군제개혁 향한 은밀한 야망 담은 호렵도胡獵圖

조선에게 청나라는 경계와 동시에 선망의 대상이었다. 이러한 사회적 분위기에서 청나라의 군사 훈련 모습이 담긴 호렵도는 군제개혁을 꿈꾸는 정조의 지시로 탄생한 일종의 교범으로, 시간이 지나며 차츰 장식용 그림으로 민간에 자리잡기에 이른다. 이번 시간에는 울산박물관 소장품, 계명대박물관 소장품, 개인소장품을 중심으로 호렵도의 변천 과정과 시대별 상황을 짚어보고자 한다.


호렵도는 ‘오랑캐가 사냥하는 그림’이라고 해석된다. 호렵도에서 ‘호胡’라는 오랑캐는 청나라를 세운 여진족을 의미하는데 청대 이전에는 조선뿐만 아니라 중국에서도 여진족을 오랑캐라고 하였다. 호렵도에 등장하는 인물들은 한결같이 화려한 복장을 한 청나라의 왕공귀족이다. 호렵도에는 청나라의 왕공귀족과 이들이 거느린 군사들이 산과 어우러진 넓은 들판에서 호쾌한 기마술을 자랑하면서 사냥하는 장면이 그려져 있다. 등장하는 인물들의 화려한 복장과 창검기치도 볼만하지만 준마로 보이는 말들의 다양한 자세와 질주 속에서 말을 탄 병사들의 화려한 궁술과 창술 검술은 그림 속의 사냥장면을 더욱 활기차게 한다. 따라서 호렵도는 청나라의 왕공귀족이 사냥하는 장면을 그린 그림이라고 할 수 있다.

김홍도가 화원이 아닌 군관으로 청에 간 까닭

18세기에 호렵도를 가장 먼저 그린 화가는 단원 김홍도(金弘道, 1745-1806?)라고 조재삼(趙在三, 1808-1866)이 지은 《송남잡지松南雜誌》에 기록되어 있다. 그 내용 중에 ‘호렵도는 우리나라에서 김홍도가 처음으로 그려서 오도자의 <만마도>와 함께 명예를 드날렸다.’고 하여 당시 조선의 최고화가 김홍도의 필력을 중국 당나라의 최고화가 오도자의 세밀한 필력과 비견할만하다고 기록했다. 그만큼 김홍도의 호렵도가 세밀하고 뛰어난 작품이라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김홍도가 그린 호렵도는 한 점도 발견되지 않았다. 하지만 18세기 이후 호렵도에서 김홍도의 화풍이 보이는 것은 호렵도와 김홍도가 밀접한 관련이 있음을 알 수 있다.
김홍도가 호렵도를 가장 먼저 그렸다는 것은 김홍도가 직접 청나라에 가서 청나라의 사냥그림을 보았든지, 누군가가 이러한 그림을 전해 주었든지 두 경로 중 하나로 생각할 수 있다. 《승정원일기》와 《일성록》에 보면 김홍도가 사행의 일원으로 청나라에 다녀온 기록이 있어 전자의 경우라고 추측된다. 김홍도는 1789년 6월에 동지정사冬至正使인 이성원(李性源, 1725-1790)의 군관자격으로 사행에 참여하였다. 이때에 화원으로 참여하였던 이는 어진화사로 이름을 날린 이명기(李命基, 1756-1813이전)였다. 김홍도가 화원자격이 아닌 군관자격으로 사행에 참여하였는데 군직軍職으로 사행에 참여하는 것은 행동이 상당히 자유로워 별도의 업무를 수행할 여지가 있다. 김홍도가 1789년 6월에 떠나는 동지사에 이명기와 함께 굳이 참여해야 되는 이유는 《일성록》 정조 13년(1789년) 8월 14일 기사에서 알 수 있다.

이성원이 동지정사冬至正使로서 아뢰기를,
“김홍도와 이명기를 이번 행차에 거느리고 가야 하는데 원래 배정된 자리에는 추이推移할 방도가 없습니다. 그러니 김홍도는 신의 군관軍官으로 더 계청하여 거느리고 가고, 이명기는 차례가 된 화사畫師 이외에 더 정해서 거느리고 가는 것이 어떻겠습니까?”하여, 그대로 따랐다.[性源以冬至正使啓言金弘道李命祺今當率去元窠無推移之道金弘道則請以臣軍官加啓請李命祺則當次畵師外加定率去從之]

