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성희 감정위원의 고지도 읽기 ⑥
1872년 군현지도 : 왕도를 둘러싼 경기도 지도

《1872년 군현지도》에 수록된 경기도 지도는 경기도 지역을 단독으로 그린 대표적인 지도이다.
40점으로 구성되었으며, 각 고을에서 완성된 후 경기감영에서 수합됐기 때문에 지도마다 표현 양식이 일정하지 않다.
또한 다른 도지역의 지도와 비교해 지리적 정보를 글로 전달하는 지도가 많은 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도에는 행정구역과 군사요충지, 상권 등이 상세하게 기록되어 당시
경기도 지역사회의 실정을 보여주는 사료로서 가치가 높다.


경기京畿 지역은 천년의 역사를 지닌 한반도 역사 문화의 중심지이다. ‘경기’라는 지명은 당나라 시대에 왕도王都의 주변지역을 경현京縣과 기현畿縣으로 나누어 통치했던 것에서 유래를 찾을 수 있으며, 고려시대에 수도 개경開京을 보좌하기 위한 경기제京畿制를 실행함으로써 1018년(현종 9)에 처음 사용됐다. 경기 지역이 하나의 행정단위로서 도道가 된 것은 1390년(공양왕 2) 44개의 읍을 경기좌우도京畿左右道로 분할하면서부터다. 이후 조선 태종이 8도 체제를 시행하면서 1414년(태종 14)에 경기좌우도가 경기도京畿道로 합쳐졌다. 1434년(세종 16)에는 경기도에 속했던 철원을 강원도에 포함시켰으며 충청도에 속했던 안성을 경기도에 속하게 함으로써 지금의 행정구역과 비슷한 범위를 갖게 됐다. 경기도는 중부 지방의 서쪽에 위치하여 지리적으로 국토의 중심이 되고 한강유역을 비롯해서 서울특별시와 인천광역시를 둘러싸고 있다. 따라서 경기도는 정치, 군사, 행정, 경제, 문화 등 각 부분에서 중요성이 큰 지역이며 수원 화성, 조선 왕릉, 광주 조선백자 요지 등 왕실과 관련된 많은 문화유산을 간직하고 있다.

1872년에 만들어진 경기도 고을 지도

도성의 배후지역으로 중요성이 컸던 경기도는 도지도道地圖, 군현지도郡縣地圖 등 다양한 형태의 지도가 제작되고 활용됐다. 그 가운데 경기도의 고을을 단독으로 그린 지도는 1872년에 제작된 경기도 지도가 대표적이다. 전국 각 군현의 지도를 모아놓은 《1872년 군현지도》(서울대학교 규장각한국학연구원 소장)에 수록된 경기도 지도는 38개 고을(4유수부, 3목, 9도호부, 10군, 12현)의 지도 38점과 영종진永宗鎭, 대부진大阜鎭을 그린 진영지도 2점을 포함한 채색지도 40점이다. 각각 낱장으로 된 단독지도 형태이며 크기가 작은 것은 63.9×59.8㎝에서 큰 것은 142.1×98.4㎝까지 일정하지 않으나, 뒷면에 표지가 붙어 있어 접었을 때는 첩帖의 형태가 되며 크기는 35.0×25.0㎝로 모두 동일하다.(도1)
《1872년 군현지도》의 제작은 전국적으로 각 도의 관찰사觀察使가 소속 군현의 수령에게 지도 제작의 지침을 전달하고 완성된 지도를 감영에서 수합하는 방식으로 이루어졌다. 《1872년 군현지도》가 편찬될 시기 경기감영에 파견된 관찰사는 1869년 8월부터 1872년 7월까지 재임한 박영보(朴永輔, 1808~?)로 확인된다. 그런데 조선 후기 경기감영은 도의 중심지에 위치하지 않고 한성부 내에 있었기 때문에, 경기관찰사는 경기도의 행정·사법·군사 등을 총괄하는 업무뿐만 아니라 수도를 보좌하는 역할을 했다. 이 때문인지 경기도 지도를 올리는 과정에서 경기관찰사가 지도 제작에 적극적으로 관여하지 못했던 것으로 보인다. 40점에 이르는 경기도 지도는 고을에서 올린 원본의 지도들이여서 지도의 형식과 구성에서 통일성을 갖추지 못했다.
반면에 경기도 각 고을에서 바라본 당시 지역의 상황이 구체적으로 기록됐다. 1872년 경기도 지도에 보이는 내용상의 특징은 첫째, 서해안 해방海防과 관련된 군사적 내용이 충실히 기재됐다는 점이다. 병인양요·신미양요 당시의 전적지戰跡地뿐만 아니라 해로, 해방의 요충지점 등이 기록됐다. 둘째, 사창社倉·장시場市·도로道路 등 사회경제적 측면과 관련되는 내용들이 보완됐다. 셋째, 한성의 외곽지역으로 경기도 일대에 자리한 조선 왕실의 능陵·원園·묘墓에 대한 내용이 기록됐다. 비교적 지면이 커진 지도에는 전반적으로 산과 하천, 도로를 중심으로 읍치, 면面, 리里, 동洞, 산성, 진津, 포浦, 역驛, 봉수烽燧와 함께 창倉, 장시, 주막, 점店, 사찰, 탑塔, 제당祭堂, 못池까지 지역에 대한 상세한 정보가 들어있다.

