궁 밖에 걸린 존상의 의미 사찰과 신당에 걸린 왕의 초상

도 3-1. <세조 존상> (도 3)의 세부

민간에 전하는 특별한 임금의 초상이 있다. 경남 해인사의 <태조 존상>, 서울 국사당의 <태조 존상>, 복개당의 <세조 존상> 등이 확인된 사례들이다. 존엄한 왕의 모습이 어떻게 궁 밖에서 그려지고 전하게 된 것일까? 그리고 이 존상들과 원본 어진은 어떤 관계일까? 즉 원본 어진의 형상과 무엇이 같고 또 어떻게 다른 것일까? 그리고 이 존상들이 갖는 의미는 무엇일까? 이런 물음에 대한 답은 크게 보아 궁중회화와 민화의 이해를 구하는 또 하나의 사례가 될 것이다.

오백 년 역사를 대변하는 조선왕실의 유물 가운데 가장 소중한 한 점을 들라면, 무엇을 꼽을 수 있을까? 단연 왕의 초상화인 ‘어진御眞’이 아닐까 싶다. 어진이야말로 왕조의 존엄과 왕실의 상징과도 같기 때문이다. 지금 국립중앙박물관에 가보면 전시된 어진을 마주할 수 있지만, 조선시대에는 결코 쉽게 볼 수 없는 그림이었다. 어진은 봉안과 관리가 엄격했으며, 일반 백성들뿐 아니라 관료들도 접근하기 힘든 그림이었다. 일부 궁중회화의 주제가 민간으로 전해져 민화나 무속화로 그려졌지만, 어진만은 예외였다.
그런데 의외로 사찰이나 무속의 신당에 임금의 존상을 모신 사례가 알려진 바 있다. 주로 무속의 대상인 신상神像으로 그려진 경우가 많다. 물론 궁중의 어진과 비교하면 화격이 현저히 낮은 그림들이다. 이 경우 임금의 모습을 그렸지만, ‘어진’이라는 용어보다 ‘존상尊像’이라는 말로 구분하여 다루는 것이 바람직하겠다. 이 글에서는 민간에서 그려진 왕의 존상 몇 점을 살펴보고 그 특징을 어진과 비교해 보고자 한다. 왕의 초상이 궁궐 밖에 걸렸다는 것은 매우 흥미로운 현상이 아닐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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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사당의 <태조 존상>과 태조어진

예전 인왕산의 국사당國師堂에 <태조 존상>(도 1) 한 점이 걸려 있었다고 한다. 국사당은 조선을 세우고 한양으로 천도한 태조를 수호신으로 모신 사당이었다. 언제부터 <태조 존상>이 여기에 걸렸는지 알 수 없지만, 현존하는 존상은 아마추어 민간 화가의 솜씨가 역력하다. 아마도 태조어진을 직접 보고 그리는 것은 불가능했을 것이고, 어진을 본 사람들의 이야기에 근거하여 그린 것으로 추측된다. 그렇다면, 익선관에 곤룡포를 입고 있는 국사당 구장舊藏의 <태조 존상>은 어느 태조어진을 모델로 하여 그린 것일까? 아마도 19세기 말이나 20세기 초, 서울의 선원전璿源殿에 있던 어진의 모습을 전해 듣고서 그린 것으로 추측된다.
그런데 이 <태조 존상>의 원본이 된 어진은 선원전에 있었지만, 그것과의 동일본이 함흥 준원전濬源殿의 <태조어진>(도 2)으로 추측된다. 일제강점기 때 촬영한 준원전의 <태조어진> 사진과 비교해보면, 그 유사성을 확인할 수 있다. 정면을 응시하고 소매 안에서 손을 맞잡은 공수拱手 자세, 관골이 두드러진 사각형의 얼굴, 얼굴의 좌우 가장자리에 그린 구렛나루, 팔자형 수염 등이 그렇다. 많이 알려진 경기전의 태조어진과는 차이가 있다.
<태조 존상>은 인체의 비례가 부자연스럽고, 머리가 크며, 이목구비에도 어색한 부분이 눈에 띈다. 하지만 민간 화가가 그린 왕의 초상으로는 매우 이채로운 그림이다. 국사당에 걸린 태조의 존상은 태조를 신격화하여 민간신앙의 대상인 신상神像으로 모시고자한 목적에서
그린 것이다.

