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메박물관 소장 경상도 유교문자도를 중심으로 –
교화敎化에서 출발해 회화繪畫에 다다른 문자도의 여정

문자도는 지역적 특성이 비교적 뚜렷한데, 경기도와 강원도의 문자도에 대해서는 소상히 밝혀져 있으나, 경상도 지역은 성리학이 잘 발달된 지역임에도 지금까지 그 특징을 언급할 수 없었다. 경상도 지역 문자도의 대표적 특징을 지닌 프랑스 기메박물관 소장 문자도를 통해 해당 지역의 문자도에 대해 상세히 살펴보고자 한다.


유교문자도의 변화 과정

민화문자도는 필요에 따라 용어가 몇 가지로 사용되는데 윤리문자도, 유교문자도儒敎文字圖 등으로도 불리며 여기에서는 유교문자도로 부르고자 한다. 문자도는 행복·출세·장수를 내용으로 하는 복록수福祿壽의 길상문자도吉祥文字圖가 주류를 이룬다. 한자문화권에서 공통된 현상이지만, 조선에서는 유교적 덕목을 담은 ‘효제충신예의염치’의 유교문자도가 유행했다. 유교문자도는 중국의 길상문자도의 영향을 받은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조선의 문자도는 삼성미술관 리움 소장 <문자도>(도2)를 기준으로 중국의 문자도와는 그 궤를 달리한다. 따라서 유교문자도의 양식적인 변화를 살펴보는 기준작으로 삼성미술관 소장 <문자도>를 제시하고 있다. 이와 유사한 시기의 작품으로 선문대학교 박물관 소장 <유교문자도>(도3)가 같은 시기의 것으로 볼 수 있다.

유교문자도는 시대에 따라 대개 3단계로 양식이 변화한다. 제1기는 18세기에 나타난 작품으로 중국의 길상문자도의 형식을 가진 정형화된 양식으로 볼 수 있고, 제2기는 19세기에 나타난 양식으로 정형을 벗어나 다양한 방법으로 변화를 추구한 시기로, 기메박물관에 있는 경상 지역 문자도는 이 시기에 발생한 것으로 본다. 제3기는 19세기말에서 20세기에 그려진 작품으로 글자와 그림의 구분이 어려울만큼 장식성을 앞세운 양식으로 변화가 이뤄진 것이 특징이다. 삼성미술관 소장 <유교문자도>와 선문대 박물관 소장 <유교문자도> 기준으로 <유교문자도>의 양식변화를 살펴보고, 그 과정에서 발생한 지방양식 중 한가지로 경상도 문자도가 나타나고 있다.

