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용권 êµìˆ˜ì˜ â€˜ì§§ì€ ê¸€ 긴 ìƒê°â€™ã‰
1970년대 ê³µë°©ì†Œì† ë¯¼í™”ìž‘ê°€ë“¤ì˜ í™œë™ â…¡

앞선 글ì—서 70년대 초반 ìš´ë´‰ ì´ê·œì™„, 설촌 정하정, 예범 ë°•ìˆ˜í•™ì´ í•¨ê»˜ ê·¸ë¦¼ì„ ë°°ì› ê³ , ì´ë“¤ì´ 1970년대 중반부터 본격ì ìœ¼ë¡œ í™”ë‹¨ì— ë‚˜ì™€ 활ë™í–ˆë‹¤ëŠ” ë‚´ìš©ì— ëŒ€í•´ ì´ì•¼ê¸°í–ˆìœ¼ë©° ì´ì™€ 관련해 ì´ê·œì™„ 작가를 먼저 소개하였다.
다ìŒìœ¼ë¡œ 정하정 작가는 1969ë…„ 수당 ê°•í¬ì› 문하ì—서 ì´ê·œì™„ì„ ë§Œë‚˜ 2ë…„ê°„ 함께 ê·¸ë¦¼ì„ ë°°ì› ë‹¤. 그는 군대 제대 í›„ì¸ 1973ë…„ê²½ì— ì†¡ìœ¤ì•ˆ 문하ì—ì„œë„ ì´ê·œì™„ê³¼ ë™ë¬¸ 수학했다. ì´í›„ 그는 í™”ë‹¨ì— ë‚˜ì™€ 활발한 활ë™ì„ 보여주면서 ì „ë³µì„, 고광준, 윤ì¸ìˆ˜, ê¹€ê¸°íƒ ë“±ì˜ ì œìžë¥¼ 양성했다. 그는 (사)한국민화협회 수ì„부회장과 (사)한국민화협회 부설 í‰ìƒêµìœ¡ì› 창작민화êµì‹¤ ì§€ë„êµìˆ˜ë¡œ 활ë™í–ˆìœ¼ë©°, 2013년부터는 ì´ê·œì™„ 작가와 함께 <한국민화창작대작>å±•ì„ ê¸°íš, ì „ì‹œí•¨ìœ¼ë¡œì¨ â€˜ì°½ìž‘ë¯¼í™”â€™ì˜ ìœ„ìƒì„ 드높였다. ë™ì‹œì— 그는 ê²½í¬ëŒ€í•™êµ êµìœ¡ëŒ€í•™ì› ‘창작민화êµìœ¡ê³¼ì •’ 출강과 ê²½í¬ëŒ€í•™êµ 국제캠í¼ìФ í‰ìƒêµìœ¡ì› â€˜ì°½ìž‘ë¯¼í™”ê³¼ì •â€™ì„ ì§ì ‘ ìš´ì˜í–ˆìœ¼ë©°, ì´ì™¸ì—ë„ ì„¤ì´Œë¯¼í™”ì—°êµ¬íšŒ, 민화밴드 모임, 전국민화투어 ê°•ì—° ë“±ì„ í†µí•´ 창작민화 í™œì„±í™”ì— í° ê¸°ì—¬ë¥¼ 하고 있다.
ì´ì–´ ë°•ìˆ˜í•™ì€ ì¤‘í•™êµë¥¼ 졸업한 16세부터 3ë…„ê°„ íŒŒì¸ ì†¡ê·œíƒœì—게 ë¯¼í™”ê¸°ë²•ì„ ì‚¬ì‚¬í–ˆë‹¤. 당시 그는 ì§‘ì•ˆì— ê·¸ë¦¼ 장사하는 ë¶„ì˜ ì†Œê°œë¡œ 송규태를 만나 ê·¸ë¦¼ì„ ë°°ìš¸ 수 있었다. ë°•ìˆ˜í•™ì€ 24세부터 ê³µë°©ì„ ìš´ì˜í•˜ë©´ì„œ 고서화를 보수, 재현하는 ì¼ì— 몰ë‘했다. 그는 한때 ë¶€ì‚°ì— ë‚´ë ¤ê°€ ì¼ë³¸ìœ¼ë¡œ 수출하는 ê·¸ë¦¼ì„ ê·¸ë ¸ìœ¼ë©° 다시 서울로 올ë¼ì™€ 송윤안 공방ì—서 ì´ê·œì™„ê³¼ 함께 작업했다.