서해안을 방어하는 요충지를 그린 지도

1872년 경기도 지도에서 해방과 관련된 군사적 내용은 교하·교동·강화·통진·김포·부평·인천·남양·영종·대부 등 서해안 일대에 위치한 고을 지도들에서 더욱 분명하게 확인된다. 수도 방어의 요충지인 강화를 그린 <강화부전도>는 봉수대를 비롯하여 해안가에 포진한 진과 보, 돈대墩臺 등의 군사시설이 정교하게 그려져 있고, 육로뿐만 아니라 강화 본섬과 주변의 섬, 그리고 육지를 연결하는 해로도 명확하게 표시돼 있다. 강화 동쪽으로 해안의 방어를 위해 쌓은 장성이 정교하게 그려져 있는데, 광성보廣城堡는 신미양요에서 어재연(魚在淵, 1823~1871) 장군과 조선군이 미군 군함의 함포사격에 맞서 싸우다 장렬히 전사한 마지막 격전지이기도 하다.(도2, 2-1, 2-2) 길상면吉祥面에는 정족산성이 그려져 있는데 산성 내부에는 전등사와 사고史庫의 모습이 그려져 있다.
김포시 통진면, 월곶면, 대곶면, 하성면에 해당하는 통진부는 한양에서 강화로 가는 중요한 길목이 되는 곳이다. <통진부지도>에도 육로와 해로의 교통망이 자세하게 그려져 있다. 한양으로 통하는 대로뿐만 아니라 관내 지역 간의 연결로나 강을 건너는 길까지도 모두 명확하게 표시되어 있다. 문수산성은 주변의 산세보다 사실적이고 입체적으로 묘사했으며 각종 건물과 성곽, 문루의 모습이 상세하고 나루터로 이어지는 계단의 모습까지 그려져 있다.(도3) 대부도는 서해안에서는 가장 큰 섬이며, 전체가 나지막한 언덕으로 이루어지고 있는 데에서 대부도라는 이름이 유래됐다. <대부지도>는 <영종지도>와 함께 진영鎭營의 모습을 그린 지도이다. 서남쪽의 풍도楓島와 오배도五拜島에 “서양 선박들이 닻을 내려 머무른 적이 있다[洋船下碇逗遛]”고 기록되어 있으며 해로가 점선으로 표시되어 있다.(도4)

