궁궐 밖의 궁궐 그림 일월오봉도(日月崑崙圖)

도 1. 일월오봉도, 경복궁 근정전

▲도 1. <일월오봉도>, 경복궁 근정전

궁궐의 담장 안에서 생산된 그림들을 궁중회화라 부른다. 화원畵員 화가들의 탁월한 솜씨가 발휘된 궁중기록화와 행사도, 장식화 등이 여기에 속한다. 그러나 조선말기에는 궁중회화 가운데 일부 주제가 민간으로 전해져 대중적인 인기를 끌기도 했다. 특히 길상吉祥의 의미를 담은 궁중장식화에 이러한 현상이 두드러졌다. 민간으로 전해진 궁중장식화는 서민화가들의 모방을 통해 점차 민화民畵로서의 특징을 갖추게 된다. 그런데, 민간으로 나온 궁중 그림 중에는 대중적인 호응을 받지 못한 경우도 있다. 즉, 궁중의 모든 그림이 반드시 민간에서 환영받았던 것은 아니었다. 이러한 경향을 가장 잘 예시해주는 그림이 일월오봉도日月五峯圖이다.

일월오봉도에는 다섯 개의 산봉우리와 해와 달이 그려지며, 골짜기의 폭포, 물결치는 파도가 들어간다. 또한, 네 그루의 소나무가 좌우 대칭을 이루는 것이 기본 구성이다. 경복궁의 근정전에 마지막까지 놓였던 일월오봉도에서 이러한 특징을 자세히 살필 수 있다.(도 1) 궁궐 안에서 제작된 일월오봉도는 그 유래, 기능, 용도, 양식 등 설명할 수 있는 부분이 많지만, 궁궐 밖에서 그려진 일월오봉도는 거의 논의된 적이 없다. 궁궐 밖에서 그려진 일월오봉도의 현상을 매우 드물게 남아 있는 몇 점의 그림을 통해 살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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궁중회화와 민화의 변별

일월오봉도는 국왕과 왕실의 권위를 상징하는 그림이다. 다시 말해 왕을 상징하는 그림 가운데 강도가 매우 높은 그림이라 할 수 있다. 임금의 집무실인 편전便殿은 물론 임금이 머무는 행사나 의례의 공간에도 일월오봉도가 빠짐없이 놓였다. 장식성을 띠면서도 다분히 의전적儀典的인 성격의 그림이다.
일월오봉도는 어디에서 유래한 그림일까? 가장 설득력이 있는 것이 『시경詩經』의 ‘천보天保’ 시詩에 기원을 둔 해석이다. 이 시에는 산과 언덕, 해, 달 등 아홉 가지의 모티프가 등장하는데, 이것이 일월오봉도를 구성하는 소재와 거의 일치한다. ‘천보’ 시의 내용을 아홉 가지의 모티프와 결합해 보면, 일월오봉도는 신하들이 왕의 덕을 칭송하고 하늘과 조상에 축복을 기원하는 내용을 담은 그림으로 해석할 수 있다. 이외에도 『주역 周易』의 음양오행사상에 입각하여 일월오봉도를 해석한 견해도 있다.
현재 우리가 볼 수 있는 일월오봉도는 대부분 19세기 후반기 이후에 그려진 그림들이다. 기록으로는 1637년(인조 15) 6월에 오봉병五峯屛을 제작했다는 『승정원일기』의 기사가 가장 빠르다. 18세기 이후의 궁중기록화 안에도 일월오봉도가 묘사되어 있는데, 이는 그 실용 사례를 말해주는 단서다.
일월오봉도는 약 백 년 전 지금의 광교 인근인 옛 광통교廣通橋에서 ‘오봉산일월도五峯山日月圖’로 거래되었다는 이야기가 있다. 그러나 일월오봉도를 민간에서 사고 판 경우는 어떤 기록에서도 확인되지 않는다. 19세기 서울의 풍물을 노래한 가사 「한양가」에는 광통교 인근에 매물로 나온 그림에 관한 기사가 있는데, 여기에도 일월오봉도는 포함되어 있지 않다. 왕실의 상징과도 같은 그림을 사고팔거나 민가의 장식용으로 사용하기에 적절치 않았기 때문일 것이다.
1990년대 이전까지만 해도 일월오봉도는 조선 후기의 민화를 대표하는 그림으로 국내외의 민화 전시나 도록의 첫 페이지를 장식했다. 그런데 궁중에서 제작되고, 임금의 곁에 놓였던 그림이 어떻게 민화로 분류된 것일까? 일월오봉도가 민화로 분류된 것은 1970년대 초기 민화 연구자들에 의해서다. 일월오봉도가 이름을 알 수 없는 화원들의 그림이라는 점, 그리고 전통회화에서 소외됐다는 점에서 민화로 분류한 것이다. 당시로는 궁중회화에 대한 연구가 전무한 실정이라 이러한 분류상의 혼선을 모두 피할 수는 없었다. 이러한 문제는 궁중회화와 민화에 대한 변별이 논의되기 시작한 1990년대 이후의 연구에서 상당 부분 해결을 보았다. 하지만 민간에서 그려진 일월오봉도에는 보완적인 연구가 여전히 필요하다.

