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취정 박사의 민화 속 신이한 이야기 ⑨ 노느니 바둑이라도 둬라

도2 <고사인물도>, 20세기, 지본채색, 69×28㎝, 가회민화박물관 소장


민화 속 위기도 圍棋圖

동아시아에서 바둑은 문인들의 일로 여겨졌다.
그런데 이러한 바둑을 두는 장면이 민화 고사인물도에 그려진 예가 적지 않다는 점이 흥미롭다.
그렇다면 민화 위기도의 특징은 무엇이 있을까?

글 김취정 (서울대학교 박물관 객원연구원, 고려대학교 강사)


바둑을 두는 장면을 그린 그림을 위기도圍棋圖라 한다. 산수인물화와 풍속화의 다양한 장면 중 바둑을 두는 장면이 그려진 경우가 있는데, 민화 산수인물화와 풍속화 장면 중 바둑 두는 모티프의 양상과 그 의미에 대해 살펴보도록 하겠다. 보통 바둑두기는 문인들의 대표적 놀이문화, 즉 풍류 중 하나였다. 이는 심정주(沈廷胄, 1678-1750)의 그림으로 전해지는 <서루에 모인 선비들[樓上 圍碁圖]>에서도 알 수 있다. 심정주는 심사정(沈師正, 1707-1769)의 아버지로 이 그림은 바둑을 두거나 시화와 음률에 심취한 선비들의 모습을 그린 것이다(도1). 이 그림 위쪽에는 서루기西樓記라는 글이 쓰여 있다. 심사정의 묘지명을 쓴 심익운(1734-?)의 글로, ‘서루’라는 누정에 대해 쓰고 집주인이 누정을 지은 뜻을 밝혔다. 누정을 지어 서로 교유하고 한담과 풍류를 즐기는 선비들의 일상을 표현한 작품으로 생각된다. 이러한 주제는 선비의 풍속을 소재로 하는 그림으로 서민들의 풍속과는 또 다른 풍류를 보여준다.


도1 전 심정주, <서루에 모인 선비들[樓上 圍碁圖]>, 조선 후기, 사본수묵絲本水墨, 26.4×30.6㎝,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조선시대 위기도는 크게 신선고사와 은일고사에 기반한 도상, 그리고 문회도에서의 위기 장면과 위기 관련 문인 고사로 분류된다. 전자는 선인위기도仙人圍棋圖이며 후자는 문인위기도文人圍棋圖이다. 선인위기도는 특정 고사를 반영한 사호위기도四皓圍棋圖, 초부난가도樵夫爛柯圖, 그 외의 선인위기도류로 각각 분류된다. 민화 고사인물도를 자세히 살펴보면 바둑을 두는 장면이 그려진 경우가 있는데(도2), 바둑은 중국의 요임금이 만들었다고 전해지고 있으며 바둑을 언급하며 바둑두기를 권했던 인물 중 대표적인 인물이 공자이다. 바둑에 관해 언급한 가장 오래된 문헌의 공식적이고도 믿을만한 기록은 《논어》의 양화陽貨 편에 나오는 아래와 같은 언급이다.

“종일 먹기만 하고 아무것도 뜻이 없는 인간은 할 수가 없다. 바둑이나 장기 같은 것도 있지 않느냐? 그런 것을 하는 것도 가만히 있는 것보다는 낫단 말이다[子曰 飽食終日 無所用心 難矣哉 不有博者乎? 爲之猶賢乎己].”

《맹자》에는 바둑이 두 번 언급되어 있다.

“지금 바둑을 두는 사람은 많지 않지만, (따라서 바둑이 그리 대단한 것은 아니지만), 전심전력을 다하지 않으면 잘하기 어렵다. 혁추는 나라에서 바둑을 가장 잘 두는 사람이다[今夫弈之爲數小數也 不專心志則不得也 弈秋通國之善弈者也]”

도3 <된 석제 바둑판> 및 상세이미지, 후한後漢시대, 망도현 출토, 북경역사박물관 소장
(출처: 남치형(바둑기사, 명지대 바둑학과 교수), <바둑 이야기>)



도4 공민왕, <위기도圍棋圖>, 고려, 일본 시센시[泗川子] 소장 (출처: 《李朝の絵画》 (泗川子コレクション 特別展), 大和文華館, 1986)

여기서의 ‘혁弈’자는 확실히 바둑을 지칭한다고 보아도 무방하다. 다른 하나는 술 마시며 ‘박혁博弈’을 하면서 부모의 봉양을 소홀히 하는 사람에 대한 것인데 《논어》의 예에서 말한 바와 같이 이는 바둑을 지칭했다기보다 여러 보드게임을 한데 묶어 지칭한 것으로 보인다.
《논어》와 《맹자》에서 언급된 것이 바둑이 맞다면 바둑이 두어진 시대는 최소한 공자가 살았던 BC 551~479년 정도까지 거슬러 올라갈 수도 있다. 맹자(BC 372~289)가 ‘나라에서 가장 바둑을 잘 두는 사람’이 누구인지 알았고, 바둑 때문에 부모 봉양을 소홀히 하는 사람이 생길 정도로 바둑이 보급되었다는 것을 감안한다면 바둑이 처음 두어지기 시작한 시기는 지금으로부터 최소한 2500년 이상 전이라고 할 수 있다.