도시의 발전과 시장의 발달을 보여주는 지도

경기도 지역은 한강을 비롯한 수로교통의 유리한 조건을 갖추고 있어 경제적으로 물자유통의 중심지였다. 경기도의 상품유통시장은 장시와 포구 시장을 발전시키는 토대가 됐다. 조선의 계획도시로 건설된 수원은 18세기 말 이후 상업유통의 중심지로 성장했다. 특히 노량진과 수원 사이에 개설된 신작로新作路로 수원의 상업화가 촉진됐다. <수원부지도>에는 정조의 화성華城 경영에 따른 변화된 수원의 모습이 잘 나타나 있다. 수원의 시장권은 화성 남문 밖의 장시場市를 비롯하여 공향면貢鄕面의 발안장發案場, 오정면梧井面의 안중장安仲場, 초장면草長面의 사살곶장沙㐊串場, 청호면에 들어선 장시 등을 통해서 당시 수원 지역의 상품 유통 발달을 파악할 수 있다.(도5)
또한 경기도는 조선 초기부터 한성을 중심으로 사방으로 통하는 길이 정비되었는데, <양주지도>에는 붉은 실선으로 도로망이 그려져 있다. 인왕산 옆으로 조선 제1대로인 의주대로義州大路의 경로가 되는 홍제원弘濟院, 검암발소黔巖撥所 등의 여행객 시설이 보이고 도로 주변에는 평구역平丘驛, 녹양역綠楊驛, 연서역延曙驛 등이 표시되어 있다.(도6) 지금의 의정부시인 시북곡면柴北谷面에서 한성 방향으로 가다보면 한성 초입에 누원점樓院店이 보인다. 양주의 누원점은 한성이 18세기 이후 전국적 시장권의 중심도시로 성장하면서 서울 외곽에 새로운 상품유통의 근거지로 생겨난 대표적인 곳이다. 이곳은 금난전권禁亂廛權의 통제를 받지 않고 자유로이 장사를 할 수 있는 곳으로서, 자유상인인 사상私商들에 의한 상업체제가 자리를 잡고 번창했던 장터거리였다.

조선의 왕릉이 표시된 지도

조선 왕릉은 후왕들이 자주 선왕의 능을 참배하고 효孝를 실천할 수 있도록 한성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는 곳에 조성했다. 한성을 둘러싸고 있는 경기도 일대 교하·파주·양주·고양·김포·수원·광주·여주 등의 지도에는 조선 왕릉이 그려져 있다. 여주에는 세종과 세종의 비 소헌왕후의 합장릉인 영릉英陵과 효종과 효종의 비 인선왕후의 쌍릉인 영릉寧陵이 있다. <여주목지도>의 읍邑 서쪽에는 세종의 영릉과 효종의 영릉이 나란히 그려져 있는데 산줄기에 둘러싸인 모습으로 명당임을 강조해서 그렸다. 또한 북성산北成山 아래에는 ‘英陵主山回龍顧主(영릉은 주산에서 내려온 용이 선회하여 다시 조종산祖宗山을 돌아보고 혈을 맺은 곳)’라고 적어 이곳이 풍수적 명당임을 다시 한 번 강조하고 있다.(도7)
<수원부지도>에는 남쪽 화산花山 아래 현륭원顯隆園과 건릉健陵을 표시하고 정자각이 함께 그려져 있다. 사도세자思悼世子와 그의 아내 혜경궁惠慶宮 홍씨洪氏의 능인 현륭원은 1899년에 사도세자가 장조의황제로 추존되면서 능으로 격상되어 현재 융릉隆陵이라 칭한다. 현륭원 서쪽에 위치한 건릉은 정조와 효의선황후 김씨의 합장릉이다. 1800년 현륭원 동쪽에 정조의 능을 조성했다가 1821년에 효의선황후 김씨가 세상을 떠나자 현륭원 서쪽으로 이장하면서 합장릉의 형태로 조성했다. 현륭원과 건릉은 뒤로 화산이 감싸고 앞에는 황구지천黃口池川이 흐르는 배산임수의 지형에 자리하고 있음이 강조됐다.(도8)
경기도는 지리적으로 도성의 울타리 역할을 하고 행정적으로는 정치·군사·경제의 중심 역할을 담당하며 도성과 밀접한 관계를 맺어왔다. 1872년 경기도 지도는 당시 경기도 각 지역에서 인식한 지정학적 특징을 구체적으로 보여준다. 다음 호에는 《1872년 군현지도》에 나타난 강원도의 모습을 살펴보겠다. 〔계속〕

글 김성희(문화재청 문화재감정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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