해인사의 불교 회화식 <세조 존상>

임금을 그린 또 하나의 존상은 경남 합천 해인사海印寺에 있는 <세조 존상>(도 3)이다. 이 존상을 화원화가들이 그린 어진과 비교하면, 화면의 구성이나 양식이 확연히 다르다. 불교회화적인 특색이 두드러져 있어 사찰의 화승畵僧이 그린 것으로 추측된다. 세조는 곤룡포를 입고 정면을 향했으며, 양손으로 홀笏을 쥔 모습을 했다. 머리 위쪽에는 우산 모양의 산개傘蓋가 있고, 그 뒤편에 5폭 병풍이 둘러져 있다. 세조의 양쪽에는 두 신하가 각각 홀을 들고 서있다.(도 3-1) 이 두 신하는 1458년(세조 4) 세조의 명으로 해인사에 세조어진을 봉안한 영중추부사 윤사로尹師路와 도승지 조석문曺錫文을 그린 것으로 보기도 한다. 그 아래에는 두 동자가 일월日月이 그려진 부채를 들고 있다.
<세조 존상>의 화면 아래에는 먹으로 쓴 기록이 있다. 이를 요약하면, 최초의 세조어진은 1458년 윤사로와 조석문이 세조의 명을 받들어 해인사에 봉안하였다고 한다. 그리고 1899년 10월 25일, 옛 어진을 다시 중모重模하여 축성전祝聖殿에 함께 모셔두었다고 적혀 있다. 알려진 바와 같이 세조는 왕권을 찬탈하며 수많은 사람을 희생시킨 자신의 죄업을 속죄하기 위해 불교에 귀의하였고, 사찰에 많은 불사佛事를 지원했다. 특히 해인사의 대장경을 모각하여 인출하였고, 대장경 판전版殿을 중건하는 등 해인사의 중흥에 크게 힘썼다.
<세조 존상>은 세조 당시의 어진과 차이가 확연하다고 본다. 애초에는 세조의 모습을 그린 도상이 있을 수 있지만, 봉안해 오던 중 언젠가 어진을 불교식 도상으로 바꾸어 그렸다고 짐작된다. 화폭 아래의 기록에서 1899년 10월에 중모했다는 것은 그 이전에 이미 바꾸어 그린 불교회화식 도상을 당시에 다시 베껴 그린 것임을 시사해 준다. 현재의 <세조 존상>은 바로 이때 그린 것으로 추측된다.

복개당의 <세조 존상>

서울시 마포구의 복개당福介堂에 있던 <세조 존상>(도 4)은 1900년을 전후하여 그린 것으로 추측된다. 이 그림을 세조의 존상으로 보는 것은 복개당 마을의 유래를 말해주는 전설과 관련이 깊다. 복개당이 세조를 신으로 섬기게 된 것은 손복개라는 마을 사람이 꾼 꿈이 계기가 되었다. 그의 꿈에 한 노인이 나타나 너희 집의 느티나무에 세조대왕의 어진御眞이 걸려 있으니 이 영정을 받들어 모시라고 말했다고 한다. 그가 마을사람들과 의논하여 영정을 모시는 당을 세워 당제堂祭를 지내자, 이후 마을이 평안해졌다고 전해진다. 이 당명은 손복개의 이름을 따서 복개당이라 했다.
복개당에 있던 세조의 존상은 단독상이 아니다. 존상 앞쪽으로 두 명의 신하가 나란히 서서 시립하는 모양새를 하고 있다. 존상의 얼굴은 이목구비가 크고 우락부락한 모습이다. 무신도에 등장하는 무신의 스타일에 부합한다. 세조는 곤룡포를 입었지만, 머리에는 왕이 쓰는 것과 전혀 다른 관을 썼다. 다만 관의 맨 위에 익선관처럼 각이 위로 올라와 있다.
그런데 무신도에서 무신의 존상을 그릴 때는 좌우에 시동이나 시립하는 인물을 함께 그리는 것이 일반적인 형식이다. <세조 존상>에서 시립한 두 인물은 신하의 존재를 암시하는 듯하다. 단령으로 추정되는 관복에 흉배가 달렸고, 각대를 하고 있기 때문이다. 복식의 격식은 정확하지 않지만, 이 두 인물은 세조를 모신 신하들의 모습으로 이해된다. 무신도의 형식을 빌려 왕의 위계를 나타낸 도상이라 할 수 있다. 그러나 이 그림의 범본이 무엇인지는 알 수 없다.

