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이한 행동으로 이름난 문인서화가 – 미불

기이한 행동으로 이름난 문인서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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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선비가 붓을 들고 수직의 바위 면에 글씨를 쓰는 모습을 그린 그림이 있다. 바로 ‘제벽도題壁圖’ 혹은 ‘제시도題詩圖’라는 그림이다. 바위나 건물의 벽에 문득 떠오른 시상詩想을 적는 것은 예로부터 문인들의 고아한 문학 행위로 받아들여졌다. 사찰의 벽화로도 그려질 만큼 널리 다루어졌던 주제인 ‘제벽도’의 주인공은 바로 송나라때의 유명한 문인 미불米(1051-1107)이다. 문인이자 명서가名書家·명화가名畵家였고 많은 서화 유물을 수장하기도 했으며, 소동파와 교유했던 다재다능한 인물, 미불과 관련된 고사인물도를 알아보고자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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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나라 때의 문인, 미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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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불은 자가 원장元章, 호는 남궁南宮·해악海嶽이고, 호북성湖北省 양양襄陽 출신이다. 아버지는 좌무의장군을 지낸 무사였고, 어머니 염씨는 영종비英宗妃의 산후조리를 돕던 여인이자 영종英宗(1032-1067)의 아들인 신종神宗(1048-1085)의 유모였다. 미불은 어머니의 도움으로 스무 살 되던 해인 1072년 황궁 도서관 편집인이 되면서 벼슬살이를 시작했다. 이후 1091년 하남성河南省 옹구현雍丘縣의 부지사, 1103년 태상박사太常博士, 1105년 서화학박사書畵學博士와 예부원외랑禮部員外郞 등에 봉직하면서 20여 년 동안 계림, 장사, 소주와 같은 남방 지역에 머물렀다.
미불은 규범에 얽매이는 것을 싫어하고 기행奇行을 일삼아 미전米癲이라 칭해지기도 했다. 전癲은 ‘미치다’라는 뜻이다. 글씨에 있어서는 채양蔡襄·소식蘇軾·황정견黃庭堅과 더불어 송사대가로 불리었고, 그림에서는 안개 낀 산을 점묘법을 사용한 독특한 기법으로 그려내어 미법산수화米法山水畵의 창시자가 되었다. 미불의 서예와 회화는 후대에 많은 영향을 미쳤다.

서원아집도, 서원에서의 문인들의 아취 있는 모임

미불과 관련된 고사인물도로는 <서원아집도西園雅集圖>가 잘 알려져 있다. ‘서원아집’이란 송나라 때 학자 왕선王詵(1036-1089년 이후)이 서원西園의 동산에서 친구인 소식蘇軾를 비롯하여 당시 명성 높은 유학자, 승려, 도사들을 초대한 모임을 말한다. 이 모임에 참가했던 문인화가 이공린李公麟이 모임의 장면을 그린 그림을 <서원아집도>라 하였고, 이 모임에 함께하였던 미불米芾은 그림에 대한 기(記)를 지어 석벽에 썼다고 전해진다. 그가 쓴 기문에는 “당건에 심의를 입고 머리를 든 채 바위에 쓰고 있는 사람은 미원장米元章(미불)이고, 복건을 쓰고 소매에 손을 넣은 채 올려다보고 있는 사람은 왕중지王仲至(왕흠신)이다. 앞에서 흐트러진 머리를 한 장난꾸러기가 오래된 벼루를 받들고 서 있다.”라고 그림의 내용을 소개하고 있다.
우리나라에서 <서원아집도>가 등장한 것은 조선 후기 이후이다. 김홍도가 그린 〈서원아집도〉(도1) 병풍이 대표적인 예인데, 제3폭의 상단을 보면 절벽의 바위 면에 글씨를 쓰고 있는 미불과 이를 구경하는 왕중지, 그리고 벼루를 받쳐 들고 있는 동자의 모습이 보인다. 고사의 내용이 충실하게 묘사된 그림이다.
<서원아집도>에 그려진 ‘미불 제벽’의 장면은 이후 독립된 그림 주제로 제작되었다. 김홍도 외에 심사정이 그린 <제벽도>가 남아있고, 조선말기·근대기에는 안중식, 허련 등이 그렸다. 중국 명대의 백과사전인 『삼재도회三才圖會』 와 화보畵譜인 『개자원화전芥子園畵傳』, 청대 상해에서 간행된 『시중화詩中畵』 등의 판본에도 <제벽도>의 도상이 수록되어 더욱 널리 영향을 미쳤다(도2).