출토된 바둑판으로도 바둑의 역사가 오래되었음을 알 수 있다. 1952년 중국 하북河北성 망도望都현의 후한後漢시대 장군(182년경 매장된 것으로 추측)의 묘에서 석제 바둑판이 출토되었다(도3). 우리나라의 위기도 중 가장 이른 시기의 작품은 고려 공민왕의 작품으로 전해지는 일본 시센시[泗川子] 소장 <위기도圍棋圖>인 것으로 보인다(도4).
동아시아에서 바둑은 문인들의 일로 여겨졌다(도5). 그런데 이러한 바둑을 두는 장면이 민화 고사인물도에 그려진 예가 적지 않다는 점이 흥미롭다. 그렇다면 민화 위기도의 특징은 무엇이 있을까. 우선 도1을 보면 네 명의 신선이 바둑을 두고 있는데, 이 장면을 구경하고 있는 또 다른 인물의 모습이 흥미롭다. 보통 구경하는 인물이 그려지더라도 세 명의 신선이 바둑을 두고 한 명의 신선이 구경하고 있거나, 바둑두기에서 홀로 벗어나 있는 모습으로 그려지는 경우가 대부분이다(도4). 바둑두기를 구경했다는 내용의 시문이 적지 않게 남아있어 주목할 만 하다. 그중 한 예로 서거정(徐居正, 1420~1488)의 시, <바둑 두는 것을 구경하다>를 들 수 있다.


도5 김홍도, <바둑두기[圍碁圖]>,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도6 이명욱, <어초문답도>, 17세기 후반, 지본담채, 172.7×94.2㎝, 간송미술관 소장
(출처: 《澗松文華》 26(한국민족미술연구소, 1984))

앓고 나서는 두 귀밑에 흰 터럭이 흩날리고
[病餘雙鬢雪飄蕭]
신기가 몽롱하여 낮잠만 늘상 자노니
[神氣昏昏晝睡饒]
바둑 두는 아이들이나마 있지 않으면
[不有圍碁兒輩在]
이렇게 기나긴 해를 어떻게 보낸단 말인가
[日長如許若爲消]
-서거정徐居正, <바둑 두는 것을 구경하다>, 《사가집四佳集》 제42권

그런데 <고사인물도>(도2)에서는 네 명의 신선이 바둑을 두고 있고, 또 다른 인물이 이 장면을 구경하고 있다.
그의 차림새나 가지고 있는 물건들이 그가 신선도, 문인도 아님을 보여주고 있다. 그는 지게를 지고 있으며 오른손에는 자루가 긴 도끼가 들려있다. 이를 통해 바둑두는 인물과는 다른 신분의 인물임을 알 수 있다. 물론 산수인물도에서 도끼를 가지고 있는 인물은 산수 자연을 좋아해서 산에 은거하는 은일자의 상징으로써 그려지기도 하기 때문에(도6) 그 또한 신선이나 은일자일 가능성이 있지만 그의 남루한 옷차림과 표정을 통해 그가 평민임을 알 수 있다. 시기가 내려오면서 바둑이 남성 문인의 일이라는 관념에서 변하게 되었는데, 이는 여러 시각자료를 통해 알 수 있다. 여인이 바둑 두는 모습을 사진으로 찍은 예가 있는데, 실제로 여인들이 바둑을 두었는지는 확인할 수 없어도 바둑에 대한 인식이 변했다는 점을 알 수 있다(도7). 이러한 바둑에 대한 전반적인 변화 양상이 도2와 같이 민화의 위기도에서 일반 서민이 등장하게 된 것으로 보인다.


도7 <(조선풍속)바둑>, 일제강점, 사진, 9.0×14.1㎝, 수원광교박물관 소장


[참고문헌]
유주희 학위논문 <朝鮮時代 圍棋圖 硏究>
남치형(바둑기사, 명지대 바둑학과 교수), <바둑 이야기>


김취정 | 서울대학교박물관 객원연구원

고려대학교 대학원에서 미술사학 석·박사학위를 받았고,
고려대학교 아세아문제연구소 연구원 등을 역임했다.
현재 고려대 강사, 서울대학교박물관 객원연구원,
한국민화학회 이사이다.


저자에 관하여

월간민화

Leave a Reply

이메일은 공개되지 않습니다. 필수 입력창은 * 로 표시되어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