농암 이현보의 적선積善과 애일愛日의 그림


농암 이현보는 생전에 선조에게 적선積善 현판을 하사받고, 사후에는 효절공孝節公으로 추증될 만큼 효도에 힘쓴 인물이다. 《애일당구경첩愛日堂具慶帖》에는 이현보가 효도를 위해 자청해서 지방으로 내려가기 전에 송별회를 하는 모습과, 부모님을 기쁘게 해 드리기 위해 적지 않은 나이에도 부하들 앞에서 색동옷을 입고 춤을 추는 모습 등이 기록된 그림이 실려있다. 이현보의 지극한 효심을 그림과 함께 자세히 살펴보자


<애일당구경첩愛日堂具慶帖>에는 농암 이현보(李賢輔,1467-1555) 선생의 애일(愛日, 부모봉양에 날이 부족하다는 뜻)과 구경(具慶, 부모가 생존하여 경사스럽다는 뜻)의 내용을 담은 그림과 시가 실려있는데, 이첩은 1994년 보물 1202호로 지정돼 현재 안동에 있는 한국국학연구원에 있다. 《애일당구경첩》은 상하 2책으로 구성되어 있다. 상책은 <무진추한강음전도戊辰秋漢江飮餞圖>, <기묘계추화산양로연도己卯季秋花山養老宴圖>, <병술중양일분천헌연도丙戌重陽日汾川獻燕圖> 등 3편의 그림이 있고, 그림 아래에는 당시 명신名臣들이 주인공인 이현보 선생을 전송 또는 송축하는 시가 쓰여있다. 하책은 중종 21년(1519) 가을에 안동부사로 재직하던 농암 이현보가 관청에 노인을 초청하여 잔치를 베풀고 지은 <화산양로연시花山養老宴詩>, <애일당시愛日堂詩>와 황필·황여헌·김안국·이장곤 등 40인의 명사들이 보내온 친필 차운시(次韻詩, 남이 지은 시의 운자韻字를 따서 지은 시)등을 첨부하여 첩장한 것이다. 이 책은 조선 전기 명사인 김안로와 남곤의 자필시도 들어있어 시문은 물론 서예로서의 가치도 높다.

늙은 부모를 위해 외직을 자청한 농암 이현보

농암 이현보는 1467년 7월 29일 경북 안동시 도산면 분천리에서 인제현감이었던 아버지 이흠(李欽, 1440-1537)과 안동 권씨 어머니의 슬하로 태어났다. 32세가 되는 1498년에 문과에 급제해 벼슬길에 오른 후, 예문관검열·춘추관기사관·예문관봉교 등을 거쳐, 38세인 1504년(연산군 10)에 사간원정언이 됐다. 이때 이현보는 서연관의 비행을 탄핵했다가 안동에 유배됐으나 중종반정으로 1506년 사헌부 지평에 복직된다. 1508년에는 부모님이 계신 안동과 가까운 곳에 있기 원해 영천군수로 내려가기를 자청했다. 이후 이현보는 밀양, 충주, 안동, 성주, 대구, 영주, 경주, 경상도관찰사 등에서 30여년간 근무하며 형조참판·호조참판을 지냈고 76세인 1542년(중종 37)에 지중추부사에 제수되었으나 같은해 7월에 병을 핑계로 벼슬을 그만두고 고향에 돌아와 이황李滉, 황준량黃俊良 등과 교유하며 한가롭게 보냈다. 농암의 저서로는 《농암집》이 있으며, 작품으로는 전해오던 <어부가漁父歌>를 장가 9장, 단가 5장으로 고쳐 지은 것과 <효빈가效嚬歌>, <농암가聾巖歌>, <생일가生日歌> 등의 시조작품 8수가 있다. 농암은 자연을 노래한 조선시대 대표적 문인으로 평가받고 있으며, 문학사에서도 강호시조의 작가로 중요하게 여겨지고 있다.
특히 농암은 관직에 있을 때 맡은 바 임무에 충실했고, 특히 누구보다도 강직했던 것으로 알려졌다. 농암 이현보의 강직함을 알 수 있는 새내기 사관시절의 조선왕조실록을 살펴보자.