① 문자도의 초기 형식, 정형화된 스타일
18세기로 편년되는 이 시기의 유교문자도는 주로 왕공 사대부층의 생활문화에서 비롯되었고, 제작 시기는 1797년(정조 21) 간행된 《오륜행실도》의 편찬시기와 비교할 수 있다. 이 시기의 양식적 특징은 중국 길상문상도에서 보이는 형태적인 특징을 갖고 있다는 점이다. 즉, 누가 보더라도 문자도가 의미하는 글자를 알 수 있도록 글자의 모양을 정확하게 그렸고, 글자 획의 먹선 안에 이와 관련된 고사가 제목과 함께 간략하게 그려져 있다. 삼성미술관 리움 소장 <유교문자도> 중 <효자도>를 보면 반듯한 효자는 정자체의 굵은 자획으로 글씨가 쓰여 있다. 그래서 한문을 아는 사람은 이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알 수 있다. 그리고 효자의 자획 내부에는 효와 관련된 고사인물화가 그려져 있고 붉은색 원 안에는 그림의 내용이 무엇인지 설명해 놓은 제목이 적혀있다. 그 내용은 《사기(史記)》<오제본기五帝本紀>에 나오는 순임금의 고사를 그린 <대순경우역산大舜耕于歷山>과 《진서晋書》<왕상전王祥傳>에 나오는 효자 왕상에 대한 고사를 그림으로 그린 <왕상고빙출어王祥叩氷出漁>, 초나라 사람 노래자의 효행을 그린 <래자농치친측萊子弄稚親側>, 《삼국지三國志》<오지吳志>손호전孫皓傳에 나오는 효자 맹종에 관한 그림인 <맹종읍죽孟宗泣竹>이다.
선문대학교박물관 소장 <유교문자도>의 ‘효’자에서는 리움 소장 <유교문자도>에 나오는 고사 이외에도 후한 사람 곽거郭巨의 고사를 ‘황금 한 솥’으로 그려 표현하였다. 그런데 곽거의 고사는 정조가 《오륜행실도》를 편집할 때 특별히 지적하여 제외하도록 한 인물이다. 따라서 이들 두 작품이 《오륜행실도》 이전에 제작되었음을 추론할 수 있다. 효행에 대한 내용은 조선조의 성리학적 이념을 백성들에게 교화시키기 위한 노력으로 간행한 행실도류의 책 중에서 정조대 간행한 《오륜행실도》(1797)의 권 1 효자편에 나오는 왕상에 대한 고사, 맹종에 관한 내용이 있다. 결론적으로 이 시기의 문자도의 양식은 유교의 실천적인 윤리이념을 가지고 백성들을 교화하고자 하는 목적으로 제작된 것임이 분명하다. 이를 위해 글자가 가진 뜻을 상징적으로 표현하고자 글자의 자획 내부에 그림을 그렸고, 이 그림이 무엇을 의미하는 것인지 설명을 상세히 하는 화제를 자획 내부의 그림에 표시하였다. 제Ⅰ기의 유교문자도는 시기적으로 정조대의 《오륜행실도》 간행을 전후한 시기에 제작된 것으로 추정된다.

② 2기로 접어들며 회화적인 면모를 갖추기 시작해
제Ⅱ기는 19세기에 해당하는 시기로 주로 서민층에서 사용하는 문자도가 유행하게 된다. 이 시기의 유교문자도에서는 글자보다 상징그림이 많은 비중을 차지한다. 뿐만 아니라, 제Ⅰ기에서는 그림이 글자 획의 내부에 그려졌는데 제Ⅱ기에는 상징도상이 주로 글자의 바깥으로 나오는 현상이 나타난다.
제Ⅱ기 문자도의 양식적 특징을 규명하자면, 각 글자에 해당하는 고사와 고사의 표현방식, 화제가 정형화되며, 고사의 내용자체도 《오륜행실도》와 뚜렷이 중복되고, 열여섯자로 구성된 화제에서 볼 수 있는 정제된 형식미를 볼 수 있다. 즉 본격적으로 회화적 면모를 갖추고 다양한 발전을 이루게 된다. 이 시기에 특히 주목되는 점은 지방양식이 나타나기 시작했다는 점이다. 이 시기의 작품들을 크게 3가지 형태로 분류한다면, 첫 번째는 제Ⅰ기의 양식과 외형상은 비슷한 형태를 하고 있으나 이 시기의 선문대 박물관을 보면 자획 내부의 상징그림과 글씨가 일치하지 않고 장식적 기능을 위해 누각과 산수 등이 대신하는 형식이다.(도4)
두 번째 형태는 유교문자도에서 가장 보편적으로 보이는 형식으로 이 작품을 보면 고사의 내용과 상징적 도상이 정형화되고 일부는 그림을 설명하는 화제가 있다.(도5)
세 번째는 기메박물관 소장의 <유교문자도>8폭 병풍(도1)과 같이 글자의 획에 책거리 등 다른 화제와 결합한 형태이다. 세 번째 형태의 작품은 경상도 문자도 등 지방색이 뚜렷한 문자도로 나타났다.

