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취정 박사의 민화 속 신이한 이야기 ⑪ ‘학문’ 이야기

도1 김홍도, 《단원 풍속도첩》 <서당>, 조선 후기, 26.9×22.2㎝,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열심히 공부해 나라를 구합시다

조선시대는 학문 권장의 시대라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독서와 공부에 대한 열망은 왕부터 사대부, 일반 서민에 이르기까지 조선의 모든 이들에게서 보인다. 책을 숭상한 조선시대 유교 문화의 산물 ‘책거리’는 궁중에서 시작해 민간으로 확산된다. 그 옛날 선조들이 학문을 얼마나 중요하게 생각했는지, 또 그림에서 어떠한 모습으로 학문을 대하고 있는지 살펴보자.

글 김취정 (서울대학교 박물관 객원연구원, 고려대학교 강사)


1918년 일본의 조선교육령이 발표되었다. 1차 조선교육령 제5조 내용에 따르면 조선인에 대한 교육정책은 ‘보통의 지식과 기술을 가르치고 일본어 보급을 목표로 한다’는 것이다. 즉, 그들이 일을 시키기 편리한 정도로만 교육하겠다는 의미로, 이는 조선인 우민화 정책, 일명 바보 교육이었다. 이에 전국 곳곳에 서당 열풍이 불어닥친다.
1911년부터 6년 사이, 서당의 학생이 14만 1,640명에서 25만 9,513명으로 급증했다.


“전국에 서당이 2만 5천여 개가 넘고 학생들이 30만 명을 초과하고 있다.”
– 《동아일보》 1921년 5월 4일



일본의 우민화 정책의 일환으로 운영된 보통학교에 대한 반발로 서당 열풍이 불자 일본은 소위 서당 사냥에 나선다. 그들은 학생들을 강제로 끌고 와 감금하고 보통학교에 입학할 것을 강요하였다. 훈장들은 학생들을 숲속에 숨게 하고 인원과 나이를 속여야 했다. 독립운동의 주역들이 전국으로 흩어져 훈장으로 나섰고, 이는 3·1운동의 뿌리가 된다. 1918년 2월 일본은 서당에 관한 규칙을 발표하여 기존의 서당을 폐교하고 새로운 서당 설립을 억제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조선인들은 굴복하지 않고 계속 나아갔으며 이는 앞서 언급한 서당 열풍으로 나타났다.
생각해보면, 조선의 학문 권장은 일찍부터 있었으며 이는 동아시아의 보편적 양상이었다. 중국 송나라 진종眞宗 황제 때 권학문勸學文 내용을 보면 독서의 즐거움과 소중함을 단적으로 대변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집을 부유하게 하려고 좋은 밭을 살 필요가 없다. 책 속에 수많은 곡식이 있으니[富家不用買良田 書中自有千種粟].
편안히 거주하기 위해 높은 집을 지을 필요가 없다. 책 속에 황금으로 된 집이 있으니[安居不用架高堂 書中自有黃金屋].
문을 나서며 따르는 자가 없다고 한탄하지 말라. 책 속에수레와 말이 가득하니[出門莫恨無人隨 書中車馬多如簇].
아내를 구하매 좋은 중매가 없음을 탄식하지 말라. 책 속에 옥 같은 미녀가 있으니[娶妻莫恨無良媒 書中有女顔如玉].
남아로 태어나 평생의 뜻을 이루고자 하면 창 앞에 앉아 부지런히 육경을 읽어야 한다[男兒欲遂平生志 六經勤向窓前讀].
– 중국 송나라 진종眞宗 황제 때 권학문勸學文



동아시아의 높은 교육열은 우연한 일이 아닌 것이다.