“신이 사관史官이 되어서 모든 일을 자세히 듣고 갖추어 기록하여 후세에 전하고자 하지마는, 다만 전하께서 경연經筵에 납실적에, 신 등의 자리가 가장 멀기 때문에 대간이 아뢴 말을 혹시 미처 자세히 다 들을 수 없으면 밖으로 나가 대간臺諫에게 물어서 쓰게 되니, 사체事體가 온당하지 못합니다. 하물며 전하께서 전교하실 때 미처 듣지 못하는 일이 있으니, 신의 생각으로는, 사관이 대관 앞으로 나가서 들으면 비록 미처 다 쓰지 못하는 일이 있더라도 밖으로 나가서도 잊어버리는 일은 없을 것으로 여겨집니다. 또한 인사 담당 관리들이 직무를 보는 곳에도 사관을 참석하게 해 주십시요”라고 농암이 춘추관 기사관이라는 새내기 사관으로서 연산군에게 중요한 사안을 제대로 기록해야 된다는 소신을 밝힌 것이다. 연산군은 “나의 말소리가 분명하지 못하니 자세히 말하더라도 다 듣지 못하고 정청에 사관들을 참여시키는 것은 예부터 없는 일이니 아니 된다”고 하였다.
– <연산군일기> 권46 8년(1502년)10월 28일

이처럼 농암은 사실을 있는 그대로 정확히 기록하는 사관으로서의 임무를 다하기 위해 권력의 눈치를 보지 않고 소신 있는 태도를 보였다. 그러나 연산군은 농암의 당돌한 요청에 내심 그를 괘씸히 여기다가 2년 후에 새삼 장형(杖刑, 큰 곤장으로 볼기를 치는 형벌)을 내렸다.

구로회를 조직해 경로사상의 모범이 되다

농암은 67세가 되는 1533년에 94세의 아버지 이흠과 92세의 숙부, 82세의 외숙부 김집을 중심으로 구로회九老會를 조직했다.

“예로부터 우리 고향은 늙은이가 많았다고 했다. 1533년 가을 내가 홍문관 부제학이 되어 내려와 성친하고 수연을 베푸니 이때 선친의 연세가 94세였다. 내가 전날 부모님이 모두 계실 때 이웃을 초대하여 술잔을 올려 즐겁게 해드린 것이 한 두 번이 아니었다. 그러나 지금은 아버지만 계시는지라 잡빈은 제외하고 다만 향중에 아버지와 동년배인 80세 이상의 노인을 초대하니 무릇 여덟 사람이었다. 마침 향산고사에 ‘구로회’라는 모임이 있었는데, 이날의 백발노인들이 서로 서로 옷깃과 소매가 이어지고, 간혹은 구부리고 간혹은 앉아 있고 편한 대로 하니 진실로 기이한 모임이 아닐 수 없다. 이런 연유로 ‘구로회’를 열고 자제들에게 이 사실을 적게 하였다.”
-《농암집》의 <애일당구로회서>

