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성희 감정위원의 고지도 읽기 ③ 지역 경관과 풍속을 그린 군현지도

군현지도는 지방의 고을을 그린 지도를 말한다. 주로 지방을 통치하기 위한 목적으로 제작되었기 때문에 지형지세, 관청, 성곽시설 등을 살필 수 있는 각종의 상징물이 표현된다. 조선 후기 지역 경관을 산수화처럼 그린 회화식 군현지도가 발달하면서 차츰 풍속을 기록한 것들도 제작됐다. 낙안군지도, 함흥읍도, 진주성도, 평양성도 등을 통해 회화와 지도의 장점을 모두 보여준 회화식 군현지도에 대해 알아본다.


조선 시대 지방 행정구역인 부府·목牧·군郡·현縣을 대상으로 그린 군현지도郡縣地圖는 조선 초기부터 통치 차원에서 지방의 실정을 파악할 수 있는 자료로 활용됐다. 조선 후기에 들어 군현지도가 더욱 발달하면서 다양한 유형으로 제작되었고 지역의 경관을 산수화식으로 그린 회화식 군현지도가 증가했다. 회화식 군현지도는 너무 넓은 지역에는 적용이 어렵고 군현 단위 또는 그 이하 규모의 지역을 표현하는 데 효과적인 방식이다. 회화식 군현지도의 발달은 같은 시기 산수 화단에서 실재하는 우리 땅의 모습, ‘실경’을 그리는 방식이 유행하게 된 것과 밀접한 관련이 있으며 조선 후기 산수화의 주류를 이룬 겸재 정선의 진경산수화가 유행한 이후 본격적으로 발전했다.
조선 후기 회화식 군현지도는 군현지도집郡縣地圖集이나 단독 군현지도의 형태로 활발하게 편찬됐다. 군현지도집은 전국 또는 도 단위로 소속 군현의 지도를 모아놓은 지도책으로 조선 후기 군현지도의 보급에 기여했다고 볼 수 있다. 고을의 지도를 하나의 독립된 지도로 제작한 단독 군현지도는 대부분 자연 지형을 산수화처럼 그렸다. 평양, 전주, 함흥 등의 감영 소재지와 진주 등 일부 큰 고을을 중심으로 회화식 단독 군현지도가 많이 제작됐다. 회화식 단독 군현지도는 축이나 병풍 형태가 많으며 이러한 형식에서는 회화성이 더욱 두드러지게 나타난다. 특히 18세기 후반에서
19세기에는 대형 병풍으로 제작한 경우가 많으며 병풍 형식의 군현지도는 처음에는 자연 및 인문 경관 위주로 그려졌으나 차츰 풍속 혹은 행사 장면을 기록한 것들도 제작됐다.

풍수지리관이 적용된 명당지의 구현

회화식 군현지도는 방위·거리·면적·위치 등 지리정보의 객관성보다는 통치 지역의 권위를 나타내기 위한 상징성이 두드러졌다. 조선에서는 개국 초부터 풍수적 논리를 갖춘 도시가 이상적인 형태로 자리 잡았으며 입지, 구조, 상징 등의 모든 측면을 고려해서 건설된 수도 한양의 도성과 비슷한 논리가 지방 고을의 읍치邑治에도 적용됐다. 풍수의 영향을 강하게 받은 조선의 읍치는 뒤로는 주산主山 혹은 진산鎭山이 있고 그 좌우로 청룡, 백호로 불리는 형세가 둘러쳐져 있으며 안산案山과 조산朝山으로 허전함을 메워주는 형식을 갖춘 지형이 읍터로 선호됐다.
순천 낙안읍성은 오늘날에도 조선 시대 마을의 형태나 읍성 내 시설들을 어느 정도 확인할 수 있는 성곽 유적이다. 18세기 중엽에 편찬된 《해동지도》의 <낙안군지도>에는 낙안군의 진산인 금전산金錢山아래 낙안읍성이 그려져 있다. 읍성과 진산을 부각시키기 위해 낙안읍성의 서쪽 백이산伯夷山에서 고읍면상도古邑面上道 쪽으로 뻗은 산줄기를 강조하고 북쪽 보성강 상류에 해당하는 외서면과 금전산 뒤쪽 부분은 거의 생략했다.(도1) 이는 낙안읍성이 풍수적 명당임을 강조하기 위한 표현으로 1871년에 편찬된 《호남읍지》에 수록된 <낙안군지도>에도 거의 동일하게 적용됐다. 《1872년 군현지도》의 <낙안군지도>는 보성강과 상사천 유역까지를 그려놓았지만 다른 산줄기에 비해 훨씬 짧은 백이산에서 옥산玉山까지의 산줄기를 더욱 강조하여 낙안읍성을 감싸는 산줄기가 또렷하게 드러난다.(도2) 이는 풍수적 명당 형국에서 꼭 갖추어야 하는 안산에 해당하는 옥산을 강조하기 위한 표현으로 19세기 말에도 지역의 경관을 풍수지리관으로 해석하는 것이 일관되게 나타나며 이러한 형식의 구도는 군현지도를 표현하는 방식으로 정착됐음을 알 수 있다.