《승정원일기》에도 같은 날 같은 기사가 있다. 기사의 내용으로 보아 정조가 동지정사에게 김홍도와 이명기를 사행에 데려가라고 명하였고 동지정사 입장에서는 이미 사행단이 꾸려진 마당에 추가로 두 명을 포함시켜야 되기 때문에 정조에게 그 방도를 보고한 것으로 보인다. 그래서 김홍도는 별도의 자리가 없어 정사 이성원의 군관으로 데려가고 이명기는 사행에는 참여할 차례가 되지 않았으나 추가로 참여하게 하겠다는 보고를 하는 대목인 것이다. 따라서 정조가 김홍도와 이명기에게 특별한 임무를 내린 것이 분명해 보인다.
정조가 특별한 임무를 부여한 기록이 몇 가지 더 전해진다. 예를 들면 1788년 금강산을 그려오게 하였고, 1789년에는 대마도를 그려오는 임무를 주는 등 특별한 임무를 주었다. 여기서 주목되는 것은 김홍도의 금강산 사경임무와 대마도 지도를 그려오는 임무를 같이 수행한 화원이 김응환(金應煥, 1742-1789)이라는 사실이다. 1789년 동지정사의 사행단에 화원으로 참여한 이명기는 김응환의 사위이다. 1789년 사행을 마치고 1790년 2월 귀국한 후 김홍도는 이명기·김득신 등과 화성 용주사 대웅보전의 <삼불회도>를 제작하면서 서양화법을 사용하였다. 1791년에는 정조의 어진도사에 이명기와 김홍도가 각각 주관화사와 동참화사로 참여하였다. 따라서 정조는 앞으로 있을 화업畵業을 미리 생각하여 김홍도와 이명기를 사행에 동참시켰던 것으로 보인다. 이것은 1789년 이후 김홍도와 이명기의 인물 그림에서 음영법 등 서양화법이 나타나는 것과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김홍도는 1789년 동지사 사행 중에 청나라 왕실의 그림을 접하는 기회가 있었다. 사행단은 1790년 2월 20일 돌아오기 전에 청나라 황제가 준 전도戰圖 2축을 받았는데 그 내용은 이리伊犁지방과 회자回子 전투의 승리를 기록한 <평정준갈이회부득승도平定准噶爾回部得勝圖> 16폭과 대금천大金川 및 소금천을 토평하고 승전상황을 그린 <평정금천득승도平定金川得勝圖> 16폭이었다. 청황실의 전쟁기록화인 전도 2축은 자신들이 승전한 내용을 기념하여 동판으로 이를 찍어 이웃나라에 배포한 것이다. 김홍도는 이러한 과정 속에 화원의 예리한 눈으로 혹은 정조의 특별한 명으로 청나라 황실의 그림 중 군사훈련을 겸한 사냥을 그린 수렵도인 <목란도木蘭圖>를 접하게 되었고, 이를 호렵도로 그려 정조에게 바쳤을 것으로 추정된다.

청나라의 기마술은 조선군 기마전술의 교범

호렵도가 김홍도에 의해 18세기에 처음으로 그려졌고 19세기에 널리 유행하였다는 사실은 밝혀졌다. 그런데 청나라를 오랑캐라고 치부하면서 비하했던 조선에서 청나라의 왕공귀족이 사냥하는 그림이 유행하게 된 것은 어떻게 된 것일까? 그것은 두 가지 관점에서 이해하여야 할 것이다. 첫째, 17~18세기 이후 활발하게 이루어진 청나라와의 사행을 통해 청나라에서 유행하는 사냥그림을 보고 이국적이고 화려한 장식그림에 대한 호기심을 들 수 있다. 이는 당시 청나라를 오랑캐라고 비하하면서도 사행을 통해서는 청나라의 우수한 문물을 다방면에서 대규모로 유입했고, 조선에서도 청나라 문물이 크게 유행하게되는 이중적인 측면을 반영한다. 둘째, 병자호란 당시 청이라는 오랑캐의 화려한 기마술에 유린된 이후 조선의 입장에서는 청을 사대(事大, 큰 나라를 섬김)하면서도 극복해야 할 대상으로 생각했다. 이 때문에 청을 극복하기 위한 군사제도의 확립이 무엇보다 중요하였다. 특히, 조선후기 정조는 군제를 대대적으로 개혁하면서 조선군의 기본군제를 보병전술에서 기마전술로 전환시키고 있었다. 군제개혁을 통해 청나라의 기마술을 능가하고자 적의 교범을 참고하는 목적으로 호렵도를 도입했을 것이다.

