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백문 베갯모 – 임에게로 가는 붉은 비단길 수놓다

동백문 베갯모
임에게로 가는 붉은 비단길 수놓다

한 땀 한 땀 정성스럽게 실로 그려가는 그림 자수. 자수는 민화와 관련이 깊다. 민화 속 다양한 화재 들은 자수로 표현되어 베갯모, 이불 등 침구류는 물론 병풍 등 다양한 생활소품을 장식했다. 이번 호부터는 박물관수繡 이경숙 관장으로부터 듣는 ‘옛 자수에 담긴 수많은 이야기’를 하나하나 소개한다. 첫 번째 이야기는 베갯모에 수놓인 동백꽃 사연이다.


툭. 동백섬의 길섶에서 꽃 떨어지는 소리에 흠칫 놀란다. 푸른색 곱기만 한 바다를 배경으로 동백꽃이 툭툭 붉은 점을 찍어놓은 동백나무 사잇길을 걸어간다. 길섶마다 뿌려진 꽃, 그 사이로 꽃향기가 아득하다. 어쩌자고 저리도 곱게 피었을까? 문득 ‘동백아가씨’의 한 소절이 아득히 들려온다. “…그리움에 지쳐서 꽃잎은 빨갛게 멍이 들었소.” 저리도 붉은 색들을 그리움으로 멍이 든 색이라고 노래하였다. 그리움은 수평선의 안개 같은 것인 줄 알았더니 아니었다. 저렇듯 선연한 붉은 색으로 가슴을 멍들게 하는 것이었다. 조금씩 조금씩 쌓여서 켜켜이 앉은 그리움이 깊고 깊어지면 감당할 수없는 무게로 그저 툭 떨어지고 마는 것인가.
발치에서 웃고 있는 동백꽃을 머리에 꽂고 환한 웃음을 짓는 사람들의 표정을 카메라들이 분주히 잡아낸다. 박하향 나는 바람 속으로 웃음들이 실려가 바다를 간지럼 태우는지 연신 파도는 높다.
옛 여인들은 멀리 길 떠난 임을 기다리며 회문回文을 수놓았다. 왼쪽으로든 오른쪽으로든 방향은 달라도 똑같은 글귀가되는 시를 수놓아서 임이 돌아오기를 간절히 기원했다. 눈빛으로도 임에게 갈 수가 없고, 비단길 같은 목소리조차 들려줄 수 없을 때, 사무치는 마음을 전할 길 없어 임에게로 가는 단 하나의 길을 수繡로 낸 것이다.
동백섬을 건너는 다리 위에 동백꽃을 가슴에 모아 쥐고 서있는 석상처럼 하염없이 기다리는 일밖에 할 수 없을 때 수를 놓았던가? 동짓날 길어진 밤에는 자수에 일선一線을 더 할수 있음을 기쁘게 노래하며, 좁디좁은 바늘귀에 비단실을 꿰어 임에게로 가는 비단꽃길을 내었다.
1906년 경기도 여주에서 태어난 신여성 최영숙은 조선의 첫 스웨덴 유학생이었고 중국과 인도를 거쳐 조선으로 돌아온 뒤 27세에 요절했다. 그 짧은 생애의 기록을 보면 스웨덴에서 경제학 학사학위를 하는 동안 아돌프 황태자의 도서관에서 틈틈이 자료를 정리하고 수繡를 놓아 판돈을 모아서 귀국준비를 하였다는 기록이 나온다. 얼마 남지 않은 돈을 가지고 이집트에서 인도까지 가는 긴 여정에서도 배 갑판 위에서 의자 하나에 의지해 수를 놓고 바느질로 의복을 기웠다고 한다. 낯선 외국의 배 위에서 동양의 작은 여자가 바늘에 의지해 견디었을 시간들이 흰 포말이 부서지는 푸른 바다 위에 그림처럼 펼쳐진다. 스웨덴 유학시절 21살의 동양의 여성을 사랑한 스웨덴의 남성들은 그녀에게 사랑을 구애했지만 그녀는 일기장에 이렇게 쓰고 있다.

“…그러나 S군아 네 사랑 아무리 뜨겁다 해도 / 이 몸은 당당
한 대한의 여자라 / 몸 바쳐 나라에 사용될 몸이라 / 네 사랑
받기를 허락지 않는다.”

그렇지만 먼 뱃길을 타고 당도한 인도에서 인도청년과 결혼한다. 뱃속에 태아를 안고 돌아온 그녀에게 남편이 인도로 돌아올 배 삯을 보내왔지만, 1932년 4월 뱃속의 아이와 함께 생을 마감했다. 스웨덴의 여성운동가 엘렌 케이, 안창호와 간디를 만나 교유했던 높은 지성과 타고난 재능, 그리고 나라를 지극히 사랑했던 신여성은 콩나물 장사로 연명하며 지독한 가난을 온몸으로 견디다 못해 떨어져 버렸다. 당시의 신여성에게 있어서 조선사회는 희망 없는 검은땅 01이었다.
목화솜을 도톰하게 꽃잎 위치에 놓고 그 위에 면실로 서너 번징금한 뒤에 붉은 비단실로 수를 놓아 꽃잎들을 메운다. 꽉찬 잎들은 팽팽하여 금방이라도 향기를 머금고 떨어질 것 같다. 그 베개를 베고 잠들면 천리 뱃길이 멀어 소식 전하지도 못한 임을 꿈에서라도 만나러 갈 수 있겠다. 인생의 망망대해 위에서 바늘이든 붓이한쪽의 하나를 놓치
지 않고 살아가는 일이야 말로 길을 잃지 않는 현명함인지도 모른다. 박물관 한쪽의 베갯모 꽃수에는 아련한 그녀의 온기가 아직 남아있을 것 같다. 그립다. 치열하게 떨어져 내릴지언정 시들지 않겠노라는 그 어여쁜 마음, 붉은 마음 그대로 떨어져 내리는 동백섬의 동백꽃.


글 김용권(문학박사 / 경희대학교 교육대학원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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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간 민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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