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토중래 다짐하던 ‘백제의 꿈’ 담긴 안식처, 공주 무령왕릉

공주 무령왕릉
공주 무령왕릉

지난 1971년에 있었던 무녕왕릉의 발굴은 백제사 연구 분야뿐 아니라 한국 고고학 발굴사에 큰 획을 남긴 ‘위대한 발굴’로 기록되어 있다. 무엇보다도 극심한 도굴의 수난을 용케 피해 백제의 고분으로는 유일하게 처녀분 상태로 발굴되어 고분의 주인공이 명확하게 밝혀진데다 유물의 보존 상태 또한 완벽에 가까웠기 때문이다. 웅진시대 복판 백제의 사정과 면모를 가장 많이 말해주고 있는 금쪽같은 유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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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제의 웅진시대 복원해 낸 ‘위대한 발굴’

충청남도 공주는 인근 부여와 함께 그 옛날 고대 왕국 백제의 수도였던 곳이다. 5세기 후반 고구려의 전성기를 장식한 위대한 임금 장수왕의 노도와도 같은 남진정책에 떠밀려 백제는 눈물을 머금고 본래의 영토였던 한강 유역을 포기하고 남으로 내려와 지금의 공주인 웅진에 새로운 수도의 터를 잡는다. 이때가 서기 475년, 문주왕文周王 원년元年의 일이었다. 이후 백제 중흥의 기수 성왕聖王 대인 538년 다시 부여로 도읍을 옮길 때까지 공주는 5대 64년간 백제의 수도 노릇을 하게 된다.
공주는 비단결 같은 금강을 앞으로 두르고 그만 그만한 산들로 첩첩히 둘러싸인 외진 지형이다. 몸을 낮추고 적을 방어하며 힘을 기르기에는 더없이 좋은 요새와 같은 땅이기도 하다. 백제가 이 땅에 도읍했던 짧은 시기를 흔히 ‘웅진시대’라고 부른다. 웅진시대는 한마디로 백제가 지형이 험한 웅진으로 숨어들어 몸을 바짝 낮추고 권토중래捲土重來를 다짐하던 ‘고난의 시대’였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수도로 있었던 기간이 워낙 짧기도 한데다 패전국에 대한 홀대가 어우러져 부여가 그러하듯 공주 역시 ‘백제의 옛 서울’이라는 고도古都로서의 위상에 걸맞지 않게 백제시대의 흔적은 남아있는 것이 거의 없다. 당연히 그 시대의 많은 부분이 짙은 베일에 가려있다.
그런 점에서 지난 1971년에 발굴되어 세상에 모습을 드러낸 웅진시대의 대표적 군주 무령왕의 무덤, 즉 무령왕릉武寧王陵은 웅진시대 백제의 사정과 면모를 상당부분 명쾌하게 밝혀준 금쪽같은 유적이다.
무령왕릉의 발굴은 지금도 백제사 연구 분야뿐 아니라 한국 고고학 발굴사에 큰 획을 남긴 ‘위대한 발굴’로 기록되어 있다. 무엇보다도 극심한 도굴의 수난을 용케 피해 백제의 고분으로는 유일하게 처녀분 상태로 발굴되어 고분의 주인공이 명확하게 밝혀진데다 유물의 보존 상태 또한 완벽에 가까웠기 때문이다.
무엇보다도 백제사 연구의 주요 텍스트였던 <삼국사기三國史記>나 <일본서기日本書紀> 등의 소략하고 불완전한 기록으로 인해 제대로 알려지지 않았던 무령왕의 가계家系와 생애는 물론 그의 치세治世였던 웅진 도읍기 복판의 백제사를 상당부분 정확하게 복원할 수 있게 된 것이다.
무령왕릉에서는 무령왕의 가계와 생애 연구에 결정적 단서가 된 기록인 매지권賣地卷을 비롯, 모두 1백8종, 2천96점에 이르는 많은 유물이 출토되었다. 이들 유물은 모두 백제 문화의 진수를 보여주는 최상급 유물로서 찬란한 백제 문화의 수준을 이론의 여지없이 증명해주는 역사적 자료이기도 하다. 웅진시대 한가운데를 관통하는 무령왕의 치세는 백제가 침체와 혼돈에서 벗어나 바야흐로 국력의 급속한 회복 국면에 접어든 시기였다는 사실을 말해 주고 있는 것이다.