도2 김홍도, 《단원 풍속도첩》 <서당자리짜기>, 조선 후기, 28×23.9㎝,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위편삼절韋編三絶’을 넘어서는 정약용의 ‘과골삼천踝骨三穿’

조선에서 대표적 호학군주가 정조라면 독서와 공부 분야에서 둘째가라면 서러운 이들로 조선의 사대부들을 들 수 있다. 정약용, 이황, 이이, 조식, 박지원 등은 나름대로 저마다의 효과적인 공부법을 갖고 있었는데 그들에게는 한 가지 공통점이 있었다. 바로 지독하게 공부했다는 점이다. 이들 중 공부의 신은 단연 정약용이 아닐까 생각한다. 공부에 자신 없어 하던 낮은 신분의 황상을 학문의 길로 이끌어 당대 시의 대가로 성장시키는 것은 물론, 조선 말기 추사 김정희로부터 극찬을 받게까지 하였기 때문이다. 1802년 임술년 10월 17일, 강진의 한 주막에서 서로 대면한 지 얼마 되지 않은 때였다. 황상은 정약용에게 다음과 같이 질문한다.
“선생님! 저는 머리도 나쁘고 앞뒤가 꼭 막혔고 분별력도 모자라 답답합니다. 저도 공부를 할 수 있을까요?”
이에 정약용은 황상이 단점으로 언급한 부분들을 오히려 공부를 잘할 수 있는 장점으로 승화시켜 학문에 힘쓰도록 격려하는 면학문勉學文을 직접 써준다.


“공부하는 자들이 갖고 있는 세 가지 병통을 너는 하나도 가지고 있지 않다.
첫째 기억력이 뛰어난 병통은 공부를 소홀히 하는 폐단을 낳고,
둘째 글 짓는 재주가 좋은 병통은 허황한 데 흐르는 폐단을 낳으며,
셋째 이해력이 빠른 병통은 거친 데 흐르는 폐단을 낳는다.

둔하지만 공부에 파고드는 자는 식견이 넓어지고,
막혔지만 잘 뚫는 자는 흐름이 거세지며,
미욱하지만 잘 닦는 자는 빛이 난다.

파고드는 방법은 무엇이냐. 근면함이다.
뚫는 방법은 무엇이냐. 근면함이다.
닦는 방법은 무엇이냐. 근면함이다.
그렇다면 근면함을 어떻게 지속하느냐.
마음가짐을 확고히 갖는 데 있다.”
– 정약용의 면학문



도3 《잡화》 중, 지본수묵채색,
88×32.5㎝ (출처: 《장식 병풍
아름다운 우리 民畵》)

황상은 ‘설부’라는 시로 스승을 놀라게 했으며 다산의 둘째 형 정약전도 황상의 시를 보고 ‘월출산 아래 권역에서 이런 인재가 있느냐’고 감탄했을 정도였다. 신분적 제약 때문에 과거를 볼 수 없었던 황상은 농사일을 하면서 부지런히 시를 지었다. 그의 저서 <치원유고>에 서문을 썼던 당대 대표적 서예가이자 고증학자였던 추사 김정희는 황상을 ‘금세무차작今世無借作’이라 극찬했다.
황상은 일흔 살이 넘어서도 책 읽기와 초서를 멈추지 않았는데 주위 사람들이 그 연세에 이르기까지 고되게 책을 읽고 베껴 쓰시느냐고 묻자 이렇게 말했다.
“내 스승님은 귀양지에 18년을 계시면서 날마다 저술에만 힘써 과골(복사뼈)이 세 차례 구멍이 났다. 스승님께서 부지런히 공부하라고 가르쳐 주신 말씀이 아직도 내 귀에 쟁쟁한데, 내가 관 뚜껑을 덮기 전에 어찌 그 가르침을 저버릴 수 있겠는가!”
조선시대는 학문 권장의 시대라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독서와 공부에 대한 열망은 왕부터 사대부, 일반 서민에 이르기까지 조선의 모든 이들에게서 보인다. 책을 강조하여 책을 주제로 한 그림을 그리도록 하기까지 한다. 책거리에 유난한 애착을 보였던 호학 군주 정조는 “비록 책을 읽을 수 없더라도 서실에 들어가 책을 어루만지면 오히려 기분이 좋아진다”는 이야기를 남겼다. 당시 자비대령화원 녹취재의 8개 화문畵門에는 ‘문방文房’이라는 독특한 화문이 설문設門되고, 그 화제畵題 가운데 ‘책가冊架’와 ‘책거리冊巨里’가 보여 주목된다. 책가冊架 화제는 정조 8년(1784) 12월 20일, 국왕이 출제하고 채점하는 3차三次 시험의 화제에 처음 보인다. 정조는 이날 녹취재의 규정에 따라 규장각의 각신閣臣이 추천해 올린 ‘책가’와 ‘화주畵廚’, ‘필연筆硯’의 세 가지 화제 가운데 ‘책가’의 화제를 낙점落點하여 출제한 뒤, 7명의 자비대령화원들이 그려 낸 책가도에 대해 채점하였다. 정조가 12년(1788) 9월 18일 자비대령화원들이 그려낸 그림을 채점한 뒤, 특별히 판부判付의 글을 써서 내리면서 신한평(申漢枰, 1735~1809)과 이종현(李宗賢, 1748~1803)의 책거리 그림에 대해 다음과 같이 언급하였다.


