꽃은 피다

시. 박철
그림. 조여영

개화역 오랜 친구 사무실에 놀러가
깜박 졸았다

당신이 자란 마을 개화동
당신이 서서 활주로를 바라보던 개화산
당신이 걷던 개화리 들판에
9호선 종점 개화역이 생기고
어린 날 친구는 그 건물에 세 든
버스 회사에서 사무직으로 일을 한다

꽃도 피는 봄날
지나다 카페에서 글을 쓰는 당신을 데려다놓고
친구는 사장에게 결재 맡으러 가 두시간째다

창밖 어린 날의 봄볕이 아득해서인지
친구를 기다리는 동안 깜박 졸았다

당신은 평생 졸아보지 않은 사람이다
누워서도 쉽게 잠든 적이 없으니
그것도 남의 빈 사무실에서랴

길 건너 사는 어머니에게 전화를 걸어
나 대욱이 사무실에 왔는데 보고 싶으면 건너가고요
아니다 됐다 아휴 우서라
그런 애들 같은 대화 끝에 친구를 기다리는 동안
친구 책상에서 뽑아든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을 무릎 위에 놓고
깜박 졸았다

나이 탓이지 난생 처음 졸다 깨
꽃도 지는 봄날
잠시 이 세상이 아닌 듯 멍해 있다가
서둘러 다시 당신에게로 돌아왔다

조금은 나아진 듯 서류를 들고 껄렁거리며
친구가 미안한 표정으로 돌아오듯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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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간민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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