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취정 박사의 민화 속 신이한 이야기

도1 <서수도瑞獸圖>, 20세기, 각 67×34㎝, 일본 민예관 소장 ( 출처 《일본 민예관 소장 한국문화재. 2, 도자·회화편》 (2017))


김정희인 金正喜印과 추사秋史인이 찍혀있는 일본 민예관 소장 서수도瑞獸圖

민화에 조선 금석학파를 성립하고, 추사체를 완성한 문신이자 실학자이면서 서화가였던 19세기 학자 추사 김정희(秋史 金正喜, 1786~1856)의 인장이 찍힌 것을 보면 무슨 연유로 추사 김정희의 인장이 찍히게 된 것인지 궁금하긴 하지만, 어색함보다는 그럴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앞서는 이유는 김정희 인장이 찍힌 그림이 바로 ‘민화’기 때문이다. 민화에 추사 김정희의 인장이 등장할 수 있었던 것은 민화가 갖는 대표적 속성 때문이다. 어떠한 주제도 모두 담아낼 수 있는 민화의 넓은 포용력과 자유로움이 그것이다.

글 김취정 (서울대학교 박물관 객원연구원/고려대학교 강사)


바다에서 힘껏 튀어 오르는 물고기들 사이로 등갑에 왕王자가 쓰인 신구가 신령스러운 서기瑞氣를 한껏 뿜어내고 있다. 다른 폭에는 다른 동물을 절대 해치지 않는다는 기린이 모란과 함께 그려져 있다(도1). 기린의 뿔 끝을 옅은 분홍색으로 칠해 기린의 특징을 잘 살렸다. 원래 여덟 폭이었을 것으로 보이나 현재 두 폭만이 소장되어 있다. 신구 그림에는 백문방인인 추사秋史가, 기린 그림에는 마찬가지로 주문방인인 추사秋史 한 개가 찍혀 있다. 조선 후기 유명 학자인 김정희와 관련된 도장이지만, 후날後捺로 보인다(도1-1).

도1-1 도1 부분

민화에 조선 금석학파를 성립하고, 추사체를 완성한 문신이자 실학자이면서 서화가였던 19세기 학자 추사 김정희(秋史 金正喜, 1786~1856)의 인장이 찍혀 있다고 할 때 무슨 연유로 추사 김정희의 인장이 찍히게 된 것인지 궁금하긴 하지만, 어색함보다는 그럴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앞서는 이유는 김정희 인장이 찍힌 그림이 바로 ‘민화’기 때문이다. 민화에 추사 김정희의 인장이 등장할 수 있었던 것은 민화가 갖는 대표적 속성 때문이다. 어떠한 주제도 모두 담아낼 수 있는 민화의 넓은 포용력과 자유로움이 그것이다.

자유분방한 우리 그림 민화

도2 <만법통일萬法統一>, 지본채색, 74×46㎝, 가회민화박물관 소장

민화는 그림의 주제나 표현방식이 자유분방하기에 어떠한 소재든, 어떠한 소재와의 조합이든 표현하고 싶은 것이라면 그것이 무엇이든 그려지고 제작될 수 있었다. 동아시아의 역사와 문화를 제대로 파악하기 위해서는
유儒·불佛·도道 삼교 통합에 대한 이해가 필수적이다. 옛 선현들은 보편진리에 다가서기 위해 유교·불교·도교 삼교三敎 통합관을 견지해왔다. 이러한 유불선 삼교 통합관을 적나라하게 그림으로 묘사한 예도 있으나, 거의 찾아보기 힘들다. 하지만 민화에서는 유교·불교·도교 삼교 통합관을 그림으로 적지 않게 표현해왔다. 심지어 기독교 관련 인물이나 주제도 함께 나타나고 있어 흥미롭다(도2). 이렇듯 자유로운 구성과 민화가 갖는 특수성을 확인할 수 있다. 이는 바로 길상화가 갖는 넓은 포용력과 자유분방으로 인해 가능한 것이라 생각된다.
<사명대사四溟大師>를 보면 붉은 해와 흰 달이 그려져 있는데 붉은 해는 일광보살을, 흰 달은 월광보살을 상징하는 것으로 보인다(도3). 이 같은 표현방식은 민화적인 요소가 강하게 발현된 부분이라 할 수 있다. 매우 간략한 표현으로 그 성격을 명확히 드러내는 묘사 방식이 바로 그것이다. 이 작품에서 사명대사가 쓰고 있는 관의 모습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이 관은 정자관의 형태로 그려져 있는데, 정자관은 조선 사대부들이 쓰던 관모의 하나로 양반들이 평상시 집에서 쓰던 관冠이다. 이 작품 또한 도교와 불교, 민화적인 요소가 함께 보이는 작품이라 하겠다.