관운장關雲將 사당의 일월오봉도

궁 밖에서 그린 일월오봉도는 관왕關王 신앙과 무속 계통의 그림에서 발견된다. 대표적인 것이 동묘東廟와 성제묘聖帝廟에 있는 그림들이다. 먼저 살펴볼 숭인동의 동묘 안에 있는 관운장신상關雲將神像의 뒤편에 일월오봉도가 펼쳐져 있다.(도 2) 무속 관련 그림에 궁중 양식의 일월오봉도가 그려진 것은 무슨 이유에서일까?
우선 관운장을 ‘성제聖帝’라 한 것에서 단서를 찾을 수 있다. 관운장에게 제帝라는 시호를 붙인 것은 1614년(만력 42)이다. 명나라 신종神宗은 관운장을 ‘삼계복마대신위원진천존관성제군三界伏魔大神威遠震天尊關聖帝君’이라 하여 황제로 격상시켰다. 청대 이후에는 관운장이 신앙의 대상으로 변하여 여러 곳에 관제묘가 세워졌다. 도교道敎에서는 신격화된 관운장을 ‘관성대제關聖大帝’라 부르며 숭배했다. 따라서 조선 후기의 신상神像으로 등장한 관운장도 성제의 권위에 맞는 의장을 갖추어야 했고, 이런 이유에서 일월오봉도가 관운장의 뒤편에 놓이게 된 것으로 이해된다.
그런데 이 동묘의 일월오봉도는 화원화가의 솜씨에 버금갈 만큼 화격이 좋다. 기존의 그림과 다른 점은 해와 달이 가운데 주산의 좌우에 그려진 점이다. 이는 관운장 신상이 놓인 감실의 문을 열었을 때, 멀리서도 해와 달이 보이도록 하기 위한 설정일 것이다.
서울시 방산동 소재 성제묘에도 <관운장내외상 關雲長內外像> 뒤편에 일월과 다섯 개의 봉우리, 그리고 파도 문양을 그린 병풍이 놓였다.(도 3) 소나무가 빠졌지만, 전체는 일월오봉도에서 유래된 형상이다. 특히 익선관을 쓰고 곤룡포를 입은 관운장의 모습이 인상적이다. 임금과 같은 제왕의 존재로 그려진다면, 그 배경에도 일월오봉도를 그리는 것이 합당하다는 생각의 반영을 읽을 수 있다.

관왕묘에서 굿당으로 : 어느 굿당의 일월오봉도

관운장 사당의 일월오봉도와 비슷한 그림들이 의외로 굿당에도 걸렸다. 즉 일월오봉도가 무속 공간의 주요 모티프로 활용된 것이다. 20세기 전반기에 촬영한 것으로 추정되는 <굿당 사진>에는 제단 뒤편에 6폭의 일월오봉도가 놓였다.(도 4) 굿당에 펼쳐진 오봉도는 무엇을 의미할까? 의문이 많지만, <굿당 사진> 속의 벽면을 채운 일월오봉도는 기도의 대상이자 신성한 무속 세계의 상징과 관련이 있을 듯하다. 얼핏 보기에 가운데 세 개의 봉우리가 강조되었지만, 오른쪽으로 90도 꺾인 벽면에는 마지막 봉우리와 폭포, 그리고 해가 그려져 있다. 사진에 나오지 않는 왼쪽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관운장의 사당과 굿당에 각각 놓인 일월오봉도는 얼마의 시간적 간격을 두고 그려진 것인지 알 수 없다. 하지만 민간신앙의 위계로 본다면, 일월오봉도는 관운장을 모신 성제묘에서 먼저 그려진 뒤 차츰 일반 굿당으로 전이가 이루어졌다고 보는 것이 타당할 것이다. 그림의 화격이나 수준을 보더라도 이러한 전이의 흐름을 짐작할 수 있다.
다음으로 궁중양식의 또 다른 변용 사례로 영국박물관의 <일월오봉도>가 주목된다. 서민 화가가 그렸을 이 그림은 궁중의 삽병揷屛, 즉 받침대에 꽂아두는 단폭의 병풍 그림을 모방하여 족자에 그린 것이다.(도 5) 흥미로운 것은 족자의 뒷면에 “朝鮮圖 金剛山 조선도 금강산”이라 쓴 글씨다. 이 그림의 소유자는 <일월오봉도>를 금강산 그림으로 이해한 듯하다. 궁중의 일월오봉도를 한 번도 본 적이 없다면 충분히 그럴 수 있다.
그런데 <일월오봉도>에는 해와 달을 그리지 않았다. 이는 궁중양식과 차이를 내기 위한 설정으로 추측된다. 궁중양식의 그림을 그대로 민간에서 소유할 경우, 잘못되면 그 자체로 궁지에 처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를 위해서는 그림을 약간 바꾸어 그리는 것이 불가피했을 수 있다. 그런 점에서 영국박물관의 <일월오봉도>는 궁중양식에서 벗어나 민간화된 한 사례라 하겠다. 그렇지만 아무래도 민가보다는 신당이나 굿당에 걸렸을 가능성이 커 보인다. 일월오봉도는 이를 차용한 무속 계통의 그림 외에 민간의 장식화로서 거래되기는 어려운 그림이었다.