세조어진의 수난사

앞서 본 세조의 존상들은 원래의 세조어진과 어떤 관계일까? 세조어진의 원래 도상을 반영한 형상일까? 조선 전반기의 어진은 임진왜란을 겪으며 모두 사라진 것으로 알려졌다. 그러나 세조어진만은 우여곡절을 겪으며 살아남았다. 세조어진은 1950년 한국전쟁 이전까지 창덕궁의 신선원전에 걸려 있었다. 1950년 12월, 전쟁의 화를 피하고자 부산으로 옮겼으나, 1954년의 용두산 화재로 인해 불행히도 소실되고 말았다. 그런데 1937년에 세조어진을 한 점 모사할 때, 촬영한 사진 속에 구본 세조어진이 어렴풋이 걸려 있다.(도 5) 사진으로는 세조어진의 자세한 디테일까지 살필 수 없으나 대체적인 큰 특징은 파악이 가능하다.
사진 속의 세조어진은 정면의 모습을 취한 점, 앉은 의자가 용상이 아니라 교의자交椅子인 점, 소매가 좁은 곤룡포, 바닥의 채전彩氈 문양, 어진 좌우에 걸쳐진 유소流蘇가 길게 드리워진 점 등이 주요 특징이다. 15세기 어진의 특색을 어렴풋하게나마 엿볼 수 있는 유일한 형상이다.(도 5-1)
그렇다면, 사진 속에 걸린 <세조 어진>은 어떤 사연을 갖고 있을까? 1468년(세조 14) 세조가 승하하자 예종睿宗 (1450~1469)이 광릉光陵을 조성하고 능침 사찰로 봉선사奉先寺를 중창하였다. 그리고 여기에 생존 시에 그린 세조어진 한 점을 봉안하였다. 이후 이 세조어진은 임진왜란 때 의주로 옮겨졌고, 병자호란 때는 강화도로 옮기는 등 몇 차례나 사라질 위기를 운 좋게 넘겼다. 이 과정에서 세조어진은 심각한 손상을 입었으나 임시방편으로 수리를 마친 뒤 서울의 남별전에 다시 봉안되었다.
이후 세조어진의 모사가 이루어진 것은 1735년(영조 11) 7월이다. 모사본의 원본은 세조가 3백 년이 넘은 어진이었다. 영조는 형상을 구분하지 못할 정도로 상태가 좋지 않으니 서둘러 모사하도록 명했다. 이때 이모한 세조어진은 바로 1937년에 찍은 사진 속에 흐릿하게나마 모습을 드러내고 있는 어진이다. 조선 초기 어진의 형식과 관련하여 매우 중요한 정보를 주는 사진이다. 이 사진 속의 세조어진에 근거한다면, 해인사의 <세조 존상>은 전통적인 어진을 그대로 그렸다고 보기 어려울 것이다.

임금 존상의 투식

세조는 아니지만, <세조 존상>과 같은 그림들은 하나의 투식으로 발전했다. 따라서 임금을 무속신앙의 존상으로 그리는 데 어느 정도 정형화가 이루어진 듯하다. <상감도 上監圖>(도 6)라고 하는 그림이 그러한 양식의 전이를 보여주는 한 사례다. 이 그림은 신당에 거는 ‘상감도’ 혹은 ‘부군님’으로 불린 그림이라고 한다. 상감의 존재는 무속의 아버지이자 현실의 주재자이고, 상전이며 나아가 상제(옥황상제)의 대행자로 받들어졌다.
무속의 신당에 있던 그림으로 추정되는 <상감도>에는 왕으로 추정되는 상감이 가운데 앉았고, 용포龍袍에 관을 쓰고, 두 손을 가슴에 모아 홀을 들고 있다. 가장 위엄 있고 권위적인 모습을 강조하고자 정면상을 취한 듯하다. 그 좌우에 사모를 쓰고 관복차림을 한 신하가 서있다. 앞서 본 세조 존상의 전통을 따르면서 각색된 도상이라 하겠다.
민간에서 임금의 존상을 다룬다는 것은 격에 맞지 않는 매우 이례적인 현상이다. 조선 후기에는 어진을 모방한 임금의 존상을 그려 신격이자 신앙의 대상으로 삼았음을 알 수 있다. 궁중회화의 저변화와 대중적 확산에는 왕의 초상인 어진도 예외가 아니었다. 존상이라는 이름으로 그려진 왕의 초상은 무속 신상의 이미지를 통해 백성들과 만났고, 위로와 평안을 주는 존재로 궁 밖에 걸렸던 것이다.

 

글 : 윤진영(한국학중앙연구원 책임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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