새로운 양식, 화려하고 다양한 부장품

무녕왕릉무령왕은 웅진시대를 이끈 4명의 임금 중 마지막으로 왕위에 오른 인물이다. 옛 사서史書 <삼국사기>는 그의 됨됨이에 대해 “신장이 8척이요, 얼굴이 그림과 같으며 성품이 인자하고 너그러워 민심이 귀부歸附하였다”라고 적고 있다. 한마디로 외모도 잘 생기고 인품도 훌륭해 백성들이 존경해 마지않은 멋진 임금이었다는 얘기다.
그는 서기 501년부터 523년까지 20년 넘게 임금 자리에 있으면서 내치와 외교 양쪽에서 두루 뛰어난 업적을 남겼다. 안으로는 중앙행정조직의 개편을 통해 통치 체계를 정비하고 농업을 장려해 백성들의 생활을 안정시켰는가 하면 밖으로는 중국 남조南朝와 외교를 강화하고 잃어버린 옛 땅을 되찾기 위해 고구려와 여러 차례 싸움을 벌여 승리하기도 했다. 실제로 이러한 노력으로 인해 그가 다스리던 시대 백제의 국력은 천도 이전의 상태로 거의 회복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중국 측의 사서 <양서梁書>에는 “이 즈음 백제가 다시 강국이 되었다”는 기록이 보이기도 한다. 무령왕릉은 이렇듯 많은 업적을 남긴 위대한 임금의 무덤답게 새로운 양식과 수많은 부장품들이 동원된 화려하면서도 아름다운 무덤이다.
무령왕릉은 충남 공주시 금성동에 있는 이른바 ‘송산리 고분군’에 속한 무덤의 하나로 사적 제13호로 지정된 ‘백제 왕릉군’에 포함되어 있다. 송산리 고분군에는 무령왕릉을 포함해 모두 10여 기의 무덤이 모여 있는데, 고분들은 해발 1백30m쯤 되는 송산宋山의 야트막한 구릉 중턱에 남쪽을 바라보며 흩어져 있다. 작은 계곡을 사이에 두고 서쪽에는 무령왕릉과 송산리 5,6호 고분이 있고 동북쪽에는 제1호 고분부터 제4호 고분이 있다.
이들 고분은 대부분 백제의 대표적인 무덤 형식인 이른바 ‘굴식돌방무덤’이고 6호분과 무령왕릉만이 벽돌로 지어진 전축분塼築墳이다. 이 전축분은 웅진시대에 들어서 새롭게 나타난 무덤 형식으로 백제 고유의 묘제가 아니라 중국 남조와의 교류를 통해 새롭게 유입된 무덤 형식으로 알려져 있다. 이런 전축분은 웅진도읍기 중에서도 도읍지인 웅진에서만 유일하게 나타나고 있어 이 시기에 특히 중국 남조와의 교류가 활발했다는 사실을 말해주고 있다.
무령왕릉은 1971년, 송산리 제5호 무덤과 제6호 무덤의 침수 방지를 위해 배수로 작업을 하던 중 우연히 발굴된 무덤으로 왕과 왕비를 한데 모신 합장묘이다. 형태로 보면 산 언덕 경사면을 L자로 파낸 뒤 벽돌을 사용, 널길과 널방, 배수구를 만들고 그 위에 분구를 조성한 이른바 ‘터널형 벽돌무덤’이다. 그러나 재료가 벽돌이라는 점이 다를 뿐, 모양과 구조는 전형적인 백제식 묘제인 굴식돌방무덤과 같다. 봉분의 겉모습은 대부분의 왕릉처럼 둥근 모양이고 지름은 20m정도이며 무덤의 높이는 약 7.7m이다.
현재 송산리 고분군에 있는 모든 무덤은 보존상의 문제로 입구가 폐쇄되어 안으로 들어갈 수 없게 되어 있다. 그 대신 고분군 한편에 실물을 정교하게 재현한 ‘모형관’이 있어 무령왕릉을 포함한 주요 왕릉의 내부를 완벽하게 관찰할 수 있다.
무령왕릉의 널방은 직사각형 모양으로 남쪽 벽의 가운데 짧은 복도가 딸려 있다. 묘실墓室의 규모는 길이 4.2m, 너비 2.72m, 높이 2.93m이다.
벽돌을 쌓은 방법은 4매의 벽돌을 뉘어서 쌓고 다시 1매의 벽돌을 세우는 소위 ‘4평平1수垂’의 축조방식을 택하고 있다. 천정은 아치 모양의 터널형인데 벽체를 둥글게 만들기 위해 사다리꼴의 벽돌을 특별히 제작해서 사용한 주도면밀한 축조 기술이 돋보인다. 널방의 벽돌에는 6~8개의 잎새를 가진 연꽃무늬와 인동무늬가 새겨져 있다. 벽에는 모두 5개의 보주형 등감燈龕이 있는데, 동서 벽에 각각 2개, 북벽에 1개가 있다. 등감 안에는 백자로 된 등잔이 있었다고 한다.