도3 <사명대사四溟大師>, 지본채색, 79×47㎝, 가회민화박물관 소장


민화에 추사 김정희의 인장이 등장한 이유Ⅰ- 조선 말기의 대표적 학자, 김정희

선비는 조선시대의 지식인이라고 할 수 있다. 학문으로써 중국에서도 명성을 높였던 추사 김정희(秋史 金正喜, 1786~1856)는 조선의 대표적 지식인이라고 할 수 있다(도4). 김정희에 대해 간략히 알아보면 다음과 같다.

김정희는 1786년(정조 10) 6월 3일, 승승장구하던 경주 김씨 집안의 병조판서 김노경(金魯敬, 1766∼1837)과 기계杞溪 유씨兪氏 사이에 맏아들로 태어났다. 김정희 집안은 대대로 높은 벼슬을 지냈다. 김정희도 1819년(순조 19년) 34세 때 문과에 급제하여 암행어사, 규장각 대교, 예조참의, 동부지사, 시강원 보덕 등 여러 중요한 관직에 올랐다. 김정희가 청나라의 학문과 문화에 대해 깊이 관심을 갖게 된 것은 그의 스승 박제가(朴齊家, 1750~1805)의 영향이 컸다. 1809년 10월 김정희가 24세 때, 그의 아버지 김노경을 따라 청나라에 가게 된다. 동지부사로 연행하는 아버지의 ‘자제군관子弟軍官’으로 청나라의 수도 북경에 갔던 것이다. ‘자제군관’은 외국에 보내는 사신使臣의 자제子弟로 임명한 군관이다. 그래서 김노경이 사신으로 청나라에 갈 때, 김노경의 아들인 김정희도 함께 청나라에 갈 수 있었다. 드디어 김정희는 청나라 학자들을 직접 만날 수 있게 된 것이다.
김정희는 중국 북경에서 중국의 학자들과 어울렸다. 그는 당시 북경에 머물고 있던 유명한 학자들의 집을 빠짐없이 방문했다. 김정희를 직접 만나지 않았어도 학문적인 교류를 통해 그를 잘 아는 사람들도 있었고, 심지어 이름만 들었다는 사람도 있었는데, 김정희와 아무런 만남이 없던 이들도 김정희의 뛰어난 천재성과 깨끗한 성품을 칭찬했다. 이것은 그만큼 김정희의 명성이 높았다는 것을 말해준다. 추사 김정희는 높고 넓고 깊은 학문 세계를 펼치고, 개성적인 예술 세계를 개척해 나갔던 조선 말기의 대표적 학자였다. 수많은 사람이 김정희에게 그림과 글씨, 학문을 배우고 익혔다. 스승과 제자 사이 외에도 김정희와 깊은 우정을 나눈 인물도 많았다. 그를 좋아하고 따르는 사람들이 많았는데 이는 김정희의 후손인 김승렬이 쓴 <완당 김정희 선생 묘비문>의 내용을 통해 잘 알 수 있다.

“풍채가 뛰어나고 도량이 화평해서 사람과 마주 말할 때면 화기애애하여 모두 기뻐함을 얻었다. 그러나 무릇 의리냐 이욕이냐 하는 데 이르러서는 그 논조가 우레나 창끝 같아서 감히 막을 자가 없었다.”
– 유홍준, 《추사 김정희 : 산은 높고 바다는 깊네》 (창비, 2018)

