궁중 십장생도 민화 장생도(長生圖)로 거듭나다

도 1 십장생도, 1880년, 10폭 병풍, 견본채색, 201.9×521.0㎝, 미국 오리건대학교박물관

궁중회화와 민화는 서로 대립하는 상극(相剋)의 관계일까? 극단적인 물음이지만, 결코 상극일 수 없다. 궁중회화와 민화의 분리를 이야기하고, 개념을 규정지으려는 과정에서 양자를 대립적 관계로 이해한 면이 없지 않다. 사실은 조화와 보완의 관계로 설명되어야 할 분야가 궁중회화와 민화일 것이다. 특히 궁중회화로부터 파생된 민화의 경우, 아무리 소박한 민간양식으로 그려지더라도 그 원류는 어디까지나 궁중회화에 있고, 반면에 궁중회화의 대중적 저변화는 민화가 이루어낸 성과라 할 수 있다. 회화예술의 정점과 대중화를 지향했던 궁중회화와 민화는 소통과 공유의 가치를 추구한 장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서로 다른 화격(畵格)을 추구한 이 두 장르의 그림에는 함께 다루어 온 화제(畵題)가 있다. 주로 공간을 꾸미며 길상(吉祥)의 의미를 지닌 십장생·모란도·책가도·곽분양행락도(郭汾陽行樂圖)·요지연도(瑤池宴圖)·백동자도(白童子圖) 등의 장식화가 그것이다. 이 가운데 궁중회화에서 민화로 이어지는 양식적 연계와 양자의 차이점을 십장생도(十長生圖)를 통해 살펴보기로 하겠다.
십장생도는 무병(無病)과 불로장생(不老長生)의 염원을 담은 길상화(吉祥畵)이다. 복을 가져다주는 길상의 의미로 인해 궁중은 몰론 상류층과 민간에서도 큰 인기를 끌었다. 주요 소재로는 해·구름·물·바위·사슴·거북·학·소나무·대나무·불로초·천도복숭아·달 등이 들어간다. 대부분 이 가운데 열 가지만을 선택하여 화폭에 옮겼다. 이러한 십장생도는 고려시대에 세화(歲畵)로 그려진 기록이 있지만, 18세기 이전의 그림이 전하지 않아 구체적인 양식은 짐작하기 어렵다.

*이미지를 클릭하시면 큰 사이즈로 보실 수 있습니다.

궁중양식과 민화의 한계

현재 전하는 십장생도는 궁중양식과 민간양식으로 구분 된다. 궁중양식은 탁월한 기량의 소유자인 화원(畵員)들이 성취해 낸 산물이다. 장중한 스케일의 구도와 섬세한 선묘, 밀도 있는 채색 등이 범상치 않은 수준을 대변한다. 잘 알려진 바와 같이 궁중양식의 십장생도는 한동안 민화로 알려졌다. 민화 연구의 초기 단계에서 십장생을 포함한 대부분의 채색화는 화가를 알 수 없고, 정통회화에서도 대접을 받지 못한다는 이유로 민화에 편입되었다.
여기에 대하여 궁중회화와 민화를 구별해야 한다는 주장이 1990년대부터 본격적으로 나오기 시작했다. 이후 여러 연구 성과들에 힘입어 지금은 궁중회화와 민화를 갈라놓는 기준이 어느 정도 명확해졌다. 특히 민화 십장생도에는 궁중양식을 응용한 소박하지만 독자적인 특징들이 잘 나타나 있다. 화려한 궁중 십장생도에 익숙한 시각으로 본다면, 민화는 지나치게 단조로운 그림처럼 보일 수 있다. 그렇다면 민화를 그린 무명화가(無名畵家)들은 궁중회화로부터 무엇을 취하였고, 그것이 갖는 한계가 무엇이며, 그 한계를 어떻게 보완해 갔는지 그 과정을 살펴볼 필요가 있다.
현존하는 19세기의 십장생도 가운데 유일한 기년작(紀年作)이 1880년(정조 24)에 의약청(醫藥廳) 관원들이 발의(發意)하여 제작한 <십장생도> 10폭 병풍이다.(도1) 경기문화재단의 박본수 연구원이 상세히 밝혔듯이 1879년(고종 16) 훗날의 순종(純宗)이 되는 왕세자의 천연두가 회복되자 의약청의 관원들이 이를 기념하여 제작한 것이다. 이 병풍은 일제강점기에 미국 오리건대학교박물관에서 구입해 간 뒤 지금까지 소장해 오고 있다. 치밀한 화면 구성과 선명하고 정교한 색감을 구사하면서도 결코 곱게 다듬지 않은 회화적(繪畵的)인 필치와 특색이 잘 살아나 있다. 화가는 분명 당시 최고의 기량을 자랑하던 화원(畵員)이었을 것이다.
궁중양식의 십장생도를 그릴 때 화가들이 유념해야 할 점은 자신의 개성(個性)을 드러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이 원칙은 지금 우리가 보는 대부분의 궁중 십장생도에 예외 없이 적용되어 있다. 가령 여러 명의 화원화가들이 십장생도를 협업(協業)하여 그린다 하더라도 각자의 개성이 반영되거나 충돌하는 현상은 볼 수 없다. 이는 궁중양식의 십장생도가 전형(典型)을 유지하는 방편이기도 하다. 그런데 정통화법을 익히지 않은 민간화가들이 대형 화면에 십장생도를 그리고자 붓을 든다면 감당하기 어려운 상황들을 마주하게 된다.
민간화가들은 여러 경로를 통해 궁중양식의 장식화를 부지런히 모방하고 응용해 왔다. 실제로 광통교(廣通橋) 인근의 지전(紙廛)에 궁중 그림이 나오면, 그것을 따라 그리면서 그들만의 한계를 넘기 위한 그림의 방향을 모색했을 것이다. 그러나 무명화가들의 모방에는 한계가 금새 드러난다. 아마추어 화가의 필치로 8폭이나 10폭으로 된 병풍의 큰 화면을 능숙하게 장악하기란 불가능에 가깝다. 화면이 클수록 허점이 쉽게 드러나고, 완성도와 장식효과가 크게 떨어지기 때문이다. 반면에 화원화가라 하더라도 궁중양식을 풍부한 경험으로 소화해 내지 못하면, 그것은 화가 자신의 개성으로 해석한 그림이 되고 만다. 이렇게 되면, 장식화로서의 생명은 끝나게 된다.