구로회와 같은 모임은 본래 기로회耆老會 또는 기영회耆英會라 하여 사대부 문인의 모임 중에서 가장 영예롭게 여겨졌다. 기로회와 기영회는 나이가 많아 은퇴한 사대부들의 모임으로 일종의 동갑회同甲會 성격으로 시작됐다. 그 연원은 당나라 회창 연간(會昌 年間, 841-846)에 백거이가 주선한 향산구로회香山九老會, 북송대 지화 연간(至和 年間, 1054-1055)에 두연 등이 조직한 오로회五老會, 북송 원풍연간(元豊 年間, 1078-1085)에 낙양에서 문억박과 사마광 등 13명의 노인이 모인 낙양기영회洛陽耆英會, 혹은 진솔회眞率會에서 찾고 있다. 국가에서는 기로회를 예를 실천하는 모범으로 삼았다. 조선시대 최고의 법전인 《경국대전經國大典》에는 일 년에 두 번 사대부와 서인庶人에게 양로연을 베푸는 일, 70세가 되어 벼슬을 그만두는 관료에게 궤장을 수여하는 일[賜几杖], 일정한 나이가 되면 노인직[壽職]을 수여하는 일, 사후에는 시호諡號를 내리는 일 등이 규정되어 있었다. 이후에도 조선시대의 주요 법전에는 양로효친에 관한 사항이 항상 실렸다. 따라서 농암이 구로회를 조직한 것은 성리학의 경로사상을 실천하는 방편이었을 것으로 보인다.
한편, 조선 초 기로회와 관련된 그림으로는 <십로도상계축十老圖像契軸>(도1)이 있다. 이 작품은 1499년(연산군 5) 신말주(申末舟, 1429-1499)가 향산구로회와 낙양기영회를 본떠 그린 것으로 70세가 넘은 열 명의 시골 노인이 즐겁게 노는 장면이 묘사돼있다. 노인들은 편안하고 자유로운 자세로 음주, 가무, 시서화를 즐기고 있다. 인물의 비중이 적고 산수를 크게 그리는 초기 양식과는 달리, 인물이 중심적으로 묘사돼있다. 인물 옆에는 이름과 인물에 관련된 사실이 적혀있다.

효행 실천을 위해 애일당을 건립하다

농암은 46세 되던 1512년에 낙동강 분강 기슭의 농암바위 위에다 연로한 아버지를 위해 ‘부모 봉양에 날이 부족하다’는 뜻의 ‘애일당愛日堂’을 지었다. 1533년에도 구로회 조직과 함께 안동시 도산면 분천리에 경로당을 지은 후 ‘애일당’이라는 당호를 붙였다.(도2)

“애일당은 집 동쪽 1리 영지산 자락의 높은 바위 위에 있다. 1508년 가을 내가 어버이 봉양을 위해 외직을 구걸하여 겨우 영천으로 부임했다. 영천은 고향에서 사흘 길이라 공무로 왕래하면서도 부모 뵙기를 달을 넘기지 않았다. (중략) 매번 좋은 날과 명절에 양친을 모시고 동생들과 더불어 색동옷을 입고 술잔을 올려 기쁘게 해드리기를 꼭 이 집에서 했다. 어버이의 연세가 더욱 많아지니 한편으로는 기쁘고 한편으로는 두려운 감정이 없을 수 없어 집의 편액을 ‘애일’이라 했다. (중략) ‘애일’이라 한 것은 부모 봉양에 ‘날[日]이 부족하다’는 뜻이 거기에 있기 때문이다. 늙은이 자손이 이 마루에 오를 때도 마땅히 이름을 돌아보고 뜻을 생각해 어버이가 늙으면 효도를 행했으면 한다. 또 이곳을 여가에 수양하는 장소로 삼는다면 ‘애일당’은 늙은이 가문에서 대대로 지키는 규범이 될 터이니 어찌 자손에게 누가 되겠는가.”
– 《농암집》 권4, <애일당중신기愛日堂重新記>

이 외에도 농암은 안동부사로 있을 때나 인근 고을에서 근무할 때도 노인들을 수시로 모셔 효도잔치를 베풀어 어버이를 기쁘게 하였다. 농암이 효도잔치를 열어 부모님을 기쁘게 한 내용은 앞서 인용한 《농암집》의 <애일당구로회서>에도 기록되어 있다. 농암의 이와 같은 효행 덕분에 농암가문은 선조로부터 ‘적선積善’이라는 글자를 하사받았다.(도3) 이 경로효행의 전통은 약 450년을 이어오고 있다.