김정희는 옳고 그름에 대한 기준이 명확해서 올바르지 않다고 생각되는 것에 대해서는 조금의 양보가 없었다고 한다. 그는 시련 속에서도 포기하지 않고 끝없이 노력한 결과로 당시 학문과 예술 분야에 있어 큰 성과를 냈다.
김정희는 금석학과 역사학 분야에서 뛰어난 학자로 널리 인정받았고, 글씨와 그림은 물론 전각篆刻 분야에 있어서도 조예가 깊었다. 김정희의 빼어난 서체와 문인 정신이 담긴 그림, 전각 등의 예술 세계를 배우고자 하는 사람들이 정말 많았다. 당시 사람들은 물론 후대 사람들도 김정희의 예술 정신을 본받고 싶어 했다. 게다가 김정희는 양반뿐만 아니라 다양한 계층의 인물들과 교유하며 친하게 지냈기 때문에 더 많은 사람이 그의 제자가 될 수 있었다. 그렇기 때문에 김정희의 예술 세계가 당대는 물론 후대에도 큰 영향을 미칠 수 있었던 것이다. 이러한 점은 민화 작가와 소비자 계층에게도 김정희가 잘 알려질 수 있는 계기가 되었고, 추사 김정희(에 대한 것)가 민화 화폭에 등장할 수 있게 된 것으로 보인다.


도4 허련, <완당선생초상阮堂先生肖像>, 19세기, 종이에 엷은 색, 63.2×38.2㎝,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민화에 추사 김정희의 인장이 등장한 이유Ⅱ – 추사인이 찍힌 민화 기린 그림

<서수도瑞獸圖> 두 폭의 그림, 즉 신구 그림에는 백문방인인 추사秋史가, 기린 그림에는 마찬가지로 주문방인인 추사秋史 한 개가 찍혀 있다. 민화의 제작과 소비계층이 김정희에 대해 알고 그의 영향을 받을 수 있었을 가능성에 대해서는 앞서 언급하였다. 그렇다면 이런 의문이 남는다. 수많은 주제의 민화 중에서 왜 서수도瑞獸圖인가 하는 것이다. 이는 기린 그림과 세한도의 주인공 이상적을 하나의 기린 뿔에 묘사했던 글의 존재와 관련 깊다. 이상적은 김정희의 시련의 순간에도 김정희에게 변치 않는 의리를 보여준 인물이다.

“일반 세상 사람들은 권력이 있을 때는 가까이 하다가 권세의 자리에서 물러나면 모르는 척하는 것이 보통이다. 내가 지금 절해고도에서 귀양살이하는 처량한 신세인데도 이상적이 예나 지금이나 변함없이 이런 귀중한 물건을 사서 부치니, 그 마음을 무어라 표현해야 할까. 공자는 ‘세한연후歲寒然後 지송백지후조知松柏之後凋’라 하였으니, 그대의 정의야말로 추운 겨울 소나무와 잣나무의 절조節操가 아닐까.”
– 정옥자, 《(우리가 정말 알아야 할)우리 선비》 (현암사, 2002)

김정희가 제주도에서 지내는 동안, 외롭고 힘들던 그에게 독서는 유일한 즐거움이었다. 김정희의 심정을 누구보다도 잘 이해하고 있었던 이상적(李尙迪, 1804∼1865)은 중국에 사신으로 갈 때마다 최신 책들을 구해서 김정희에게 보내주었다. 그 책들은 쉽게 구할 수 없는 귀한 책들이었다. 만약 어렵게 구한 책을 권력 있는 사람에게 바쳤다면 출세가 보장되었을 텐데, 이상적은 바다 멀리 유배되어 아무 힘도 없는 김정희에게 보내주었다. 그 책을 받은 김정희는 이상적에게 큰 감동을 받았다. 김정희는 이상적의 변함없는 의리를 보고 《논어論語》의 한구절을 떠올렸다.

“날씨가 추워진 뒤에야 소나무와 잣나무가 뒤늦게 시듦을 알 수 있는 것이다. [子曰 歲寒然後 知松柏之後凋也]”
– 成百曉 譯註, <子罕 第九>, 《論語集註》 (전통문화연구회, 2001)

김정희는 <세한도>를 다 그리고 나서, 마지막으로 인장을 하나 찍었다. ‘장무상망長毋相忘’이라는 인장이다. ‘장무상망’이란 ‘오래도록 서로 잊지 말자’는 뜻이다. 김정희는 이상적의 변치 않는 의리와 따뜻한 마음을 잊지 않고 간직하겠다고 이야기하면서 이상적 또한 자신을 잊지 않기를 바라는 마음을 표현한 것이다. 김정희는 ‘세한연후 지송백지후조歲寒然後 知松柏之後凋’의 내용을 그림으로 그려서 이상적에게 선물했다. 그는 이상적을 기린에 비유한 바 있는데 이는 추사가 오경석에게 쓴 글에서 확인할 수 있다.

