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취정 박사의 민화 속 신이한 이야기 ⑩ 벽사의 매응도

도2 <신응도>, 조선, 지본담채, 114.8×63.3㎝, 한국민화박물관 소장



매가 등장하는 그림은 예부터 재앙을 물리치는 주술적인 의미를 지니고 있다. 이는 매가 사냥할 때 재빠르게 먹이를 낚아채는 생태적 특징을 통해 의미화시킨 것으로 생각된다. 또한 매는 늠름하고 용맹스러운 존재로 각인되어 있어 왕이나 장군들과 같이 영웅들을 상징하기도 한다. 따라서 매 그림은 다양한 상징성을 내재하고 있다.

글 김취정 (서울대학교 박물관 객원연구원, 고려대학교 강사)


민화의 제작과 감상의 목적은 크게 두 가지로 나누어 살펴볼 수 있다. 길상적 도안으로써의 민화와 벽사적 도안으로써의 민화가 그것이다. 일반 길상화가 장식에 보다 큰 목적을 두고 있는 것에 반해 벽사화는 주술呪術의 힘으로 사귀와 재액을 물리치는 데 초점을 맞추고 있다는 점에 차이가 있다. 역사시대 이전에는 미술과 주술이 동일 선상에 있었다. 이런 관점에서 볼 때 벽사 목적의 민화는 원시 인류 미술의 맥을 잇는 그림이라 해도 좋다. 길상만큼이나 벽사 또한 민화에서 중요한 부분이라 할 수 있다. 특히 벽사적 도상은 대개 여러 동물의 도상들을 융합시키거나 아예 새로운 도상, 즉 상상의 동물로 등장하는 예가 많다. 이번 회차에서는 귀신을 잡는다는 삼두매에 대해 이야기하려 한다. 옛 사람들은 나쁜 일이 일어나는 것은 사악한 기운, 즉 악신惡神 때문이라고 믿었기 때문에 벽사를 위한 문양과 장식을 통해서 악신을 물리치고자 하였다. 늠름하고 용맹스러운 존재로 각인되어 있어 왕이나 장군들과 같이 영웅들을 상징하고 있고 매 도안을 목판으로도 제작했을 정도로 그 수요와 공급이 적지 않았다(도1).
앞 뒤 양면에 매가 새겨진 목판은 원래 이천우 초상과 함께 태종이 하사하였다고 한다. 1416년(태종 16) 이천우가 관직에서 물러날 때 밭 80결, 노비 80명을 내리려 하자 이를 사양하고 대신 태종의 깍지 위에서 놀던 백송골白松鶻과 노화송골蘆花松鶻 두 마리를 달라고 하였다. 그 이유를 묻자 이천우는 사냥을 좋아한 태종 임금이 매에 사로잡혀 정사를 그르칠까 두렵다고 하였다. 이에 태종은 깍지를 거두고 이천우의 모습을 그리게 하여 친히 ‘사완산부원군이천우賜完山府院君李天祐’라고 썼고, 두 마리의 매를 그려 하사하였다고 한다.
당시 그려진 매 그림인 이응도는 숙종대에 다시 그려졌는데, 이 목각판은 유최기(兪最基, 1689∼1768)가 1747년에 쓴 찬문이 새겨져 있어 영조대 이후에 제작된 것으로 보인다. 목판 양면에 새겨진 백송골과 노화송골은 받침대 위에 한 발만 내딛고 다른 한 발은 줄로 묶여 있다.
탑본搨本의 그림은 노화송골의 모습으로 흰 매이면서 푸른 깃털이 갈대꽃과 같다고 붙여진 이름이다.


도1 <이응도二鷹圖> 목판, 앞면(왼쪽), 뒷면(오른쪽),
– 조선, 세로 86㎝, 가로 46㎝, 두께 3㎝, 전라남도 영광군 출토, 국립광주박물관 소장


