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취정 박사의 민화 속 신이한 이야기 ⑤ 민화에 등장한 적벽부赤壁賦

도1 책거리 6폭 병풍 중 부분, 19세기 후반~20세기 전반, 지본채색, 41.2×23.6㎝, 조선민화박물관 소장, 출처 《한국의 채색화 Ⅲ》



적벽부는 소동파가 적벽이 있는 황주黃州에 좌천해 살면서 정치적 삶의 좌절에 따른 비애감과 더불어 유비와 조조의 격렬한 전투지였다는 역사 회고를 바탕으로 한다. 그러면서도 가을 풍정의 우수에 찬 비장감, 물살의 흐름에 몸을 맡기는 자연 순리, 술에 취해 흥에 겨운 풍악, 신선 세상을 꿈꾸며 이상향을 찾고자 했던 노장사상을 드러낸 작품으로 평가된다.
그렇다면 적벽부 관련 이야기가 민화에서는 어떻게 수용되었을까?

글 김취정 (서울대학교 박물관 객원연구원/고려대학교 강사


동아시아 문예의 기준은 이미 북송대에 마련되었다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다. 여기에는 소동파의 기여가 적지 않았다. 소동파는 사실주의가 주류를 이루던 북송대에 창의성의 중요성을 강조하였다. 이러한 그의 예술관은 ‘문인화’의 개념을 탄생시켰다. 소동파의 문예관은 후대 사람들에게도 강한 영향을 미치게 된다.
조선조 문인에게 공감과 영감을 주고, 문학의 ‘이상적 모델’이 되었던 소동파蘇東坡의 전후 적벽부赤壁賦가 책거리 그림 속 펼쳐진 책에 보이는 예가 있어 흥미롭다(도1). 펼쳐진 책에 보이는 글자들을 살펴보면 ‘적벽부 임술지추월 여객범赤壁賦 壬戌之秋月 與客泛’이라 쓰여있다. 이는 적벽부의 첫 시작 부분에 해당하는 내용이다. 중간에 몇 글자씩 빠져있는데, 이는 책 위에 놓여있는 안경에 가려져 있는 부분 때문인 듯하다.
소동파蘇東坡의 적벽부赤壁賦 관련 고사故事를 재연하는 행사를 여는 것은 조선시대 문인들에게는 그들의 놀이문화, 즉 풍류였다. ‘적벽선유赤壁船遊’는 사회문제가 될 정도로 크게 유행했던 조선시대 문인들의 최애 풍류였다. 이와 관련된 그림도 남아 있다(도2). 1742년 10월 보름날, 임술년을 맞아 경기도관찰사 홍경보가 경기 동부지역을 순시 중에 삭녕 우화정으로 경기도 관내 최고의 시인 연천현감 신유한과 최고의 화가 양천현령 정선을 불러들여 연천의 웅연까지 뱃놀이를 즐겼고, 정선은 이 이벤트를 <우화등선羽化登船>과 <웅연계람熊淵繫纜> 두 점으로 그렸다. <웅연계람熊淵繫纜>은 뱃놀이를 마친 이들이 웅연에 내리고 있는 장면을 그린 것이다. 저녁이 되어 돌아왔다는 점은 <웅연계람熊淵繫纜> 좌 상단에 그려진 달 그림을 통해 알 수 있다. 동아시아의 대표적인 달 그림을 그리는 기법, 즉 달 주변(달 무리)를 표현함으로써 달을 드러내는 방식인 ‘홍운탁월烘云托月’법으로 달을 표현하였다. 또한 어두워진 상황이었기에 배에서 내린 이들은 횃불을 하나씩 들고 있다. 정선은 횃불의 불 부분을 붉게 담채하여 횃불을 그렸다.
그렇다면 적벽부 관련 이야기가 민화에서는 어떻게 수용되었을까? 우선 적벽부란 무엇인지부터 살펴보도록 하겠다.