‘십장생도’에서 ‘장생도’로

민간화가들은 십장생도를 그릴 때 다음의 두 가지 전략을 세운 듯하다. 첫째는 궁중 십장생도 병풍에 비해 그림의 크기를 파격적으로 축소시킨 일이다. 모티프의 수도 줄이고, 병풍 그림에 보이던 복잡한 소재들도 간략하게 처리하였다.
예컨대 개인소장의 <십장생도>(도 2)를 오리건대박물관의 <십장생도>(도 1)와 비교해 보자. 민화 는 크기가 작아지고, 소재도 10종을 다 채우지 못했다. 해·학·구름·사슴·거북이·영지 등을 그렸지만, 괴석과 같이 복잡한 부분은 아예 제외하였다. 그 결과 작은 화폭의 소박한 십장생도로 모습을 갖추게 된다. 이렇게 되면, ‘십장생도(十長生圖)’라는 단어에서 ‘열십(十)’자를 떼고 그냥 ‘장생도(長生圖)’라 불러야 한다. 장생도는 아마도 민화의 영역에서만 붙일 수 있는 명칭일 것이다. 이처럼 십장생도에서 편리한 대로 화면의 크기를 줄일 수 있는 것은 십장생도가 이야기를 담고 있는 그림이 아니기 때문이다. 예컨대 곽분양행락도나 요지연도의 경우는 이야기를 구성해야 하기에 단폭(單幅)으로 그리는 것이 불가능하다.
민간화가들의 장생도에 나타난 작은 크기의 화폭은 중산층이나 서민들의 생활공간에 수용할 수 있는 매우 현실적인 크기이다. 민간에서는 집이 좁은 경우 큰 병풍으로 된 십장생도는 소유하기가 어려웠다. 그렇다면, 이러한 민간 장생도는 어디에 주로 펼쳐지거나 걸어두었던 것일까? 아마도 안채의 방문에 붙이는 문배(門排) 그림으로 활용하였을 가능성이 커 보인다.
둘째, 민간화가들은 민화를 그림에 있어 언제까지나 작은 화폭에만 머물 수 없었다. 생계의 방편을 위해서라도 잘 팔릴 수 있는 새로운 그림의 형식을 고안해야 했다. 그래서 나타난 것이 분폭형(分幅形) 십장생도 병풍이 아닌가 싶다. 여기에 소개하는 삼성미술관 Leeum 소장의 <십장생도>(도 3)가 그러한 특징을 잘 보여준다. 병풍의 화면을 연폭(連幅)으로 이어서 그리는 것이 아니라 한 폭씩 따로 완성시킨 그림을 8폭 내지 10폭의 병풍으로 만든 형식이다. 이를 분폭식 구성이라 이름 붙여 본다. 이러한 분폭식 병풍에 민간화가들이 소략한 화법으로 그림을 채운다 하더라도 허점이 크게 드러나지 않는다. 미흡한 점들이 드러날 만큼 화폭의 여유가 없기 때문이다. 주로 소나무가 화면에 길게 자리 잡거나 학·사슴·물고기 등이 등장하며, 영지나 바위 등의 소재도 곁들여진다. 분폭형 장생도는 민간화가들이 자신들의 실력으로 만들어낼 수 있는 최선의 고안이었다. 이러한 형식이 좀 더 세련미를 갖추게 되면, 민화 장생도는 중산층이 선호한 인기 품목으로도 거래되었을 것이다.