기메박물관 소장의 <유교문자도>는 글자의 획에 책거리 등 다른 화제와 결합한 형태로 경상도 유교문자도로 특정될 수 있다. 이 작품은 프랑스의 민속학자 샤를 루이 바라가 1888년 조선 종단 여행시 밀양에서 구입한 것이다. 샤를루이 바라(1842-1893)는 프랑스의 여행가로, 지리학자이자 민족학자이다. 유럽과 아메리카, 인도, 캄보디아 등의 동남아시아를 두루 여행하였으며, 특히 북부 러시아와 시베리아를 횡단하였다. 1888년에서 1889년에 걸친 조선여행은 그가 프랑스로 돌아가 출판할 정도로 개인적인 관심을 끌었던 것 같다. 샤를 루이 바라는 890년 일련의 학회를 개최하고 수집품들을 국가에 정식 기증하기도 하였다. 또한 조선여행의 과정을 <트루 드 몽드(Le Tour De Monde)>라는 여행 잡지에 기고했는데 1889년 상반기에 발행된 잡지에 현전하는 이 작품이 게재되어 있다.
샤를 바라는 《조선기행》에서 이 작품에 대해 “가로가 3미터 세로가 1미터 남짓 되는 그것은 무척 오래된 것이었는데, 전체가 여덟 개의 판으로 이루어져 있고, 그 각각에 사람이 지켜야 할 도리가 한자로 적혀있다. 그 의미는 효도·겸양·정숙함·신의·예절·의로움·공정함·검소함이다. 뿐만 아니라 그러한 의미들이 관례에 따라 일정한 짐승들이나 상징적인 사물들로 표현되어 있는데, 그 현란한 색채가 비좁은 방을 환하게 만들 정도로 화려했다.”라고 기록하고 있다.
샤를 바라의 기록들은 유교문자도중 경상도 문자도에 대한 많은 지식을 알려주고 있다. 우선 밀양에서 작품을 구입하였다는 부분이다. 잘 알려진 사실이지만 안동이 경북지역의 대표적인 유교적 특색이 짙은 곳이라면, 밀양은 경남에서 유교적 특색이 강한 지역으로, 이들 두 지역은 상당한 교류가 있었다. 이러한 지역적 특색과 문자도 병풍이 있었다는 사실은 의미가 있는 것이다. 다음으로 중요한 사실은 이 문자도의 편년이다. 샤를 바라가 1888년에 구입하였고, 당시 무척 오래된 작품이었다는 사실은 이 문자도의 제작연대가 적어도 19세기 중엽임을 짐작할 수 있다. 다행스럽게도 이 문자도가 기메박물관에 보관되어 있어, 서양인의 눈에 비친 민화가 주는 미감을 전달할 뿐만 아니라 그림의 출처와 시대양식을 추정할 수 있는 근거가 되며 경상도 문자도 연구에 있어서 편년의 기준을 해결해 주었다는 의의가 있는 것이다.

③ 그림 중심으로 제작돼 장식성이 부각된 문자도
제Ⅲ기는 19세기 말 이후 20세기까지로 구분될 수 있다. 이 시기의 문자도는 장식성이 강하게 부각되어 글자를 알아보기 힘들 정도로 장식적인 도상으로 표현되었다. 이러한 현상이 벌어지는 이유는 문자도가 널리 보급되고 생산되면서 윤리문자를 담아내려는 근엄한 동기는 약화되고, 생산자와 수요자의 취향에 따라 집안을 장식하려는 목적으로 제작함으로써 감정과 정서가 강조된 것으로 보인다. 문자와 연관된 고사의 의미도 퇴색하고 그 표현 방식도 무질서한 경향을 나타낸다. 그 연유는 전대의 작가들에 비해 이 시기의 작가들은 창조적 개척보다는 타성적으로 단순히 반복 작업으로만 작품을 생산한 것이 원인일 것이다.
제Ⅲ기의 특징인 장식성을 나타내기 위해 작품의 상·하단에 다른 화제인 책거리와 결합되어 유교문자로서의 의미보다 장식적 특징이 나타나는 그림이 있는데 대표적인 작품이 삼성미술관 리움소장의 <유교문자도>이다.(도6) 이 작품은 각 폭의 상·하단에 책거리를 배치하였고 글자는 장식이 더해져 글자보다 장식의 비중이 더 많은 작품들이 그려진다. 이 시기에는 지역별로 지방양식이 확립된 것이 최근의 연구에서 밝혀졌다. 특히 강원도 문자도의 경우 제 Ⅲ기의 양식적 특징을 잘 나타내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이 시기 경상도 문자도는 더욱 단순한 경향이 나타난다. 글씨는 더욱 초서화되어 부적과 비슷한 형태로 변형되고 글자를 장식하는 상징적 소재들은 단순히 붉은 주사와 먹으로 표현하는 방식으로 제작되었다.(도7) 초기의 문자도에서 상징했던 소재들은 이미 그 내용을 알고 있지 않으면 알 수 없을 만큼 소략하게 그려졌다. 뿐만 아니라 도상들의 도식화가 완전히 진행되었고 한편으로는 추상적인 표현이 가미되었다.