호렵도는 자비대령화원의 시험과목

《송남잡지》에 호렵도는 18세기에 김홍도가 가장 먼저 그렸다고 기록되어 있어, 18세기 후반에 궁중에서 감계용으로 호렵도가 그려지다 세월이 지나고 오랜 기간 전쟁이 없는 평화가 지속되어 본래의 의미가 퇴색되고 벽사용 혹은 장식그림으로 변화된 것으로 보인다. 호렵도는 19세기 초까지도 조선왕실 화원들이 필수적으로 그렸던 화제의 그림으로 보인다. 그것은 자비대령화원의 녹취재(祿取才, 녹봉을 주기 위해 기술 있는 사람을 가려 뽑는 시험)에 호렵도가 시제로 출제되었다는 기록이 있다. 《내각일력》에 이러한 내용이 여러 번 나오는데 그중 순조 12년(1812년) 정월 26일자 기사를 보자.

“자비대령화원 금춘등今春等 녹취재 재차(2차) 시험은 그림의 종류를 인물 호렵도로 하였고, 성적은 삼중일에 이효빈, 삼중이에 김득신, 삼중삼에 이인문, 삼중사에 허용, 삼하일에 김건종이었다.”

자비대령화원은 영조대에 임시로 설치 운영하던 것을 정조 7년(1783) 규장각에 설치한 직제로 국왕이 직접 관장하는 궁중화원제도이며 사계절 별취재別取才를 통해 증가된 녹봉과 특별한 사물을 수여한 당대 최고위의 화원이다. 원래 녹취재는 기술직 관료에게 정기적으로 실시하였던 것인데 자비대령화원에게는 별도로 추가 실시하였다. 즉, 자비대령화원의 녹취재는 정조 자신이 지향하는 회화적 이념을 전달하고 경쟁을 통해 효과적으로 수준을 유지하기 위한 방법이었던 것이다. 위의 기사를 통해 알 수 있는 것은 호렵도가 조선시대 화문畵門에서는 인물문人物門이었음을 알 수 있다. 인물문의 화재는 대개 상징과 교훈이 많은 비중을 차지하는 중국의 고전에서 출전하는데 호렵도의 화문이 인물문이라는 것은 호렵도에 상징과 교훈이 될 만한 내용이 포함되어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 교훈은 기사 수렵을 통해서 청나라를 세운 청나라의 군사훈련 또는 군사제도였을 것이다.

호렵도의 양식변화

호렵도는 조선후기에 유행한 그림이지만 시기별로 작품에 나타나는 양식적 특징이 달라지는 것을 알 수 있다. 이 글에서는 궁중화풍의 호렵도를 중심으로 시기별로 양식적 특징을 살펴보려고 한다. 시기를 구분하기 위해 호렵도가 최초로 그려진 18세기 후반부터 20세기 초까지를 3등분해서 살펴보면 그 차이를 알 수 있다.
첫 번째 단계는 18세기 말에서 19세기 초로 구분되는 궁중화풍의 호렵도로 울산박물관소장 <호렵도> 8폭 병풍과 서울미술관소장 <호렵도> 10폭 병풍, 삼성미술관 리움소장 <호렵도> 8폭 병풍이 해당된다. 첫 단계 작품 중 이 글에서는 울산박물관소장 <호렵도> 8폭 병풍을 중심으로 살펴볼 것이다. (도1)
두 번째 단계는 19세기 중엽에서 말기에 해당하는 작품으로 이 시기는 작품은 호렵도가 정형화되고 토착화되는 단계로 가장 많은 수의 작품이 전해진다. 이 글에서는 계명대학교 행소박물관소장 <호렵도> 12폭 병풍을 대표적으로 살펴볼 것이다. (도2)
세 번째 단계는 19세기 말에서 20세기 전반으로 편년되는 작품들로서 앞 시기의 작품들에 비해 다양하게 변용되어 그려진 것이 특징이다. 이 시기의 작품도 많이 있으나 마지막 어진화사라고 하는 이당 김은호의 작품으로 추정되는 개인소장 <호렵도> 8폭 병풍을 통해 조선 말 궁중풍의 호렵도의 양식을 볼 수 있다. (도3)
다행히도 필자가 이들 3점의 작품을 가까이서 볼 수 있었기에 이를 통해 호렵도 궁중 양식을 이해하고 그 변화를 설명하고자 한다.