도2 겸재 정선, <웅연계람>, 1742년, 비단에 수묵담채, 35.5×96.6㎝, 개인 소장, 연천군 중앙도서관 제공


적벽부赤壁賦, 노장사상을 드러낸 작품

소동파는 임술년 7월과 10월 만월滿月에 호북성湖北省 황강黃岡에서 객客과 선유船遊했고, 이를 ‘전적벽부前赤壁賦’와 ‘후적벽부後赤壁賦’로 불후의 명작을 남겼다. ‘적벽부’는 소동파가 삼국三國시대의 유명한 전쟁터였던 적벽을 찾아가 시간과 역사, 자연과 인생을 회고한 작품이다.
전적벽부는 “임술壬戌년 가을 칠월 열엿새 나는 객客과 더불어 배를 띄우고 적벽赤壁 아래에서 놀았다…”라는 문장으로 시작된다. 후적벽부는 “사람의 그림자가 땅에 비치고 있기에 고개 들어 밝은 달을 쳐다보고 주위를 돌아보며 즐거워하여 걸어가면서 노래 불러 서로 화답하였다…”라는 내용으로 시작된다. 이 두 편의 부賦, 즉 전적벽부前赤壁賦와 후적벽부後赤壁賦는 동양의 자연관을 대표하는 문학작품으로 꼽힌다. 후대 문인들이 자연과 벗하며 즐기는 풍류의 모범이 되었다.
적벽부는 소동파가 적벽이 있는 황주黃州에 좌천해 살면서 정치적 삶의 좌절에 따른 비애감과 더불어 유비와 조조의 격렬한 전투지였다는 역사 회고를 바탕으로 한다. 그러면서도 가을 풍정의 우수에 찬 비장감, 물살의 흐름에 몸을 맡기는 자연 순리, 술에 취해 흥에 겨운 풍악, 신선 세상을 꿈꾸며 이상향을 찾고자 했던 노장사상을 드러낸 작품으로 평가된다. 이에 ‘적벽부 두 편을 읽으면 장자를 읽는 것보다 낫다’고 회자될 정도이다.


도3 전 안견, <적벽도赤壁圖>, 조선 전기, 비단에 색, 161.2×101.8㎝,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도3-1 도3 부분


소동파蘇東坡의 적벽부 고사故事를 재연한 뱃놀이, 적벽선유

적벽부는 소동파가 58세에 지은 작품이다. 평성 우尤 운을 압운한 평기식 칠언율시이다. 소식蘇軾이 원풍元豐 5년(1082) 임술년 7월 16일에 적벽에서 노닐며 <적벽부赤壁賦>를 지었다. 이후로 이것이 문사들의 풍류 고사가 되어 으레 매년 이날이 되면 문주회文酒會를 열었다. 이 관례에 따라 홍주만이 이해 7월 16일에 벗들을 초청하여 사회를 열었다. 이날을 맞이하여 고을의 관원들이 간소한 술자리를 차리고 적벽赤壁 아래 배를 띄우고 놀거나 작은 모임을 열고 시를 읊었다는 기록을 적지 않게 찾아볼 수 있다.

“임술년(1622, 광해군14) 가을에 내가 양칙사梁勅使를 빈접儐接하면서 전송차 청천강淸川江까지 갔다가 돌아올 때는 무산巫山 쪽으로 길을 잡았다. 원외員外 최대용崔大容이 마침 공무로 왔는데 막내 아이 소한昭漢이 괴원槐院의 자문咨文을 가지고 함께 따라와 있었다. 고을의 관원들이 간소한 술자리를 차리고 적벽赤壁 아래 배를 띄우고 놀았으니, 바로 7월 기망旣望이었다. 가을 하늘이 언뜻 개자 맑은 달빛이 대낮같이 밝았으며 밤은 깊고 주흥酒興은 무르익어 바람과 이슬이 사람을 엄습하는 줄도 깨닫지 못하였다. 이에 배에서 내려 누각에 올라 난간에 기대어 시를 읊노라니 또 하나의 좋은 흥취를 보탤 수 있었다. 입으로 한 수 읊어서 그 좋은 모임을 기록해 둔다.”
-이정귀李廷龜, <권응록倦應錄 하下>, 《월사집月沙集》 제18권

“고을의 관원들이 간소한 술자리를 차리고 적벽赤壁 아래 배를 띄우고 놀았으니…”와 같은 내용이 그림으로 그려지면 아마도 안견의 전칭작인 <적벽도赤壁圖>와 같았을 것으로 생각된다(도3).