제벽도題壁圖, 바위벽에 글씨를 쓰는 미불

미불이 절벽의 바위 면에 글씨를 쓰는 장면이 민화에서도 그려졌다. 가회민화박물관 소장의 <제벽도>(도3)는 미불이 붓을 들고 절벽에 글씨를 쓰는 모습과 동자가 두 손으로 벼루를 받쳐 들고 서 있는 모습을 그렸다. 이는 <서원아집도> 중 미불 제벽의 장면만을 독립된 화폭에 그린 것이다. 바위 절벽의 형상이 독특한데 네모진 형상이 중첩된 모습이다. 이는 조선말기에 중국에서 전해진 해상파海上派의 바위 묘법이 도식화 및 퇴화된 양식으로서, 이 기법을 사용했던 안중식, 조석진과 같은 근대기의 화가들의 미불 고사도에서 이 그림이 파생되었음을 말해준다. 근경의 산과 가옥이 인물에 비해 현격히 작게 표현된 점은 민화 특유의 자유로운 공간 인식과 주관적 표현에서 비롯된 것이다.
‘미불 제벽도’의 주제는 근대기에 더욱 유행하여 8폭 혹은 10폭으로 구성된 고사인물도 병풍에 종종 포함되었다.
근대기의 고전 부흥의 분위기 속에 옛 그림의 화제畵題를 채택한 서화가 붐을 일으키면서 나타난 현상이다. ‘미불제벽도’가 사찰 벽화에도 그려졌던 점에서 이 주제의 높은 인기도를 확인할 수 있다. 양산 통도사 영산전 벽화중에 <제벽도>(도4)와 여수 흥국사 무사전無私殿 벽화 중의
<제벽도>(도5)가 그 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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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석도拜石圖, 돌을 향해 절을 하는 미불

미불과 관련된 고사가 다양하게 전해지지만 그림으로 다루어진 주제로는 ‘미불 배석拜石’이 있다. 미불은 기암괴석을 좋아했는데, 길을 가다가 기이한 돌을 보면 도포와 홀을 갖추고 정중하게 절을 했다는 고사가 전해진다.
특히 송나라의 역사서인 『송사宋史』에 미불의 전기가 수록되어 있는데, 이에 따르면 그가 지무위군知無爲軍의 벼슬에 제수되어 무위주에 내려갔을 때 감영에 큰 돌이 있었는데 평소 바위를 좋아한 미불이 기이하고 추한 바위를 보고도 감탄했다는 것이다.(『宋史』, 文苑傳, 米芾)
미불배석의 주제는 특히 근대기에 회화의 주제로 떠올라 활발하게 제작되었다. 민화에서 다루어진 예가 많지는 않지만, 호림박물관 소장의 <백납도 10폭 병풍> 중에 <미불배석도>(도 6) 소품이 포함되어 있다. 그림 속에는 나귀를 타고 가다가 기이한 형상의 바위를 보고는 내려서 바위를 향해 공수 자세를 취한 미불의 모습이 그려졌다. ‘미불 배석’의 주제가 근대기에 적극적으로 다루어진 데에는 괴석 완상의 취미와 괴석도의 유행이 배경이 되었던 것으로 알려졌다.(송희경, 개화기 미불고사도 주제의 표현양상, 미술사논단 39, 20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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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행으로 이름난 문인서화가 미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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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대宋代 사대부의 표상이라 할 수 있는 소식에 대한 숭배열이 조선 말기에 다시금 크게 일어나면서 그와 교유하며 문인문화의 전개에 동참했던 미불에 대한 관심도 커졌던 것으로 보인다. 조선시대 문인들과 조선 말기·근대기에 문인문화의 새로운 소비자로 대두된 여항인들에게 미불은 존숭되고 선망되는 문인서화가였던 것이다. 여기에 더하여 그의 기이한 취미와 행동은 그를 더욱 친근하고 호감이 가는 인물상으로 자리 잡게 하였을 것이다. 민화뿐 아니라 사찰 벽화에도 다루어질 만큼 대중적 인기를 끌게 된 데에는 기인奇人으로서의 그의 이미지가 한몫 했을 것으로 여겨진다.

글 유미나(원광대학교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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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간 민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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