《애일당구경첩》의 세 그림

《애일당구경첩》 상권에 첩장된 그림은 이현보가 1508년에 부모님을 모시기 위해 영천군수로 발령받고 전별하는 장면이 담긴 <무진추한강전음도戊辰秋漢江飮餞圖>와 1519년 안동부사로서 양로연을 베풀던 장면이 있는 <기묘계추화산양로연도己卯季秋花山養老宴圖>, 1526년 중구일에 부모님을 위한 잔치를 벌이는 장면이 그려진 <병술중양일분천헌연도丙戌重陽日汾川獻燕圖>로 구성돼 있다. 각각의 그림 뒤에는 농암 이현보와 친분 있는 명사들이 지은 시가 수록돼있다. <무진추한강전음도戊辰秋漢江飮餞圖>에는 16명의 시가 있고, <기묘계추화산양로연도己卯季秋花山養老宴圖>에는 이현보의 시를 비롯하여 41명의 시가 수록되어 있으며, <병술중양일분천헌연도丙戌重陽日汾川獻燕圖>에는 3명의 시가 수록되어 있다. 즉, 《애일당구경첩》은 부모에 대한 ‘효심’을 그림과 시로 표현하여 후대에 교훈을 주고자 만든 것으로 볼 수 있다.

무진추한강전음도

<무진추한강전음도戊辰秋漢江飮餞圖>(도4)에는 중종 3년(1508년) 농암이 고향부근인 영천의 군수로 내려가기 전에 지인들과 술을 나누는 모습이 그려져 있다. 그림 속 장소는 제천정濟川亭으로 지금의 한남동과 보광동 사이 언덕에 있다. 농암은 70세가 넘은 부모님을 모시기 위해 3번이나 글을 올려 외직을 자청했고, 결국 그의 뜻이 받아들여져 영천군수에 제수될 수 있었다. 당시에도 사람들은 외직인 고을살이를 기피하고 경관京官을 절대적으로 선호하였고, 때문에 외직을 기피하는 것을 바로잡으려는 조치로 국법까지 마련됐던 사실로 미루어보면, 농암이 외직을 자청한 것은 상당히 드문 예에 속한다. 즉, 농암에게 외직의 자청은 제성(帝城, 왕이 있는 나라의 서울)과 강호(江湖, 은자隱者 등이 현실을 도피하여 생활하던 시골이나 자연)를 모두 저버릴 수 없는 한 지성적 지식인의 고뇌에 찬 결단이 아닐 수 없다. 이런 까닭에 동료들은 농암의 결단을 진심으로 찬양하며 전별시로 마음을 전하였다. 그림 뒤에 실려 있는 시의 작가는 대부분 당시 농암이 교유하던 인물들이며, 작품의 내용은 대체로 농암이 효의 실천을 위해 외직으로 나감을 인식하면서 그와 송별하는 내용을 다루고 있다. 이 자리에는 김안국, 소세량, 최숙생, 유운, 유인귀, 서후, 황효헌, 심의, 이희보를 비롯한 당대의 쟁쟁한 인사들이 다수 참석하였다. 예나 지금이나 중앙에서 기를 쓰고 근무하려고 하는데, 이와는 반대로 농암은 부모님을 잘 모시기 위해서 외직을 자처했기 때문에 지인들이 성대하게 배웅한 것이다. 참석자 중 한 명인 유인귀의 시를 보면 외직에 나가는 것이 얼마나 많은 결심이 필요한지 보여주고 있다.

어찌 자유롭지 못하도록
고을 수령을 자청하였는가
[胡爲乞郡不自由] 흰 구름 고향으로 돌아가고픈 마음
간절하였네.
[白雲鄕國歸心切] 그대의 이번 걸음
어버이 봉양 때문임을 아노니
[知君此去緣養親] 사언은 산양山陽으로
좌천된 것이 아니라네.
[不是思彦山陽屈] 그대가 고향으로 돌아가
맛있는 음식 받들어 올리면
[君歸桑鄕奉甘羞] 오정五鼎의 영화로운
봉양인들 누가 비할 수 있으랴.
[五鼎榮養誰與儔]