그대와 더불어 겨우 두세 번 만났지만 그 손가락은 봄바람을 튕기고 그 입은 꽃다운 향기를 뱉어냄을 보고서 마음속으로 이상히 여겼는데 곧 서찰을 받아보니 문채文采와 사화詞華가 또 이와 같이 넉넉하리라고는 생각도 못했었네. 주문세가朱門世家의 모든 자제들이 비록 청환淸宦과 화직華職을 거쳤다 해도 건각巾角 추미麈尾가 다이와 같지는 못하니 자못 한탄스러운 일이며 또한 무슨 까닭인지 알 수가 없네. 우선藕船 같은 사람은 바로 하나의 기린의 뿔이 세상에 나타났다 여겼는데 그 뒤를 이어 섭진추영躡塵追影하는 일족逸足이 또 몇이나 있는지 듣고 싶네. 그러나 하늘이 총명을 주는 것은 귀천이나 상하나 남북에 한정되어 있지 아니하니 오직 확충擴充하여 모질게 정채精彩를 쏟아나가면 비록 구천 구백 구십 구분은 도달할 수 있으나 그 나머지 일분의 공부는 원만히 이루기가 극히 어려우니 끝까지 노력해야만 되는 거라네.
– 김정희, <오경석에게 주다[與吳生 慶錫]>, 《완당전집》 제4권


민화에 등장한 김정희인金正喜印과 추사인秋史印

일본 민예관 소장 <서수도瑞獸圖>의 두 폭의 그림(도1), 즉 신구 그림에는 백문방인인 추사秋史가, 기린 그림에는 마찬가지로 주문방인인 추사秋史 한 개가 찍혀 있다. 이는 후날後捺 일 가능성이 높다. 민화에 추사 김정희의 인장이 등장한 예는 이 작품이 유일한 예이다. 그리고 김정희와 같은 문인의 인장이 등장한 예는 거의 없다. 그렇다면 이러한 의문이 생긴다. 이 민화에 추사 김정희의 인장이 등장한 이유는 무엇일까?
이에 이번 호에서는 일본 민예관 소장 <서수도瑞獸圖>의 두 폭의 그림에 추사 김정희의 인장이 등장한 이유가 무엇인지에 대해 살펴보는 시간을 가졌다. 필자가 민화에 찍혀 있는 모든 인장을 전수조사한 것이 아니기에 부족한 점이 많겠지만, 추후 추가 연구를 위한 기초 연구로써 살펴보아 주시기를 바란다.

[참고문헌
국외소재문화재재단 발행, 《일본민예관 소장 한국문화재. 2, 도자·회화편》(서울 : 국외소재문화재재단, 2017)
정옥자, 《(우리가 정말 알아야 할)우리 선비》 (현암사, 2002)
추사 김정희에 관해서는 김취정, 《고난 속에서 꽃피운 고고한 예술》 (다림, 2019.09.3.)
후지츠카 치카시(藤塚隣) 저; 후지츠카 아키나오 편; 윤철규, 이충구, 김규선 역,
《秋史 金正喜 硏究 : 淸朝文化 東傳의 硏究 한글완역본》 (과천: 과천문화원, 2009)
후지츠카 치카시(藤塚隣) 저; 후지츠카 아키나오 편; 윤철규, 이충구, 김규선 역,
《秋史 金正喜 硏究 : 淸朝文化 東傳의 硏究 한글완역본》 (과천: 과천문화원, 2009)
유홍준, 《추사 김정희 : 산은 높고 바다는 깊네》 (창비, 2 018)
정옥자, 《(우리가 정말 알아야 할)우리 선비》 (현암사, 2002)
成百曉 譯註, <子罕 第九>, 《論語集註》 (전통문화연구회, 2001)
김정희, <오경석에게 주다[與吳生 慶錫]>, 《완당전집》 제4권


김취정 | 서울대학교박물관 객원연구원

고려대학교 대학원에서 미술사학 석·박사학위를 받았고,
고려대학교 아세아문제연구소 연구원 등을 역임했다.
현재 고려대 강사, 서울대학교박물관 객원연구원,
한국민화학회 이사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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