매, 강하고 힘센 날개와 발톱으로 재앙을 물리치길

매는 사냥에 뛰어난 사나운 부리와 눈, 발톱을 가지고 조류 중의 왕, 혹은 사냥꾼으로 지칭되는 맹금猛禽이다. 현재 조선 후기 매 그림에서는 다양한 작품명으로 지칭되고 있다. 매를 지칭하는 용어로는 응鷹, 골鶻, 조鵰, 취鷲, 지鷙, 전鸇, 요鷂, 준隼 등이 전해진다. 우리나라에서는 고려 시대에 사냥용 매를 조련하고 관리하며 매사냥을 관장하는 기관인 응방鷹坊을 두었다는 사실과 고려 시대 이조년(李兆年, 1269-1343)이 매의 사육서인 《응골방》을 저술했다는 사실을 통해 매를 표현할 때 일반적으로 ‘응鷹’을 사용한 것으로 생각된다. 더불어 조선 시대에 남아있는 제화시題畵詩에서도 ‘응鷹’이 주로 발견된다.
매가 등장하는 그림은 예부터 재앙을 물리치는 주술적인 의미를 지니고 있다. 이는 매가 사냥할 때 재빠르게 먹이를 낚아채는 생태적 특징을 통해 의미화시킨 것으로 생각된다. 또한 매는 늠름하고 용맹스러운 존재로 각인되어있어 왕이나 장군들과 같이 영웅들을 상징하기도 한다. 따라서 매 그림은 다양한 상징성을 내재하고 있다.


(좌) 도3 <삼두신응도>, 조선, 지본담채, 114.8×63.3㎝, 한국민화박물관 소장
(우) 도4 <삼재부적三災符籍>, 조선, 종이, 34.7×26.3㎝, 국립민속박물관 소장


귀신 잡는 삼두매

삼두매는 세 개의 머리와 발톱이 날카로운 한 개의 다리를 갖고 있어 삼두일각조三頭一脚鳥, 삼두일족응三頭一足鷹 등으로도 불린다(도2). 조선 후기에는 이 삼두매 그림을 출입문 기둥이나 벽에 붙여두면 삼재를 피할 수 있다고 믿었다. 심지어는 몸에도 지니고 다녔다. 삼재를 막는 벽사 기능을 지닌 삼두매에 대한 수요가 많았다. 이 많은 수요를 감당하기 위해서는 판화나 인쇄 방식으로 제작해야 했다(도1), (도3). 삼두매는 부적으로도 상당히 많이 남아있다. 현존하는 부적에 그려진 영모 중 가장 많은 것이 매, 이 삼두매일 정도다(도4), (도5).
삼재가 든 사람은 그 액년厄年을 면하기 위하여 설날에 응삼우鷹三羽(매 그림)를 그려서 문설주에 붙인다. 대문이나 벽에 매 그림이 붙어 있으면 그 집에 삼재를 맞은 가족이 있다는 뜻이다. 삼재의 불행을 안겨 주는 악귀를 쫓기 위해 무서운 매가 선택된 것이다. 이를 뒷받침하는 근거로 다음의 문장이 있다.


도5 <삼재부적(三災符籍)>, 조선, 종이, 26.3×34.7㎝, 국립민속박물관 소장



19세기의 학자 이규경(1788-1863)이 저술한 《오주연문장전산고五洲衍文長箋散稿》의 <점화응변증설黏畫鷹辨證說>에는 매를 그려서 방문 위에 붙이는 것에 대한 변증설을 거론하고 있다.


“중국에서는 정월 초하루에 닭[鷄]을 그려서 방문 위에 붙이는데 우리나라 항간에서는 정월 초하루가 아니더라도 세 마리의 매를 그려서 방문 위에 붙여놓고 삼재三災(크게는 수재水災·화재火災·풍재風災를 말하고 작게는 도병刀兵·기근飢饉·역려재疫癘災를 말한다)를 물리친다고 하는데, 이는 삼재가 드는 해[三災年]에 붙여야 한다.”
-李圭景, <매[鷹]를 그려서 방문 위에 붙이는 데 대한 변증설>, 《五洲衍文長箋散稿》



한편 ‘Charles Henry Cooper’는 1903년 ‘Korean Review’에서 삼두매 그림에 대한 기록을 남기고 있어 주목할 만하다.


다음은 삼재三災 또는 세 가지 재앙에 대한 설명이다. (…) 첫해의 첫 달 동안, 재앙이 올 예정인 시기에 세 마리 매의 그림을 그리고, 이를 계산서(아마도 돈 관련 문서)와 함께 방에서 문으로 향하게 붙여야 한다. 재앙에서 벗어나는 해가 되면 반드시 이 그림들은 뜯어내야 한다.


박민경은 그의 2014년 석사 논문에서 문헌을 통한 매의 상징적 의미를 세 가지 유형, 즉 통치자의 이미지, 현자賢者의 이미지, 영웅적 이미지 등으로 나누어 살펴보았다. 이 중 영웅적 이미지를 도상화 한 매 그림 중 대표적 예가 ‘해응도海鷹圖’ 유형이다. 해응도는 넓은 바다 가운데 매 한 마리가 바위 위에 앉아 어딘가를 응시하고 있다. 우뚝 솟은 바위, 그 위에 앉은 늠름하고 준수하게 생긴 매는 화면 상단의 붉은 해와 조응하면서 화면을 수직으로 반분하고 있다.