도4 <삼국지연의도三國志演義圖> 10폭 중 부분, 19세기, 지본채색, 221.3×130.3㎝, 서울역사박물관 소장, 출처 《한국의 채색화 Ⅰ》



도5 <삼국지연의도> 중 부분, 19세기, 견본채색, 79×33.5㎝


민화 속 적벽부의 양상

민화에도 적벽부 관련 도상이 적지 않게 보이고 있어 주목할 만하다. 민화에서는 크게 두 가지 유형으로 나누어 살펴볼 수 있다. 하나는 소동파의 <적벽부> 글 그 자체를 표현한 책거리 그림 유형이다(도1). 이 경우 책거리 그림 속에 펼쳐진 책에 적벽부 내용을 써넣은 것이다. 현재 일곱 폭으로 전하는 이 책거리는 각 폭마다 서안과 서책 더미를 공통으로 그렸으며 각기 다른 문방구류와 중국제 도자기, 새, 꽃 등을 그렸다. 원래는 여덟 폭의 병풍이었을 이 책거리는 현재 각각 액자로 분리되어 있다. 화면 아래 안경 너머로 펼쳐진 책자에는 소동파蘇東坡의 <적벽부赤壁賦>가 적혀 있어 당시 문사들의 취향을 알 수 있다.
다른 하나는 적벽부 창작의 계기가 된 삼국시대 적벽대전 관련 장면을 그린 <삼국지연의도三國志演義圖>의 부분이다(도4), (도5), (도6). 진나라의 학자 진수(陳壽, 233∼297)가 편찬한 중국의 위·촉·오 3국의 정사正史인 《삼국지三國志》를 바탕으로 명나라 때 나관중이 지은 역사소설 《삼국의 통속 연의》의 내용을 그림으로 그린 것이 <삼국지연의도三國志演義圖>이다. 이 화제의 그림은 워낙 방대한 내용이기 때문에 여러 폭의 병풍 그림으로 제작되는 경우가 많다. 나관중의 소설은 작가가 의도적으로 이야기를 좀 더 재미있게 만들기 위해 역사적 사실과 전혀 다르거나 과장한 예가 많은데, 삼국지의 인물 중에서도 역사적 사실과 가장 다르게 과장된 인물로 제갈량을 들 수 있다. 제갈량은 불세출의 천재로서 하늘을 보고 앞으로의 일을 점치고, 필요에 따라 바람의 방향을 바꾸는 등 신화 속 인물처럼 묘사되었다. 조선 후기 실학자인 안정복은 “제갈량은 후세에 오래도록 귀감이 될 만한 인물이나, 세상에서 그를 논하는 이들이 정상적인 것은 소홀히 봐 버리고 괴이한 것만 믿는 통에 그의 정직하고 정의로운 사업이 결국 풍운이나 일으키고 팔진도나 쳤던 일에 가려져 버렸으니, 이 얼마나 통한스러운 일인가”라고 주장했다.
민화 <삼국지연의도三國志演義圖>에서 적벽대전과 관련하여 빠지지 않고 등장하는 장면이 있다. 이는 풀을 실은 배를 보내 조조군의 화살을 모두 가져오게 했다는 이야기를 그린 장면이다. 사실 이 이야기는 나관중이 만들어낸 소설에 불과하며 현실적으로는 불가능한 일이다.
적벽선유라는 뱃놀이 차원에서 놀이문화나 이에 대해 그린 민화가 있을 것으로 생각되어 찾아보았지만 찾아볼 수 없었다. 현재까지 필자가 찾아본 결과 소동파의 적벽부나 적벽대전과 관련된 민화는 책거리 그림 중 적벽부가 적혀 있거나 적벽부 책이 펼쳐져 있는 경우, 삼국지연의도 속에 역사적 사실이라기보다는 흥미 위주의 나관중 소설 삼국지연의 중 제갈량이 주도하여 짚풀을 실은 배를 보내 조조군의 화살을 모두 가져오게 했다는 이야기를 그린 예가 대부분이다.
민화에 적벽선유나 소동파의 적벽부 관련 행사 재연이나 관련 그림은 남아있지 않다. 사군자나 산수화 등 문인화의 영역으로 볼 수 있는 회화 장르도 민화로 제작되었으나, 소동파와 적벽부, 삼국지연의, 적벽대전 등에 대해서는 알고 있었지만 문인들의 풍류로서 적벽선유나 문주회 등은 민화의 수요층에게는 관심의 대상이 아니었던 것 같다. 이는 민화 수요층의 성격과 성향에서 그 원인을 찾을 수 있다. 이는 조선 중기의 문신 이식李植이 그의 문집 《택당집澤堂集》의 <양강에 배를 띄우고 달구경을 하면서 창화한 시록 뒤에 쓴 글[楊江泛月唱和詩錄後序]>의 내용에서 유추해 볼 수 있다.