내륙지방의 문화를 품은 경상도 유교문자도

경상도 유교문자도는 그 출처와 시기를 알 수 있는 기메박물관 소장 작품을 기준으로 살펴보면 글자의 서체가 초서에 가까운 흘림체를 사용하였다. 글자의 서체를 가지고 지역성을 구분하기는 어렵지만 등장하는 소재 중 어패류는 ‘효’자의 잉어와 ‘충’자의 새우가 있고, 대부분의 동식물은 새 종류 아니면 꽃 종류로 이루어져 있어 해안지방과는 거리가 있는 내륙지역적 특징을 나타낸다. 한편 주자 성리학의 관혼상제에 사용되었거나 이와 관련이 있는 것으로 보이는 도상은 사당의 형태를 가진 건물과 ‘치’자 속에 위패 형태를 차용하여 그린 것이다. 경상도 지역 유교문자도는 기본적으로 내륙지방의 문화를 간직하고 있으며, 이념적으로는 주자 성리학의 관혼상제를 철저히 이행한다는 의미의 그림들이 묘사되어 있는데 이들의 내용과 의미를 살펴보기로 하자.

① 글자
문자도의 선은 대개 획을 구성하고 있는 유기적인 선들과 그 내부를 장식하고 있는 무기적인 선으로 나타난다. 따라서 문자도는 글자와 그림의 유기적인 관계를 잘 파악해야한다. 글자에 사용된 서체나 색조의 사용이 지역적 특징을 나타낸다고도 볼 수 있다.
경상도 문자도의 기준작이라 할 수 있는 기메박물관 소장 <유교문자도>는 글자를 위주로 하여 화면을 단순하게 구성하고 있다. 글자를 위주로 한다는 것은 ‘효제충신예의염치’의 주자성리학의 덕목을 가장 잘 표현하는 방법이라고 할 수 있다. 제주도와 강원도의 문자도가 3단 구성의 복잡한 구도를 한 반면, 경상도 문자도는 글자를 위주로 구성되어 있고, 상징도상이 글자에 포함하거나 글자와 밖으로 그림이 나올 경우에도 글자 본체와 연결되어 있는 구도를 취하고 있다. 이러한 특징이 다른 지역 문자도와 구분되는 것이다.
20세기 초가 되면 글자체는 초서로 변화하였지만 문자도의 구조는 한 가지 붓질만을 사용하여 단숨에 그린 부적같은 느낌을 준다. 기본적으로 초서체의 문자도는 비백의 글 자체와 흐름이 유사하므로 상호간에 영향을 받은 것으로 보인다. 비백도 그 역사를 보면 중국의 선진시대를 논하지 않더라도 조선후기의 유득공(柳得恭, 1749-?)의 《경도잡지京都雜誌》를 보면, 18세기에는 이미 성행하고 있었던 것을 알 수 있다. 《경도잡지》 <풍속편>에 ‘비백서는 버드나무 가지를 깎아 그 끝을 갈라지게 한 다음, 먹을 찍어 효제충신예의염치 등의 글자를 쓴 것이다. 점을 찍고 긋고 파임하고 삐치는 것을 마음대로 하여 물고기, 개, 새우, 제비 등의 모양을 만든다.’하였다. 비백 중에 도7처럼 글자만을 간결하고 담백하게 표현하거나 상징 도상들을 글자에 연결하여 글자의 일부처럼 쓴 것은 경상도 지역과 연관이 있다고 보여진다.