문화예술의 절정기에서 스러지다

모형관 한쪽에는 발굴 당시 무덤의 내부 모습이 쇼 케이스로 그대로 재현돼 있어 무령왕릉 내부의 배치상태를 한 눈에 알 수 있다.
우선 현실로 이어지는 복도에는 맨 앞쪽인 널길 입구에 청동제 그릇과 청자항아리가 쓰러져 있었고 바로 뒤에는 왕과 왕비의 지석誌石이 있었으며 그 위에는 당시 중국 화폐인 오수전五銖錢 한 꾸러미가 얹혀 있었다. 땅을 무단으로 사용한 것이 아니라 지신地神에게 돈을 주고 매입했다는 것이다.
지석 뒤에는 기묘한 모양을 한 석제 동물상이 서 있다. 이런 동물을 묘를 지키는 짐승이라 해서 ‘진묘수鎭墓獸’라고 부르는데, 크고 무시무시한 중국의 진묘수와는 달리 무령왕릉의 진묘수는 크기도 작고 모양도 매우 귀엽다. 이 진묘수가 남쪽을 향해 널방을 지키고 있는 형태로 서 있다.
그 다음 시신이 있었던 널방을 보면, 우선 널받침 위에 왕의 나무관이 동쪽에 있었고 서쪽에 있었을 것으로 보이는 왕비의 나무 널은 썩으면서 쓰러져 서로 겹친 상태로 출토되었다. 나무 널의 판재들 밑에서도 왕과 왕비가 몸에 지녔던 장신구들과 몇 점의 부장 유물들이 출토되었다고 한다.
무덤에서는 이러한 죽은 이의 장식품 이외에도 실로 수많은 부장품들이 출토되었다. 금제 관장식, 금제 뒤꽂이, 금귀걸이, 은팔찌, 금팔찌, 은제 과대, 금동신발, 둥근고리큰칼, 금은장도 등의 장식품을 비롯, 청동용기와 은제 탁잔 등의 제기와 생활용기를 망라하고 있다. 눈이 휘둥그래질 만큼 금빛 찬란하고 화려한 것들이다. 이들 유물에서는 전반적으로 당시 활발하게 교류했던 중국 남조의 영향이 짙게 풍기고 있으며 이들 중 상당수는 중국에서 수입된 수입품이다.
이들 화려한 부장품들을 진품으로 만나려면 송산리고분군을 나와 인근에 있는 국립공주박물관으로 발걸음을 옮겨야 한다. 사실 국립공주박물관은 무령왕릉의 출토품들을 위해 설립되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만큼 박물관에서 이들 유물이 차지하는 비중은 거의 절대적이다. 한 층의 전시실을 가득 채운 무령왕릉의 출토품들을 둘러보다 보면, 백제의 경이로운 문화수준과 예술적 감각에 다시 한 번 경의를 표하지 않을 수 없게 된다.
웅진 도읍기는 백제가 본래의 영토를 거의 잃어버리고 남쪽의 험한 지세에 의존해 겨우 명맥을 유지하던 최대의 시련기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무령왕릉에서 출토된 유물들에서는 결코 그런 내색이 드러나지 않는다. 위축되기는커녕 더없이 화려하고 당당하다.
흔히 한 시대의 문화 예술품은 당대의 정치, 사회적 사정을 매우 민감하게 반영하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러나 백제는 왕조가 망할 때까지 왕조의 말기 현상으로 흔히 나타난다는 문화예술의 퇴조 현상이 보이지 않는 것이 특징이다. 이런 점에서 백제의 멸망은 ‘등 뒤에서 갑자기 칼을 맞아 사망한 경우’와 같다는 어느 학자의 표현은 더없이 명쾌한 비유인지도 모른다. 그래서일까, 무령왕릉을 찬찬히 돌아보면 삼국 중 가장 높은 수준의 문화 예술적 역량을 지녔으면서도 가장 먼저 망국의 한을 곱씹어야 했던 백제의 비운悲運이 거듭 가슴 저리게 실감된다.

 

글·사진 : 유정서(본지 편집국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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