“화원 신한평과 이종현 등은 각자 원하는 것을 그려내라는 명이 있었으면 책거리冊巨里를 마땅히 그려내야 되는 것이거늘, 모두 되지도 않은 다른 그림을 그려내 실로 해괴하니 함께 먼 곳으로 귀양보내라.”


책을 소재로 한 그림이라는 점에서 책거리가 학문을 숭상한 조선시대 유교 문화의 산물이라는 점은 어렵지 않게 유추할 수 있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면서 특히 궁중에서 시작한 책거리가 민간으로 확산된다. 이는 조선 화원이 그린 풍속화부터 민화 화조화나 책거리 그림에 이르기까지 당대 그림들을 통해서도 잘 보인다.
쪼그리고 돌아앉아 훌쩍이는 학동을 화면의 초점에 두고, 그 주위에 방건方巾을 쓰고 유생의 옷차림을 한 훈장을 축으로 학동들을 둥글게 배치하였다(도1). 화면의 구성이나 생략된 배경, 옷주름의 필치, 얼굴 모습 등 모두가 현장감 넘치는 분위기를 준다. 서러움이 완연한 학동의 표정도 재미있지만, 주변 인물들의 익살스러운 모습에도 정감이 넘친다. 김홍도의 《풍속화첩》에는 <서당자리짜기>라는 그림이 들어 있다(도2). 그림 속에서 탕건을 쓴 것으로 보아 몰락한 양반으로 보이는 한 남자가 자리를 짜고 있고, 아내는 물레를 돌리고 있다. 또 그 뒤에선 아들로 보이는 한 어린아이가 책을 읽고 있다. 책 읽는 아이에게서 좀 더 나은 미래에 대한 희망이 엿보인다.
정약용의 공부법은 ‘초서書法’법이다. 이는 중요한 내용을 골라 뽑아서 기록하는 공부법을 말한다. 단순히 책만 읽고 마는 공부가 아닌, 붓을 들어 써가며 공부하는 공부법이 강조된 독서장면이 함께 그려진 민화가 있어 주목할만하다(도3).

[참고문헌]
김태웅, 《우리 학[생]들이 나아가누나:소학교 풍경 조선후기에서 3.1운동까지》 (서해문집, 2006);
박근복, <일제시대의 서당교육에서 민족교육의 전개과정 연구> (강원대학교 석사학위논문, 2007년)
임형택, <정약용의 강진유배기의 교육활동과 그 성과>, 《한국한문학연구》 21, 한국한문학회, 1998,
《실사구시의 한국학》 (창작과비평사, 2000)에 재수록;
안대회 「임술년의 추억」, 《부족해도 넉넉하다》 (김영사, 2009), 210~215쪽;
안대회, <다산 정약용의 교육사상과 공부법 ; 다산 정약용의 아동교>,
《다산학》 18권(다산학술문화재단, 2011년 06월)
《內閣日曆》 第102冊, 正祖12年 9月18日
김병완, 《선비들의 평생 공부법 : 배우고 가르침을 실천한 조선 시대 14인의 공부 천재들》 (서울:이랑, 2013)


김취정 | 서울대학교박물관 객원연구원


고려대학교 대학원에서 미술사학 석·박사학위를 받았고,
고려대학교 아세아문제연구소 연구원 등을 역임했다.
현재 고려대 강사, 서울대학교박물관 객원연구원, 한국민화학회 이사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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