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취정 박사의 민화 속 신이한 이야기 ④ 차 이야기

도3 <고사인물도>, 20세기, 지본채색, 69×28㎝, 가회민화박물관 소장



18세기 후반에서 19세기 초반까지 다화의 제작이 활발해진다. 차는 정신을 맑고 시원하게 해주는 성질을 갖고 있어 탈속脫俗과 은일隱逸을 위한 매개체로 즐겨졌는데, 차의 보편적인 가치가 회화 작품에 시각적 이미지로 형상화되고 작품의 제재로서 선택되는 현상은 차와 관련해서 직·간접적으로 많이 노출되고, 그것에 대한 인식이 강하게 형성되었기 때문이다.

글 김취정 (서울대학교 박물관 객원연구원/고려대학교 강사)


차茶는 사람들에게 위안을 주는 한잔의 음료로 각광 받는다. 고대 중국에서 시작된 차는 주변국으로 전해져 저마다의 역사, 문화적 배경을 바탕으로 고유한 차 문화를 형성했다.
차 문화의 형성에는 차를 마시는 방법과 깊은 관련이 있다. 솥에 가루 낸 단차와 소금, 파, 생강 등의 향신료를 넣어 끓이고, 이를 국자로 퍼 찻사발에 부어 마시던 시대는 고전의 시대다. 당시 식품이자 의약품이었던 차가 차츰 상류층의 기호품으로 자리 잡게 된 시기이기도 하다. 이어 차를 끓이던 솥이 사라지고, 차 전용 찻사발이 등장한 낭만의 시대가 도래했다.
사람들은 비 온 후의 푸른 하늘빛 같은 청자에 가루 낸 단차를 넣고 뜨거운 물을 부어 찻숟가락이나 차선으로 저어 하얀 거품을 내 마시기 시작했다. 명태조明太祖 주원장朱元璋의 단차 금지령을 기점으로 낭만의 시대도 막을 내렸다. 그리고 오늘날과 같은 방식으로 찻잎을 우려 마시는 실용의 시대가 펼쳐진다.
8세기 이후 차의 정신적 가치와 그 역할은 하나의 문화를 이루게 되었고, 시대에 따라 다양한 양상을 보이면서 발전하였으며, 이를 차 문화라 부른다. 차 문화는 인류역사상 차와 관련된 물질적, 정신적 면이 총 집합되어있다.


(좌) 도1 이인문(李寅文, 1745-1821), <맥반흔포도>, 조선후기, 116×48㎝, 개인소장
(우) 도2 이인문(李寅文, 1745-1821), <산정일장병> 중 제5폭 부분도, 조선후기, 116×48㎝, 개인소장


차그림, 다화茶畵

현전하는 최초의 다화는 중국 당대唐代에 제작된 다화이다. 우리나라에서는 고려시대 다화가 가장 이른 시기의 다화이다. 조선 초·중기에는 작품 수가 적지만 그 시기만의 특징을 지니며 면면히 제작되었다. 조선 후기로 넘어오면서는 이전 시기에 비해 훨씬 다양한 주제와 도상으로 그려지게 되며 작품 수도 많아지는데, 특히 18세기 후반에서 19세기 초반에 다화가 두드러지게 제작되는 양상을 보인다. 예를 들어 남송대 나대경羅大經의 《학림옥로鶴林玉露》 <산거편山居篇>을 도해한 그림은 18세기 전반부터 그려졌으나 내용에 따라 본격적으로 차를 준비하는 장면이 그려진 것은 18세기 후반부터이다. 조선 후기 화원 화가 이인문(李寅文, 1745-1821)이 그린 《산정일장병》 중 제 4폭 <맥반흔포도>를 보면 깊은 산 속 우거진 나무들 사이로 모옥茅屋 한 채가 보인다(도1). 그 안에서 고사高士는 조촐한 식사를 하고 있고, 마당에 놓인 커다란 괴석 옆에는 다동茶童이 차를 준비하고 있다(도1-1).


도1-1 도1 부분



다동이 풍로 앞에서 차를 준비하고 있는 장면은 <산정일장병>중 제5폭에도 보인다(도2). 18세기 후반 이후에 이르면 문인들 사이에서 차 문화가 널리 퍼진 까닭인지 다동의 도상이 그려진 예가 상당히 많이 보인다. 김두량이 그림을 그리고, 그의 아들인 김덕하가 색칠해 완성한 사계의 일상을 보여주는 풍속화 계열의 <추동전원행렵승회>에서도 보인다.
또한 차 달이는 장면을 단독으로 그린 작품도 제작된다. 이는 차가 지닌 보편적 가치가 시각적 이미지로 형상화되고, 회화 작품의 주요 제재로 선택된 현상으로 볼 수 있다. 18세기 후반에서 19세기 초반까지 다화의 제작이 활발해진다. 차는 정신을 맑고 시원하게 해주는 성질을 갖고 있어 탈속脫俗과 은일隱逸을 위한 매개체로 즐겨졌는데, 차의 보편적인 가치가 회화 작품에 시각적 이미지로 형상화되고 작품의 제재로서 선택되는 현상은 차와 관련해서 직·간접적으로 많이 노출되고, 그것에 대한 인식이 강하게 형성되었기 때문이다.
다화 향유층으로 생각되는 18세기 후반에서 19세기 초반에 활동한 북학 경향의 지식인들은 19세기 차 문화 중흥의 주역들인 김정희, 신위, 권돈인, 허련 등의 인물들과 학문적 경향, 문예적 활동, 교유 관계 등 여러 측면으로 연결되어 있다.


