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연명陶淵明 – 동쪽 울타리 아래에서 국화를 꺾으며

q1

도연명陶淵明
동쪽 울타리 아래에서 국화를 꺾으며

10월, 마지막 늦더위마저 물러가고 나면 바야흐로 본격적 가을, 이제 국화의 계절이다. 옛 사람들은 국화하면 떠올리는 인물이 있었으니 바로 동진東晉 시대의 시인 도연명이다. 송나라때의 학자 주돈이周敦頤는 「애련설愛蓮說」이라는 글에서 “물과 뭍에서 자라는 풀과 나무에서 피는 꽃 중에 사랑할 만한 것이 매우 많지만, 도연명만 유독 국화를 사랑하였다(水陸草木之花 可愛者甚蕃 晉陶淵明 獨愛菊).”라고 운을 떼었다. 도연명의 국화 사랑이 유명해진 것은 주돈이의 이 글 덕분이었다.
도연명의 인품과 은둔의 삶, 그의 소박하면서도 세련된 시 세계에 매료된 많은 문인들이 도연명의 국화 사랑을 함께 노래하게 되었고, 화가들은 동쪽 울타리 아래에서 국화를 따는 도연명을 그림으로 그리게 되었다

전원시인 도연명

q2
동진에서 유송劉宋으로 왕조가 교체되는 격동기, 군벌의 반란과 농민의 민란이 끊이지 않는 혼란기, 젊어서 청운의 꿈을 안고 유가적 덕치의 이상을 펼치고자 출사하였으나, 부패한 세상에서 도연명에게 기회는 주어지지 않았다.
지방의 말단 관리직을 전전했던 도연명에게 관직은 그저 굶주림을 피하기 위한 삶의 방편이 되었을 뿐이었다.
“전원으로 돌아가자(歸去來兮)”라 외치며 과감히 관직을 내던지고, 고향 강서성 심양 시상현 율리(潯陽 柴桑縣 栗里)로 돌아가 농부의 삶을 시작한 도연명의 선택은 암담한 현실에서 벗어나 비록 빈궁할지언정 유유자적한 생활 속에서 인생을 사색하고자 한 것이었다. 이는 어지러운 세상에 타협하지 않겠다는 도연명 나름의 지조의 표현이었다. 도연명은 소박한 전원의 삶이 자연의 섭리를 따르는 것이요 가장 보람 있는 삶임을 체득해나갔다. 자신의 삶을 꾸밈없이 솔직하게 표현한 그의 시는 ‘전원시’라는 새로운 시 세계의 개척이었다. 특히 간결하고 구어에 가까운 그의 언어는 당시로서는 새롭고 독특한 것이었다.

도연명의 국화 사랑

도연명이 마지막 관직이었던 팽택 현령 자리를 박차고 나와 고향 집으로 향할 때 그의 눈에 맨 먼저 들어온 것은 집 마당에 솟은 소나무와 울 밑의 국화였다.
“삼경은 황폐해졌건만 소나무와 국화는 아직도 그대로 있네(三徑就荒 松菊猶存)”라고 「귀거래사(歸去來辭)」에서 그는 읊었다. 소나무와 국화는 도연명이 객지에서 그리던 고향 집의 상징이었을 것이다. 이제는 세상을 등진 도연명의 은둔의 삶의 표상이 되었다.
도연명의 국화 사랑은 「음주飮酒」라고 하는 20수로 이루어진 연작시에 나타난다. 시의 서두에서 도연명이 설명하기를 “집에 마침 귀한 술이 생겨서 등불에 비친 자신의 그림자를 벗 삼아 매일 밤 빠지지 않고 술을 마셨다.”고 하였다. 이렇게 술에 취해 시를 지으니 그 시가
모여 20수의 연작시가 되었다. 이 중 가장 유명한 것이 제5수이다.


採菊東籬下 동쪽 울타리 밑에서 국화를 따다
悠然見南山 마음 한가로이 남산을 바라보네.
山氣日夕佳 산기운은 해 저물자 더욱 아름다운데
飛鳥相與還 나는 새들도 서로 어울려 돌아오네.

울타리 밑에 핀 국화를 따다가 고개를 들어 먼 산을 바라보니, 석양이 아름다운데 새들도 보금자리로 돌아간다. 소박한 농촌의 삶, 그 삶 속의 소소한 일상이 그려져 있다. 언제나 뜨고 지는 태양이지만 어느 날 그 석양이 눈물 나게 아름답게 느껴지는 것, 이것이 삶의 참뜻이 아니겠는가. 여기서 도연명이 국화에 대한 애정을 따로 표현한 것은 아니지만, 그의 시 속에 함께하는 국화는 마치 그의 삶의 지표와도 같은 존재였던 것 같다. 「음주」 시의 제7수에서는 좀 더 적극적으로 국화에 대한 사랑을 언급하고 있다.


秋菊有佳色 가을 국화는 빛깔도 아름다우니
裛露掇其英 이슬에 젖은 그 꽃잎을 따서
汎此忘憂物 시름 잊게 하는 이 술에 띄워
遠我遺世情 속세 버린 내 마음 더욱 깊게 하네

세속을 등진다고 근심이 사라지는 것은 아니었던 것 같다.
끊임없이 번민하는 시인의 삶에 술은 근심을 잊게 해주고, 그 술에 국화 꽃잎을 띄우고 세속을 향한 미련을 멀리 밀어낸다는 이 구절은 나약한 한 인간의 진솔한 고백으로 들린다.