복개당의 <일월도日月圖>

또 하나의 변용된 궁중 일월오봉도의 사례가 국립민속박물관 소장의 <일월도>이다.(도 6) 1970년대 말 서울 마포구 신수동의 복개당福介堂이라는 신당神堂에서 나온 그림이다. 이 신당에는 구한말부터 전하는 여러 점의 무화巫畵와 무속화가 남아 있었다. 그중의 하나인 <일월도>는 화면을 가로로 삼등분한 뒤 가운데는 비워두고, 좌·우측에만 해와 달, 산과 폭포, 바다 등을 그려 넣었다.
그리고 <일월도> 중앙에는 세조世祖(재위 1455~1468)의 존상이 걸려 있었고, 지금도 그대로 전하고 있다. 1920년대의 조사에 따르면, 복개당의 주신主神은 조선의 제7대왕인 세조였다고 한다. 그 내력을 보면, 이 마을에 사는 한 백성이 꿈에 세조의 영정을 받들게 되자 동네 사람들이 당을 세워 제를 지냈는데, 이것이 유래가 되었다고 한다. 마을 사람들은 세조를 가정마다 화복과 평화를 가져다주는 신으로 받들었음을 알 수 있다. 현전하는 <일월도>와 <세조도>는 아마도 1868년에 복개당의 수리가 있었을 때 그려진 것으로 보고 있다.
<세조도>에는 세조가 대좌 위에 앉았고, 좌우에 문관文官이 보좌해 있다. 불화의 전형적인 삼존도三尊圖식 구도이다. 세조는 붉은 곤룡포를 입었으나 머리에는 변형된 관을 썼다. <일월도>에는 처음 그릴 때부터 <세조도>를 걸어둘 공간을 남겨 두었다. 복개당의 <세조도>는 주인공이 왕이어서 이와 같은 <일월도>를 배경에 그린 것이다. 특히 초상화 형식의 무속화에 일월오봉도가 들어간 것이 매우 특이하다. 이는 <일월도>가 궁중의 어진御眞 봉안 양식을 모방한 것으로 볼 수 있다. <세조도>가 어진의 봉안 방식으로 민간화되었다는 점이 무엇보다 흥미롭다.
이상에서 궁중의 일월오봉도가 궁 밖으로 전해져 새로운 형식의 민화로 거듭나는 과정을 알아보고자 했다. 결론적으로 일월오봉도의 대중화는 이루어지지 못했고, 성제묘나 신당과 굿당 등으로 전해진 사례만을 확인하였다. 일월오봉도의 민간화는 성제묘에서 먼저 시작되었고, 다음 단계에서 신당과 굿당으로 전해졌다고 본다. 성제묘에서는 일월오봉도를 성제인 관운장의 뒤편에 그렸으나, 신당과 굿당에서는 신앙의 대상이 되기도 했고, 어진의 봉안 방식을 모방한 사례도 볼 수 있었다. 일월오봉도는 이러한 관왕 신앙이나 무속을 제외한 민간에서는 거의 다뤄지지 않았다는 것이 현재까지의 결론이다. 결국, 일월오봉도는 궁 밖으로 나오긴 했지만, 민가에서 결코 보란듯이 걸릴 수 없는 그림이었다.

– 일월오봉도의 유래에 대해서는 이성미, 『어진의궤와 미술사 – 조선국왕 초상화의 제작과 모사』(소와당, 2012), pp. 275~333.
– 복개당의 그림에 대해서는 김윤정, 「복개당 巫畵」, 『생활문물연구』 제26호(국립민속박물관, 2010)

 

글 : 윤진영(한국학중앙연구원 책임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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