② 유교적 소재
(1) 책거리 이미지
경상도 유교문자도에서는 다른 지역 문자도와는 다르게 글자의 획을 책거리 이미지로 묘사하고 있다. 주로 선비의 사랑방이나 서재에 장식되었던 책거리 그림은 고매한 학덕을 쌓기 위해 애쓰는 문인들의 소망을 담고 있으며, 글읽기를 즐기고 학문의 길을 추구했던 당시 조선시대 선비들의 일상적인 생활상을 표현하고 있다.
책거리는 중국의 다보각경多寶閣景 또는 다보격경多寶格景이라는 장식장과 궁중벽화 등에서 기원을 찾고 있다. 조선에서는 정조임금이 책거리를 창안하고, 책거리를 장려하는 기록이 여러 곳에서 나온다. 정조가 책거리를 장려한 이유를 문체반정에서 찾았다. 문체반정은 명말청초에 유행한 패관잡기를 단속하고 전통적인 고문古文을 장려한 것을 말한다. 이와 같이 책거리는 패관잡기를 바로잡기 위해 제작한 그림이다. 정조의 책거리에 대한 애정은 문체반정으로 이어졌는데 이것은 고문으로 회귀하자는 운동으로 책거리에 묘사된 책은 대개 유교의 경서들이다. 《홍제전서弘齊全書》에 보면 다음과 같은 글이 있다.
“어좌御座 뒤의 서가書架를 돌아보면서 입시한 대신大臣에게 이르기를, “경은 보았는가?” 하였다. 보았다고 대답하자, 웃으면서 하교하기를, “경이 어찌 진정 글이라고 생각하겠는가. 글이 아니고 그림이다. 옛날에 정자程子가 ‘비록 책을 읽지는 못하더라도 서점에 들어가서 책을 만지기만 해도 기쁜 마음이 샘솟는다’라고 하였는데, 나는 이 말에 깊이 공감하는 바가 있다. 그러므로 화권畫卷 끝의 표제標題를 모두 내가 평소에 좋아하였던 경사자집經史子集으로 쓰되 제자諸子 중에서는 《장자莊子》만을 썼다.” 하였다.
이어 한숨을 쉬며 말씀하기를, “요즈음 사람들은 문장에서 추구하는 바가 나와 상반되어서 그들이 즐겨 보는 것은 모두 후세의 병든 문장들이니, 어떻게 하면 바로잡을 수 있겠는가. 내가 이 그림을 그린 것은 또한 이러한 뜻을 부치고자 해서이다.” 하였다.

위의 내용을 분석하면 정조의 학문에 대한 열의와 책거리 그림에 나오는 책은 경사자집의 경서들을 묘사한 것임을 알 수 있다. 따라서 책거리 이미지는 학문과 유학의 상징이라고 할 수 있는 것이다. 경상도 유교문자도에서 글자의 획을 표현하기 위해 책을 쌓아 놓은 책거리의 이미지를 사용한 것은 양반문화 즉, 사대부문화를 상징하고 있는 것이다.

