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구미술관 <박생광 대규모 회고전>

대구미술관(관장 최은주)은 이번 전시를 통해 박생광이야말로 전통과 모더니즘이라는 건널 수 없는 간극에 다리를 놓은 불세출의 작가였다는 점을 보여주고자 했다. 박생광의 작품에는 불교 미술이 지닌 형식적 화려함, 풍류를 아는 신선사상, 일신日新의 유가 정신, 역사적 혼령들을 화면에 소환시키는 샤머니즘의 마술적 형식이 화면 속 붓질로 물결친다. 박생광이 살아간 시간 속에서 그의 작품을 감상하고 우리의 과거, 현재 그리고 미래를 생각해볼 수 있는 시간이 되었으면 한다.


박생광은 생애 말기 작업으로 전통에 대한 재해석을 통하여 진정한 한국 정체성을 화폭에 담아냈다고 평가받고 작업의 독창성을 인정받았다. 이것을 이루어내기까지 역사의 격변과 함께 구도자적인 자세로 평생을 살아가며 자신의 혼을 화폭에 쏟아 부었다.
박생광(1904-1985)은 진주에서 태어나 고등학교(진주농업학교)를 다니던 시절, 그의 그림 실력을 눈여겨 본 일본인 선생님의 권유로 17세에 일본 유학을 떠나면서 작가로서의 삶을 시작하게 된다. 그는 교토에 있는 학교에 입학하여 동양화와 서양화 수업을 받았다. 당시 일본은 근대화와 민족주의 논의가 활발하였고 일본 화단에서는 신일본화풍이 성행하고 있었다. 신일본화풍의 거장이었던 고쿠라 센깅郷倉千靭의 제자가 된 박생광 역시 많은 영향을 받게 된다. 박생광은 ‘명랑미술전明朗美術展’, ‘대일미술전大日美術展’, ‘일본미술원전日本美術院展’, ‘신미술인협회新美術人協會’ 등에 꾸준히 출품 및 입선하며 자신의 작업적 역량을 키워 나갔다. 1930~1940년대 박생광의 작업은 일본 화단의 전위적인 미술경향에 영향을 받으며, 초현실주의적인 양식을 보이기도 했다.
해방을 앞둔 42세의 박생광은 귀국했다. 해방 이후 한국 화단은 본능적으로 일본화풍을 거부했고 척색주의斥色主義가 완연했다. 이런 분위기의 영향을 받은 듯 박생광은 1967년에 서울에 상경하기 전까지 진주에서 줄곧 생활하며 중앙화단과는 다소 차단된 은둔한 작업 활동을 이어나갔다. 진주에서 거주하는 동안 박생광이 다양한 모색을 시도했다는 흔적이 드문드문 나타나고 있으나, 연속적인 작업량에 의한 일관성과 적극적인 모색이 결여되었기 때문에 이 시기를 그의 방황기라고도 볼 수 있다.

한국 민족성에 대한 치열한 탐구

박생광의 그림은 1970년대 후반에 들어서 자신의 화풍을 정립하는 시기에 접어들고 다양한 기법이 혼재하던 그의 작업이 어느 정도 정리되게 된다. 이미 1950년대부터 간헐적으로 그려 오고는 있었지만 1980년을 전후로 해서 본격적으로 한국적 이미지가 그의 작품 소재의 전반을 이루게 된다. 이때부터 박생광은 본격적으로 한국 민족성에 관심을 가지며 그것을 예술로 승화하기 위해 노력한다.
그는 민족성을 서민문화를 대변할 수 있는 것, 즉 민화적 요소와 한국의 오랜 역사 동안 자리 잡고 있던 불교, 나아가 무속신앙에서 찾은 것이다. 그는 불교를 종교적인 것 이상으로, 고구려시대부터 자리 잡고 있었던 민족문화의 하나로 생각했다. 1982년에 박생광은 인도 성지순례를 떠나 산치탑, 아잔타, 엘로라 석굴 등을 방문했다. “잘 생긴 것을 내 나라 옛에서 찾고, 마음을 인도에서 보고, 그것들을 그린 나의 어리석은 그림들을…”이라는 그의 말에서 알 수 있듯이 박생광은 불교를 통해 정신적 깨달음을 얻고자 했다.
박생광은 한국 민족성의 뿌리를 단군에서 찾았고 1980년대 작업에는 작품 제작연도를 단기로 표기하기 시작했다. ‘내고乃古’로 쓰던 호를 ‘그대로’로 바꿔 사용한 것도 박생광이 얼마나 민족성, 전통성에 관심을 가졌는지 알 수 있는 지점이다.

평생 구도자적 자세로 연구해 독자적 화풍 정립

박생광의 작품 속 색채와 자유로운 화면구성에서는 강한 생명력이 느껴진다. 박생광은 오방색을 사용함에 있어서 화면을 압도하는 강한 힘을 느끼게 하고 괴기스러울 정도로 환상적인 분위기와 방대한 스케일, 자유분방한 구성과 역동적 운율감을 수반하여 화면 구성과 동시에 이루어지는 색채의 자율성과 평면성, 주술성을 더욱 부각시키고 있다. 따라서 작품 속 오방색의 강렬한 색채, 주황색 선의 사용과 수묵과 채색을 혼합한 기법을 통해 마침내 박생광은 누구도 흉내 낼 수 없는 독자적 화풍을 정립하고 인정받게 된다.
박생광이 주목받기 시작한 시기는 그가 70대였을 때다. 사실 작가의 작품세계가 어느 정도 정립되고 나면 기존의 방식을 버리고 새로운 것을 모색하려고 시도하는 것은 매우 힘든 일이다. 하지만 박생광은 달랐다. 기존의 기법을 버리는 것에 주저함이 없었고 구도자적 자세로 깨달음을 얻기 위해 끝까지 노력했다. 역사적 사건에 집중하여 역사화 시리즈를 제작해 우리 민족의 고통과 저항의식을 드러내고 민족의식을 심화하기 위한 작업에 돌입했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10점으로 계획되었던 역사화 시리즈는 <명성황후>, <전봉준>, <역사의 줄기> 3점에 그쳤고, 박생광은 1985년 7월, 후두암 병세가 악화되어 생을 마감하게 된다.
박생광은 우리나라 20세기 역사의 격변을 살다 갔다. 국권을 빼앗기며 역사의 단절의 슬픈 시간을 보냈고 한국의 20세기 미술 또한 그 흐름을 함께 했다. 모더니즘의 영향을 받으며 한국의 모노크롬이 대세를 이루던 1970년대에 박생광은 중심 화단과 거리를 두었고 자신만의 기법을 만드는데 집중했다.
본 전시에는 특별히 박생광의 드로잉 작업이 대거 전시되는데, 풍경, 꽃, 동물, 유물시리즈, 단청연구, 불상, 인도여행 드로잉 등이 소개된다. 이를 통해 우리 고유의 미술을 확립하기 위한 박생광의 지난했던 과정을 한 눈에 파악할 수 있는 계기가 될 것이다.


글·사진 김혜진 (대구미술관 학예연구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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