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성희 감정위원의 고지도 읽기 ⑤
조선 말기 전국의 초상, 1872년 군현지도

1872년(고종 9) 흥선대원군 집권기에 중앙집권적 통치 체제를 확립하기 위해 전국에 대한 구체적이고 종합적인 내용을 보여주는 군현지도가 제작됐다. 《1872년 군현지도》는 각 군현에서 완성된 지도가 경기도, 충청도, 전라도 등 8곳의 도별로 수합되었으며 수량이 총 461장에 이르렀다. 또한 19세기 말 변화된 정치·경제적 상황과 군사적 내용을 담고 있는 《1872년 군현지도》는 기존의 회화식 군현지도 제작 기법이 총체적으로 사용되어 의미가 남다르다.


조선 시대에는 국가 통치를 위한 기초 자료로서 군현지도郡縣地圖가 널리 활용됐다. 군현지도는 고을의 중심 공간인 읍치邑治나 읍성邑城을 확대해서 관아를 비롯한 주요 관청 건물을 상세하게 묘사하고 산줄기와 물줄기, 도로, 그리고 백성들이 모여 사는 촌락과 같은 고을의 인문지리가 한눈에 들어오도록 회화적으로 표현된 것이 많다. 전라남도 순천시 낙안면의 사적 제302호 ‘순천 낙안읍성’은 현존하는 조선 시대 읍성 가운데 하나로 오늘날에도 조선 전기의 읍성 양식을 유지하고 있다.(도1) 낙안읍성과 그 일대를 그린 낙안군의 지도는 1757년과 1765년 사이에 편찬된 전국 지리서인 《여지도서》, 1871년 《호남읍지》, 1899년 《낙안군읍지》 등의 읍지邑誌에 수록된 채색지도에서 확인된다.(도2) 조선 후기에는 중앙의 행정력이 지방사회에까지 미치게 되면서 전국적으로 군현지도집과 읍지가 활발하게 편찬됐다. 정부에서 주도한 관찬지도 편찬사업은 《해동지도》를 비롯하여 18세기 영・정조대에 집중적으로 이루어지다가 19세기에 들어서는 정조 이후 계속되는 세도정치의 사회적 혼란으로 점차 쇠퇴해갔다. 그러나 다시 고종 대에 와서 집권세력의 교체와 정치적 개혁이 수차례 이루어지면서 지방제도의 변화 시기마다 많은 읍지들이 편찬됐다. 고종 연간은 읍지 편찬이 가장 활발하게 이루어진 시기이며 현존하는 도별 읍지 대부분이 고종대에 작성된 것이다. 그 가운데 1863년 고종의 즉위로 10년간 정권을 잡았던 흥선대원군은 1870년에서 1872년 사이에 집중적으로 많은 읍지와 군현지도를 편찬했다.(도3)

이는 1866년의 병인양요와 1871년의 신미양요를 겪은 이후에 강병책强兵策을 위주로 국가 정책 전반에 대한 과감한 개혁을 추진한 것과 관련이 있다. 특히 병인양요 이후 군비강화정책을 추진하고 포수 중심체제로 군편제를 조정하면서 이 시기 병사들에게는 조총 사격 훈련을 강조했다. 이에 화포과火砲科를 창설하여 함경도, 충청도, 전라도, 경상도 등 주로 해안지역에 포군을 중점적으로 편성하고 신미양요를 전후해서는 전국 각지에 대대적으로 증설했다. 이러한 일련의 조치를 위해서는 전 국토의 실정과 군사력에 대한 현황을 파악하는 것이 시급한 과제였고 이를 위해서 전국적으로 많은 읍지와 군현지도가 새롭게 편찬된 것이다.

