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용권 관장의 ‘짧은 글 긴 생각’ ㉟ 현대 민화의 전개 방향

민화를 담은 병풍은 집집마다 두어 간수하던 생필품이었지만, 새마을 운동이 시작된 1973년부터는 멀쩡한 병풍들이 하나둘씩 버려졌으며 고물장사, 엿장사, 돗자리 장사꾼들이 그저 얻어가거나 헐값에 사갔다. 그러나 1970년대 후반부터는 전통의 계승이라는 문제가 대두되면서 다시 문화유산, 전통의 의미가 강조되었다. 특히 박정희 정권이 자신의 권력에 정당성을 부여하기 위해 민족의식을 이데올로기화하면서, 정부 주도로 전통과 민족문화에 대한 관심이 더욱 높아졌으며 이와 같은 분위기 속에 민화를 비롯한 무속화, 탱화 등에 대한 수요가 점차 높아지고 수집 붐이 일어났다.
인사동을 중심으로 많은 화랑과 표구사가 생겨나 전통 미술품 매매가 활발하게 이루어졌으며 심지어 커피 값을 300-400원 받던 다방이나 옷 가게에서도 전통 미술품이 거래되었다. 그리고 고물장사, 엿장사, 돗자리 장사에게 팔려간 병풍도 다시 제자리를 찾아갔다. 당시 수집가가 고물장사에게 사들인 어떤 병풍에는 몇 겹으로 민화가 덧발라 있어 그걸 물에 담가 놓으면 생각지도 못한 가치 있는 그림이 한 켜 한 켜 떨어져 올라와 뜻밖에 횡재했다고도 전한다. 한 미국인은 인사동 종이공장에서 재활용 종이를 만들기 위해 넝마주이가 주워온 폐지 속에서 많은 민화를 건졌다고 했는데, 이와 같은 경로로 현재 시애틀미술관, 포클랜드미술관 등 박물관이 민화를 소장, 전시하기도 한다.
한편 한국전쟁 직후, 전국에 기지촌이 형성되고 미군을 상대로 한 그림가게가 생겨나면서 그들의 취향에 맞는 초상화, 풍경화 등이 판매되기 시작했다. 이와 같은 그림을 ‘이발소 그림’이라 부르는데, 성격적으로 민화와는 차이를 많이 보이지만 전혀 무관한 것도 아니다. 왜냐하면 민화의 현세 구복적인 특성은 해방 전후에 통용된 소위 이발소 그림으로 이어지기도 했기 때문이다. 어떻든 이발소 그림은 1970년대 후반부터 본격적으로 그려지기 시작했으며, 저렴한 가격의 미술품 수출이 점차 확대됨에 따라 물량이 모자랄 정도였다. 이러한 이발소 그림의 열풍은 삼각지뿐 아니라 주변지역인 이태원을 비롯한 구로공단, 신설동, 성수동, 의정부까지 영향을 끼쳤다. 이렇게 내수시장이 활기를 띄면서 수출상들도 생겨났는데, 당시 ‘아메리아’, ‘영풍’ 등은 대량생산체제의 그림회사로 많은 작가들에게 수출할 그림을 그리게 했다.
이발소 그림은 명칭부터 폄하, 무시되는 경향이 있었지만 새로운 미술품 소비의 길을 열어가면서 빠르게 일반 가정이나 상가로 퍼져 나갔다. 특히 복(돈)을 가져온다는 〈돼지 그림〉같은 류의 그림은 상업 공간, 주거 공간 등에 많이 걸렸다. 그러나 1980년대 후반부터는 작가들의 인건비가 상승함에 따라 수출그림의 가격도 함께 높아졌고, 그림회사들은 임금이 낮은 중국, 베트남 등으로 자리를 옮기기 시작했다.


글 김용권(겸재정선미술관 관장)

저자에 관하여

월간민화

Leave a Reply

이메일은 공개되지 않습니다. 필수 입력창은 * 로 표시되어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