당시 이현보는 조정에서 여러 관직을 역임하였고, 앞날도 보장된 인물이었다. 그렇기에 이때 이현보를 전송하기 위해 모인 이들은 보통 전별餞別의 때에 읊는 시들과 달리 “한 번 지방관으로 나감이 굴욕이 아니라”거나 “조정에서 그대를 용납하기 어려웠던 것이 아니라, 인끈과 인장을 차고 가 어버이를 위함이라네”라는 내용을 포함했다. 즉, 이들은 교유하던 이와 나누는 이별의 슬픔보다는 이현보의 어버이 봉양을 위로함과 동시에 이현보의 바람이 이루어지는 것을 아름답게 여긴 것이다. 또 시구에 쓰인 ‘오정五鼎’은 소[牛], 양[羊], 돼지[豕], 물고기[魚], 사슴[麋] 등 다섯 가지 고기를 다섯 솥에 각각 담아 먹는 것으로 고기가 갖추어진 진수성찬을 뜻하는데, 이는 가까이서 부모를 모시는 것이 가장 큰 효도임을 이야기하는 것이다. 물론 이때 지어진 시들 가운데는 일반적인 송별시처럼 이별의 아쉬움을 토로하는 내용들도 있다. 그러나 대체로 송별하는 이들은 이현보가 부모 계신 곳 가까이에서 봉양을 잘 하고 지방관으로서도 백성을 훌륭히 보살피기를 바라는 마음을 드러내었다. 이런 이유로 부모와 멀리 떨어져 있는 이와 부모가 이미 세상을 떠난 이들은 부모를 그리워하는 마음을 드러내며 이현보에게 부러움을 드러내기도 했다.

기묘계추화산양로연도


<기묘계추화산양로연도己卯季秋花山養老宴圖>(도5)는 1519년(중종 14) 9월 당시 안동부사로 있던 이현보가 경내의 노인들을 불러 잔치하는 광경을 그린 것이다. 조선시대에 양로연을 시행하는 것은 조정이나 지방관의 중요한 일이었다. 양로연을 열었던 기록은 그림과 함께 전해져 오는데, 지방관으로서 양로연을 열었던 기록과 그림은 병와 이형상이 제작한 <탐라순력도>와 <풍산김씨세전서화첩>에 포함돼 있다. 그러나 농암은 부府내의 80세 이상 노인 수백 명을 남녀귀천 구분하지 않고 전부 관정에 불러 모아 잔치를 베풀었다. 당시처럼 엄격한 신분사회에서는 실로 파격적인 일로, 농암의 애민과 경로사상을 볼 수 있는 일이다. 농암은 이 자리에 자신의 부모님도 모시고 <화산양로연시花山養老宴詩>를 지었다. (화산花山은 안동의 옛 이름이다.)

“풍년 9월 하늘아래
[歲稔時淸九月天].
관청에서 노인들 모아 잔치 벌이네
[公堂開宴會高年].
서리서리 백발들 손잡은 주변에는
[霜髥雪鬢扶携處] 단풍 국화가 가득하네
[赤葉黃花爛熳邊].
나누어 수작하는 자리
[位設尊卑酬酌遍] 내외청에 음악이 이어지네
[廳分內外管絃連].
술동이 앞에서 색동옷 입은 것
이상하게 여기지 마라
[樽前綵戱人休怪].
내 부모님도 이 자리에 계시네
[太守雙親亦在筵].”
– 이현보 <화산양로연시>