(2) 감모여재도 이미지
경상도 유교문자도에 나오는 건물은 대개 사당으로 보인다. ‘치’자는 ‘감모여재도感慕如在圖’의 도상에서 영향을 받은 것으로 보인다. 최근 연구에서는 위패형位牌形 진영眞影이 감모여재도와 관련이 있는 것으로 보았는데 이 위패형 진영은 경상도 지역 사찰에서 거의 대부분이 발견된다고 하였다. 이것은 감모여재도, 경상도 문자도의 ‘치’자, 경상도 지역 사찰에서 발견되는 위패형 진영은 동일한 유교문화의 영향을 공유하는 것으로 보인다.
경상도 유교문자도는 ‘치’자는 위패를 걸어놓은 모습을 묘사했고 위패에는 ‘백세청풍 이제지비百世淸風 夷齊之碑’란 지방을 써 놓은 것을 확인할 수 있다.(도8) 백세청풍에 해당하는 인물로 은殷나라가 망하자 의롭지 않은 주周나라의 곡식을 먹지 않겠다고 수양산에 들어가 고사리를 캐먹다가 굶어죽었다는 백이伯夷와 숙제叔齊를 든다. 그래서 백이·숙제를 제사지내는 해주의 청성묘淸聖廟 앞에는 ‘백세청풍이제지묘’라는 글이 새겨졌다. 이후 길재吉再의 충절을 기리는 사람들이 묘소 앞에는 ‘지주중류砥柱中流’라고 각석刻石하고, 살던 집에는 백세청풍이라고 각석하였다. 이는 《사기》열전에 나오는 내용으로 선비의 굳은 절개를 의미하는 것이다. 우리나라에도 편액이나 비석으로 많이 남아 있다. 예를 들면 예천군 풍양면 삼강리 삼강강당三江講堂에 걸려 있던 것은 그 대표적 편액이다. 경남 함안의 채미정[采薇亭·군북면 원북리]에도 ‘백세청풍’ 편액이 걸려 있다. 충남 금산의 청풍서원[淸風書院·금산군 부리면 불이리]에도 백세청풍 비석이 있다. 함양의 일두一蠹 정여창(鄭汝昌, 1450∼1504) 고택에도 ‘백세청풍’ 편액이 걸려있고, 안동 학봉 종가의 불천위 제사 때 제상 뒤에 걸어놓는 ‘중류지주 백세청풍’ 탁본이 있는데 이것은 자신들 조상의 충절을 기리기 위해 탁본한 족자를 걸어놓은 것이다.
경상도 유교문자도에 나오는 ‘백세청풍’은 명문가나 절개있는 선비들을 기리는 표상의 의미가 있다. 경상도 문자도 중에 ‘백세청풍’을 자신들의 조상을 기리기 위해 ‘이제지비’에 자신의 조상 이름을 기록한 지방으로 사용한 <유교문자도>의 ‘치’자도 있다.(도9) 이 작품에서는 ‘백세청풍 이계집李啓集’이라는 지방을 써 놓았다. 이를 통해 추정할 수 있는 것은 이 병풍이 이계집이라는 집안의 제사 혹은 이계집이라는 인물 개인의 제사를 위해 만든 병풍으로 추정할 수 있다. 한편 병풍을 제작한 시기를 기록해 놓은 작품이 있는데 그 내용은 ‘병술년하사월초성입병丙戌年夏四月初成立屛’이라고 기록되어 있다.(도10)
이외에도 선비들의 절개를 추모하는 문장이 여러 종류가보이는데 그 내용은 ‘백세청풍이제지비’와 일맥상통한 의미로 쓰였는데 그 중 몇 가지 문장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만고청풍이제지비萬古淸風夷齊之碑’, ‘이제천추불망비夷齊千秋不忘碑’, ‘척피서산혜채기미의陟彼西山兮採其薇矣’라고 쓰여 있다.(도11) 이중 ‘척피서산혜채기미의’라는 글은 경상도 문자도를 특정할 수 있는 근거가 된다. 경북 군위군 부계면 남산면 제2석굴암 위쪽 계곡에 가면 척사정陟西亭이란 정자가 있다. 이 정자는 경제敬齋 홍로(洪魯 : 1366-1392)의 후손들이 경제의 절의정신을 추모하여 지은 정자이다. 조병유가 지은 척서정기문에 의하면, ‘수산首山과 양산陽山의 중간지점에 예전에는 경제를 기리는 사당을 지어 제향을 올렸으나 없어지고, 그 유허지에 척서정을 지어 절의를 추모하고 있다’고 한다. 후세의 학자들이 그의 절의를 중국 은나라의 백이와 숙제에 견주었다. 그 이유는 척사정이란 이름이 백이, 숙제가 죽으면서 부른 가사에 ‘저 서산에 오름이여! 고사리를 캐었도다.[陟彼西山兮採其薇矣]’라고 한데서 따온 것이기 때문이다.
경상도 유교문자도의 ‘치’자에 나오는 비문에는 경상도 선비의 기상을 볼 수 있는 글이 그대로 나타남을 알 수 있다. 선산의 야은 길재의 각석과 군위의 척사정은 고려후기부터 이어진 영남 사림의 흔적을 그대로 보여주고 있다.

