농자천하지대본을 마음에 새기다, 경직도 초본

경직도 초본 6폭병풍, 20세기 전반, 지본담채, 각 89.5x35.6cm

*경직도 초본 6폭병풍, 20세기 전반, 지본담채, 각 89.5×35.6cm

경직도 초본

이번 시간에 소개할 초본은 호림박물관에서 소장하고 있는 경직도 초본 6폭병풍이다. 대개 초본은 낱폭으로 전해져 오는데, 이 초본은 최근 병풍의 형태로 표구되었으며 그림의 상태가 매우 양호한 편이다.
경직도는 농부들이 농사를 짓고, 누에를 치고 비단을 짜는 모습을 그린 그림으로, 조선에는 연산군 때 처음 들어온 것으로 알려져 있다. 조선왕조실록 중 중종실록에는 경직도에 대해 다음과 같은 기록이 있다.

傳于政院曰 “今見《耕織圖》, 只載圖書詩文, 不便於披閱。 以此作屛風三件以進, 常欲觀覽也.”
정원에 전교하였다. “지금 경직도耕織圖를 보니, 그림과 시문詩文만 실려 있어 보기에 불편하다. 이것으로 병풍 세 벌을 만들어 들이라. 항상 관람하려고 한다.”

경직도 초본 중 일부, 돗자리 골 하나하나까지 세밀하게 그려놓았다.

(경직도 초본 중 일부, 돗자리 골 하나하나까지
세밀하게 그려놓았다.)

이 외에도 명종실록, 숙종실록, 영조실록, 고종실록 등에도 경직도에 관한 내용이 나온다. 이 사실을 바탕으로 했을 때 경직도는 중종 때부터 왕실에서 사용되어왔으며, 왕이 직접 제작을 명할 만큼 중요한 그림이었음을 알 수 있다.
경직도는 왕이 왕세자에게 백성들이 농사를 짓는 과정을 보면서, 백성들의 어려움을 늘 생각하고 바른 정치를 할 수 있도록 학문에 정진할 것을 가르치는 교육의 목적으로 주로 제작되었다. 또한 중종실록의 사례와 같이 임금인 자신도 경직도를 보면서 백성을 향한 마음가짐을 가다듬기 위해 주변에 둘러놓고 감상하였다.
각 초본의 상단을 살펴보면 숫자가 쓰여있는 것을 볼 수 있는데, 一일, 三삼, 五오, 六육, 八팔, 九구 총 여섯 개의 글자가 남아있다(五오라고 쓰인 폭(사진 오른쪽에서 세번째 폭)은 표구과정에서 글씨의 윗부분이 가려져버렸다. 매우 안타까운 일이다.). 이 숫자는 그림을 제작할 때 그림이 들어갈 순서를 표시해 놓은 것으로 보이며, 경직도가 일 년 열두 달의 농사과정을 그린 그림임을 감안할 때, 이 초본의 그림 또한 원래 열두 폭으로 제작되지 않았을까 짐작해 볼 수 있다. 이 사실은 현재 남아있는 경직도 유물들이 대개 열두 폭으로 제작되었다는 사실에서도 알 수 있다.
이 초본을 그린 화가는 이 그림이 초본임에도 불구하고 사람의 표정이라든가 곡식 낟알, 심지어 돗자리 골 하나하나까지 섬세하게 그려놓았다. 이는 이 초본을 바탕으로 그려진 그림이 굉장히 뛰어난 작품이었음을 의미하는 것이며, 이 그림을 주문하는 사람들이 섬세하게 잘 그린 그림을 살 수 있을 정도의 재력과 권력을 가진 사람들이라는 것을 의미한다. 경직도 초본이 남아있다는 것은 왕실뿐만 아니라 사대부가를 비롯한 지배층들 또한 왕실의 풍습을 따라 경직도를 소장하였고, 수요에 맞춰 공급을 위해, 여러 점이 제작되었다는 사실을 반증하는 것이기도 하다.
경직도를 통해 농민들의 고충을 이해했던 조선시대 지배층들처럼, 현재 우리나라 지도층들도 지금 가뭄으로 고통받는 농민들의 고충을 이해하고 그들을 위한 정치를 생각해야 할 것이다.

 

글 : 이다정(가회민화박물관 학예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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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간 민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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