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용권 교수의 ‘짧은 글 긴 생각’㉛ 현대 민화의 전개 방향

민화가 새롭게 조명을 받고 널리 인식되기 시작한 것은 1970년대에 들어오면서부터였다. 물론 민화가 갖는 조형성의 우수성은 좀 더 일찍 발견했으나 민화가 일반에게까지 널리 인식되고 보급된 것은 1970년대에 와서의 일이다. 놀라운 것은 당시에 민화가 그 이전의 인식과는 다르게 우리 민족 유일의 주체적이고 고유한 미술로 받아들여졌다는 것이다. 이른바 당시에 민화는 중국 화풍의 영향을 받은 화원이나 문인화가들 그림과는 다르게 서민 생활 정서와 사상을 우리 서민 작가들이 가식 없이 드러낸 그림으로 인식되면서 민족 유일의 주체적인 그림으로 받아들여졌다.
그리하여 인사동 골동품가게에서 뽀얗게 먼지를 덮어쓰고 있던 민화들이 고가의 상품으로 거래되기 시작했다. 그 촉매구실은 외국 사람들이 하였는데 특히 안목 있는 일본 화상들에 의한 민화의 수집은 곧 한국인 수집가들에게도 자극이 되어 민화 가격이 뛰어오르기 시작했던 것이다.
짚고 넘어가자면 당시 일본은 급격한 경제성장에 힘입어 한국 민화를 수집하는 열기가 높았으며, 바로 이때 민화가 일본에 집중적으로 건너갔다. 이 때문에 역사가 오래된 오리지널 민화가 우리나라보다 일본에 더 많은 것이다. 예컨대 세리자와 케이스케, 아타카[安宅] 컬렉션 등에서 한국 민화를 집중적으로 모았고, 일본에서 거주하던 한국 예술가인 이우환 등이 민화의 수집과 더불어 연구도 병행하였다. 물론 일본뿐 아니라 미국, 프랑스, 독일 등의 수집가들에게도 민화가 큰 사랑을 받으면서 국내 수집가들의 눈길을 끌기 시작했다. 김호연은 1969년 신세계 화랑에서 <호랑이그림> 전시를 할 때 그림 한 장에 만원이 넘지 않던 그림들이 1972년에는 50만원에도 골라잡을 수 없었다며 당시 민화에 대한 수집의 열기가 얼마나 뜨거웠는지를 회고했다.
그런데 앞의 글과는 전혀 다르게, 당시에는 우리 민화의 전통과 장점을 버리도록 강요받기도 했다. 즉 당시에 민화는 새로운 시대의 변화에 밀리면서 무관심의 대상이 되기도 했다. 이른바 1970년대는 새마을운동과 유신에 의한 미신타파를 외치는 가운데 전통의 모든 것들이 버림받기도 했던 것이다. 무당, 점, 굿, 부적 등은 비합리적 미신으로 농촌과 마을 공동체에서 뿌리 뽑혀나갔다. 예컨대 무녀들의 활동은 비과학적, 비윤리적, 사이비라는 이유 때문에 사회악으로 지목되면서 무속은 미신타파라는 미명 아래 탄압받기도 했다.
그러나 70년대 후반부터는 민족성, 민중성에 대한 역사적 전통이 새롭게 복원되기 시작하였다. 다양한 전승 공예와 미술과 음악 등에 학계의 관심이 집중되었고, 그런 가운데 민화에 대한 관심도 함께 높아졌다. 실제로 당시에는 민화수요가 급증했는데, 오래된 집 다락에 잠자고 있던 <고사인물 그림>, <호랑이 그림>, <화조 그림> 등을 찾는 사람이 생겨나고 그 수요가 늘면서 값이 오르게 됐다. 즉 민화가 무한정 있는 것도 아니고 찾는 사람이 늘어나면서 값도 오르고 민화도 귀해졌다. 이에 민화를 찾는 거간들은 시골집들을 누비면서 민화 비슷한 것, 이를테면 민화가 아닌데도 이름이나 낙관落款 없는 그림을 모조리 민화로 둔갑시켜 대폭 늘어난 수요를 충족시켰다. 여기에는 초상화나 탱화 그리고 무화도 끼어있었다. 이렇게 당시 전통 미술이 호황을 누린 시기였다. 1960년대 초까지만 해도 저렴하던 작품 가격이 1970년대 중반부터 급등하면서 미술품이 투기의 대상으로까지 부각됐다. 즉 신흥 부르주아지계층이 등장하고 전문 교육을 받은 문화 향유층이 형성되면서 미술 수요 인구가 급증하기 시작했고 인사동을 중심으로 한 화랑가도 본격적으로 형성됐다.


글 김용권(겸재정선미술관 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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