국화 핀 울 곁에서 거문고를 어루만지다

q3
<좌간남산도坐看南山圖>(도1)는 ‘앉아서 남산을 바라보네’라는 뜻으로, 도연명의 「음주」 시 제5수 중 ‘마음 한가로이 남산을 바라보네’라는 구절에서 제목을 끌어 온 것이다. 도연명이 소나무 아래에서 먼 산을 바라보는 모습이 묘사되었다. 이 그림은 화면 구성이 안정되었고, 산수와 인물의 묘사가 섬세하여 솜씨 좋은 화가의 작품으로 보인다. 동자 두 명이 시립해 서 있고, 도연명 앞에는 현 없는 자그마한 거문고가 보인다. 붓과 벼루도 놓여 있어 시인의 면모를 부각시키고 있다. 울타리 아래에 국화가 만발하였고 그 곁에는 버드나무 다섯 그루도 갖추어져 있다. 도연명이 집 주위에 다섯 그루의 버드나무를 심고 ‘오류五柳’라고 자호했다는 「오류선생전」의 내용에 따른 것이다.
선문대 박물관 소장 <동리채국도>(도2)에서 도연명은 다섯 그루의 버드나무와 국화가 꽉 들어찬 울타리 곁에 앉아 거문고를 만지고 있다. 도연명은 현이 없는 거문고를 가지고 있으면서 어루만지곤 했는데, 거문고의 흥취를 알면 되었지 줄을 만져 소리 낼 필요가 있겠는가라고 했다는 데에서 이처럼 도연명이 거문고와 함께 그려지게 되었다. 이 그림의 상단에는 제시가 적혀 있는데 그 내용은 아래와 같다.


籬下叢菊開 울타리 아래 국화 무리지어 피고,
門前五柳垂 문 앞에 다섯 그루 수양버들 드리워졌네.
葛巾處士時倚杖 갈건 쓴 처사 때때로 지팡이에 의지해
與爾百鳥共忘機 뭇 새들과 함께 세상사를 잊었네.

q4
시 중에 ‘갈건 쓴 처사’ 또한 도연명을 지칭한다.
도연명은 거친 칡베로 만든 두건을 썼는데 그 두건을 벗어 술을 거르는 데에 썼다고 한다. 전주역사박물관의 <도연명도>(도3)는 여백을 더 살려서 고즈넉한 분위기를 자아낸다. 화면 상단에는 “앉아서 거문고를 어루만지고, 처는 국화를 따네(坐撫素琹 翟妻採菊)”라고 쓰여 있다.
소나무와 오류나무, 그리고 울 밑에 만발한 국화가 보인다.
도연명의 처가 국화를 따는 모습을 더한 것이 이채롭다.
중국의 고사지만 도연명은 상투를 튼 머리에 방건을 썼고 처는 쪽진 머리에 한복을 입은 조선인의 모습이다. 한편, <산중독락도>(도4)에서는 혼자서 술잔을 기울이며 먼 산을 바라보는 듯한 선비가 그려졌고, 동자는 거문고를 들고 서 있다. 울타리 아래에 국화가 보이는 식물이 보여서 도연명의 고사를 그린 것으로 보인다. 들판에 논두렁이 그려진 것은 농삿일을 업으로 삼은 도연명의 전원생활을 나타낸 것이라 볼 수 있을 것이다. 프랑스 기메동양박물관 소장의 이 그림은 8폭짜리 산수도병풍 중의 한 폭인데 흥미롭게도 산수 경물마다 지명을 적어 놓았다(도5).
이 화폭에는 도연명의 고향 율리가 그려졌는데, 맨 상단에 정자로 보이는 건물 옆에 ‘율리栗里’라고 동네 이름을 적었고, 버드나무 다섯 그루가 서 있는 옆에는 ‘오림류五林柳’라고 썼다. 또한 ‘동쪽 울타리의 국화’라는 뜻으로 ‘동리국東籬菊’이라 기입했고 그 옆에는 ‘외로운 소나무’라는 뜻의 ‘고송(孤松)’을 적어 넣었다. 이들 명칭은 모두 도연명의 「음주」 시와 「귀거래사」라는 글과 관련된 장소들이다. 이들 이름만 제시해도 도연명이 그 곁에 앉아 멀리 남산을 바라보는 이미지가 자동으로 떠오른다. 이처럼 익숙한 주제가 바로 ‘동쪽 울타리 아래에서 국화를 따다’는 ‘동리채국’의 주제였다.

q5

인간적이어서 더욱 존중 받은 시인

도연명으로 인해서 국화는 은둔의 표상이 되었다. 혼란되고 부조리한 세상을 과감히 떨쳐버리고 고향으로 돌아와 가난하지만 세상과의 타협 없는 소박한 농부의 삶을 택한 도연명이다. 하지만 그의 내면에서는 이에 대한 끊임없는 갈등과 고뇌가 자리하고 있었고, 국화는 그런 도연명에게 삶의 지표가 되어준 꽃이었을 것이다. 나약한 인간임을 숨김없이 고백한 시인이기에 많은 이들의 더욱 큰 공감을 얻었고, 그래서 도연명과 국화는 그토록 사랑받았던 것이 아닐까.

글 유미나(원광대학교 교수)

 

저자에 관하여

월간 민화

Leave a Reply

이메일은 공개되지 않습니다. 필수 입력창은 * 로 표시되어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