1871년 읍지에 수록된 군현지도와 1872년 전국 군현지도집

1871년 8월 21일, 강원도 감영監營은 각 읍의 읍지들을 속히 올려보내라는 의정부의 관문을 받고 이를 도내 각 군현으로 전달했다.(《강원감영관첩江原監營關牒》 辛未八月二十一日) 강원도 금화현金化縣의 읍지인 《화강읍지花江邑誌》에는 9월 10일에 감영으로부터 도착한 읍지 작성령이 기록된 관문이 수록돼 있다. 이렇듯 1871년에 각 고을의 읍지를 올리라는 ‘읍지등상지령邑誌謄上之令’이 전국에 내려지고, 이에 1871년에서 1872년에 부·목·군·현 단위의 각 군현지郡縣誌를 도별로 묶어 낸 전국 읍지가 간행됐다. 이 읍지 속의 군현지 서두마다 지도가 첨부되어 총 300장의 군현지도가 확인된다.(도4)
1871년 읍지 편찬에 이어서 1872년 3월에서 6월 사이에 전국적으로 군현지도 제작 사업이 진행됐다. 《1872년 군현지도》로 불리는 이 지도들은 낱장의 단독 형태로 1871년 읍지에 수록된 지도를 바탕으로 제작됐으며 각각 첩帖으로 분리된 지도를 펼쳤을 때의 크기가 모두 다르지만 평균 세로 100㎝, 가로 70㎝에서 ±10~20㎝의 비교적 큰 지도이다. 지도의 지면이 커지면서 지형의 모습, 객사 및 관사 등의 관아 건물, 사찰 등과 같은 여러 가지 지역의 상황이 매우 상세하게 전달된다.
《1872년 군현지도》는 총 461장에 이르는 매우 방대한 양이 며 지도의 구성은 전국 320개 군현의 지도뿐만 아니라 진영지도 126장, 산성지도 13장, 목장지도 2장 등 별도로 군사시설을 그린 지도가 포함됐다. 채색으로 필사한 《1872년
군현지도》는 그림처럼 그려진 회화식 지도 표현이 고을마다 각기 다른 방식으로 나타나는 점이 매우 흥미롭다. 1871년 읍지 편찬과 연속해서 진행됐기 때문에 읍지에 수록된 지도를 바탕으로 모사된 지도들이 많고 관찬지도집이라고는 하지만 중앙에서 정서正書 작업을 거쳐 통일성을 갖춘 이전의 관찬지도집과는 다르게 지역마다 지도 제작자들의 개성적인 표현 기법이 지도에 그대로 표출되는 특징을 보인다.

흥선대원군의 개혁과 1872년 군현지도

흥선대원군 집권기에 편찬된 1871년 읍지와 1872년 군현지도에는 지리정보를 포함해 군사정보에 관한 내용이 강조됐다. 《1872년 군현지도》 가운데 경기도 <강화부전도>와 <통진부지도>에는 해로海路와 해안지역 방어의 요충지要衝地를 상세하게 담고 있어 당시 국방에 대한 관심도를 엿볼 수 있다. 강화는 경기도의 유수부留守府로서 군비를 증가시킨 대표적인 지역이다. <강화부전도>에는 동쪽으로 해안 방어를 위해 쌓은 장성이 정교하게 그려져 있는데 섬 전역에 설치된 돈대墩臺와 진鎭, 봉수대에 관한 정보가 매우 상세하다. 광성보廣城堡는 용진진, 덕진진, 초지진과 더불어 강화해협을 지키는 중요한 요새이며 신미양요에서 어재연 장군과 조선군이 미군 군함의 함포사격에 맞서 싸우다 전사한 마지막 격전지이기도 하다.(도5, 도6) 전라도 진도부는 서남해안의 길목에 위치한 섬으로, 왜적의 침입이 빈번해서 서해안 방어의 중요한 요충지였다. 1871년 《호남읍지》 진도부의 건치 연혁에 의하면 처음에는 군수가 주재하던 군郡이었는데 1866년에 부府로 승격됐다고 기록하고 있다. 이것은 병인양요 이후에 해방海防의 중요성이 강조되면서 취해진 조치로 보인다. 1872년 전라도
<진도부지도> 읍성의 내부에는 이 시기 포군의 증설과 관련된 화포청火砲廳의 모습이 확인된다.(도7) 남쪽에는 당시 해안방어기지였던 금갑진金甲鎭과 남도진南桃鎭이 설치됐던 진성鎭成이 뚜렷하게 확인된다.