Ⅰ. 18세기 말 ~ 19세기 초, 울산박물관소장 <호렵도> 8폭 병풍

울산박물관소장 <호렵도> 8폭 병풍은 궁중회화의 화풍으로 추정되며 18세기 후반으로 편년되는 중요한 작품이다. 이 작품은 숙달되고 정교한 필치와 화려하고 강렬한 채색으로 왕실회화의 품격을 갖추고 있다. 등장하는 인물들과 산수의 표현은 궁중회화의 양식적 특징을 보여주면서도 호렵도의 연원인 청대 황실수렵도 <목란도>의 구성요소를 모두 포함하고 있다. <목란도>의 구성요소를 포함하기 위해 작품을 상·하 2단으로 화면을 구성하였다. 이러한 특징을 볼 때 이 작품은 김홍도가 청나라 사행에서 돌아와서 초기에 그린 김홍도풍의 호렵도일 것으로 보인다. 1790년에 편찬된 《무예도보통지武藝圖譜通志》에 들어간 마상무예 동작들과 이 작품의 사냥장면 중에서 기마병사들의 무예동작이 상당한 친연성을 보이고 있다. (도4), (도4-1) 학자에 따라서는 《무예도보통지》의 편찬과 김홍도가 관련이 없다는 경우도 있으나 대체적인 견해는 1790년 당시, 정조 조차 ‘그림에 관한 모든 일은 김홍도에게 맡겼다’라고 할 정도로 신임했기 때문에 《무예도보통지》의 편찬과 같은 중요한 일에 김홍도가 배제되었을리 없을 것으로 추측한다. 《무예도보통지》는 정조의 아버지인 사도세자가 18가지 무예를 수록하여 편찬한 《무예신보武藝新譜》에 마상무예 6가지를 추가하여 만든 것으로 정조의 사도세자에 대한 효심을 고려하면 당시 최고의 화원과 학자를 동원하여 만들었을 것이기 때문에 《무예도보통지》의 삽도를 김홍도가 직접 그렸거나, 이것을 감수監修했거나, 참여 화원들을 지도하였거나 간에 김홍도를 제외하고는 상상할 수 없다. 물론 1790년, 1791년은 용주사 <삼불회도>라든지 어진을 그리는 임무가 있어 상당히 바쁜 와중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무예도보통지》의 중요성에 비추어 김홍도가 판화를 직접 그렸을 가능성도 있고 전체적인 윤곽만 주관하였을 가능성도 있다.
이 작품은 1790년 이후에 그린 작품으로 보이는데 그 이유는 김홍도가 사행을 다녀온 이후 사용한 서양화법을 사용한 흔적이 나타나기 때문이다. 산의 원근에 따라 크기와 색을 달리하였고, 인물의 표현에 약간의 음영을 넣었음을 알 수 있다.