도6 <삼국지연의도> 중 부분, 20세기, 66×34㎝



“(상략) 문자를 짓는 것에 관심을 두지 않고 있거나 강호江湖와 멀리 떨어져서 살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그리고 이것은 위로 존귀尊貴한 자들이 가까이 하기에는 적합하지 않은 점이 있고, 아래로 향속鄕俗과 맞지 않는 점도 있는데, 여기에 매년 정상적으로 행할 수 없다는 것 역시 하나의 이유로 꼽을 만하다. (하략)”
-이식李植, <양강에 배를 띄우고 달구경을 하면서 창화한 시록 뒤에 쓴 글[楊江泛月唱和詩錄後序]>, 《택당집澤堂集》

소동파의 적벽부 관련 고사의 재연은 뱃놀이보다는 문주회가 중심이다. 문주회라 하여 술자리만 있어서도 안되며 문, 즉 시문이나 부를 짓고 노래하며 모임을 함께하는 벗들과 함께 서로 문으로써 교류가 가능할 때 소동파 적벽고사의 온전한 재연이라고 할 수 있는 것이다. 이는 당시 민화 수요층에서는 쉽지 않은 것이었기에, 적벽부 관련 고사를 재연하는 풍류도 민간에는 이루어지지 않았을 가능성이 높다. 민화의 제작과 감상이 성행하던 시기에는 언문 소설을 비롯하여 민중들이 재미있게 즐길 수 있는 책들을 책 대여점인 세책방을 통해 직접 접하거나 삼국지연의와 같은 이야기들을 전해주는 이야기꾼들의 입을 통해 들을 수 있었던 친근한 이야기 장면들을 시각화한 그림에 대한 수요는 많았던 것 같다. 그러므로 적벽부 관련 민화는 당대 문화의 유통과 소비라는 측면에서 살펴보아야 할 것이다.

[참고문헌]
박본수, <이야기로 보는 책거리⑨ 민화 책거리-소동파의 적벽부 옮겨놓고>, 《경기신문》, 2012.05.21.
이정귀李廷龜, <권응록倦應錄 하下>, 《월사집月沙集》 제18권


김취정 | 서울대학교박물관 객원연구원

고려대학교 대학원에서 미술사학 석·박사학위를 받았고,
고려대학교 아세아문제연구소 연구원 등을 역임했다.
현재 고려대 강사, 서울대학교박물관 객원연구원, 한국민화학회 이사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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