이처럼 회화식 군현지도는 실제의 모습이 어떠한지에 상관없이 지형 표현에 풍수지리관이 반영되는 것이 일반적이다. 고을의 주산을 실제보다 강조하거나 주산에서 뻗어 나온 산맥이 읍치로 향하도록 방위를 옮기고, 중심부에 있지 않은 읍치를 지도 중앙에 확대하는 등 지역 경관을 인식 차이에 따라 실제와 다르게 그렸다. 고을의 행정중심지인 읍치 내부에는 관청, 객사 등의 주요 시설이 집중해 있으므로 표현할 내용이 많았고 이에 따라 읍치를 주변 지역보다 확대해서 크게 그렸다. 또한 지방관이 임금을 대신하여 다스리는 통치 공간의 권위를 나타내기 위해 읍치나 읍성 주변을 산지로 감싸는 풍수적 명당 구도는 유교적 이상 공간으로 상징화하려는 의도가 드러나 있다.

실경과 일상 풍속이 재현된 도시 경관

지도와 산수화가 결합된 회화식 단독 군현지도는 읍지나 지리지가 제공할 수 없는 정보, 가령 고을의 입지, 주요 건물들의 변화 모습 등 지역의 모습을 더욱 입체적이고 현장감 있게 전달한다. 단독 군현지도에 회화성이 강조된 시기는 1740년 감영監營과 군영軍營에 도화서 화원을 군관으로 파견한 화사군관畵師軍官 제도와 관련이 있다. 지방에 파견된 화원들은 중앙의 요구가 있을 때마다 고을의 지도를 그려 올렸으며 감영과 군영에서 소요되는 지도제작에도 참여했다. 임지에 파견된 지방관들이 세금을 매기거나 인력을 징발하는 등 고을을 관리하는데 있어서도 군현지도는 꼭 갖추어야 하는 것이었다. 이때의 지도는 고을의 인구, 경지 등을 파악하기 위해 단독으로 비교적 큰 화면에 상세하게 그린 지도가 선호됐다.
충청남도 유형문화재 제217호 <함흥읍도咸興邑圖>는 함경도 감영 소재지였던 함흥부를 그린 지도로 함흥읍성을 중심으로 성곽 주변의 전경을 그림처럼 담아냈다. 함흥은 태조 이성계가 4대 조상들의 신주를 차려놓고 제사를 지내게 하던 본궁本宮이 있는 곳으로 <함흥본궁도>를 비롯해서 지도가 많이 제작된 고을 중의 하나이다. 함흥읍성은 고을의 진산인 반룡산을 등지고 남쪽 성천成川강변의 평지에 자리 잡고 있다. <함흥읍도>는 이러한 고을의 입지가 한눈에 드러나도록 구도를 잡았다. 함흥읍성 내부의 주요 지형지물을 상세히 묘사하고 명칭을 기록하여 당시 성문과 누정 등의 성곽 시설, 주요 관아 건물 등을 파악할 수 있는 귀중한 자료이다. 성곽 주변으로 빽빽하게 들어선 민가들, 만세교 위를 말을 타고 건너거나 소달구지로 강을 건너는 인물들의 전경은 18세기 이후 번성하는 도시의 분위기를 반영한다.(도3)