Ⅱ. 19세기 중엽 ~ 말기, 계명대학교 행소박물관소장 <호렵도> 12폭 병풍

이 시기의 작품들은 화원화가의 화풍이 답습되는 과정에서 더 진척되어 두 가지 양식적 특징이 나타난다. 하나는 호렵도로 정형화되는 단계로 일종의 형식과 폼이 결정되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민화풍으로 정착되는 과정으로 이 과정을 토착화 또는 한국적 변용이라고 할 수 있다.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의 양란 이후 국가 제조사업이 성공하고 국제무역의 흑자가 계속되어 부를 축척한 중인계층과 평민계층이 왕실과 사대부가에서 향유하던 문화를 답습하게 된다. 이러한 사회적 배경 속에 호렵도 역시 궁중에서 교훈적인 감계화로 그려지던 것이 색채의 화려함과 기마사냥의 호쾌한 장면, 당시 최대의 문명국의 문화에 대한 호기심 등으로 중국인의 모습을 하였지만 조선의 양식으로 정형화된 작품들이 등장한다. 그 중에서 행소박물관소장 <호렵도> 12폭 병풍은 19세기 중반부터 말까지 편년되는데 이 시기의 현존하는 작품 중 가장 모범적으로 정형화된 작품으로 판단된다. 호렵도의 화면구성은 출렵장면, 사냥장면, 사냥후 사냥물을 바치는 장면으로 구성되는데 이들 구성장면을 한두 장면 혹은 세 장면을 결합하여 작품을 제작했다. 행소박물관소장 <호렵도> 12폭 병풍은 세 가지 구성요소가 충실히 결합되어 하나의 정형을 이룬 중요한 작품이다.
물론 왕실에서 그린 작품은 아니지만 청대 궁중회화의 양식적 특징이 그대로 잔존하고 있고, 김홍도가 호렵도를 그렸다는 시기에서 상당기간 지났음에도 김홍도의 영향을 받은 모티프나 양식적 특징이 나타나고 있다. 중국 청대 궁중회화의 양식적 특징이 잔존한 예를 들면 주인공인 왕공귀족의 초상이다. 중국에서 초상화는 황제복장을 하고 어좌에 앉은 <건륭황제조복상>(도5)과 사냥 등 행사에서 말을 탄 모습, 부처의 모습 등 다양한 모습으로 나타내는데 이는 중국에서 초상화는 전통적으로 인물의 정신을 담은 그릇으로 여겼기 때문이다. 이 작품에서 마지막 폭인 2폭에 그려진 주인공인 왕공귀족이 말을 탄 모습과 12폭의 막사에 앉은 모습이 중국 건륭황제가 사냥을 위해 말을 탄 모습과 조복을 입거나 부처의 모습으로 그려진 초상화의 양식과 거의 흡사하다. 김홍도의 영향을 받은 모티프는 이 작품의 9폭에 있는 꿩 사냥 장면을 보면 확실하게 알 수 있다. (도6) 이 장면과 비교 되는 작품은 김홍도의 <호귀응렵도豪貴鷹獵圖>이다. (도7) 두 장면은 상호간에 복장만 바꾼다면 동일한 장면으로 볼 수 있을 만큼 유사하다. 특히 꿩을 잡고 있는 매를 향해 짖고 있는 사냥개의 긴박한 모습은 그 소리가 들리는 듯하다. 또한 잡목을 그린 수지법도 상호간에 친연성이 있다.
행소박물관소장 <호렵도> 12폭 병풍은 작품의 크기로 보아 일반 가정용의 작품은 아니고 상당한 규모의 건물에 근무하는 인물을 위해 그린 것으로 보인다. 중요한 것은 김홍도에 의해서 처음으로 그려진 18세기의 양식이 변용되고 정형화되는 양식적 특징이 있어 미술사적으로 중요한 작품임에 틀림없다는 것이다.

Ⅲ. 19세기 말 ~ 20세기 전반, 개인소장 <호렵도> 8폭 병풍

이 작품은 마지막 어진화사라는 이당 김은호(以堂 金殷鎬, 1892-1979)의 작품이라고 알려져 있으나 확실한 근거는 없다. 다만 몇 가지 점에서 이당의 화풍을 추정할 수 있다. 첫째, 비교할 만한 호렵도 작품은 없지만 등장인물의 옷자락은 양감이 느껴지고 명암이 적절히 표현되어 있어 채색화에 대한 이당의 재능이 느껴지는 것이고, 둘째는 이당의 작품 중에 소나무가 표현된 <견수성> 같은 작품과 비교하면 16세기 전파된 절파화풍이 흔적이 느껴진다는 점이다. 이 작품에서 여러 곳의 화면에 소나무가 중요한 회화적 공간을 만들어주고 있는데 가지가 직각으로 꺾이며 좌우로 펼쳐지고 그 뒤로는 깍아지른 절벽의 산까지 배치되어 화면의 오른쪽보다 왼쪽에 무게 중심을 둔 전형적인 절파 화풍의 특징을 보여준다. (도8) 셋째, 이당이 1930년대에 호렵도를 소장했다는 동아일보 기사도 있고 수묵으로 그린 단폭 호렵도가 존재하는 것도 연관지어 생각해볼 수 있다. 그러나 이당 김은호가 친일화가로 알려졌다는 점, 작품에 나타난 섬세한 필선과 맑고 세밀한 채색이 왜색풍의 화법이라는 점은 아쉽다.
이 작품이 의미 있는 이유는 하나의 작품에 궁중화풍과 민화풍이 공존한다는 것이다. 표현된 경물을 묘사하는데 있어서 그 표현의 세밀함이나 구도의 안정적인 면, 기마인물의 사실적 표현 등에서는 분명 궁중화의 면모가 보인다. 하지만 산을 표현하는데 있어서 원근법을 무시하였고, 말을 타고 사냥물을 쫓아가는 무사들의 기마모습이 산 정상을 날아다니는 동작과 주인공을 더 크게 그리는 등 소재와 모티브에서 비현실적인 묘사는 전형적인 민화풍의 익살 혹은 과장된 표현법이라고 할 수 있다. (도9) 이는 문화가 위에서 아래도 전해지는 ‘상행하효’이 아니라 민중의 문화가 상층(궁중)으로 전해지는 단계를 보는 듯하다.


글 이상국((사)한국민화센터 이사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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