한편, 《1872년 군현지도》에는 사창社倉, 시장[場市], 도로 등의 사회경제적 측면과 관련된 내용들이 대폭 보완됐는데 그중에서 특히 주목되는 것이 바로 사창의 설치 현황이다. 흥선대원군은 기존의 환곡제도를 개선해서 마을 단위로 공동 운영하는 사창 제도를 시행했고 지방마다 사창의 설치 상황을 지도에 반영하게 했던 것으로 보인다. 1872년 경기도 <양주지도>는 1871년 《경기읍지》에 수록된 <양주목지도>를 바탕으로 제작되어 표현방식이 거의 동일하다. 단 《양주목읍지》의 내용에 30여 개의 사창 시설이 있다고 기록된 부분을 1872년 <양주지도>에는 사창 31곳을 지도에 직접 그려 두었다. 또한 흥선대원군의 서원철폐령으로 인해 사라진 서원들은 《1872년 군현지도》에서 서원훼기書院毁基, 서원고지書院故址 등으로 표시하거나 처음부터 서원을 그려 넣지 않는 경우가 있는데, 1871년 《영남읍지》 산청현의 원院 항목에서 서계서원西溪書院은 1871년에 훼철되었다고 기술하면서도 수록된 읍지도에는 서계서원을 표기했다. 그러나 1872년 경상도 <산청현지도>에는 처음부터 서원을 그려 넣지 않았고 산청현 15곳에 설치한 사창과 신미양요 이후 서양 세력의 침략을 경계하기 위해 1871년에 세운 척화비斥和碑를 그려 넣어 《1872년 군현지도》 제작 당시의 변화된 내용을 반영했다.(도8, 도9)

실경산수화 방식으로 표현된 지역의 경관

1872년에 군현지도가 제작되면서 새롭게 그려졌거나, 1871년 읍지에 수록된 읍지도와 모사관계가 없는 지도는 실경산수화의 방식으로 표현된 경우가 많다. 이러한 지도는 회화적인 요소가 두드러져 지역의 경관을 더욱 입체적으로 전달한다. 《1872년 군현지도》 중 경상도 <영일현지도>는 경북 포항시 연일읍, 오천읍, 대송면, 동해면 일대를 그린 지도로 예로부터 왜적들이 침입이 잦았던 곳이다.
1871년 《영남읍지》에 수록된 <영일현지도>는 동쪽의 영일만을 물고기 비늘 무늬로 나타내고 삼각형 형태의 산봉우리로 산세를 간략하게 설명한 것에 반해, 1872년 경상도 <영일현지도>는 산형의 입체감을 드러내는 준법이 다소 도식화됐으나 산수화풍의 구도로 표현됐다.(도10, 11)

조선왕조에서 시행한 관찬지도 편찬사업의 마지막 성과물에 해당하는 《1872년 군현지도》는 조선 말기 전국 각 고을에 대한 구체적이고 종합적인 내용을 시각적으로 보여주는 귀중한 자료이다. 《1872년 군현지도》의 제작은 당시의 정치 사회적 상황이 뒷받침됐다. 국가 통치를 위한 전국의 지역을 파악할 수 있는 구체적인 지리정보와 군사시설에 관한 자료는 필연적으로 요구되는 사항들이었으며 좀 더 실질적인 이용을 위한 자료로서 전국 군현지도가 제작됐다. 《1872년 군현지도》는 각 군현에서 그린 원본이 그대로 합쳐졌기 때문에 일정하게 통일된 체제를 갖추지는 못했지만 각 지방에서 인식하는 지역의 중요성이 강조되고 제작 방식에서도 고을마다 지도 제작자들의 역량에 따른 다양하고 개성적 표현을 엿볼 수 있다. 다음 호에는 《1872년 군현지도》에 나타난 경기도 지역의 모습을 살펴보겠다. 〔계속〕



글 김성희(문화재청 문화재감정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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