도2-1 도2의 부분


민화에서 찾은 차그림

조선 후기 다화의 특징은 다음과 같다. 주제적 측면에서 시詩와 중국 고사故事를 주제로 한 작품의 비율이 높고, 도상적 측면에서는 차를 준비하는 장면이 ‘풍로와 탕관, 다동’이라는 구성과 ‘풍로 위에 탕관, 그 앞에 다동’이라는 포치법이 정형화된 모습이 발견된다. 흥미로운 점은 풍로와 탕관, 다동의 행동 묘사에서 각 작가의 특정 양식이 확인된다는 것이다. 따라서 조선 후기 다화의 대부분은 차를 준비하는 정황이 상세하게 묘사된 작품보다 차 마시는 장면과 차를 통해 얻어지는 정취情趣를 강조한 작품인 것으로 생각된다. 한편, 차를 준비하는 장면은
3명 이상의 아회雅會 장면보다 1~2명의 은일지사隱逸之士와 함께 등장하는 비율이 높았고, 차 달이는 다동이 단독으로 그려진 작품은 현재 중국 다화에서 볼 수 없는 우리나라의 독특한 양상이다. 이러한 양상은 민화 다화에서도 보여 흥미롭다(도3). 이 작품을 보면 산속에서 은일하는 문인이 문인을 상징하는 책갑과 붓, 필통을 비롯한 문방구류가 있는 탁자에 기댄 채 찻잔을 앞에 두고 풍로 앞에서 불조절을 하며 찻물을 끓이고 있는 다동을 내려다보고 있다. 눈길을 끄는 것은 문인의 행색이다. 《장자莊子》에서 언급된 해의반박解衣盤礴을 상기시킨다. 옷섶을 풀어헤친 채 세상 편한 자세로 차를 기다리고 있는 것이다. 사실 해의반박은 완전 자유 상태의 화가, 예술가의 태도를 말한다.

“송宋의 원군元君이 장차 그림을 그리게 하려 하자 여러 화공畵工들이 모두 이르러 명을 받아 읍揖하고 서서 붓을 빨고 먹을 개고 있었는데, 밖에 있는 자가 반이나 되었다. 늦게 온 한 화공이 있었는데, 한가히 빨리 걷지도 아니하고 명을 받아 읍하고는 서지도 아니한 채 곧 방으로 가버렸다. 원군이 사람을 시켜 그를 보게 하니, 곧 옷을 풀고 다리를 뻗은 채 벗어 붙이었다고 한다. 원군이 이르기를 ‘옳다! 이 자가 진정한 화공이다’라고 하였다.”
– 《장자》, <전자방田子方>, 해의반박

어쩌면 그림 속 차를 기다리는 문인이 은일자임을 표현하기 위한 것일 수도 있다. 산중에서 은일하는 인물이 의관을 정제하고 반듯하게 있는 것은 어울리지 않는 표현이다. 은일이나 와유臥遊는 동아시아 문인들이 도달하고자 했던 경지였다. 그런데 이러한 정신을 담은 그림이 그 어떠한 그림 장르보다 세속적 바람을 담고 있는 민화로도 그려졌다는 점은 민화 연구에 있어 매우 주목할 필요가 있는 부분이라고 생각된다.
이렇게 차를 기다리는 문인과 풍로 앞에서 찻물을 끓이고 있는 다동의 모습이 그려지는 다화가 조선시대에 제작된 다화의 주류를 이루며, 이는 20세기 전반기까지 성행한다. 이러한 조선 말기 화단의 다화 양식이 민화에 그대로 적용된 것으로 볼 수 있다.
19세기 중반으로 오면서 다화는 급격히 그 수가 줄었다. 그러나 기존 제작 흐름의 지속, 실제 아회나 실존 인물을 제재로 한 다화의 증가, 차와 관련된 시詩와 그 정취만 담긴 다화, 새로운 유형의 등장으로 다양한 제작 경향을 보인다.


김취정 | 서울대학교박물관 객원연구원.

고려대학교 대학원에서 미술사학 석·박사학위를 받았고,
고려대학교 아세아문제연구소 연구원 등을 역임했다.
현재 고려대 강사, 서울대학교박물관 객원연구원,
한국민화학회 이사이다.


저자에 관하여

월간민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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