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용권 관장의 ‘짧은 글 긴 생각’ (69) 조선시대 화원 제도Ⅲ

글 김용권 (겸재정선미술관 관장)


본격적으로 조선시대의 도화서 화원 직제는 성종 때 완성, 1471년에 편찬된 《경국대전經國大典》 ‘신묘대전’의 <이전吏典>·<예전禮>·<공전工典> 등에서 다음과 같이 확인할 수 있다. 예조판서가 도화서 관리 책임자인 제조提調를 겸했고 그 밑으로 종6품 별제別提 2명을 두었다. 별제 밑으로는 실질적인 업무를 보는 잡직雜職 화원 20명을 정원으로 두었는데 이들은 종9품에서부터 종6품까지 오를 수 있었다 .
다시 《경국대전》의 규정에 따라 새로 도화서의 운영을 전담한 예조의 문관은 ‘제조提調’와 ‘별제別提’였다. 즉 도화서의 최고 책임자인 제조는 직속 관서장인 예조판서가 겸임했는데, 제조에 대한 검찰권은 이조에서 행사해 도화서가 국왕의 관할에서 분리된 문신 중심으로 전환되었다. 종6품직인 별제 직위는 화원이 진급할 수 있는 최고의 직위였다. 하지만 사실상의 별제 자리는 신분적으로 천시되는 화원이 진급하기보다는 주로 사대부 가운데서 그림에 밝아 화격畵格을 잘 아는 사람이 임명되었다.
이어 도화서 화원은 선화善畵 1명(종6품), 선회善繪 1명(종7품), 화사畵史 1명(종8품), 회사繪史 2명(종9품)과 화원 임기가 만료된 뒤에도 계속 근무할 수 있는 서반체아직西班遞兒職에 3명(종6품 1명, 종7품 1명, 종8품 1명) 등 20명이 소속되어 활동했으며, 화원이 되기 위해 교육을 받고있는 화학생도畵學生徒 15명이 정원으로 소속되었다. 이외에도 도화서에는 표구를 담당한 배첩장褙貼匠 2명, 제조를 겸임한 예조판서를 주로 수종하였던 노복 근수노跟隨奴 2명, 여러 가지 잡역을 담당했던 하인 차노비差備奴 5명이 배속되어 도화서의 여러 가지 업무를 도왔다.
이상과 같이 조선 전기에 이미 도화서에는 정직正職으로서의 제조提調가 있었으며, 종6품인 별제와 화원 20명이 있었다. 앞서도 일면 언급했듯이 국초의 도화원 정원은 40명이었기 때문에 숫자상으로 감소한 것으로 이해될 수 있겠다. 하지만 고려 도화원 시절에는 그림을 전문으로 하지 않는 시파치라 불리던 2품 이상 고관의 서자庶子들이 적지 않았기 때문에 그림을 그리는 화원은 본래 20명이었던 것으로 생각된다.
이는 세종대의 “도화서 화원이 잡고雜故 이외의 시사자時仕者는 20명에 불과하다”라는 기록에서 더욱 확실히 알 수 있는 대목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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