황해도 안진사(安進士) 댁의 장생도 병풍

민간화가들이 그린 민화 장생도 병풍은 어떤 계층의 집에 놓이게 되었을까? 현장에 놓인 사례를 한번 확인해 보자. 20세기 초에 촬영한 흑백사진 속에 민화 장생도 병풍 한 점이 눈에 띤다.(도 4) 병풍이 펼쳐진 장소는 황해도 신천군 두라면에 사는 안진사(安進士)의 집으로 확인된다. 이 사진은 1911년 한국을 방문한 독일인 신부 노르베르트 베버(Norbert Weber, 1870~1956) 일행이 촬영한 것이다. 그해 4월 황해도 지역을 여행하던 베버 신부는 천주교 신자인 안진사의 집을 방문하고서 여러 점의 풍속 사진들을 촬영했다. 이 사진은 그 가운데 한 장으로서 베버 신부 일행이 소박하게 차려진 밥상을 받고 식사를 하는 장면이다. 베버 신부 일행의 뒤편에 2점의 병풍이 둘러져 있다. 왼쪽에 놓인 병풍이 바로 필자의 관심사인 분폭형 장생도 병풍이다.
그런데 안진사 댁에서는 마당에 멍석을 깔고서 이방인 손님들의 식사를 대접하고 있다. 왜 손님들을 실내로 안내하지 않았을까? 아마도 베버 신부 일행이 식사 장면의 촬영을 위해 마당에 차려줄 것을 부탁했던 것으로 추측된다. 실내는 어두워서 사진 촬영이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처음 보는 낯선 서양인들의 식사 장면은 인근 주민들에게 큰 구경거리였다. 그렇지만, 사람들에 둘러싸인 신부들이 편안하게 요기를 하도록 집안에 있던 병풍을 꺼내어 뒤편에 설치했던 것이다. 편안한 식사와 사진 촬영을 위한 배려였다.
사진 속의 십장생도는 10폭 병풍이며 세로 비례가 긴 화면이 한 폭씩 나뉘어져 있고, 그림도 각 폭마다 독립된 구성으로 그려져 있다. 소나무를 세로로 길게 배치하였고, 그 주변에 학(鶴)과 사슴들이 어렴풋이 보인다. 앞서 본 삼성미술관 Leeum 소장의<십장생도>(도 3) 병풍과 화면의 구성이 매우 유사하다. 이런 십장생도 병풍은 서울에서도 제작되었겠지만, 지방으로까지 확산되어 널리 유행하였음을 사진 속의 안진사댁 병풍이 말해준다.

민화 장생도의 세련된 변모

오리건대학교 박물관의 <십장생도>(도 1)와 삼성미술관 Leeum의 <십장생도>(도 3)를 다시 비교해 보자. 이 두 그림에 나타난 각각의 특색은 궁중양식과 민간양식이 만나는, 그리고 넘을 수 없는 경계 지점을 시사한다. 민간화가들은 화원화가의 그림처럼 화려하지 않지만, 병풍형식으로 만들어 내는 데 일단 성공을 거두었다. 아마도 그림을 사고파는 시전(市廛)에서도 민간화가들의 분폭식 병풍은 화원화가들 못지 않게 수요자의 구매욕을 자극하며 유통되었을 것이다. 그리고 민간화가들의 실력이 차츰 향상되면서 분폭의 화면구성이 약간씩 연폭으로 변모하는 경향도 찾아볼 수 있다. 가회박물관의 <십장생도>(도 5)가 그러한 특징을 설명해 주는 좋은 사례이다.
가회박물관의 <십장생도>는 앞의 사례들 보다 좀 더 세련된 그림이다. 십장생도에 빈도 높게 등장하던 소재들이 들어가 있다. 소나무 외에 학과 사슴이 자주 그려지며, 이외에 해·영지·물고기 등이 기본 모티프로서 장생도의 요건을 갖추었다. 그런데 바위를 그린 부분이 상대적으로 큰 비중을 차지한 점이 주목된다. 그리고 병풍의 좌·우폭으로 바위의 형태를 연결시키면서 마치 공간을 확장해 가는 듯 한 효과를 연출하였다. 그러나 괴석과 소나무, 학 등을 그리는 화법은 여전히 정형화되어 있다.
가회박물관의 <십장생도>는 그 수요층을 중산층은 물론 상류층으로까지 끌어올려도 무리가 없을 것이다. 아무리 소략한 그림이라도 일단 병풍형식이 되면, 가격도 올라가고, 그것을 놓을 수 있는 공간이 마련되어야 한다. 따라서 적어도 중산층 이상의 계층에서 소유하게 되었을 것이다. 결국 병풍에 그려진 그림들은 그림을 사들일 경제적 여유와 넓은 주거공간을 가진 사람들이 가져갈 수 있는 물건인 셈이다.
궁중양식의 회화가 민간으로 전해져 민화로 변화해가는 과정을 구체적으로 살필 수 있는 사례가 바로 십장생 그림이다. 민간화가들은 정형화된 궁중양식을 특유의 자유로운 감성으로 여과시켜 소박하면서도 풍성한 민화의 조형 세계를 일구어 낸 예술가들이다.

 

글 : 윤진영(한국학중앙연구원 책임연구원)

 

저자에 관하여

월간 민화

Leave a Reply

이메일은 공개되지 않습니다. 필수 입력창은 * 로 표시되어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