진주는 조선 후기에 경상우병마사영慶尙右兵馬使營이 있던 곳으로 경상우병마절도사가 경상우도 전체의 군정을 지휘하는 진주성과 진주목사가 고을의 행정을 담당하는 진주목의 공간으로 나누어져 있었다. 진주성은 내성과 외성으로 구분되어 있고 내성에는 진남루와 촉석루가 있다. 진산인 비봉산飛鳳山 아래는 객사와 민가들이 들어서 있다. 이러한 진주의 모습을 상세하게 보여주는 진주성도는 병풍 형태가 여러 점 전하는데 축 형태의 진주성도는 국립중앙박물관 소장의 <진주성지도>가 유일하다. <진주성지도>는 ‘丙午二月 日 晉州成地圖’라는 기록이 있고 1894년에 서문과 촉석문 이외에 2층 누각으로 변화된 모습이 반영되지 않아 병오丙午 1846년에 제작된 것으로 보인다. 비봉산과 망진봉수를 도식화된 피마준과 미점준으로 묘사하고 청록으로 채색한 부분이 거칠지만 전반적으로 회화적 요소가 반영됐다. 그러나 지도로서의 표현에 더욱 충실하여 비봉산과 남강 사이 위치한 읍성의 입지를 드러냈으며 대체로 간략하게 묘사된 건물들에는 명칭을 쓰지는 않았지만, 주요 관청 등은 푸른색으로 엷게 칠해서 일반 민가와 구분했다. 남강 일대에 빨래하는 아낙들과 배를 이용하여 땔감을 나르는 촌부 등 생활 풍속 장면이 더해져 도시의 규모와 생활상을 한눈에 볼 수 있다.(도4)
현재 전하는 <진주성도> 병풍은 표현 양식에 조금씩 차이가 있으나 내용과 구성이 거의 유사하여 병풍 형식의 진주성도가 정형화된 이후 큰 변화 없이 반복적으로 그려진 것으로 생각된다. 구도는 비봉산을 중심으로 좌우로 뻗은 산줄기가 진주성 일대를 감싸도록 그려졌다. 부산광역시립박물관 소장 <진주성도> 10곡병은 진주성을 중앙에 배치하고 뒤로는 비봉산 줄기가 진주성 일대를 감싸고 앞으로는 남강이 흐르는 진주성도의 전형적인 구도이다. 전각마다 명칭을 일일이 기록하진 않았지만, 건물의 배치가 상세하여 지리적 입지와 도시 구조가 한눈에 들어온다. 진주성 북쪽 성 밖을 둘러 파서 못으로 만든 해자에는 연꽃이 만발하고 그곳에서 낚시하는 인물들이 보인다. 특히 이 그림에는 성 주변으로 넓게 펼쳐진 농경지에서 농사일을 하는 사람들이 많이 그려져 있어 지역 농업정책의 성과를 보여주고 있다.(도5, 5-1, 5-2)

평안도 감영이 있던 평양은 숙종대 이후 상업의 발달로 번화한 도시적 면모를 갖추게 됐다. 평양은 조선 후기에 군현지도 병풍이 가장 많이 제작된 지역으로 교토대학종합박물관 소장 <평양도> 8곡병, 홍익대학교박물관 소장 <평양성도> 6곡병과 같이 목판본의 병풍이 전하고 있어 대량 제작과 유통으로 당대 평양성도에 대한 수요가 많았음을 짐작할 수 있다. 국립중앙박물관 소장으로 19세기 말에 제작된 <평양성도> 8곡병은 평양성을 중심으로 평양 일대를 부감한 시점으로 그려져 있다. 평양성 뒤로는 산 능선이 이어지고 아래쪽에는 평양성을 에워싸며 흐르는 대동강을 그려 평양성의 입지를 잘 보여준다. 상업으로 번성한 도시답게 성 밖 정전井田의 구획마다 기와집이 들어서 있고 대동강에는 물자를 나르는 배들이 즐비하다. 산세와 나무를 회화적 기법으로 섬세하게 묘사하고 모란봉, 영명사, 부벽루 등 주요 명승지와 관청, 성곽 시설 등에 꼼꼼하게 명칭을 기록하여 회화와 지도의 장점을 모두 취했다.(도6, 6-1, 6-2, 6-3) 회화식 군현지도는 지역의 자연경관뿐만 아니라 인문경관까지 상세하게 담아낼 수 있어 지역의 모습을 파악하기에 효과적이다. 더불어 회화적 특징이 적극적으로 반영되어 지도의 기능과 함께 지역의 아름다운 풍광을 가까이에서 볼 수 있는 감상용 지도의 기능도 함께했다. 다음 호에는 ‘옛 그림에 담긴 제주’를 살펴보겠다.〔계속〕



글 김성희(문화재청 문화재감정위원)

저자에 관하여

월간민화

Leave a Reply

이메일은 공개되지 않습니다. 필수 입력창은 * 로 표시되어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