ì´í›„ 그는 서울 사당ë™ì—서 활ë™í•˜ë‹¤ê°€ 부천으로 ì´ì‚¬í•˜ë©´ì„œ 그곳ì—서 ì œìžë“¤ì„ 집중ì ìœ¼ë¡œ 양성했다. 친구 ë™ìƒì¸ ê¹€ìƒì² ì„ 첫 ì œìžë¡œ 받아들여 가르쳤으며, 외가 쪽 먼 ì¹œì²™ì¸ êµ¬ì—°ê²½ì„ ë¹„ë¡¯í•´ ì´ë¬¸ì„±, 오ì˜ìˆœ, ì´ì •ë™ ë“±ì˜ ì œìžë¥¼ 배출했다. 당시 ì´ë¬¸ì„±ì€ 박수학 공방 ì˜†ì§‘ì— ì‚´ê³  ìžˆì—ˆê¸°ì— ìžì—°ìŠ¤ëŸ½ê²Œ ì¤‘í•™êµ 3학년 때부터 민화 ê¸°ë²•ì„ ë°°ìš¸ 수 있었다. ì´ë ‡ê²Œ ë°•ìˆ˜í•™ì€ ì˜¤ëŠ˜ë‚  활발한 활ë™ì„ 하며 민화분야를 리드하고 있는 ê¹€ìƒì² , ì´ì •ë™, ì´ë¬¸ì„± ë“±ì˜ ì œìžë“¤ì„ 양성해 ì¢‹ì€ í‰ê°€ë¥¼ 받고 있다.
ì´ë ‡ë“¯ 오늘날 민화분야가 í¬ê²Œ ê°ê´‘ì„ ë°›ìœ¼ë©´ì„œ ìžë¦¬ 잡아가고 있는 ë°ì—는 ì´ê·œì™„, 정하정, ë°•ìˆ˜í•™ì˜ ì—­í• ì´ ë§¤ìš° 컸다. ì´ë“¤ì€ 약ì†ì´ë¼ë„ 한 듯, 서로 다른 개성ì ì¸ 작품 활ë™ì„ 보여주면서 ì œìžì–‘성과 창작민화 저변 í™•ëŒ€ì— ì‹¬í˜ˆì„ ê¸°ìš¸ì—¬ 왔다. 현재ì—ë„ ì´ë“¤ì€ ê°ê° 〈운봉창작민화회〉, 〈설촌창작민화연구회〉, 〈예범전통민화연구회〉를 남다른 리ë”십으로 ìš´ì˜, 창작민화 ë°œì „ì— ìžˆì–´ í° ê¸°ë‘¥ ì—­í• ì„ í•˜ê³  있다.
ì´ë°–ì—ë„ 1970ë…„ëŒ€ì— í™œë™í•œ 나정태, 정수í¬, 육재수, 김용대 ë“±ì˜ í™œë™ì„ ë¹¼ë†“ì„ ìˆ˜ 없다. 특히 현대미술 íë¦„ì— í° ì—­í• ì„ í–ˆë˜ ë‚˜ì •íƒœëŠ”, 70년대 ì´ˆ 성남ì—서 ê³µë°©ì„ ìš´ì˜í•˜ë˜ ì´ê·œì™„ì„ ë§Œë‚˜ 1ë…„ê°„ 함께 하면서 ë¯¼í™”ì— í° ê´€ì‹¬ì„ ê°–ê³  제작하기 시작했다. 당시 나정태는 ì´ì›ƒì— ì‚´ì•˜ë˜ ì´ê·œì™„ ê·¸ë¦¼ì„ ë³´ê³  여러 번 그를 찾아간 ëì— í•¨ê»˜ í•  수 있었고 ì´í›„ ë…ìžì ìœ¼ë¡œ 1980ë…„ëŒ€ì— ê³µë°©ì„ ìš´ì˜í•˜ë©´ì„œ 본격ì ìœ¼ë¡œ 민화를 ì œìž‘í–ˆëŠ”ë° ì œìžë¡œëŠ” 서공임, ë…¸ìš©ì‹ ë“±ì„ ë°°ì¶œí–ˆë‹¤.


글 김용권(겸재정선미술관 관장)

ì €ìžì— 관하여

월간민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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