농암은 시의 내용처럼 53세의 나이임에도 색동옷을 입고 부모님 앞에서 덩실덩실 춤을 추었다. 이처럼 ‘효’는 농암에게 있어 ‘적선’과 더불어 삶의 지향점이 되는 것으로, 그 시호인 ‘효절공孝節公’은 이를 잘 보여준다. ‘효절공’이란 시호를 받은 사람은 조선시대를 통틀어 농암 이현보가 유일하다.
농암이 색동옷을 입은 것은 중국의 노래자老萊子를 흉내낸 것이다. 노래자는 춘추시대 말 초나라 사람으로 중국에서 고대로부터 전해 내려오는 24명의 효자들 가운데 한 사람으로 꼽힌다. 24명에는 순 임금을 비롯해 한 문제 유항, 공자의 제자 증삼, 중유(자로) 등이 있다. 노래자는 70살의 나이에도 늙은 부모를 즐겁게 해드리기 위해 부모 앞에서 때때옷을 입고 딸랑이를 흔들며 아이들처럼 놀았다. 한 번은 노래자가 부모에게 물을 갖다 주려다 넘어진 일이 있었다. 이때 노래자는 부모가 걱정할까봐 일부로 물을 더 뿌린 뒤 드러누워 어린아이가 우는 흉내를 내었다. 이 일화는 ‘채의희彩衣戱’, ‘영아희嬰兒戱’ 또는 ‘노래희老萊戱’라 부른다. 노래자의 ‘때때옷 효행’은 조선의 선비들이 시와 그림의 주제로 많이 이용했다.
사대부가의 ‘노래희’를 그린 대표적인 그림은 이한철의 <반의헌준>이 있다.(도6) 이 그림도 수염이 시커멓게 난 노인이 때때옷을 입고 아버지에게 술잔을 바치는 장면과, 이를 기쁘게 바라보는 노부를 그렸다. 그림의 좌측하단에 ‘76세에 이한철이 그렸다’고 씌여 있는 것으로 보아 자신을 그린 것이 아닌가 한다. 민화 중에는 삼성미술관 이 소장하고 있는 <문자도 ‘효’>(도7)자에 노래자의 효행이 그려져있다. 자획 안에 ‘내자롱추친측萊子弄雛親側’이라는 글자가 있는데(도7-1), 이는 ‘노래자가 병아리를 가지고 어버이 곁에서 놀다’ 라는 뜻으로 어버이를 즐겁게 하기 위해 어린이 흉내를 내는 것을 의미한다.

병술중양일분천헌연도

이현보는 60세에 시강원 보덕으로 있었는데, 경상도 목장의 말을 점검하기 위해 내려온 김에 휴가를 얻어 부모님을 뵈었다. 이때 경상도 관찰사 김희수는 이현보의 정성을 고려하여 그의 부모를 위한 수연壽宴을 주관하고, 눌재 박상으로 하여금 그 사실을 기록하게 했다. 《농암선생속집》에 수록된 박상의 서문에 잔치의 경위가 자세히 기록되어 있다. “모인 이들이 중양절을 맞아 국화주를 마시는 한편 <남해南陔>와 <백화白華>를 번갈아 연주하여 흥취를 돋우고, 또 웃음을 위해 몰래 작은 배에 기녀를 태워 장구 치고 피리 불며 멀리 강 가운데로 노 저어 가게 하였다”는 기록을 통해 볼 때 부모를 즐겁게 해드림은 물론, 모인 이들 역시 흥겨운 자리였음을 짐작할 수 있다.
<병술중양일분천헌연도丙戌重陽日汾川獻燕圖>(도8)는 병술년, 곧 1526년(중종 21)에 있던 이날의 잔치를 묘사한 그림이다. 그림 내용은 박상이 남긴 위의 글 내용과 일치한다. 그림의 왼쪽 위에는 종택, 오른쪽 바위 위에는 애일당과 강각江閣이 보이고, 그 아래에는 분강(汾江 혹은 汾川)의 뱃놀이 풍류가 묘사되어있다. 분강촌 일대의 실경은 매우 사실적으로 그려져 있다. 분강촌은 부내라고도 부르는데, 부내의 산천이 너무나 아름다워 농암은 ‘정승도 이 강산과 바꿀 수 없다’고 말했고, 농암의 지인 김안국은 ‘부내마을은 그윽하고 산수가 맑고 고와 흡사 도원에 들어가 신선을 만난 것 같다’고 했다. 김창석이 그린 도산도(도9)와 강세황이 그린 도산도(도10)에서도 부내의 아름다운 장면을 볼 수 있다. 농암은 이곳에 귀거래하여 말년을 보내면서 강호문학(江湖文學, 향촌의 자연 속에서 살아가는 느낌과 생각을 표현한 문학)의 발전에 크게 기여하였다.


글 이상국((사)한국민화센터 이사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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