(3) 유교경전 이미지 (성학십도, 팔괘)

<성학십도聖學十道>의 이미지를 경상도 문자도에 사용한 개인소장 <유교문자도>10폭 병풍이 있는데 이 작품의 1폭에 <성학십도>중 제1도 태극도太極圖를 배치하고, 10폭에는<성학십도>제8도 심학도心學圖를 배치하였다.(도12) <성학십도>는 조선 선조임금의 즉위년(1568) 12월에 퇴계 이황이 어린 임금을 위해 올린 상소문에 있는 도표로 경연에 입시하였을 때 올린 글이다. 그 내용은 성학聖學의 개요를 그림으로 설명한 책이다. 퇴계의 성학십도가 유교이미지로 결합된 것은 안동지방 문자도의 특징이라고 할 수 있다. 퇴계의 후학들인 남인은 숙종 20년 갑술환국甲戌換局을 끝으로 일선 정치에서 거의 물러나게 된다. 이후 퇴계의 후학들은 남인으로 짧은 기간 정권에 참여했을 뿐 중앙 정계와는 거리가 있는 초야의 사림으로서 학문을 본업으로 하였다. 특히 경상도에 거주하는 후학들은 퇴계의 학문을 절대적으로 신봉하였다. 따라서 <성학십도>가 유교문자도에 부가된 것은 경상도라는 향촌에서 퇴계의 학문을 바탕으로 지역사회에서 도덕적 우월적 지위를 유지하였던 양반들은 퇴계의 사상이 집대성된 <성학십도>에 대한 인식이 남달랐을 것이다. 그래서 지역사회에서 양반행세를 하기 위해서는 <성학십도>를 알고 있어야 했을 것이다. 따라서 주자가례를 실천함으로써 양반처럼 하고자 하는 서민들이 사용하는 유교문자도에 <성학십도>가 포함되어 있는 것은 퇴계 후학들의 영향을 받은 경상도 지역의 특징일 것이다.
개인소장 <유교문자도> 10폭 병풍에는 1-8폭까지는 주역에 나오는 팔괘를 각 폭의 하단에 그려 놓았다. 9폭에는 하단의 삼三과 상단의 강綱을 합해 삼강을 의미하고, 10폭에는 하단에 오五와 상단의 ‘륜倫’자가 오륜五倫을 묘사했다. 따라서 9폭과 10폭을 합하면 삼강오륜인 것을 알 수 있다.(도13) 팔괘와 삼강오륜이 포함된 작품은 두 가지 측면에서 생각해 볼 수 있다. 첫째, 팔괘는 사림들의 필수 경전인 주역을 상징하므로 유학과 관계된 것을 표현한 도상이고, ‘효제충신예의염치’ 여덟 글자는 삼강오륜의 핵심이라는 의미로 보인다. 둘째, 조선후기의 백성들은 벽사, 길상 등 기복적인 신앙에 심취해 있었기 때문에 주역의 팔괘가 점술의 기능이 있어 백성들의 기복신앙과 연관된 것으로 볼 수 있다.


글 이상국((사)한국민화센터 이사장)
참고문헌
정병모, <유교문자도의 탄생>,《무명화가들의 반란 민화》(다할미디어, 2011)
진준현, <민화 효제문자도의 내용과 양식변천-선문대학교 박물관 소장품을 중심으로->, 《선문대학교박물관 명품도록 Ⅳ 민화-문자도편》(선문대학교박물관, 2003)
하수경, <한국민화의 윤리 문자도의 상징과 표현읽기>, 《비교민속학》제25집(비교민속학회, 2003)
김윤정, <한국민화의 존재와 양상-19세기 후반 20세기 전반을 중심으로->,《민속학 연구》제19호(국립민속박물관, 2006)
샤를 바라/샤이에 롱, 성귀수 옮김, 《조선기행》(눈빛, 2001)

저자에 관하여

월간민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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