도6 전 정홍래 필, <해 뜨는 바위 위의 매[旭日鷲圖]>, 조선, 견본채색, 118.2×60.9㎝,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정홍래(鄭弘來, 1720-?)작으로 전해지는 해응도 중의 하나인 <해 뜨는 바위 위의 매[旭日鷲圖]>의 연원은 아직 확실한 사실이 전해지지 않는다(도6). <해응도>는 넓은 바다 가운데 매 한 마리가 바위 위에 앉아 어딘가를 응시하고 있다. 우뚝 솟은 바위, 그 위에 앉은 늠름하고 준수하게 생긴 매는 화면 상단의 붉은 해와 조응하면서 화면을 수직으로 반분하고 있다. 수평방향의 파도와 대비시키며 욱일旭日의 기세와 매의 기상을 돋보이게 하려는 구도이다. 매가 그려지는 뒷배경의 파문波紋을 생략하고 안개로 처리한 것도 같은 의도일 것이다. 파도와 해의 형태는 도식화 되어 있지만 매우 공을 들여 그렸음을 알 수 있다. 파도가 넘실대는 바다 위에 우뚝 서 있는 매와 구름에 가리어진 태양의 도상은 《고씨화보》에서 매 대신 잉어를 배치하고 있는 화보의 영향으로도 간주할 수 있다(도7). 이들은 도식화된 장식성이 돋보이는 것으로 보아 왕실에서 궁정화로 사용된 것으로 추측된다.
이러한 매 그림은 정홍래(鄭弘來, 1720- ?)에 의해 많이 그려지고 이후 김득신(1754-1822), 최북(1712-1786?), 신윤복(1758- ?) 등의 화가로 이어진다. 먼저 다작의 영웅독립형의 매 그림을 남긴 정홍래의 작품을 살펴보면 조금씩 차이가 있기는 하지만 공통적으로 간취되는 특징이 있음을 알 수 있다. 조선 후기의 문인 홍세태(洪世泰, 1653-1725)가 기록한 문헌자료를 통해 독립형 매 그림의 형태를 살펴볼 수 있다.


도7 《고씨화보》, 출처: 顧炳 編, 《顧氏畵譜》
(北京: 文物出版社, 1983)

천길 놓은 바위 위 홀로 우뚝 서서
몸 움츠리고 돌아보며 무슨 생각을 하는가
바다 천만리 청명한 밖으로
구름이 한동안 떠가네



홍세태의 기록에서 묘사하고 있는 매는 바위 위에 홀로 서 있는 영웅독립형의 매와 유사한 것으로 생각된다. 당시 이와 같은 독립형 매 그림이 정형을 이루고, 문인들 사이에서도 널리 감상되었을 것으로 추측된다.
매 그림은 일반적으로 말하는 매와 수리를 포함하는 맹금류를 그린 작품을 지칭한다. 매 그림은 중국의 송대나 조선시대 이후에 확인되지만 그 문학적 전통은 고대부터 발견되어 매에 관한 상징적 의미를 찾을 수 있다. 조선 말기는 그림에 대한 수요와 공급이 한층 넓은 계층으로 확산되면서 전반적으로 회화의 장식적 기능이 강화되는 시기였다. 매 그림은 세시기를 통하여 벽사의 의미가 더욱 부각되면서 영모화조 병풍이나 축으로 제작되어 선물용 장식화로 제작되었다. 지금까지 살펴본 바와 같이 매 그림에 있어서 벽사적 의미가 강조된 매 그림 유형은 삼두매이다. 이에 삼두매 그림은 부적으로도 제작된 예가 상당히 많다. 삼두매가 그려진 부적은 삼두매는 물론 삼두매와 더불어 삽살개나 호랑이 도상을 함께 그려 그 벽사의 힘을 더욱 강화시키기도 하였다. 또한 삼두매 그림의 대량제작을 위해 목판으로도 제작하고, 판화나 인쇄본으로도 제작하였다.

[참고문헌]
허균, <전통미술의 겉과 속 ⑨ 벽사辟邪와 주술呪術>, 《월간민화》
원병오, 《한국의 조류》, 교학사, 1993
박민경, <朝鮮 後期 鷹圖 硏究> (고려대대학원 석사학위논문, 2014.8)
《宣和畵譜》 卷第15,
洪世泰, 《柳下集》卷8, <畵鷹>


김취정 | 서울대학교박물관 객원연구원


고려대학교 대학원에서 미술사학 석·박사학위를 받았고,
고려대학교 아세아문제연구소 연구원 등을 역임했다.
현재 고려대 강사, 서울대학교박물관 객원연구원, 한국민화학회 이사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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