에 대한 신념과 집착 덕분이었다. 여러 경진대회와 공모전에서 입상하며 실력도 인정 받았다. 전승공예대전에는 1990년부터 출품하여 1992년 문화부장관상, 1996년에는 특별상인 문화재위원장상, 1998년도에는 국무총리상 등 꾸준히 수상했다.
이처럼 여러 상을 받으며 옥에 대한 열정을 보상받았지만 엄익평 장인은 만족하지 않았다. 끊임없는 연구를 통해 터득한 그만의 옥 상감기법으로 특허 제0322117호를 받기도 했다. 2004년에는 노동부에서 산업포장의 증서를 받았고, 2006년에는 서울시 무형문화제 제 37호 옥장으로 지정됐다.

옥의 효능보다 의미가 중요

절차탁마의 과정을 통해 옥 장인이자 권위자로 인정받아온 세월이지만, 한 가지 걱정되는 것이 있다. 갈수록 옥에 대한 인식이 낮아지는 것이다. 옥이 장식품이자 권위를 상징하는 장신구로 사용됐던 것은 선사시대부터로, 중국 고전 예기禮記에서는 ‘군자는 반드시 옥을 지녀야 한다’는 뜻의 군자필패옥君子必佩玉이라는 말이 생겨날 정도였다. 이처럼 언제나 고급스러운 장신구이자 보석으로 대접받았던 옥이 지금은 예전만큼 그 가치를 인정받지 못하고 있다. 여러 서양 보석의 유입에도 연관이 있지만, 엄익평 옥장은 가장 큰 원인으로 옥에 대한 사람들의 인식이 변한 것을 꼽는다.
“옥을 몸에 지니면 잡귀가 들어오지 않는다. 이런 믿음은 옛날부터 있었죠. 그런데 최근에는 일부 상인들이 마치 만병통치약인 것처럼 옥의 효능을 왜곡하고 과장했습니다. 이런 상술이 오히려 옥의 이미지를 낮게 만들었어요.”
벽사진경酸邪進慶. 과거 사람들은 사악한 것을 내쫓는 의미에서 옥을 지녔고, 그러한 믿음을 가지고 있었기에 마음의 병이 치유되는 심리적인 효과가 있었다. 물론 옥이 지니는 실제 효능이 전혀 근거 없는 것은 아니겠지만, 이를 상술적인 의미에서 만병통치약으로 홍보하는 것은 오히려 옥의 가치를 떨어뜨렸다는 것. 사람들이 옥 제품에 대해 기능성으로 생각하다보니 공들여 만든 작품이 평가절하 되는 것을 보면 속상하단다.

옥 가치 제고를 위한 고민, 그리고 실천

옥을 다루고 연구하며 일평생 살아온 그는 옥에 대한 사람들의 인식을 바꾸기 위해 여러 체험 활동을 비롯한 교육활동에도 공을 쏟고 있다. 무형문화재 교육전시장에서 매일 시행하는 체험 활동 외에도 한국문화의집 KOUS에서 5~6주 정도 진행하는 단기강좌를 통해 사람들이 직접 옥을 만져볼 수 있게 하고 있는 것. 사극 협찬 등을 통해 옥에 담긴 의미를 되새기는 것도 옥을 알리기 위한 하나의 방법이다. 실제로 MBC 드라마 <동이>가 일본에서 방영된 후, 극에 등장했던 쌍가락지를 구매하기 위해 많은 관광객들이 그가 북촌에서 운영하는 가원공방으로 몰려들었다고.
옥공예 기술과 옥에 대한 연구를 넘어 옥의 가치에 대해 고민하고 개선하려하는 자세. 평생 한 길을 걸어온 엄익평 옥장이 지켜나가고 있는 장인정신이다.

 

글 : 박인혁 기자
사진 : 박성일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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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간 민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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